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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22-27
설교내용 요시카 피셔라는 사람이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다녀갔습니다. 세계적인 명사가 된 이 사람은 현재 독일의 외무장관이면서 부총리입니다. 35살에 연방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을 해서 관직을 두루 거친 관운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키가 181㎝이고 몸무게가 75㎏의 아주 미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관직에 있는 동안에 체중이 자꾸 불어서 112㎏까지 몸무게가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의 삶에 중대한 도전이 왔습니다. 제일 큰 시련은 부인이 뚱보 남자가 싫다면서 이혼을 청해온 것입니다. 서양은 우리와 문화가 달라서 그런 이유도 이혼이 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이혼을 당했습니다. 생활의 리듬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게 다 무너지고 의욕상실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오기가 났습니다. 내가 살을 빼리라 결심하고는 그날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체중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람이 우리나라를 공식적으로 방문한 손님인데도 역시 남산을 달리는 그런 스케줄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은 오늘도 달리고 있습니다. 이 분이 쓴 「나는 달린다」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한 구절 나옵니다. “내 몸을 내가 조정하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큰일을 하겠는가?” 내가 내 몸을 다스리지 못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경주자세
오늘 성경본문에 사도바울은 인생을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경주자라고 적용했습니다. 인생을 운동경기에 비유한 것은 아주 합당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한 경주자로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 교훈은 매우 유익합니다. 자기 자신이 경주자로서 인생을 달려가는 그 비법을 우리 앞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바울의 경주의 비법을 배워서 우승하는 인생경주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경주에 보면 특히 세 가지 방법이 우리에게 강조가 됩니다.
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달음질하는 사람들은 향방이 있어야 됩니다. 이 향방은 목표를 말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야 됩니다. 목적과 목표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목적을 잘 인식을 하면서도 목표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추석에 고향방문을 하는 것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고향에 갑니까? 부모님을 뵙고 인사도 드리고, 고향에 성묘도 하고, 일가친척을 만나서 교제도 하는 이런 목적으로 고향에 갑니다. 그러나 목표를 세우고 가야 됩니다. 몇 일, 몇 시에 출발할 것을 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하고, 돌아오는 날도 정하고 차가 얼마나 밀릴 지를 예상해야 되는 등 전부 목표를 정해야 됩니다. 목표는 구체적입니다.
그런데 인생경주가 목표 없는 인생경주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표는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인생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두 가지 목표는 세워놓고 사는 게 좋겠습니다. 첫째는 나이가 얼마나 되시든지 여러분이 앞으로 ‘10년 후의 내 모습이 어떨까?’라는 목표를 세우십시오. 저는 10년 후에는 목회를 은퇴해야 합니다. 저는 성전건축에도 내 나름대로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10년 후에 내가 어떤 모습일까를 지금부터 목표를 세우십시오. 머뭇머뭇하면 10년 갑니다. 30대든 40대든 50대든 10년 후에 후회 없는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지금 뛰어가야 됩니다.
목표 있는 경주
수년 전에 제 친구가 장로장립을 받을 때 축전을 하나 쳐 주었습니다. 전화로 감사인사가 왔습니다. 교회를 지키는 친구가 하도 기특하고 고마워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장로임직을 받고 네가 10년 후에 어떤 장로가 되어 있을지 지금부터 목표를 세워라. 그리고 10년 후에 네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장로로서 서고 그 지점에서 후배들에게 네 자리를 물려줘라. 10년만 해도 충성할 시간은 충분하다. 멋지게 10년만 훌륭한 장로로서 마라톤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 지금 6년째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경주 가운데 10년이라는 경주가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도 아직 목회를 다 마치지는 않았지만 10년 단위로 보면 제게 큰 변화들이 다가 왔습니다. 내가 10년 후에 어떤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인가 하는 목표를 미리 설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학문적인 용어로는 ‘골 셋팅’이라고 합니다. 이 골 셋팅에 가장 놓치기 쉬운 게 덕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10년 동안에 내가 저축을 많이 하는게 성공적인 인생이 아니라 덕을 쌓아 가야 됩니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 재산이 없습니다. 10년 목표 안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뭇 사람들 앞에 덕이 없다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잘 먹고 잘 살아도 성공적인 인생이 아닙니다. 목표 안에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목표가 함께 있어야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성도 한 분이 조그마한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시련을 맞았습니다. 사업에 실패도 오고 자기도 다리를 아주 심하게 다쳤는데 콘크리트 절단하는 톱날에 뼈를 상해서 아주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기적적으로 뼈 봉합수술이 성공을 하고 다시 살아났는데 이 사람이 그런 절망적인 고비를 만나면서 병상 속에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자기를 돌아보았답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됐는가? 내 인생에 무엇이 지금 부족한가? 만약 하나님이 나를 살려준다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하며 목표를 정했습니다. ‘하나님, 내 건강을 회복시켜주고 내가 이전처럼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 보겠습니다’ 하고 목표를 하나님 앞에 세운 것입니다. 그동안에 반생을 살아오면서 그래도 남에게 꾸이지 않고 그런데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 삶의 결정적인 실수는 그동안에 한 가지도 남들에게 베푼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성하고는 ‘하나님, 내게 다시 일할 기회를 주시면 이제는 남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남을 섬기면서 살아보겠습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이 사람이 제기를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고 그 분야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는 사업을 하고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힘들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다고 소개를 합니다.
