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6:13-14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3, 14

오늘날 인간은 모두 무엇인가 준비하다가 결과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17에 보면 인간은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꿈을 꿀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준비하느라고 분주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주택을 갖기 위하여 돈을 모으고, 또는 학자가 되기 위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훌륭한 기술자가 되기 위하여 몇 십 년을 공부하다가 건강을 헤쳐서 의사로서 실험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또 법학을 공부한 학생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로 임명받을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가 교통사고로 쓰러진 일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땅에는 무엇인가 되어 보려고 준비하다가 결과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당시 노아가 만든 방주는 1만 6천 통의 어마어마한 배라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만한 배를 바다나 강, 호수에 띄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전혀 물이 없는 곳에 건립하라고 했습니다. 배를 짓고 있는 노아를 본 모든 사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노아에게 배를 준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가치있고 행복을 가져다 주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교회에 가는 발걸음을 비웃고 있습니다. 일주일내 벌어도 먹고 살기 바쁜데 왜 하루를 쉬느냐고 그들은 이해를 못 합니다. 누가복음 12:19 이하를 보면 어떤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소출이 풍성하여 70, 80대까지 먹고도 남을 만큼 곡간을 크게 지어 곡식을 많이 쌓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내가 오늘밤에 네 영혼을 부르리라’하시고 바로 그날 그 영혼을 불러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곡식을 준비하느라고 밤잠을 자지 않고 남들 놀 때 놀지 않고 남은 여생을 편히 보내려고 부지런히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준비는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이렇게 많이 준비해 놓았으니 이제는 먹고 마시고 좀 쉬어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제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하시면 그 영혼을 불러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준비가 가장 지혜롭고 완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 당시에 세상의 종말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의 죄악상을 보시고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멸망시키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그 예로 노아 홍수 때 모든 사람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시키는 구원의 역사가 있었고, 소돔 성을 멸망시킬 때도 불과 유황으로 재바다를 만들었지만 롯의 가정을 끌어냈으며,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여 구원해 냈지만 그때에 홍수에 수장된 애굽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에 정탐군이 갔을 때도 기생 라합이 정탐군들을 영접하여 그들에게 비밀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는데 라합의 가정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든지 멸망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멸망과 구원은 항상 공존한다는 사실이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을 때도 율법대로 행하지 않으며 여지없이 멸했으나 율법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과 구원이 따랐습니다.

노아 시대와 같이 지금의 상황도 마지막 때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계시록이 연구되고 말세의 위기 의식을 불어넣는다 해도 개개인의 심령들이 이런 마지막 심판의 때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 시대에 노아의 때와 같은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깜깜한 밤중에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울 거리를 내려다 보노라면, 수많은 빨간 십자가의 네온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죽음을 의미해 주고 있는 빨간 십자가를 보면서도 전혀 심판의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십자가의 군(群)들을 보고 욕을 합니다.

