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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같이 (마18:1-4)
오늘날 어린이와 여자의 권리가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남자들의 의식의 저변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있고 또한 어린이를 어른의 예속물로 보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 님 시대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재산의 일부분으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 님께서 어린이를 이토록 높이셨다고 하는 점은 폭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님께서는 여러 번 어린아이를 높이시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도 그랬고 또한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아이들이 예수 님께 나아 왔을 때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시고 분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특히 본문의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첫째는 '결단코'란 말이 그렇고, 둘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을까요? 어떤 사람의 말처럼 어린아이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믿음의 속성과 어린아이의 어떤 속성과 관련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믿음의 어떤 속성과 어린아이가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⑴,어린아이는 겸손합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을 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즉 어린 아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의존성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믿음 자체가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 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대의 교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속성과 천국이 얼마나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3절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고, 4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할 정도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전자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말했고, 후자는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말했습니다. 즉 천국은 어린아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관련이 있되 천국에 가느냐 못 가느냐와 천국에서 큰 자냐 적은 자냐를 나누는 정도로 관련이 있습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천국에는 들어 갈 수도 없고 들어가더라도 상급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어른들은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 어른들에게 요구하는 바요 명령하는 바입니다.
본문에 '돌이켜'란 말은 어린 아이 같지 못함을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어른의 방법으로 살고, 어른의 방법으로 믿고, 어른의 방법으로 아이를 가르치고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특히 어린아이와 같이 믿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살지 못했음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대부분 우리 삶의 최고 목표를 자녀 교육에 두고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컨대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고달픈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 최고의 이유를 자녀의 교육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어린이를 기르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배워 가는 것이요 오히려 우리가 어린 아이 같지 못함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하지 못함을 회개하고 아이들처럼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⑵,어린아이는 진실합니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는 지혜와 용기와 진실과 믿음이 향상되고 인격이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어른이 되는 것을 단지 꾀와 자기 이익에 대한 계산과 성공과 출세를 위한 욕망의 성장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어른은 어린이보다 계산은 잘합니다. 그러나 진실성은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훨씬 낫습니다. 단순성도 어린이가 어른보다 낫습니다. 정직성도 특히 겸손함도 어른들보다야 어린이가 훨씬 낫습니다.
어른의 얼굴에서는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이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천사와 같다'는 말을 합니다. 갓난아이는 잘 생기고 못 생기고 가없습니다. 모두 천사와 같습니다. 우리는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정욕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더럽혀진 우리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낄 때 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옳은 일에 대하여 단순합니다. 놀이를 하며 어떤 아이는 운전사를 하고, 어떤 아이는 자동차 바퀴 노릇을 하고, 어떤 아이는 자동차 뒤에 나는 먼지 노릇을 하고도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있는 부모는 먼지 노릇을 하고 노는 자기 아이에게 먼지 역할을 하지 말고 이왕이면 운전사 역할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성탄절 축하 발표에서 내 아이가 무대 뒤에 서면 내 아이를 앞에 서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어른입니다. 아이 스스로도 앞에 서기를 바라면 그는 이미 어린이가 아닙니다. 어른 때문에 오염된 아이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이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워즈워드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낮추다'는 말이 나오는데 '낮추다'는 말은 내리 누르고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를 철저하게 비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아이로 낮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만 은혜 받고 어른들만 구원받는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은혜를 더 잘 받습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도 훨씬 깊이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자는 또한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린아이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는 사람 앞에서는 자세도 달라야 합니다.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는 소자 하나라도 영접하고 소자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직업에 따라 다르게 본다고 합니다.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람과, 그대로 보는 사람과, 그리고 믿음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검사는 인간을 항상 의심을 하고 보고, 의사는 있는 그대로 보고, 목사는 항상 믿어 주고 본다는 것입니다. 믿어 주고 어린아이라도 영접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어린아이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겸손한 믿음을 가진 자는 소자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자란 누구입니까? 어린이만이 소자는 아닙니다. 노인도 환자도 신체 부 자유 자도 소자입니다. 심지어 돈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는 사람 모두가 다 소자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어린아이는 소자 중에 소자입니다.
⑶,어린아이는 약합니다.