경주자는 목표가 중요합니다. 제가 말하는 10년 후 목표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5년 후가 더 구체적이 될 수 있지만, 인생살이에 한 평생을 단위로 볼 때 10년 단위로 작은 봉우리를 설정하는게 필요합니다. 다음에 제가 하나 더 소개하는 것은 죽을 때를 위해서 목표를 설정하십시오. 내가 주님 앞에 서는 그때 내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되어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 내 인생은 이런 인생으로 생을 마쳐야 되지 않느냐?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죽을 날이 너무 멀다’가 아닙니다. 아무리 멀어도 여러분이 숨을 거두어 아무개가 죽었다는 부고소식이 전해지는 그 순간에 내가 죽었다는 그 말을 듣는 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이 일어날 것인가? 거기에 목표를 맞추고 사셔야 됩니다. 함부로 살면 안됩니다.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한다”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의 결점은 now hwo가 아니라 now why다, 너무 몰두하고 발전하고 있는데 now why가 없다.” 즉, 열심히 일하고 돈 버는 방법도 알고 잘 하는데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아테네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비해서 철저한 목표를 세웁니다. 지금 태릉선수촌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금메달을 목표로 이미 훈련에 들어간 선수가 여러 명이 있습니다. 목표는 경주자에게 중요합니다. 인생 경주자는 그저 흘러가듯이 살면 안됩니다. 목표를 설정해야 됩니다. 1년 목표, 5년 목표는 작은 봉우리지만 그래도 한 번씩 맥을 짚고 정비를 하려면 10년 목표 안에서 해야 됩니다.
가치관이 있는 경주
두 번째, 바울이 2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 여기에 허공을 친다는 말의 의미는 의욕상실, 허무주의, 무관심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자세문제입니다. 맥아더가 아들을 위한 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문이 유명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헛된 생을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사람이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고 하나님이 부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써야 됩니다. 하나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 가지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자존감입니다. 우리의 존재가치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낳아서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한없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편에서 자존감의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두셨다는 것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걸 붙잡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나를 이 땅에 두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명 앞에 우리 자신이 헌신을 해야 됩니다. 그 사명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책임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다룹니다. 나는 내 가치를 인식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예수의 피로 사신 소중한 존재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맡겨주시고는 그 사명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주께서 인내하시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속에 그것을 해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사명을 회피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말 값지게 남은 때를 살아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우리의 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헛되이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훈련 있는 경주
셋째로, 가장 주목할 교훈이 있는데 27절에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했습니다. 경주자는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됩니다.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훈련의 뜻입니다만, 이 말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면 헬라어로 보아야 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이 말이 헬라어로 ‘둘라고고’라는 말입니다. 둘라고고는 두 단어가 합해진 것입니다. 앞의 단어는 ‘둘로스’ 종, 노예라는 말입니다. ‘고’는 아고르라는 단어입니다. 둘로스와 아고르가 합해지면서 ‘둘라고고’ 이렇게 변형을 합니다. 그러면 ‘아고르’라는 이 말은 이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노예를 이끈다, 즉, 노예를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소를 고삐를 채워서 말 안 듣는 소를 길들이는 작업을 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 이 말은 내가 내 몸을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영적으로 적용해 보면 신앙생활은 길들여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해서 제일 먼저 했던 행사가 40일 새벽기도운동입니다. 그때 한 분이 제게 농담처럼 이야기 하였습니다. “목사님, 제가 3일간 새벽기도를 했는데 머리가 띵하고 직장에 가면 졸음도 오고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광고는 그렇게 하시는데 안 나갈 수는 없고 3일째 나가는데 아주 힘듭니다.” “우리는 평생하고 있습니다.” 하니까 어떻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떻게 하긴요, 새벽기도 하니까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찍 일어나는 사람과 늦게 일어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합니까? 단연코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제가 스포츠의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단언을 합니다. 1년간만 길을 들여 보십시오. 우리 몸도 길들여진데로 갑니다. 새벽기도는 창세전부터 사명 받고 난 사람만 하는게 아닙니다.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육체가 길들여졌습니다.
