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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교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회사)
서론 : 역사에서 본 ''위기''와 ''변혁''의 관계
"청컨대 너는 옛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 지어다. ...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 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 하겠느냐.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1)
현실이 암울할 때 역사에 대한 관심은 성하고 역사는 상세히 기술된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위기에서 이사야는 웅장한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상술하였고2), 창세기 기자는 창세의 역사를 정연히 정리하였다. 한국사의 근대적 사관과 입론(立論)은 대개, 외침(外侵)의 위기 속에서, 천재적 역사예언자들에 의해 형성, 발휘되었다.3)
전문적인 시야가 아니더라도 역사 안에 전개되는 ''역설적 반전''은 쉽게 포착된다. 종국으로 간주되는 폐허나 위기에 내재하는 새로운 변혁의 역동은, 위기의 때때에 역사를 돌아보게 하고 거기에서 배우며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이치는 곧, 역사의 영광 뒤에나, 역사의 새로운 전개 배후에는 고난이나 위기 같은 것이 필시 위치해 있다는, 역사적 경험의 진술인 것이다.
교회사의 큰 줄거리만 가지고 전제해 보아도 그렇다. 구약의 역사나 메시아의 영광과 부침의 과정은 성서의 범주라고 차지하더라도, 바울의 초대교회 행로, 유대와 로마의 기독교 박해, 이단의 발호와 확산, 교회내의 갈등과 자괴가 다 위기였다면, 그것은 새로운 변혁의 기회가 또 다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중세의 전개가 기독교 또 하나의 위기를 창출하고, 돌이킬 수 없는 기회의 상실로 보여 졌다면, 그 위기 안에는 역시 ''종교개혁''의 새로운 기회와 제2차 ''세계 미션''의 장이 잉태되었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위기나, 상황 악화나, 종말 정황과 같은 과정 없이 찾아 온 변혁이나 새로운 전개는 역사 안에 절대로 없었고, 그러한 위기의 극한에서 희망을 논의하는 일도 결코 부질없는 일이 아님을 제시한다. 이러한 경향에서 절대 한국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며, 그 또 다른 예증으로 뚜렷이 자리하는 것이 확실하다. 이에 한국기독교의 희망과 과제에 대한 담론을, 그 역사적 이해로부터 풀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정당한 근거를 확보한다고 믿는다.
1. 한국기독교 역사의 첫째 위기: ''반민족''의 혐의
"위로는 출중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어 자칫 불행한 일이 있으면,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져 내릴 것이 정녕입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전함 수백 척과 정병 5, 6만을 내어 대포 등 강력한 무기를 다량 싣고, 또한 글 잘하고 조리 있는 중국 선비 서너 명을 함께 하여 이 나라 해변에 당도,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우리는 서양의 선교하는 배요, 사람이나 재물로 인해 온 것이 아닙니다. 교황의 명을 받들어 이 지역의 영혼을 구원하려 하는 것입니다. 귀국이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쾌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요, 한 발의 탄환이나 한 대의 화실도 쓰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상치 않을 것이며, 우호조약만 체결한 뒤 북치고 춤추며 돌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주가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할 것인즉 우리는 죽어도 발길을 되돌리지 않을 것입니다.''"4)
이는 저 유명한 천주교 수용자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을 추국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그 백서의 한 주요 내용이다. 여러 가지 단서와 해석은 감안해 보아야 하겠지만, 카톨릭의 전파와 선교실현을 위해서, 한국 조정과 국권에 대한 위해도 불사할 수 있다는 사상임에는 분명하다. 이 백서사건은 한국 전통사회로 하여금 기독교 배척과 금기의 빌미를 가중시키는 일이 되었다. 추국과정에서의 황사영을 보면 나름대로의 논리는 지녔을지 모르나, 전통적 개념이던, 현대적 의미로의 치환이던 관계없이 적어도 기독교의 ''반민족'' 혐의를 제기 할만한 요소를 함축하였음은 여실하다.
"질문-청에서 오는 큰배는 어디에 쓰고자 하였는고?
대답-그 배는 중국에서처럼 큰 성당을 건설하여 서학을 진흥시키고자 함입니다.
