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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기념비 (수 4:19-24)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절은 보리를 수확한 것을 감사하며 드리는 절기로서 칠칠절,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맥추절은 유월절, 수장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절기로서 출애굽한 때부터 신실하게 지켜진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을 명령으로 주신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명령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내 인생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고, 그리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이런 마음을 품고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개인의 삶에도 있었고, 공동체에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이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본을 보였던 인물들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간 어느 날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온 백성이 한곳에서 기념비를 세우는 사건입니다. 보통 기념비는 하나, 둘을 세우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에서는 열 두개의 돌을 세웠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우리도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에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한번 내 생애의 신앙과 삶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조명하고, 현재의 삶을 진단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기념비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본문에 나오는 지명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언급되어 있고, 이스라엘의 당대와 후대까지 평생 잊지 못할 곳, 과연 그곳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첫째는 ‘요단’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백성이 요단을 지난 뒤에 있었던 사건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요단은 이들에게 과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단을 지난 후에, 그들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요단은 어떤 곳일까요? 요단에서 어떤 일을 그들이 경험했습니까? 요단은 요단강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입니다. 우여와 곡절 끝에 요단 동편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거기에서 지도자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재무장하여 강을 건널 채비를 합니다. 그러나 그 강은 물로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돌아갈 길도 없고, 넘어갈 다리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수영을 해서 갈 수도 없습니다. 뾰족한 방법이나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런 요단강을 그들이 어떻게 건넜을까요?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본문 바로 앞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옛날 홍해를 육지같이 지나가듯, 그렇게 지금도 그들은 요단강을 육지처럼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와 요단이 이런 면에서 같다는 것을 23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와 요단에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궁극적으로 기념비를 세우려는 이유도 그 놀라운 기적을 영원토록 당대와 후대에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요단의 사건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분과 저도 이미 신앙의 요단을 건넜습니다. 다시 말해 내 생애에 놀라운 기적을 이미 경험했다는 말이고, 한번 일어난 기적이 내 삶의 현장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경험한 기적 같은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예배에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거룩한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이름으로 이 땅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날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죽은 자리에서 다시 부활하여 새로운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확실하게 믿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믿어집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삶의 큰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기적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제 한번 일어난 기적이기에 계속해서 내 삶에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를 더 깜짝 놀라게 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놀라고, 다른 사람이 놀라고, 모두가 놀랄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그 기적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요단을 건넌 사람들이요, 기적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 내 삶에 나를 더 놀라게 할 기적적인 일들을 기대하면서 믿음 생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여리고’입니다. 19절에 백성이 지금 자리잡은 곳을 언급하면서 여리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백성들이 아직까지 지나가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그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의 사건에 대해서는 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리고는 요단에서 서쪽으로 약 8키로 떨어진 곳입니다.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진군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당시 여리고는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이 많아서 일찍부터 군사력이 강화된 곳입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에서부터 처음으로 강력한 철제무기와 견고한 집이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이곳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곳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순히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불가피한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상대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정탐군을 보내고, 이곳저곳의 헛점을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여리고는 지금 이스라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이미 전시상황으로 체재가 바뀐 상태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을 할 수가 없었고, 정면 대결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것이 당시 그들에게 당면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여리고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무너졌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속이 시원하게 한 일입니다. 이것이 소위 여리고 사건입니다.
여러분, 이 여리고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진군해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어떤 난관, 어떤 장벽, 어떤 문제도 다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길에 난관은 해결되고, 장벽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만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뒤로 갈 수 없고, 옆으로 샐 수도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만 전진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어떤 장벽도 무너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문제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확고해도 장벽은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세계에서 아주 많이 사용한 말 가운데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가 채택한 정치적 비밀주의와 폐쇄성을 자유주의 진영에서 비유적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영국의 처칠이 1946년 미국 방문 시 연설에서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이 말이 사람들에 알려지면서 유사한 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중국이 자유 진영의 국가와의 관계에서 보인 외교적 폐쇄성을 중국의 명산물인 대나무에 비유하여 "죽(竹)의 장막(帳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요즘에는 인(人)의 장막(帳幕)이라는 것도 이 말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벽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무너졌고, 또 무너지고 있습니다. 소련이 무너졌고, 독일이 무너졌고, 공산주의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장벽이라도 무너집니다. 바벨탑도, 여리고도, 바벨론도, 로마도 모두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철의 장벽도 무너진다면 신앙의 세계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장벽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꼬인 문제도 풀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기념비를 세우십시오. 주님과 더불어 가는 내 삶에 장벽은 없습니다. 이 신앙으로 전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길갈’입니다. 길갈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머물고 있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이들에게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곳을 길갈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기에서 할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5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를 앞에 둔 시점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할례는 오래 전에 모세에게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이미 출애굽시대부터 백성들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광야1세대가 죽은 이후, 지금의 2세대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되었기에 하나님은 할례를 명령하셨고 여호수아는 이 일을 신실히 이행했던 것입니다. 할례가 마친 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굴러가게 하셨다’는 말에서 ‘길갈’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할례를 행한 그곳 길갈에서 여호수아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 기념비는 하나님앞에 참된 삶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길갈에서 그들은 가나안정복의 꿈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길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다시 무장했습니다. 곧 길갈에서 새로운 삶을 헌신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할례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서 그들이 말하는 사람의 구분은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할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입니다. 이것이 왕정시대와 구약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아니 신약까지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할례는 고통스럽고 아픈 의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서 이제 하나님과 깊은 연관이 된 백성인 것을 심어주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할례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우선, 할례의 의미는 ‘구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방 신을 믿는 자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에는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온갖 잡신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이런 이방 신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뜻으로 할례를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례를 행하면서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마음에 심었고, 이제부터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헌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것이 뜻깊은 맥추절에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이제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구별이 되지 않으면 믿음의 의미는 없습니다. 좀 다르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할례의 두 번째 의미는 이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백성들이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전쟁중입니다. 언제 가나안의 정복자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할례는 남자에게 행하는 것이고, 군사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그들이 완전히 낫기까지 군사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때 적이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합니다. 백성들도 순순히 따릅니다. 할례를 행하는 순간부터 이스라엘은 진공상태에 빠졌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이들이 바라보았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살고, 하나님이 버리시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죽기살기로 하나님을 붙잡았겠습니까? 아마 이때만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권력이나 힘이나 물질이나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할례의 의미입니다.
맥추절을 지키고, 내 인생의 기념비를 세우면서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헌신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의 기적을 체험하고, 미래의 장벽을 무너트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다고 고백하고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지난 6월 29일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망자 502명, 부상자 903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큰 참사사건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난 그날 시민의 숲에서 추모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많은 유족들이 참석하여 그날의 아픔을 되새겼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어머니의 이야기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고로 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을 잃었습니다. 토스트 한 개먹고 백화점으로 출근한 딸이 그날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엘리베이터 속에서 싸늘하게 발견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헤쳐 나오려고 애썼는지 손톱이 다 빠져있었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입술이 모두 찢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처참한 딸의 시신을 목격하고, 그 뒤부터 어머니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의지할 대상은 이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믿을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힘이 아니고, 돈이 아니고, 오직 나를 사랑하는 주님뿐입니다. 살면 살수록,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가장 복되고, 지혜롭고, 우리가 진정으로 사는 길임을 배웁니다.
이제 이 맥추절에 우리는 내 인생의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요단을 건넜고,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여리고도 무너질 것입니다. 이제 길갈에서 마음의 할례를 행합시다. 구별된 삶을 살기를 다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다시 굳게 다짐합시다. 이 믿음과 신앙을 견고히 세우며 이 한 주간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