우리 교회 임옥자 권사님이 새벽기도를 오시는 것을 보면 놀라운 은사입니다. 그게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자기 자리를 지키며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 훈련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길들여진 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길들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글에 바이오리듬이 우리 육체에 적응하는게 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무슨 기계를 사서 바이오 치료를 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3년간 길들여야 우리 몸에 적응이 된다고 합니다. 몸뿐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길들이기 나름입니다. 마음도 쳐서 복종시켜야 됩니다. 우리가 엄밀히 보면 하나님 앞에 버릇없는 마음, 버릇없는 육체를 굴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쓰시는 몸으로 우리가 길들여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일 시합을 앞둔 선수가 음주하고 오락하고 잠도 안 자고 올 라이트 하고서야 무슨 시합에 가서 성공을 하겠습니까?
상 얻는 경주
여러분은 이번 아테네올림픽에서 어느 경기가 제일 감동적이었습니까? 우리 각자가 느끼는 바가 다 다르겠지만 솔직하게 제가 아주 가슴이 찡하면서 왈칵 눈물이 눈에 맺힌 것을 느꼈습니다. 그 경기는 일본 여자마라톤 선수가 우승을 했는데 그 더운 날씨에 전력을 다해서 뛰고 우승테잎을 끊고는 그만 토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는 운동장 옆에 가서 막 토하는 그 장면을 보고 ‘아, 저렇구나! 힘을 다해서 뛰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힘을 다하는 모습으로 서야 됩니다. 힘을 남겨놓고 안됩니다. 우리나라 유도선수 가운데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재엽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가 LA올림픽에서는 결승전에서 일본선수한테 힘도 못쓰고 초반에 누르기 한판에 져 버렸습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힘이 펄펄 남아 있습니다. 경기가 끝났으면 힘이 소진되어야 그 사람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려면 슬쩍슬쩍 뛰어서 안됩니다. 전력을 다해 뛰어야 합니다. 힘을 남겨놓고 하늘나라 가면 안됩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6절에 “내가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관제는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한 방울 물까지 태워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가 관제입니다. 선수는 경기할 때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히딩크의 전술은 한 게임이 끝났을 때 힘이 남아 있는 선수는 그 다음에 출전을 안 시키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쓰러지더라도 전력을 다해서 뛰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의 경주의 메시지를 들을 때 진정으로 인생의 골 셋팅을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진정 믿음 안에서 목표를 건전하게 세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표를 따라 우리의 육신이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주님의 영광도, 덕도 쌓아가는 목표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허공을 치듯이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준 사명을 이루어드려야 됩니다. 그리고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우리라는 이 도구가 하나님 쓰시기에 알맞도록 쳐서 길들여져야 됩니다. 거기에서 상을 받는 아름다운 경주가 가능한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이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우리가 이 시대에 믿음의 경주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각자가 우승자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우승자는 하나뿐입니다.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내 인생에 실패자가 되는 것을 극복하기 바랍니다. 내게 주시고자 하는 우승의 면류관이 하나님 편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달려가는 요시카 피셔 장관처럼 오늘도 그도 달리듯이, 우리도 주 안에서 잘 달리는 경주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