교회는 우리 시대에 닥쳐올 심판을 피할 방주입니다. 스스로가 이 방주를 준비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방주를 지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는 자 개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혼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15, 16 이하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는 말씀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하나님의 자녀끼리 결합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네피림이 태어났습니다. 네피림은 신명기 1:28, 2:10에 ‘장대하다’,‘거인이다’라고 표현되었고 ‘폭군’,‘도둑놈’의 뜻도 있습니다. 이 네피림을 창세기 6:4에는 이름난 장사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의 죄 속에 빠져 있습니다. 죄와 타협해서 얻은 명예와 치부 때문에 진리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가고 있어도 외면해 버립니다. 네피림처럼 교회의 부정이 낳은 ‘치부’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 거대한 교회의 제도화된 세력 앞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진리보다도 전통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복음보다도 교단의 권위가 앞서게 되었습니다. 내용보다 형식이 우선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제도화된 조직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진리를 고수하기 위한 고통을 버리고 무사안일한 세속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변명하고 합리화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때에 방주를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해 가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에 불이익이 주어지고 성도의 생활에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현실의 이익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와 물량주의 속에 빠져 버린 교회를 구출해야 할 책임이 이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3. 당신의 죄악상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26, 27에 예수님이 인자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고 그 속에 들어가기까지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때나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살아갑니다. 남녀가 결합을 해야지 가정이 이루어지는데 왜 성경에서 노아의 때만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이나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육적인 것이므로 영에 대한 고민 없이, 어떤 영적인 준비없이 육적인 향락만을 좇는 것을 말합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향락에 도취한 것을 말하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결혼 적령기가 되어 부모의 승낙을 받아 결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멋대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안 되었거나 결혼식도 안 올리고 자기네들끼리 좋아 사는 예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5에서 그때의 죄악상을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짓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우발적으로 저지른 죄가 있게 마련인데, 오늘날의 범죄는 아주 계획적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정말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것 같습니다. 노아 시대의 음란과 오늘날의 음란을 비교한다면 그 당시는 죄를 지으면 스스로 느낄 수 있었으나, 오늘날은 죄를 짓고도 양심이 마비되어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음란으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TV뉴스에서 허가 없이 사우나 영업을 하는 업소를 찾아 내어 정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러한 업소들이 생겨서 소시민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노아의 때와 같이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앙상에도 종교라는 탈을 쓰고 음란 행위를 감쪽같이 하고 있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씨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가문의 씨가 끊어졌을 때 다른 방법을 취했던 수치스런 장면이 성경에 몇 군데 있습니다. 이들은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하여 자기들의 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금전을 거둬 들여서 호화판 생활을 한다거나 몇 해 전 미국에서의 집단 자살 행위 등은 말세의 현상입니다.

4. 방주는 피난처, 보호처로서 살 곳을 말합니다.

홍수를 피하고 죽음을 피하고 환난을 피하는 것이 방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6:6을 보면,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한탄하고 계십니다. 한국 교회를 보고 한탄하시고, 목회자들을 보고 한탄하시고,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을 보고 한탄하시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한탄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몇 십 년씩 교회에 다녔다는 많은 신자들이 예배나 성경 공부는 고사하고 들로 산으로 놀러가서 술 마시며 음란한 처소에 있을 줄 압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 물들어서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늘의 면류관보다 이 땅에서 어떤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 우리의 현실을 영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한탄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가장 모범되고 표본이 될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7에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1:18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를 보고 가까이 가셨는데, 그 나무는 잎사귀만 있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무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시니 그 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 현대 교회는 잎사귀만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외모한 보고 다니지 말고 열매 있는 신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교인이 되어야 되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36 이하에 보면, 농부가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나와서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힐까봐 추수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가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불에 던지고 알곡은 곡간에 넣으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 놓으실 때가 우리 앞에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주를 준비해야 합니다. 방주는 생명의 보호처입니다. 노아는 남들이 뭐라고 조롱하든 아랑곳없이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는 세상이 멸망될 때 구원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옆에 교육관이 건축되어 있습니다. 그 교육관을 처음 시작할 때 노아의 때 만큼이나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 지식을 전달하는 수백 개의 교육기관보다, 수십 개의 병원보다  몇 개의 경찰서, 교도소, 구치소보다 정말 인간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교회 하나가 먼저 세워지는 것이 급선무인 줄 믿습니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에 이제 막 자라나는 선량한 학생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잘 양육시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교회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교육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방주는 성전을 뜻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말 교회는 구원의 역사, 속죄의 은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배를 삼층으로 짓고 , 위로 창을 내고 옆으로 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 문은 영생의 문, 구원의 문이며 속죄의 문, 축복의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문을 내라고 하셨겠습니까? 저는 방주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받아 주라는 뜻으로 믿어집니다. 교회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자만 모이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의 문이 활짝 열려서 누구나 올 수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구원의 문, 은혜의 문이 활짝 열린 이 때에 여러분 모두 구원의 방주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김충기목사 설교 자료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