질문-큰 배 수백 척과 정병 5, 6만을 청하여 온다함은 무슨 뜻인고?
대답-대포를 장전하여 조정이 겁을 먹고 서학을 금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부리려 한 것뿐입니다.
질문-그대는 수백 척의 전함과 수만 명의 군사를 청해 오더라도 백성과 국가에 피해가 없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그대도 이 나라 백성인데, 어찌 차마 이런 수치스러운 생각을 하였는고?
대답-소인은 그런 것은 잘 모르고, 단지 서학을 국내에서 자유로이 전파할 수 있도록 하는 생각뿐인 즉, 그 이외의 것은 더 아뢸 말씀이 없나이다. 관대한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5)
수용기 한국 카톨릭의 주류 사상은, 세계교회에 함께 편재하고, 공유, 공동하는 입장이 강했다. 강고한 박해에 직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에 수용된 카톨릭의 신학적 경향성 자체가 근본주의적 교회론에 교황 중심성을 지녔고, 각 민족이나 문화단위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충분한 가치를 인정치 않는 입장이었다. 이는 ''예수회''에 대한 이른바 ''전례논쟁'' 이후 그것과 상대되는 새로운 신학에 의한 동양선교 시기와 한국 카톨릭 수용이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던 것도 그 한 이유였다. 물론 한국 카톨릭 수용자 중에도, ''상재상서''(上宰相書)의 정하상(丁夏祥)에게서 나타나는 적응방식의 수용신학도 있었으나, 역시 주류는 황사영과 같은 ''울트라몬타니즘''(Ultramontanism)이었다. 영락없이 한국 카톨릭은 ''반민족''이었다.
이상의 한국 카톨릭이 지닌 유산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한국 수용에 있어서 중대한 선입견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구교의 차별이 명료치 않던 당시 한국의 조야나 민심은 서양종교인 기독교는 ''탈민족'', 혹은 ''반민족''일 것이라는 정서가, 더구나 나라의 정세가 위태롭던 조선후기, 팽배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이에 불행하게도 한국 프로테스탄트가 한국 선교의 ''제일성''으로 설정하였던 표어가, "우리는 카톨릭과 다르다"라는 것이었다.6) 이는 황준헌(黃遵憲)의 이른바 [朝鮮策略]에서 정리되는데, 그 다른 점은 첫째,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순수 종교적 도(道)라는 것이며, 둘째, ''반민족''하지 않고 오히려 민족적 목표나 이상에 동류(同流)할 것이라는 내재가 함축되어 있는 표현이었다.7) 결국, 비정치적이며, 친민족적인 진로의 가능성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배타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논리였다. 이는 대개 초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나, 그 신앙수용자들에게서 실천되었다. 특히 한국 초기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들에게서는, 비정치적일 것이라는 ''정교분리''는 설득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황사형 류의 반민족이나, ''세계주의''의 푯말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지닌 가장 흥미 있는 양상의 하나는 애국심이다. 우리의 연안선은 어느 주일 아침 늦게 북쪽 땅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강 언덕 마을로 이씨는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였다. 대나무 끝에서 조그마한 한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 깃발들은 기독교인들의 집이나 교회 위에 휘날리고 있었다. 주일날이면 그들의 집이나 교회 위에 국기를 단다는 것은 선교사들이 아무런 지식도 없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실천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날의 성격을 표명하고 그들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8)
프로테스탄트 선교와 수용에 이르러 한국기독교가 치르어야 할 첫 번째 위기는 대개 극복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인, 혹은 그 공동체는 한국 민족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때 ''반민족''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개신교 선교 개척자들과 특히 한국인 수용자들의 실천적 진로에 의해서 불식되어 나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결과가 단순히 선교자나 수용자의 신학, 이념, 의식의 변화에 의한 측면만이 아니라 수용기의 시대적 정황이 지닌 환경요인이다. 즉 나라에 대한 총체적 외세 위기, 특히 일제 침략의 과정은 한국 프로테스탄트 수용자들로 하여금 민족문제를 주제로 한 선교적 과제를 지니게 했다. 