어린아이란 섬세하게 돌봐 주어야 할 연약한 소자입니다. 저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있는 경우를 보면 부모들이 아이의 손톱 하나 깎아 주는 것도 소중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몸에 난 큰 상처보다 얼굴에 난 작은 상처가 때로 더 문제가 됩니다. 수잔 포워드 박사는 '이런 사람이 무자격 부모다'란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해 주어야 할 기초적인 5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녀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둘째는 자녀의 몸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고, 셋째로 자녀에게 필요한 사랑을 베풀고, 넷째로 자녀가 정서적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고, 다섯째로 자녀에게 도덕적 윤리적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는 늘 돌봐 주어야 하는 소자 중에 소자입니다.
좋은 사회일 수록 좋은 가정일 수록 좋은 교회일 수록 소자를 소중히 여깁니다. 장애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미국에는 세 개의 천국이 있다고 말합니다. 장애인의 천국이요, 여자의 천국이요, 스포츠맨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한 어린이와 노인의 천국이기도 하고 열심히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물건을 잘못 만드는 것보다, 정치를 잘못하는 것보다 어린이를 잘못 기르는 것은 훨씬 더 나쁜 것입니다. "문제 아이는 없다 다만 문제의 어른이 있을 뿐이다"(에이 에스 닐)라는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고 심지어 죽이고 하는 것은 우리 부모의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사람으로서 알려진 사람들 중에 자식 교육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루소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들을 반 쪽 잡이 성공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무명의 부모가 위대한 아들을 만들어 내는 경우를 보는데 사실 이들이 온전한 성공 자일 것입니다. 스펜서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행위를 비치는 거울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이 땅에서 돈이나 명예를 얻게 하는 것을 결코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물질이나 인간 관계를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처럼 자식들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반성하게 하고 회개케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집 센 아이를 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고 고집 부리며 산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보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비쳐 주는 더 좋은 거울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 같이되지 못함을 회개하고 또 어린아이를 어른으로 가르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어린 아이 같은 어른도 있고 어른 같은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어른도 어린아이같이 믿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지만 어린이도 어른 같이 믿으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출저/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
오늘날 어린이와 여자의 권리가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남자들의 의식의 저변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있고 또한 어린이를 어른의 예속물로 보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 님 시대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재산의 일부분으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 님께서 어린이를 이토록 높이셨다고 하는 점은 폭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님께서는 여러 번 어린아이를 높이시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도 그랬고 또한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아이들이 예수 님께 나아 왔을 때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시고 분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특히 본문의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첫째는 '결단코'란 말이 그렇고, 둘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을까요? 어떤 사람의 말처럼 어린아이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믿음의 속성과 어린아이의 어떤 속성과 관련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믿음의 어떤 속성과 어린아이가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⑴,어린아이는 겸손합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을 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즉 어린 아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의존성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믿음 자체가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 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대의 교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속성과 천국이 얼마나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3절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고, 4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할 정도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전자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말했고, 후자는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말했습니다. 즉 천국은 어린아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관련이 있되 천국에 가느냐 못 가느냐와 천국에서 큰 자냐 적은 자냐를 나누는 정도로 관련이 있습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천국에는 들어 갈 수도 없고 들어가더라도 상급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어른들은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 어른들에게 요구하는 바요 명령하는 바입니다.
본문에 '돌이켜'란 말은 어린 아이 같지 못함을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어른의 방법으로 살고, 어른의 방법으로 믿고, 어른의 방법으로 아이를 가르치고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특히 어린아이와 같이 믿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살지 못했음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대부분 우리 삶의 최고 목표를 자녀 교육에 두고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컨대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고달픈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 최고의 이유를 자녀의 교육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어린이를 기르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배워 가는 것이요 오히려 우리가 어린 아이 같지 못함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하지 못함을 회개하고 아이들처럼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⑵,어린아이는 진실합니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는 지혜와 용기와 진실과 믿음이 향상되고 인격이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어른이 되는 것을 단지 꾀와 자기 이익에 대한 계산과 성공과 출세를 위한 욕망의 성장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어른은 어린이보다 계산은 잘합니다. 그러나 진실성은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훨씬 낫습니다. 단순성도 어린이가 어른보다 낫습니다. 정직성도 특히 겸손함도 어른들보다야 어린이가 훨씬 낫습니다.
