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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손길 (창 50:20-21)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증거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 성령이 오신 것은 참 은혜이고 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성령의 은혜가 말할 수 없이 우리의 삶 속에 충만한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저 공기 속에 산소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공기속의 산소를 사람들이 마시고 살아갑니다. 또 식물들과 물속의 물고기들조차도 그 산소를 마시고 숨을 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산소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참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 하늘에는 온갖 전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전파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전파들이 온갖 정보, 소리, 화면, 뉴스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전파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는 성령의 열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성령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여기서, 내 마음속에서 보이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성령이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눈을 뜨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게 하고, 믿게 하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무엇을 보게 하시는가 하면 그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은 눈을 뜨게 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십니다. 이 눈이 열리기 전에 자신을 보면 모두 자기위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자만하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남의 흉만 보게 됩니다. 자신을 보는 눈이 아직 뜨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뜨게 하신 눈으로 자신을 보면 자신의 무능이 보이고 무지가 보이고 죄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능하면서도 교만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전도할 때 “우리는 죄인입니다”하고 말하면 “내가 왜 죄인이냐”하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진정 성령의 감화로 나를 보는 눈이 뜨이면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하던 사람입니다. 그말은 그만큼 그는 자만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기질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그는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그는 자신을 보는 눈이 활짝 뜨였습니다. 그 뜨인 눈으로 자신을 보니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하고 고백했습니다.
또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바울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기고만장했습니까. 그래서 유대교에 충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바울은 자신이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이 신비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뜬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봅니다. 바라보니까 이것은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시의 모습이 엉망입니다.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까지 추구하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를 전하는 사람으로 일생을 바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사람 되고 신앙인이 진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를 보게” 하십니다.
성령이 나 자신을 보게 하는 것 뿐 아니고 너를 보는 눈도 뜨이게 하십니다. 이 너를 보는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보는 눈이 뜨이면 동시에 너를 보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너를 보는 눈이 뜨이면 너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 눈이 뜨이기 때문에 중보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눈이 뜨여야 신앙이 성숙해 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초월하고 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점심을 굶는 어린 아이들이 3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에 점심을 굶는 아이들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눈에 보일 리가 없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은혜를 받고 나서 매일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들이 은혜를 받고 나서 비로소 너를 알고 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네가 보이고 너의 아픔이 보이고 너의 필요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눈을 뜨고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성령이 이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십니다. 나 자신을 보는 것도 복입니다. 그런데 더 큰 복은 너를 보고 너를 생각하는 눈이 뜨였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깊은 곳을 보게” 하십니다.
이 눈을 뜨게 되면 평소에는 생각도 없고 개념도 없고 관심도 없던 것들이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고 눈에 들어옵니다.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보니 그것이 눈에 보입니다. 생각이 납니다. 느끼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감동으로 비추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서 깊은 의미를 알고 깨닫고 보게 하십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읽은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갑니다. 가서 온갖 수난을 당하고 살다가 마침내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후에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리로 나타납니다. 말이 쉽지 그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앞에 자기를 노예로 판형들이 나타났습니다. 순간 눈에서 불이 났을 것입니다. 형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떨고 있습니다. 당연히 떨일 입니다. 지금 요셉이 말 한마디면 자신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을 판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형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이 요셉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때 형들을 대하는 요셉의 모습이 요셉의 인생가운데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 45:48절을 보면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또 오늘 읽은 본문 창 50:20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이 대목을 보면 요셉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난날의 고난을 해석하는 이 혜안이 얼마나 깊습니까. 이 대목을 해석하는 모습으로 보아서 요셉은 깊은 곳을 내려다보는 통찰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눈이 열린 눈입니다. 열려도 그냥 열린 것이 아니고 활짝 열렸습니다. 