민족위기에 응답하지 못하는 그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도 민족구성원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록 외래 수용종교인 기독교 역시 민족과 진로를 함께 하는 방도 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국 선교 상황이 일본에 의한 침략, 서구에 의한 기독교 수용이라는, 이른바 ''이원구조''는 기독교 수용자들로 하여금 민족문제에 더욱 적극적일 수 있는 구도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반민족 혐의''의 극복과 더욱 적극적으로는, ''민족교회'' 형성과정이 자연스럽게, 혹은 자동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우선 첫째, 기독교 자체가 지닌 외래적 이미지는 널리 확산되어 있었고, 특히 한국 민족공동체 내부의 독자적, 자존적 정체성이 강력한 보수 그룹일수록 그것을 경계하고 혐오하는 지수가 높았다.9) 둘째,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실제로 주도하고 앞서 추진한 미국의 복음주의계 선교사들의 기본적 입장이 기독교의, ''비민족화'', ''비정치화'', ''비이데올로기화''를 원칙으로 내세운 점이다. 이를 당시 한국 상황에 적용시켜보면, 민족 주권의 존립문제나 정치적 환경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 반대, 제한, 만류하는 입장을 시행한 점이다. 어쩌면 이는 한국기독교 수용자들이 주도한 ''민족교회'' 형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교회일과 나라일은 같은 일 아니라 또 우리가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일 보는 회가 아니요 또한 나라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요"10)
물론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은 카톨릭과 차별하여 프로테스탄트의 특성을 선전하는 한 요소로 활용되었던 것도 사실이고 일정부분 실효가 있었음도 자명하다. 그러나 민족 문제가 선교적 과제의 첨두에 섰을 때 이와 같은 입장은 기독교의 ''반민족'' 혐의를 가중시키는 다른 요소로 작용할 소지가 컸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1907년의 대부흥운동 등도 한국교회의 성숙이나 내면화 과정으로서의 적극적 의미를 말하면서도 민족과의 일정한 거리를 형성하는 ''비민족화''의 수순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사실 이대로 그 외형적 형식에 함몰되었을 때 한국교회는 민족의 문제와는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유리된 채, 그 존재양식을 구축하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3.1운동에 이르러서 반민족의 혐의를 완전히 벗고 그 내재 안에 민족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재편하였다. 이를 여러 가지 역사적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민족문제 외면이라는, 당시로서는 가장 반민족적 형식에 강력히 연계될 수 있는 위기의 극에서 민족 최대의, 민족적 사건의 주역의 하나가 됨으로써 큰 위기를 넘어섰다. 3.1운동과 기독교의 관계는 여러 단계, 측면, 형식으로 논의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운동 결과의 ''희생양''으로서 기독교회나 기독교인이 차지한 역할은 어떤 면면보다도, ''민족수난''과 ''교회수난''의 돈독한 유대를 형성하여, 상호공속(相互共屬)하는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그 증언으로서 일본측의 한 기록을 예로 들어 보자.
"지난봄부터 한국인 가운데 사상된 이가 1천명 이상에 달하고 한국인 교회 가운데 파괴, 소실된 교회당도 9개에 달하며 그 손해액이 약 3만 여원이라고 하니 한국인 교인들의 고통을 참으로 동정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와 같은 사정을 알고도 수수방관할 일이 아니기에 금번 약 1만원을 모금하여 피해교회의 재건자금으로 제공함으로써 그들에게 동정을 표하고, 우리 서로의 이해를 가져 서로 돕는 바탕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에 각 교회 유지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좋은 뜻에 동참하시어 7월 20일을 기해 기부금을 작정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11)
기록의 특성상 사안의 왜곡이나 일정한 의도를 읽을 수도 있고, 이 기록만으로 3.1운동 당시 한국교회가 당한 피해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일본기독교회의 한국인식이나, 한국교회 인식에서의 가장 정직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피해와 수난에 대한 동정의 단면만을 통해서도 한국민족과 한국교회의 일체성을 헤아려 내기는 어렵지 않다. 이로써 한국기독교는 초기의 ''반민족'' 혐의를 벗어나는 클라이맥스에 당도해 있었다.
