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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 (마28:1-10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뱃속에 있었던 것 같아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마12:39-40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셨던 대로 우리 예수님은 밤낮 사흘을 무덤에 계셔야 했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우리 예수님은 주검이 되어 세마포로 쌓인 채 밤낮 사흘을 무덤에 계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도 그리고 사랑스러웠던 예수님의 말씀도 수많은 기적들도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예수님의 무덤을 흔적으로 남긴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사흘은 그러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첫날 예수님인 무덤에 계신지 사흘째 되는 날 새벽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여인은 오직 예수님이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무덤앞에 가면 무덤을 지키고 있는 빌라도의 경비병들과 유대 제사장들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지 모르지만 이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무덤앞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며 떠나버렸고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외면했던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팔았다는 자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고 예수님의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다 했던 요한과 야고보를 비롯한 제자들은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오직 두 여인만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거룩한 부담을 안고 새벽미명에 무덤을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일입니까? 두 여인이 무덤에 가까이 왔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을 가로막고 있던 돌을 굴러내고 그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놀란 여인들에게 천사는 말했습니다.
마28장 5절에서 7절에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 누으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며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다 하라
이것이 왠 일입니까?
여인들은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부활의 현장을 처음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여인들은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여인들이 큰 기쁨과 놀라움을 가슴에 안고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무덤을 떠나 달려 갈 때 였습니다. 평안하느뇨 음성과 함께 여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죽은 예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누웟계신 예수가 아니라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예수였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 하셨던 대로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합니다. 이렇게 죽으면 끝나는 줄 알았던 인생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렇게 죽으면 끝나는 줄 알았던 인생들이 예수님을 무덤에 가뒀습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에게는 무덤이 새로운 시작이었음을 뿐입니다. 죽음도 무덤도 예수님을 가두워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 영원자이셨기에 시간이 가두워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이 땅에 죽었던 모든 인간에게 구원자가 되시었고 지금 악의 세력 때문에 억압받고 고통 받는 모든 인간의 해방자가 되시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예수 안에서 죽으면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이 있게 될 것입니다. 약속해주셨습니다.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는 의학적인 질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부활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믿음입니다.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과학적인 질문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내안에서 이해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죄와 사망에 매여 있는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화해시키기 위하여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맞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에 매여 있던 인생에게 참 용서의 길이 있음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땅밖에 모르는 인생들에게 또 하나의 세계 하늘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적인 것밖에 모르는 인생들에게 보이는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믿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세계가 알려진 역사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믿고 말하며 사는 원리가 있음을 알려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떡으로만 사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원리가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처음으로 인생들에게 섬김의 가치를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섬김을 받아야만 하는 인생들에게 용서와 사랑의 가치를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미명에 처음으로 무덤을 찾는 여인들은 절망이었습니다.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큰 지진과 함께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러내고 그 위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까 여인들을 두렵게 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여인들을 위해서 였습니다. 천사는 왜 돌을 굴려내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돕기 위해서입니까?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올 수 있도록 무덤을 연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무덤을 열기 전에 부활의 예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열지 않아고 얼마든지 부활의 예수일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무덤앞에 돌을 굴러내어 버린 것은 바로 여인들을 위함이셨습니다. 죽음을 찾아온 저들에게 부활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무덤을 보러온 저들에게 빈 무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절망을 찾아온 저들에게 참 소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인 줄 알고 찾아 온 저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온 저들에게 참 생명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 부활의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도 돌을 옮겨버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돌 다음에는 주님이 있고 절망이 있고 끝이요 마지막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그 돌을 너무 많이 보았고 그 돌들 앞에 포기해 버렸습니다. 남편앞에서는 보여지는 돌은 그 다음은 포기요 절망입니다. 자식앞에서 보여지는 돌은 무너지 기대입니다. 사업앞에서 보여지는 돌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앞에 보여지는 돌은 절망입니다. 이 돌들앞에 정몽헌이나 부산시장도 전남지사도 파주시장도 어찌하지 못해 포기한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이 돌을 치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우선의 지진앞에 두려워 할 필요없습니다. 그 지진마져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있게 한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내 눈 앞에 돌을 굴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천사에게 들려온 음성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무서워말라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여인들이 찾는 예수는 어떤 예수였습니까? 고난받으신 예수 죽으신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였습니다.
여인들이 만나야 할 예수는 어떤 예수였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입니다. 부활의 예수입니다.
좌와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예수입니다. 죽은 예수를 찾으러 온 저들에게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음성은 단호합니다. 와서 그 누우셨던 곳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말씀대로 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뼈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용서와 구원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의 매력은 죽는 것입니다. 왜요, 다음으로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신앙에 이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의 특징은 언제나 그 다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입니다. 계산은 아버지의 원이 아니라 내원대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특징은 그 다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이 왜 사자굴이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왜 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바로 그 다음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믿어요?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은 언제나 그 다음을 계획하시고 계시기에 입니다. 보라 십자가를 넘어 부활이 있고 부활을 넘어 재림이 있고 재림을 넘어 영원을 계획하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기독교의 신앙 중 또 하나는 말씀신앙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말씀대로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기는 말씀이 말씀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말라기시대에 사람들의 감동이 무엇입니까? 말3:14절에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대로 살아 내게 무엇이 유익이 있으리요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자가 화를 면한다 함이니라 한마디로 왜 말씀대로 안되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살아도 소용없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정답은 결국 말씀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마24: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입니다. 예수안에서도 우선은 말씀이 말씀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악한 자가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불법이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로가 아니라 부활로 말씀이 말씀됨을 분명하게 증명하신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의 신앙입니다. 말씀신앙입니다.