그때 요셉의 눈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형제들은 그날 요셉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열린 눈으로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역사를 보았고 자신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먼저 보내신 이유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날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석자는 요셉의 눈이 5.0이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역사의 저 깊은 부분을 보는 혜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눈으로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전방을 보고 후방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시력 말고 또 다른 감각의 눈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인들의 눈은 3.0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것은 환경 때문에 직감의 눈이 발달되어서 그럴 것입니다. 산속에서 반 짐승처럼 능력을 가지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 직감의 시력이 발달했을 것입니다. 인간이지만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대처하고 짐승을 잡아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발달했을 것입니다. 마치 축구선수와 같습니다. 축구선수는 잘 뛰는 것이 좋은 선수가 아닙니다. 감각 없는 선수는 공을 좇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늘 뛰어 다닙니다. 그런 선수는 일류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감각 있는 선수는 공이 올만한 곳을 미리 알고 지키고 있다가 공이 오면 몰고 나아갑니다. 그것을 감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눈이 또 다른 눈입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밤샘공부를 해도 성적이 안 오릅니다. 그것도 공부하는 감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학생은 문제가 어디서 나올 줄을 감도 잡지 못하고 밤을 새웁니다. 그런데 공부 잘 하는 학생은 이 감각이 있습니다. 시험문제가 나올 법한 범위를 미리 감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짧은 시간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앞서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눈이 열려져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이 이 눈을 열게 해서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눈이 열리지 않으면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아버지와 아들 간에 100억 원대 땅을 놓고 재판을 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상속세를 피하려고 어린 아들에게 명의 이전을 시켜놓았습니다. 몇 년 후 아들이 장성하자 그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도 이전하라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부자가 이 눈이 조금인들 뜨였다면 그런 소송을 벌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이런 사건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이 감겨진 눈을 뜨게 해서 더 깊고 오묘한 세상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노셨습니다. 그 성령은 지금도 소리 없이 다니시며 역사하고 있습니다. 다니시며 눈을 열게 하시고 마음을 열게 하시고 그래서 보이지 않던 곳을 보게 하십니다. 이 눈을 떠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손길을 보는 눈을 가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도 모르고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우연과 섭리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연은 이런 것입니다. 독일 병사가 소련군에 쫓겨 도망갑니다. 소련군은 탱크를 몰고 오는데 독일군은 가지고 있는 소총에 총알마저 다 소진된 상태입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이에 화난 소대장이 단 한방 남은 권총을 꺼내 몰려오는 탱크를 향해서 쏘았습니다. 탱크를 맞추려고 쏜 것이 아니고 그저 화가 나서 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쏜 한방의 총알이 제일 앞서 오던 탱크의 기관총 총구에 맞아 기관총이 파괴되면서 탱크는 멈추어 섰고 이어서 탱크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적의 전진을 막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우연입니다. 맞추려고 쏜 것도 아닌데 우연히 적의 기관총 총구에 맞아 탱크를 폭발시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만큼은 분명하게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런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가 돌을 던졌습니다.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맞아 죽는 바람에 그날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두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무슨 힘으로 골리앗을 이깁니까. 어린 아이가 던진 돌이 아무리 세게 맞았다 해도 장수가 그 돌에 맞고 쓸어져 죽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다윗 배후에서 사역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내가, 나 때문에, 내 힘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서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누가 다윗을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영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 앞에 나가도록 용기를 주어 밀었습니다. 그게 어찌 사람의 생각이었겠습니까. 그때 거기 있던 누구도 골리앗 앞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만 겁 없이 그 앞에 나아갔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다윗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던졌는데 그 돌이 그만 앞으로 똑바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추었습니다. 물론 돌 던지는 연습을 오래하면 어느 정도 똑바로 던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 한번 던진 것이 골리앗의 이마 정 중앙에 맞혔습니다. 그것도 연습의 결과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연습의 결과라고 칩시다. 던진 돌이 똑바로 앞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 정중앙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여기가지는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그 돌아 이마에 박혔다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40일 동안이나 이스라엘과 대치하는 동안 하나님을 모독하는 욕을 내뱉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윗이 그 골리앗을 향해서 돌을 던질 때 그 돌 속에 그동안의 분노의 용액을 넣어서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죽도록 심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깊숙한 부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건 이후로 골리앗을 이긴 것을 자기가 죽였다고 한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내가 하였다고 말합니다. 내가 죽였고 내가 물리쳤고 내가 위기에서 민족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만해지는 것이고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 눈이 뜨인 사람입니다. 그동안 형들 때문에 얼마나 눈물의 세월을 보냈습니까. 그런데 그 형들 10명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지금 말 한마디면 보기 좋게 복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이 눈이 뜨이니까 이런 해석이 나오고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뜨인 눈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도 보고 성령의 역사도 보고 세상에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