2. 한국기독교 역사의 둘째 위기 : ''역사성''의 상실
"名譽의 史를 가진 朝鮮敎會의 前途는 悲觀밖에 없는 줄 아오."12)
민족적 문제의 여러 과제 앞에서 성실을 다 하던 한국교회, 단지 나라의 독립이나 정치적 관심에서 뿐만 아니라 ''개화''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첨단으로서 민족공동체의 진보나 향상에 있어 선구적 리더십을 발휘하던 한국기독교가, 이른바 영적 관심, 이른바 ''종교성''에 철저히 탐닉하여 세속과 피안을 구별하기 시작할 때,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여 보는 경향이 팽배해 질 때, 이광수 같은 인물은 이를 큰 위기로 단정하였다. 그의 진단은 곧 한국기독교의 역사성 상실의 문제를 주로 제기한 것이고, 이를 신학적으로 규정하면, ''성육신적 참여 신학'' 부재13) 측면을 힐책하는 것이었다.
"元來 하나님의 일과 世上 일의 區別이 있을 리 없을 것이오. 人類에 福利를 주는 事業은 다 ''하나님의 일''일 것이다. 牧師, 傳道師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諸般 하나님의 일을 各各 分擔하는 것이니 牧師, 傳道師도 其實은 하나님의 일의 一部를 擔任함이요, 商工業者나 學者나 技術家도 다 一部를 擔當함이외다. 吾人은 결코 日曜日에 會堂에 가서 讚頌하고 祈禱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奉事함이 아니라 他六日間에 人類의 福利를 위하야 하는 事業이 온통 하나님께 奉事하는 것이외다. 차라리 六日間 奉事하다가 日曜日에는 安息한다 함이 至當할 것이외다. 農商工業의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리까."14)
민족교회 참여의 ''클라이맥스''로 명명한 3.1운동이 1919년의 일이기는 해도, 이미,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한국교회 안에는 ''몰 역사적''인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측면이 한국기독교의 ''종교성''을 함양시키는 데는 일정한 기여를 하였으나, 민족사회 안에서 실천적 리더십을 유지하여 나가고, 지속적인 선교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취약점을 드러내기 십상이었다. ''근대성''의 ''담보''라는 한 측면만 놓고 보아도 이미 한국기독교는 첨단에서, 낙후의 영역으로 퇴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하늘과 땅, 하나님의 일과 세속의 일이 구분되었고, ''성일''(聖日)과 ''속일''(俗日)도 시간적 경계를 나누어야 했다. 앞서 이광수의 비판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지적과 충고였다. 이는 그대로 1920년대 한국 민족사회의 새로운 리더십이 되기를 갈망하고 새로운 민족적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반기독교'' 내지는 ''기독교 비판''의 빌미로 또한 작용하였다. 한국기독교회의 일정한 ''몰현세적'' 측면 강화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단순한 ''종교적 허무''로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일제 침략정책의 강고한 진행 하에서 ''현실유기''적인 무책임, 혹은 암묵적인 침략세력에 대한 동조로도 폄하되고 있었다. 이들이 1920년대 들어 기독교를 향하여 공박하기로 한 논조의 표어만 보아도, 그 강도를 알 수 있다. "기독교는 미신이다", "양이랑심(羊而狼心)의 기독교", "현하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 "악마의 기독교" 등이다.15)
민족구성원 내에서, 특히 민족현실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사회운동과 역사적 책무에 관심을 기울이는 세력들 중에서, 이 무렵, 3.1운동 이후가 되면, 한국기독교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거는 목소리의 흔적은 찾기 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탄과 원성의 대상이었다. 한국교회 자체도 실제로 현실적인 결과에서, 목적달성에 실패한 3.1운동 이후 그 주도자로서의 탄압과 폐해를 정도 이상으로 감당하고, 신앙적 시험과 역사적 좌절의 늪에 빠져있는 실정에서 현실의 어느 한편도 기대고 돌아 볼 곳이 없었다. 이는 또한 교회로 하여금 더욱 내세나 피안, 신비적 경험의 ''몰역사''속으로 침잠하고 싶어 하는 촉매가 되었다. 교회 스스로도 이를 위기로 진단하였다. 당시 감리교 지도자 양주삼(梁柱三) 목사도 이 위기를 부인하지 않았다.
