엡 4:17-24

우리 사회에서는 무엇을 입는가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대개 누구인가?
의사나 약사나 간호사 또는 그런 종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검정 가운을 입은 사람은 대개 누구인가?
재판정의 법관이나 교회의 목사일 것이다.
그리고 나비 넥타이에 검은 연미복을 입은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이거나 혹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일 가능성이 많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 입은 옷을 보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하게 된다.
군인이라도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고 다니면 그가 군인인지 알 수가 없고,
경찰관이라도 평상복을 입고 있으면 별로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람들이 입은 옷을 보고 그의 신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 중에 나오는 두 소년처럼,
옷만 갈아 입으면 그가 누구인지 그 신분을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말에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허술하고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면, 어디를 가나 그런 수준의 대접을 받고,
반면에 단정하고 깨끗한 정장을 한 사람은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삶의 주님으로 믿고 새로워진 사람이다.
그는 이제 속 사람이 새로워졌고, 영원한 운명의 길이 바뀐 사람이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옛날식의 생각과 행동과 생활을 벗고,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비교하면서,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의 삶을 생각한다.
우선, 예수를 진정으로 믿지 않았던 나의 옛 사람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는 그 마음이 허망한 것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4:17).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이 분명치 않은 사람은 방황할 수 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은 허망한 것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순간적인 쾌락이나 흥분 또는 가치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마음을 빼앗기기 쉽다.
어떤 사람은 도박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헤어나오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부도덕한 이중 생활을 하면서 죄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비생산적이며 자신을 무너뜨리는 헛된 일로 인생을 낭비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다.

마음이 허망하면, 속이 텅 빈 진공 청소기처럼 아무 것이나 빨아 들인다.
그래서 이단 집단에 끌려 가기도 하고, 허무주의에 빠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마음에 안정이 없으니 늘 불안하고, 심지가 굳지 못하니 환경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러니 마음에 파도가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나의 삶의 의미와 방향이 아직도 불투명한가?
왜 이렇게 수고하고 땀흘리며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이 뚜렷하지 못한가?
공연히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살 맛이 나지 않을 때가 있는가?
이런 때에 남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잘못하면 잠간 사이에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옛 사람의 두 번 째 모습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사는 것이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여기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몇 가지 언급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학식이나 경험과 무관하게, 영적인 어둠 가운데 산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도, 하나님에 관한 것에는 어둡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사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것은 교회 일에 얼마나 많이 관여하고, 교리에 얼마나 밝은가를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가를 의미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펴거나 설교를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하는가?
학력이 높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지능지수가 좋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성경을 많이 배우지 못해서인가?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아라는 두꺼운 껍질 속에 자신을 숨겨 두고 있어서,
밖으로부터 빛이 들어갈 수 없고, 은혜의 이슬도 스며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주장과 아집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은
아직도 생각과 생활 속에 옛 사람이 강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분별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계획과 꿈을 펼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기보다 자기 성취욕일 뿐이다.

실제로 사도 바울도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두 틈바구니에서 심각한 영적인 갈등을 겪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자신을 쳐서 복종하며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예수를 통해 새로워진 자신과, 아직도 남아 있는 옛 자아와의 갈등을 느끼며,
마음 속에 그치지 않는 싸움이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5, 19).

그러나 바울은 이런 갈등에 휘몰려서 자신을 포기하여 무너져 내리지 않고,
그것을 주님께 대한 더 깊은 믿음과 순종과 은혜로 딛고 일어선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처절한 영적인 갈등을 겪으면서도 두 팔을 활짝 펴 들고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와 같이 옛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생명에서 떠난 삶이었다.
아무리 활개치고 다녔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영적으로 생명없는 자로 보일 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나 경력이나 지난 날의 잘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지금 그의 속 사람이 어떠한지를 깊이 들여다 보신다.

이른 아침에 시간이 급해서 제대로 씻지 않고 나올 경우에 머리가 헝클어진 때가 있다.
황급하게 대강 옷을 입다 보니 단추를 잘못 잠그기도 하고, 양복 아래위가 다르기도 하다.
머리를 빗기는 했는데, 거울에 비친 쪽은 괜찮아도 뒤쪽에 머리카락이 뻗친 경우가 있다.
자신은 못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우습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눈에는 상당히 괜찮게 여겨지는 인생이
하나님의 눈에는 부패한 마음이 보이고, 영적으로 죽은 자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라.

