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4
시137:1-6
오늘은 6.25를 앞둔 주일입니다. 6월25은 주일이었습니다.
38도선 전역에서 일시에 남으로 포문이 열렸고, 쏘련제 탱크로 밀고 내려와 3일만에 수도 서울까지 버리고 남하해야 했던 비극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후 3년간의 전화로 인한 피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쪽은 변함없이 자기들 나름대로 통일을 이룩하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엇그제만해도 서해 앞바다에서 서로의 총성이 오갔고 순간이나마, 다시 전쟁이 나지 않을까 염려하게 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이래, 첫 번째 왕이 사울 왕이었고, 다음이 다윗왕이었고, 그 다음이 솔노몬왕이었는데, 솔노몬왕 이후에, 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리어졌습니다. 한민족이 둘로 나뉘어 각기 다른 왕을 섬기며 두 체제로 이어져 왔는데, 북쪽을 일컬어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하였고, 남쪽을 <유다왕국>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둘이 갈라져 내려오다가 주전 587년 남쪽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침략을 받아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게 항복해야 했고, 많은 청장년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 모든 기물들과 레위 자손들도 머 언 이방의 나라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저들은 망국민의 슬픔을 품고, 날마다 고국을 그리워했고, 특히 안식일에는 마음속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며 슬픔을 참아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어떤 경건한 신앙 인의 애절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 사람은 레위 인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성전에서 악기(樂器)를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을 들이던 오늘의 성가대의 직분을 감당하던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지금 안식일이 되어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없는 현실을 슬퍼하면서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시온의 노래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라고.........
우리가 이 시편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망국민의 한(恨)은 그야말로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우리는 과거 나라 잃은 슬픔을 경험했던 백성이요,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눈물을 흘렸던 민족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들이 6.25를 다시 기억하면서 착잡한 감회에 젖게 됩니다.
대륙의 반도로 붙어 있는 국토는 지정학적으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처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열강들의 세력 팽창의 틈에서 민족의 비극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국토 분단과 이산가족의 비극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열강들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민족의 비극이란 말입니다.
해마다 6.25.를 맞을 때마다 다시 기억하기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민족이 마음속에 깊이 삭여 두어야 할 역사적 교훈들이기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좁은 땅에서 열 여섯 나라들의 젊은이들이 싸웠고,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3년 동안 500만 명의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6.25야말로 세계 전쟁 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동족 상쟁(相爭) 이었습니다. 남북을 통하여 2,122개의 교회가 불타 파괴되었고, 인민군 1,644,280명이 죽고, 국군도 419,350명이 전사했고, 미군도 143,958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했습니다. 그 밖에 민간인들은 남북을 합쳐 345만 명이 희생되었고, 미국은 3년동안에 200억불을 전비로 썼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2차 대전에 비하여 몇 배나 되는 액수를 이 좁은 땅에서 소모했고, 2차 대전에서 죽은 수보다 더 많은 인명이 이 땅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입니까. 전쟁이 가신 터 위에 찾아 든 빈곤!
세계 앞에 구호의 손길을 뻗쳐야 했고, 미군의 군수물자가 아니었으면 살 수 없었던 그런 참흑한 나날을 보내야 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 위에 오직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어진 나날들.....멸시와 푸대접이 의당한 것처럼 받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영국의 한 기자는 피폐된 전란에서 허덕이는 우리를 보고 “세계의 쓰레기 통”이라고 했고, 또 어떤 외국 기자는 “세계의 최악의 전시장”이라고 하면서, “쓰레기통에서 무슨 장미꽃을 기대하겠는가” 라고 까지 조소를 했던 것이 우리의 아픈 과거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한 아픈 고난을 체험한 민족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와 같이 고난의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요, 수치와 멸시를 당하며 살아오면서, 이제 이만큰 키워 온 나라가 우리 나라입니다.