"교회는 지금 한국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민족 구성원의 대체적인 태도는 어제와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가히 충격이다."16)
그러나 이 위기의 때 한국기독교는 어디에서 나름의 에너지를 축척하고 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첫째, ''참여신앙''의 맥락에서는 지속적인 지탄의 대상 자체가 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익두의 부흥회, 길선주의 부흥집회, 그리고 이용도의 신앙운동 등이 오히려 수많은 민중 기독교인의 총체적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 신유치병의 체험, 말세구원의 체험, 신비영력의 체험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혹은 반역사참여적인 신앙체험 프로세스를 통해, 어두운 역사현실을 견딜 수 있는, 역사적 실존의 강인성을 부양받았을 개연성도 있다. 이들 가장 몰역사적 신앙유형들이 당시 정황 상으로는 가장 역사적인 존재양식이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역으로 제기해 볼 수 있는 측면이다.17)
둘째, 중국, 러시아, 일본, 미주지역에 한인들을 중심으로, 혹은 현지인들을 위한 해외 선교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는 교회사에서 자주 해석되는 역사적 ''위기''와 역설적인 ''선교''의 관계에도 부합되는 측면인데, 한국교회는 당시 어린교회로서, 특히 교회 안팎의 위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활발한 해외선교에 열의를 보인다. 이 또한 새로운 위기극복의 해석 가능성을 제시한다.18)
셋째, 자치 자립운동, 특히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확산을 보이며, 선교사로부터 신학과 교회의 제도를 독립시키고자 하는 ''교회독립''의 움직임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이 다수 당 시대의 구조적 역학 속에서 친일로 경사되거나 현실적 실효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좌절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히 김교신의 ''조선적 기독교''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반선교사하면서도 끝까지 반일하는'' 독자적 형태를 성취하는 경우도 발견된다.19)
그러나 이상의 위기 반대편의 변혁과 함께 1920년대 한국교회 ''몰역사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응한 기독교 세력은 YMCA와 각 교파의 농촌운동, 연합적 사회절제운동 세력 등이 보여준 새로운 형태의 ''참여신앙''이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다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1920-30년대 한국기독교 사회운동 세력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천적으로 응답한 전형적인 변혁적 대응 사례로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의 이론적 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옛 信者들은 한갓 自身의 罪만 痛悔하야 自己自身만 聖潔케 하기 위하야 人間社會와 絶緣하고 隱退生活로써 滿足타 하얏다. 今日 信者는 不然하니 一般社會로 하여금 光明하게, 汚染된 罪人으로 하여금 聖潔케 하야, 地上에 天國을 建設하기 前까지는 滿足치 아니 할지라."20)
3. 한국기독교 역사의 셋째 위기 : ''정체성''의 혼란
"각 信徒의 家庭마다 大魔를 封齋하고 皇道情神을 徹底히 할 것/ 國體本義에 基礎하여 忠君愛國의 情神과 敬神崇祖의 情神을 涵養할 것/ 我國의 淳風美俗을 尊重하고 質實强直한 氣風을 길러 堅忍持久의 鞏固한 意志를 鍊成할 것/ 信徒의 皇民鍊成의 實을 거두기 위하여 皇國 古典 및 國體의 本義에 關한 指導敎本을 編纂할 것/ 각 所에 鍊成會를 開催하고 敎師(牧師) 및 信徒의 鍊成에 努力하며 特히 皇國 文化의 硏究 指導를 圖謀할 것."21)
이른바 ''일본화''를 진행한 한국 장로교회의 교인교육을 위한 실천 조항인데, 과연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앙교육을 위한 지침인지, 이른바 일본의 황도정신과 군국일본의 충성된 신민을 길러 내기 위한 ''파시즘 교육''의 지침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이는 이미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완전 상실한 상태로 일제 말 한국기독교 위기의 단적인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戰時對應 敎役者 講習會를 別記와 如히 10月 28日부터 4日 間 第1回로 開催하고 第2回에 約100名을 또 하고, 第3回에는 女子 敎役者를 모으기로 함/ 各 敎區 代表者 扶餘 神宮 御造營 奉仕의 件/ 各 敎會堂 又는 附屬 空地를 該 部落, 邑, 面, 町에 提供하야 非常時局에 適應한 集會 及 避難所 又는 特別 作業場으로 使用케 하며 敎友들이 自進協力하고 便宜를 圖하도록 할 것/ 各 敎會 所有의 鐵門과 鐵柵 等을 獻納할 것/ 地方別로 冬季 聖書 講義會(査經會) 前後에 戰時 對應 講演 又는 座談會를 開催하되 地方 當局者와 잘 連絡하고 復興 講師 及 모든 順序는 미리 敎團 本部에 交涉하야 內諾을 得한 後에 實行할 것."22)
