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0하

주님은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시사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주셨고 오늘도 새롭게 직분을 맡기시려고 하십니다.(딤전 1:12)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로 얼마나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까? 사람은 그 사람의 하는 일에 따라 평가 기준이 다릅니다. 연예인에게는 끼, 예술가에게는 혼, 운동선수에게는 스포츠맨 쉽, 경영인에게는 실적, 그리고 군인에게는 충성이 평가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일군인 우리 성도들에게는 어떤 것이 최고의 평가 기준입니까?
오직 충성입니다.
성경에 좋은 단어가 많습니다. 사랑, 용서, 은혜...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평가하는 데에는 오직 충성만이 제일입니다.

왜 충성입니까?
일군이란 말은 원래 하급 노예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노예는 자유도, 권리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인의 명령을 따라 충성할 뿐입니다.
충성은 곧 생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인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왜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비밀입니까?
오직 믿는 자에게만 알아지므로 비밀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제시된다는 의미에서 공개된 비밀입니다.
“맡았다”는 것은 중간 관리자로 어느 정도 권한도 있고 책임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급 노예인 일군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분을 맡은 자에게 구하는 것은 오직 충성뿐입니다.(고전 4:2)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지시한대로 어김없이 이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 앞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진실, 전심, 전력 같은 말입니다.
충성앞에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는 눈치껏, 입으로만, 이익을 위해, 적당히, 대충 대충과 같은 말입니다.
“충성이니라”는 말은 수동태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충성은 자신이 판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충성했지만 스스로 충성 되다고 판단하지도 또한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남들이 칭찬해도 칭찬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비난해도 매우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오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 때에는 공의로운 심판이 있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까지도 하나님이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충성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충성’이라고 하면 흔히 큰일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돈을 벌면 헌금을 많이 해야지’. ‘나의 죽을 이 병이 나으면 몸 바쳐 충성해야지’.

그러나 충성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논개의 정절도, 정몽주의 충성도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양떼를 돌보는 이새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니라도 충성할 만한 7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어떤 형들보다 아버지 말씀에 충성하다가 마침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보디발의 집에서 작은 일에 충성해서 가정 총무가 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에는 전옥에게 충성하고 인정받아서 죄수들을 돌보았습니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디발에게도 전옥에게도 충성을 다했더니 마침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오늘 임직을 받으시는 여러분은 이완정목사님의 노예도 아니고 이룸교회 성도들의 종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인 이완정목사님께 충성하고 성도들을 잘 섬기면 천국의 즐거움에 참예하시는 영광과 축복을 받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눈가림으로 섬기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충성을 다하십시오.(골 3:22)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일을 많이 맡기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0)
어느 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21, 23)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는 임직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7)
장차 열 고을을 차지하시는 임직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충성은 조건과 환경을 불문해야 합니다.
따뜻한 봄날이나, 녹음방초가 무성한 여름에는 송죽의 절개를 모릅니다. 백설이 온누리를 덮을 때에라야 송죽의 절개가 나타납니다.
집이 가난해야 어진 아내를 알 수 있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진 충신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도 어려울 때 충성된 자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버가모교회를 향하여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2:13)

신자라고 다 성도가 아닙니다.
집사라고 다 일군이 아닙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처럼 죽임을 당할 일이 닥쳐오더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장로들이 되십시오.
추운 겨울눈을 맞으면서도 항상 푸른 나무로 서 있을 수 있는 안수집사가 되십시오.

교회 안에 비바람 불고 천둥번개 칠 때가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권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어려워질 때 도망가려면 오늘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아예 서약을 포기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충성은 죽기까지 해야 합니다.
잠시 충성은 누구나 합니다. 며칠의 충성도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남자라면 적어도 26개월은 국가에 충성해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시집살이만 제대로 하려도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 년, 소경처럼 삼 년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모세처럼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인 이룸교회 안에서 사환처럼 충성하시기 바랍니다.(히 3:2-5)
화형대에 오른 폴리갑은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준다는 집행인의 마지막 권유에 이렇게 대답하고 순교의 재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86년 간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단 말인가?"
죽도록(숨을 거두는 그 순간)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시는(계 2:10) 오늘의 임직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출처/박광현 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