옛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방탕과 더러운 욕심에 끌려 산다.

"저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4:19).

죄를 처음 범할 때에는 떨리고 무섭고 긴장이 되지만, 반복해서 범하다 보면 중독이 된다.
벌레가 밟혀 죽은 것이나 닭잡는 것만 봐도 눈을 찌푸리던 아이들이,
요즘에는 영화와 TV에서 살인 장면을 하도 많이 봐서, 피를 봐도 놀라지도 않는다.
이제는 우리 눈에 웬만한 폭력이나 음란 장면은 별로 대수롭지도 않게 보인다.
이것이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탕과 음란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 증거이다.

최고 정치가가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도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잠간 동안 언론이 떠들썩하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우리 관심에서 사라졌고,
그 사건을 조사하던 특별검사만 그 자리에서 떠나 버리고,
장본인은 오히려 더 유명 인사가 되어 방송과 TV에 출연하여 돈도 벌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은 이렇게 감각이 무뎌지면서 점차 더욱 깊은 죄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어렷을 때에는 작은 잘못을 저질러도 부모에게 야단맞을 것을 두려워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만 해도 선배나 부모나 선생의 말에 그래도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대학생 쯤 되었을 때에는 이제 아무도 그를 제어할 사람이 없다.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음주와 흡연에 빠지고 죄에 이끌린다.
에이즈 이상으로 문둥병이 왜 그렇게 무서운 질병인가?
병이 짙어지면서 모든 감각이 무뎌지는 것이다.
뜨거운 것을 만져도 뜨겁지 않고, 피를 흘려도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뜨거움을 느껴야 손을 피하고, 아픈 것을 느껴야 치료하지 않겠는가?
감각이 없으니 결국 손가락이 망가지고, 썩어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이것에 못지 않게 처참한 일이다.
죄를 범하면서도 죄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을 방탕에 내팽계쳐 버리니,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럽고 음란한 것을 남보다 더 욕심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생활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자.
나는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말과 행동을 주의하는가?
나는 악하고 음란한 것이 생각에만 머물고 행동만 안하면 죄가 아니라고 여기는가?
어느 수양관 책임자는 그곳을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얻어 복음을 전했다.
그는 자기가 만난 이들을 볼 때에 요즘에 가장 무서운 범죄는 이단과 음란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일 주일에 한 두 번 씩 혼자 한적한 모텔에 가서 음란 영화를 보았는데,
결국 더러운 귀신에 들려 밤낮 고통하다가 죄를 고백하고 기도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욕심이 잉태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사망을 낳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가?

첫째는, 복음의 진리를 진실한 마음으로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4:21).

참된 진리는 과학이나 신학이나 철학 안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급선무이다.
무엇보다고 예수님을 바로 배우고 그의 복음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또는 억지로라도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들으라.
설교를 들을 때에 최선을 다해 경청하고, 멧세지의 핵심을 놓치지 말라.
바로 들어야 바로 이해하고 바로 믿고, 바로 살 수 있다.

우리는 남의 말을 들을 때에 종종 지레 짐작으로 결론을 내리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서 실수할 때가 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결론내려 버리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외국인에게 길을 물었는데, 말이 어렵고 설명이 복잡해서
자세히 알지도 못했으면서 알아 들은 척을 했다가 길을 찾느라고 혼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깊은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상식으로 간단히 판단하다가는
어느 날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둘째는, 유혹의 욕심에 끌려 다니는 옛 습관을 벗어 버려야 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4:22).

이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악한 옛 생각과 생활 습관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죄를 끊는 일은 결코 간단하게나 저절로 되지 않는다.
저절로 알콜 중독이 끊어지고, 저절로 줄담배 습관이 끊어지는가?
도박에 빠진 사람이 저절로 그것에서 손을 떼는 것을 보았는가?

성경이 교훈하는 대로, 먼저 유혹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촛불 주변에서 이리 저리 날아 다니는 부나비는 결국 그 불에 타 죽고,
죄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결국 그 죄에게 얽히고 만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않도록 유혹을 이기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일단 "안된다"고 마음에 결심하고, 핑계를 찾지 말고 과감하게 거부하라.

이단의 전도 방법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믿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와 보라는 것이다.
한번 가보고 듣다가 결국 깊은 웅덩이에 끌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바늘 도둑은 결국 소도둑이 되고, 잔돈을 훔친 사람은 결국 큰 돈을 훔치게 된다.

셋째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4:23).