공생애을 시작하셨던 예수님의 선언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떡이 아니라 말씀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결정할 때 이익이 될 만한 것을 구하는 우리에게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으나 결국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원하는대로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오해와 핍박으로 감옥에 가게 된 존 번연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별 차이없이 억울하다 한탄하거나 항소하지 않고 지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니 행복하다 합니다. 이러한 존 번연의 수감생활에 감동을 받은 형무소 소장과 간수들 또한 존 번연의 행복한 미소로 행복한 생활들을 이어갑니다.
칙칙하고 답답하고 사고만 터지던 형무소안은 언젠가부터 웃음소리가 들리는 행복한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장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 마침 생일을 맞은 존 번연에게 감옥에서 생일을 치루지 말고 가족과 함께 치루라고 법에도 없던 특별 외출을 시켜줍니다. 갈까 말까 한참을 갈등하던 존 번연이 가다가 돌아온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가지말라고 그래서 돌아오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자 소장은 화를 냅니다. 아니 잠깐 갔다오는 것인데 왜 다시 돌아오냐고 답답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존 번연을 원 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마침 영국왕실 감찰대에서 감찰사가 형무소 감찰을 나온 것입니다. 다른 형무소 같지 않은 이 형무소 소장에게 표창을 하고 감사장을 줍니다. 그리고 전국 최우수 형무소로 지정합니다. 만약에 존 번연이 외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소장이 존 번연을 찾아와 감찰사에서 왔다갔다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앞으로도 성령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서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향한 또 하나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빨리가서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의 요구는 사명을 회복하여 전파하는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가 전파될 때 전해질 때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음성은 무덤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모른 채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무덤에는 예수의 흔적은 있지만 예수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나 많은 기독교가 예수 없는 무덤만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건물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파만 붙들고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만 붙들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과 만나야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지 못합니다.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는 것입니다. 갈 힘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한 것입니다. 또 하나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부활과 만났다면 이제 부활은 오순절과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신앙에서 부활신앙으로 부활신앙에서 오순절 성령신앙입니다. 신앙은 어디까지 가야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커보여도 목적은 부활입니다. 부활이 커보여도 성령입니다. 성령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십자가앞에서도 도망했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알고도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못 박혔던 손을 만져보고 입으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을 했어도 옛 직업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아는 것만 같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는데 생각으로는 알겠는데 육신은 고기 잡으러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도 아는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 제자들이 언제 달라졌습니까? 언제 깨져 버렸습니까?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입니다. 이때부터 능력이 나타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관원이 무섭지 않습니다. 감옥이 무섭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할 때 기적과 능력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단순한 앎이 아니라 능력이 되었습니다. 부활이 오순절과 만날 때 능력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지식으로 믿을 때 신앙고백은 될 수 있으나 능력은 안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능력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 체험을 해야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부활은 우리 구원의 완성입니다. 오순절은 우리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오순절과 만나야 합니다.
오순절때 있어진 성령이야말로 부활 승천을 넘어 재림을 기다리는 사는 삶의 원리입니다.
오순절 성령신앙이 전파하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나 식당 그리고 거리에서나 이웃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라 이것은 부활신앙의 요구입니다.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간 수난의 경건에 동참함에 있어서 아침을 구별하여 금식하거나 경건의 여러 모양으로 문화활동을 절제하거나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부활을 확실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의 요구앞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또 하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왜 갈릴리로 주님은 초대합니까? 배반의 자리 저주의 자리 좌절의 자리에서 저들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왜 갈릴리에서 저들을 초대합니까? 제자들을 처음 불렀던 곳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복음을 전했던 사명의 출발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안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사명안에서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앞에서 그냥 눈물만 흘리는 신앙이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명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첫사랑을 회복시켜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첫사랑은 회복되지 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첫 사랑일 때만 첫사랑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첫사랑의 회복은 첫사랑회복이 아니라 사명의 회복입니다.
부활의 요구는 사명의 회복입니다. 은혜의 회복입니다.
제자들처럼 좌절감을 맛보고 신앙을 잊어 버린 분이 있다면 갈릴리로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첫 사명 첫 은혜의 마음을 회복하여 사명을 위해 사는 자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기도하던 사람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하던 사람은 계속 전도해야 합니다.
봉사하던 사람은 계속 봉사해야 합니다. 부활은 회복입니다.
우리주님은 여러분 안에서 부활이길 원하시고 있습니다.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