장로교는 물론 양대 교파의 하나인 감리교의 실천지침에도 정체성 혼미는 다름이 없다. 심지어 기독교 목사들이 일본 신사의 하나인 ''어조영'' 공사에 노력 동원이 될 정도로 이 정황의 기독교회가 나름의 신학, 신앙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위기였다. 당시 한국기독교의 위기를 더욱 단정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발견된다.
"1944년에 이르러서는 ''유태사상 배제'', ''순복음으로서의 교의 선포''를 표방하면서, 구약성서와 신약 묵시록의 사용 금지, 4복음서 중심만의 교리 선포를 지시하였던 것이다."23)
기독교회에 있어서 정경의 강독이 외압에 의해 금지되거나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찬미가 금지된다면, 이는 정체성의 혼란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박해상황으로 진단해야 할 만큼 그 위기는 급박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한국기독교회의 상황 속에서 또한 그 신앙적 순수성을 증거하고 있는 순교자의 무리와 소수지만, 저항의 자리에서 훗날 한국교회 회생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수난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주목사가 목회하는 산정현 교회당에 4개 노회 논객들이 운집하여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 이 교회의 담임 목사는 前日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된 터였다. 주제는 신사참배 문제였다. 도미다(富田)씨는 신사를 정부가 국민의례로서 종교가 아니라고 규정한 이상,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법령을 이용해 가면서 반복해서 설명하자 질문이 쏟아졌다."24)
일본 당국은 신사참배 강요를 앞세워 한국기독교의 철저한 변질을 의도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동원되었다. 물론 한국 공교회의 다수는 앞서 살핀 바대로 일본의 기독교 정책에 유린되어 기독교회로서의 최소한의 정체성마저 상실해 버리고 마는 절대 위기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목숨을 건 투쟁을 필두로 ''일사각오''(一死覺悟)를 결의하여 일관해 나간 저항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이 비록 전체적인 비율에서는 미미하였지만, 한국교회 최대 위기를 헤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이 암흑의 시대에, 철저한 절망 가운데에서 한국기독교와 한국 민족의 희망을 예언한 김교신(金敎臣)의 문장을 대하면, 위기의 극도에서 번지는 희망의 메시지를 감격적으로 발견해 낼 수 있다.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어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25)
이 문장이야 말로 한국기독교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선포된 지고의 희망이다. 이 메시지를 감지한 일제는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을 일으켜 당대 최고의 예언자를 억압하였고, 그들 스스로도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이 희망의 강력함에 모골송연해 하였다.
"너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아 온 놈들 중에 제일 악질들이다. 다른 놈들은 결사니 독립운동이니 파뜩파뜩 뛰다가도 잡아다가 족치면 전향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쉬었는데, 너희 놈들은 종교니 신앙이니 이상이니 하면서 500년 후를 내다보고 앉아 있으니 다루기가 더 힘들다."26)
4. 한국기독교 역사의 넷째 위기 : ''분열''과 ''양극화''의 문제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민족적 과제의 전체적 해결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한국기독교의 문제도 새로운 위기 국면을 맞았다. 일제 말기 유례없는 박해의 와중에 있었던 한국교회가 신앙적 자유를 회복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남북분단'', ''신앙적 순수성에 대한 논쟁'', ''신학적 입장차의 갈등''으로 함축되는 명제들로 인해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이는 그대로 교회의 대분열이라는 위기로 이어졌다. ''고신파 분열''의 원류를 예로 들어 보자.