부끄러운 불신앙과 불순종의 생활을 벗어 버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변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속 사람이 새로워져야 한다.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생각이 변한다는 것이요,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하고,
변화된 행동이 반복되면 좋은 습관이 되며, 결국 운명이 멋지게 변하게 된다.

마음의 즐거움이 양약이라고 성경은 말하다.
어느 인도 청년이 의사가 되었는데 처음 맞은 환자는 재단사의 직업을 가진 폐렴 환자였다.
그는 의학책을 뒤지다가 힌두교식의 치료법을 찾지 못하여
"치료법이 없습니다. 조용히 쉬면서 편안하게 죽음을 마지하십시오."라고 말하고 돌려 보냈다.

그런데 몇 주일 후에 다시 그 사람을 만났을 때에 그는 건강하고 활기차게 일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놀란 청년 의사가 그에게 물었다.
"나는 기왕에 죽을 것이니까, 병원을 나서자 마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자 팬케이크를
32개나 먹었는데, 곧 힘을 얻어서 회복된 것입니다.
그 청년 의사는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폐렴에는 감자 팬케이크 32개가 특효."

그런데 그 다음 환자도 공교롭게 폐렴을 앓고 있는 구두수선공이었다.
청년 의사는 자신있게 치료법을 가르쳐 주었다. 감사 팬케이크 32개를 먹으면 된다고.
그런데 며칠 후에 그 구두수선공은 감사 팬케이크를 32개 먹고 난 후 곧 죽었다.
청년 의사는 다시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감자 팬케이크가 재단사에게는 효험이 있지만, 구두수선공에게는 맞지 않는다."
많은 병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마음이 주신다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마음과 생각이 바뀌면 인생의 많은 것이 바뀐다.
늘 어둡고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과
늘 밝고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다르겠는가?
누구나 그들의 얼굴만 보고 몇 마디의 대화만 나눠도 그 차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신선하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도록 구하라.

넷째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

그리고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려면 추구하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
지난 날에는 남보다 잘 먹고 더 크고 좋은 집과 차를 갖는 것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의롭게 살고, 진실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지난 날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자신에게 이익만 되면 안면 몰수하고 몰아부쳤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고,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더러운 곳에는 파리떼가 모이지만, 향기가 있는 곳에는 벌과 나비가 모이 듯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으면 거기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헌 옷 위에 겹쳐 입으라는 것이 아니다.
마치 오래 되고 낡은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옛 것을 다 벗어 던져 버리고, 온전히 새 것으로 바뀌 입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이전 것은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라는 새 옷을 입지 못하고, 낡은 옷을 입은 채 죽은 사람들의 유언을 들어 보라.
회의론자인 볼테이르는 의사에게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생명을 6 개월만 연장시켜 준다면 내 재산의 반을 주겠소."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6 주 밖에 더 못 삽니다"라고 하니,
그는 "그러면 나는 지옥에 갈 것이요. 당신도 마찬가지요"라고 악담하며 숨을 거뒀다.

바이런 경은 "긍휼을 구해 볼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바이런은
"약해지지 말자. 끝까지 남자답게 죽자"라고 말하고 불신앙 가운데 죽었다.

이태리의 배역자인 프란시스 스피라는 "내 죄가 하나님의 자비보다더 더 크다.
난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내 마음을 이렇게 딱딱하게 만든 것이 예수다.
그래서 난 소망없이 죽는 것이다"라고 원망하면서 죽어 갔다.

홉스는 "세상에 작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
그는 하루만 더 살게 해 주면 자기가 가진 것을 전부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이들이 마지막 남긴 말들을 들어 보라.
성경학자인 매튜 헨리는 "죄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난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를 든든히 붙잡아 주고 계시다"라고 말하고 숨을 거뒀다.

마틴 루터는 죽기 전에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죽을 때에도 피할 길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다.

종교 개혁가인 죤 낙스는 "그리스도 안에 사시오. 그리스도 안에 사시오. 그러면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소"라고 외치고 죽었다.

죤 칼빈은 "주님이 나를 상하게 하신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님의 손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너무도 만족하다."

요한 웨슬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다. 안녕!"
그의 동생인 챨스 웨슬레는 "난 주님을 닮는 것으로 만족하다. 정말 만족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다른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된 까닭이 어디 있는가?
이제는 부끄러운 옛 사람을 용감하게 벗어 버리고, 자랑스런 빛과 의의 옷을 입자!

출처/박광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