저는 지금도 저 동작 동에 사랑하는 가족을 묻어 둔 국군 묘지를 지나갈 때마다, 저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깊이 생각해 보군 합니다. 저 말 없이 누워 있는 수많은 영령들이 이 민족에게 무엇을 얘기해 주며, 무엇을 말해 주려고 하는가를 똑똑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저들의 희생의 뜻을 바로 되새기고,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는 이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한강변에 나아가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울면서 기도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1. 이 시편 기자는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과거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고난은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난은 죄(罪)의 값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라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 즉 이사야, 예레미야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얼른 보면 모순인 것 같지만 진리입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는 죄(罪)로 인한 고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되었고, 한편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진상과 인간의 무능과 죄를 깨닫게 하여 더 낳은 역사를 이루게 한다는 말입니다. 즉, 고난을 통하여 죄를 회개하게 하고, 씻게 하고, 고난을 통하여 생을 깊고 높게 그리고 성숙하게 만들어 나아감을 보게 됩니다. 결국 고난은 인생의 탕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고 돌아서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것이요, 고난을 극복한 자라야 위대한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현대 신학 자중에 <루빔 알베스>(Rubeam Alves)같은 이는 자기가 쓴 책 ?포로의 신학?(Theology of Captivity)이란 책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모두 포로가 된 속박 상태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모두가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입니다. 경제적으로, 건강 적으로, 아니면 정신적으로 모두가 속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풍요한 사회라 해도, 그 물질 자체가 도리어 우리를 속박하고, 아무리 사회보장이 잘 되었다 해도, 인간의 내면의 속박을 풀어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더욱이 영적으로 우리 인생은 모두 죄의 포로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속박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눈물이 없어진 것이 문제란 것입니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는 이 시편 기자의 그런 영성(靈性)이 다 메말라 버렸다는 것이 문제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죄의 대한 아픔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형식적으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죽어 간 숫한 젊은들 앞에서 과거의 죄와 허물을 반성하는 눈물이 다 말라 버린 채, 군 묘지는 관광 코스가 되었고, 저들이 내려다보는 한강의 고수 부지에서는 밤낮으로 청춘 남녀들의 희희낙락 데이트 장소와 먹고 마시는 오락장으로 변했으니,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 모습이라면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는 이 시인의 마음을 한번쯤이라도 우리가 짚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누가 이 나라를 위해 울며 애국 충정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는 운동들이 있느냐입니다. 모두 그놈의 돈, 돈, 돈만 생각하는 현실이 아닌지...
2. 이 시편 기자는 과거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6.25 제 49주년을 맞습니다. 6.25의 비극과 고난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역사의 비극을 겪고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오늘의 신앙 인들이 비극적 고난의 경험과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죄의 무서움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큰 문제입니다.
마치 홍수의 심판이 지나간 후에 사막에 사는 <함>의 후손들이 세상의 영걸이 되어 시날 평지에서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아 올렸듯이, 오늘날 그렇게 처참한 전란의 고통을 겪고서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함의 자손들처럼 인간 지혜로 황금 만능의 바벨탑을 쌓으려 하니, 바로 이것이 오늘의 문제란 것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도 앞을 내다보는 형안(炯眼)이 열리지 않은 민족은 어리석은 민족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모습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 사회가 물질 만능의 사회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이 생활을 윤택케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지난날의 고난의 의미를 잊게 하고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게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파괴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모 방송국에서 취재한 보도 중 우리 나라에서 상류 사회 계층에 들려면 도대체 얼마를 가져야 하는가? 라는 말에서 100억을 가졌어도 상류층에 들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놀랜 적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봉급생활자들에게는 평생을 벌어도 몇 천만원, 아니 몇억에 불과할 현실인데, 어떻게들 그렇게 많은 돈을 갖게 되었을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노력의 댓 가 라기보다는 땅값 오르고, 집 값 오른 데서 얻어진 결과들이 아니겠는가? 싶었습니다. 땅을 사 두었더니 몇10배, 몇100배 올라서 일약 재벌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벌었으면, 사회를 위하여 존경받는 일들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높아진 황금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을 경고하는 바입니다.
처음 예루살렘 성지를 갔었을 때 제일 감명 깊었던 것은 유대인의 나치 학살 장면을 잘 재현시켜 보존한 역사 박물관이었습니다. 마지막 나오는 창구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는가 하면,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는다”라는 문구였습니다. 그 문구를 보면서 과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인식이 이러하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과거의 부정과 비극을 쉽게 잊는 민족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부정을 저지른 그 사람들을 또 국회로 보내고, 또 보내고 그러합니다. 그러니 반복의 역사만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시온은 영적으로 모든 영혼의 그리움의 본향입니다.
시온은 죄로 포로 된 영혼들에게 한없는 향수를 달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시온을 기억하고 있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비록 현실의 자리가 눈물에 자리라 해도, 시온을 기억하며 우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시편 84:5절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시온을 기억하며, 그 마음에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대로가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저들의 현실이 지금 눈물을 흘리는 곳이라 해도, 그곳이 많은 샘물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소망의 예언입니다.
드디어 70년만에 바벨론의 손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 민족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이 시편 기자의 기도대로 응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민족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조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