어른의 얼굴에서는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이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천사와 같다'는 말을 합니다. 갓난아이는 잘 생기고 못 생기고 가없습니다. 모두 천사와 같습니다. 우리는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정욕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더럽혀진 우리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낄 때 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옳은 일에 대하여 단순합니다. 놀이를 하며 어떤 아이는 운전사를 하고, 어떤 아이는 자동차 바퀴 노릇을 하고, 어떤 아이는 자동차 뒤에 나는 먼지 노릇을 하고도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있는 부모는 먼지 노릇을 하고 노는 자기 아이에게 먼지 역할을 하지 말고 이왕이면 운전사 역할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성탄절 축하 발표에서 내 아이가 무대 뒤에 서면 내 아이를 앞에 서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어른입니다. 아이 스스로도 앞에 서기를 바라면 그는 이미 어린이가 아닙니다. 어른 때문에 오염된 아이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이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워즈워드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낮추다'는 말이 나오는데 '낮추다'는 말은 내리 누르고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를 철저하게 비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아이로 낮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만 은혜 받고 어른들만 구원받는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은혜를 더 잘 받습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도 훨씬 깊이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자는 또한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린아이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는 사람 앞에서는 자세도 달라야 합니다.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는 소자 하나라도 영접하고 소자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직업에 따라 다르게 본다고 합니다.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람과, 그대로 보는 사람과, 그리고 믿음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검사는 인간을 항상 의심을 하고 보고, 의사는 있는 그대로 보고, 목사는 항상 믿어 주고 본다는 것입니다. 믿어 주고 어린아이라도 영접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어린아이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겸손한 믿음을 가진 자는 소자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자란 누구입니까? 어린이만이 소자는 아닙니다. 노인도 환자도 신체 부 자유 자도 소자입니다. 심지어 돈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는 사람 모두가 다 소자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어린아이는 소자 중에 소자입니다.
⑶,어린아이는 약합니다.
어린아이란 섬세하게 돌봐 주어야 할 연약한 소자입니다. 저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있는 경우를 보면 부모들이 아이의 손톱 하나 깎아 주는 것도 소중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몸에 난 큰 상처보다 얼굴에 난 작은 상처가 때로 더 문제가 됩니다. 수잔 포워드 박사는 '이런 사람이 무자격 부모다'란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해 주어야 할 기초적인 5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녀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둘째는 자녀의 몸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고, 셋째로 자녀에게 필요한 사랑을 베풀고, 넷째로 자녀가 정서적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고, 다섯째로 자녀에게 도덕적 윤리적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는 늘 돌봐 주어야 하는 소자 중에 소자입니다.
좋은 사회일 수록 좋은 가정일 수록 좋은 교회일 수록 소자를 소중히 여깁니다. 장애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미국에는 세 개의 천국이 있다고 말합니다. 장애인의 천국이요, 여자의 천국이요, 스포츠맨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한 어린이와 노인의 천국이기도 하고 열심히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물건을 잘못 만드는 것보다, 정치를 잘못하는 것보다 어린이를 잘못 기르는 것은 훨씬 더 나쁜 것입니다. "문제 아이는 없다 다만 문제의 어른이 있을 뿐이다"(에이 에스 닐)라는 말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고 심지어 죽이고 하는 것은 우리 부모의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사람으로서 알려진 사람들 중에 자식 교육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루소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들을 반 쪽 잡이 성공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무명의 부모가 위대한 아들을 만들어 내는 경우를 보는데 사실 이들이 온전한 성공 자일 것입니다. 스펜서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행위를 비치는 거울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이 땅에서 돈이나 명예를 얻게 하는 것을 결코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물질이나 인간 관계를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처럼 자식들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반성하게 하고 회개케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집 센 아이를 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고 고집 부리며 산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보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비쳐 주는 더 좋은 거울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 같이되지 못함을 회개하고 또 어린아이를 어른으로 가르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어린 아이 같은 어른도 있고 어른 같은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어른도 어린아이같이 믿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지만 어린이도 어른 같이 믿으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출저/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