"산정현 교회에서 만든 재건원칙에 대한 각 교회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물론 재건원칙을 받아들인 교회나 일부교인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이 재건원칙이 한국교회 전체적으로는 거부되는 상황으로 치달아 가게 된다."27)
주지하는 바대로 재건원칙이라는 것은 일제말기 수난자들이었던 이른바 ''출옥성도''들이 한국교회를 일신한다는 목표 하에 세운 일종의 ''정화원칙''이었다. 정체성의 혼미를 겪었던 한국교회 일각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정조를 지켰던 이들로서는 새로운 시대전개에 있어 요구할만한 내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그렇게 명료한 흑백의 논리만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굴욕 속에서도 교회의 실체를 지켜나갔다는 기득권자들의 반발, 은둔과 방랑의 시간을 보냈던 이들의 명분 등이 얽혀 이른바 ''경건의 문제''는 한국교회 분열의 제1차적 화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교회 분열기의 요항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곧 잠재되었던 신학의 입장차는 혼미의 틈새에 또 다른 변수로 떠올랐다.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김재준 목사를 파직하는 조건을 내걸었고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조선신학교 인정을 파기한다고 했다. 여기에 조선신학측 교수와 학생들이 강력하게 반발했고 김재준 목사의 면직에 대한 총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조선신학이 중심이 된 노회가 총회에서 나왔고, 고신파 분열과 비슷한 시기에 별도의 총회를 조선신학측이 조직하게 된 것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 된다."28)
이미 1930년대 중반 한국교회 내에는 ''신학적 완급'', ''보수와 진보''라는 입장차이가 장로교회 총회를 중심으로 노출된 바 있었고, 송창근, 김재준, 김영주, 김춘배 등으로 대표되는 해외 유학파 신학자들에 대한 경계가 대두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신학의 판별 기준은 교권의 수중 하에 있었고, 곧이어 불어 닥친 일제의 기독교 탄압책의 가중으로 자체적 토론의 기회는 수면 하에 잠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가 해방 후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서 재현된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대체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며, 한번은 겪어야 할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장로교 내에서는 이른바 ''기장''과 ''예장''으로 대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이상에서 본 ''신앙경건''의 문제와 ''신학완급''의 문제는 신앙적 억압이 해체되는 해방공간에서 한국교회의 내부적 위기로 대두되어 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 문제는 앞서 예로 든 장로교의 경우만이 아니라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등 다른 여러 교파들의 경우에서도 예외 없는 통과의례처럼 되풀이 되었다. 그리고 시대적으로는 좀 이후로 기산되지만, 세계교회의 한 경향으로 대두된 ''에큐메니칼'' 신학과 전통적인 ''에반젤리칼'' 신학의 갈등이 강화되고 이것이 국내 교회의 여러 갈등 인자와 결합하면서, 또 다른 분열과정이 전개되어 한국기독교회의 이 시기 역사를 ''분열의 시대'', ''분열의 위기''로 단정하여도 다름이 없을 만큼 혼란은 가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는데 있어서는 역시 민족사의 상황과 동류하는, ''분단''과 ''전쟁''의 문제를 간과할 수가 없다.
"수년 동안 전쟁이 진행되면서 체제를 달리하는 남과 북 사이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고 이데올로기 대립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마침내는 이데올로기가 민족애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서로 다른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남북한 동포들 사이에 동족애보다는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적개심과 증오심을 심어 주었다. ... 공포, 소름끼치는 상황,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결핍, 부상과 죽음의 가능성, 그런 것들이 모든 전쟁터에 도사리고 있지만, 한국전쟁에는 이데올로기와 결부된 증오가 하나 더 있었다. 그 결과 전쟁의 참상과 상처는 어느 전쟁보다도 유난히 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체험은 모든 민족구성원을 그들의 사회적 기반에 관계없이 실존적인 상황에 내팽개쳐진 개인으로 만들었다."29)
분단과 전쟁은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역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 남북교회의 이산, 전통적 기독교 중심지인 북한지역 교회의 상실, 월남 기독교인들의 고난과 혼란, 무엇보다 전쟁과 대결 속에 또 다른 희생양으로서 받아야 했던 기독교회나 교인들의 수난과정 등을 살필 수 있다. 한국교회 역사의 시대마다의 위기가 다 나름의 절박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내우(內憂)로서의 분열과, 외환(外患)으로서의 분단, 전쟁에 노출된 이 시대의 위기야 말로 달리 견주어 볼 상대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한의 위기에서도 역시 희망과 변혁의 가능성은 잉태되어 있다. 다음 몇 가지로 지목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교회 성장의 바탕이 마련된 점이다. 수용 이래 전체적으로 보면 지속적인 성장 국면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혼란과 위기의 정점인 분열, 분단기에 이룩한 한국교회의 역동적 성장은 다음 시대에 전개될 대형성장의 전초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회적 혼란과 위기는 기독교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킨 것이다.
둘째, 신앙, 신학의 수용 폭이 확장된 점이다. 한국기독교의 전통적인 경향성은, 선교사들로부터 전수받은 신학이나 신앙양태, 혹은 일부 주류 교권신학이 주창하고 견지하던 신앙표준만이 오직 진리임을 석명하고, 그 밖의 모든 신학적 사조나 신앙적 성향은 배척되는 일원구조에 몰입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 공간과 전쟁시기, 현상적으로는 분열과 갈등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면서도, 그 운용력의 놀라운 신장을 경험하게 된다. 지극히 보수적인 근본주의 신학에서부터 첨단 자유주의로 가늠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신학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이 형성될 수 있었고, 갈등과 분열의 와중에서 혼란을 겪으면서도 서로 다른 신학, 신앙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에 이른 것이다. 다양한 시각과 입장이 수용되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시대가 창출된 것이다.
셋째, 한국교회가 민족사회의 문제에 다시 한 번 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점이다. 이 시기 한국교회의 사회적 참여영역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비판의 소지도 존재하고, 강력한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기능했던 한국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비판할 소지도 없지는 않다.30) 그러나 분단과 특히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연대하며 한국의 전쟁와중의 민중 약자들을 위한 구제와 구난에 앞장선 솔선수범은 그 어느 시대의 사회적 참여기능도 능가하는 공적을 보였다. 전쟁고아, 전상자, 절대빈곤자에 대한 도움, 그 밖에 전시교육 실시, 의료 봉사, 사회적 비전의 제시 등에서 보여 준 기독교회의 역할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이상의 요항들은 한국기독교가 또 다시 절대 위기 상황 하에서 희망과 변혁을 이룩해 나간 역사적 전거라고 아니할 수 없다.
5. 한국기독교 역사의 다섯째 위기: 제2차 ''역사성''의 약화
"조용기의 설교와 목회, 전도의 중심은 자신의 표현대로,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의 영혼이 잘되고, 모든 일이 잘 되며, 강건하여 지기를 축원 합니다''에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균형은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도 잘되기를 바라는 축복''이다. 민중의 고통이 극복되는 데에만 주안이 있어 ''범사''의 구체적 축복만을 구가한다면 기독교회의 ''희생적 신앙''이나 ''십자가''는 망각되는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될지도 모른다. ... 그의 설교나 목회가 시대적 정황을 달리 할 때, 곧 민족사적 ''상황'', 이른바 ''민중의 총체적 정황'', 세계선교의 ''입지 조건'' 등이 전적으로 변천되고 새로운 사회선교의 과제가 형성되는 시점에서 어떤 ''변화''를 수용하느냐 하는 점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31)
1960년대, 더욱 직접적이기는 1970년대 이후로 오면서 한국기독교회는 수용 이래 가장 활발한 성장과 괄목할 만한 부흥을 이룩하여, 한국사회 내에서 양적으로 주력 종교의 위치를 확실히 점유하였다. 이 과정에서 앞서 그의 설교를 매체로 논의하였지만, 조용기와 같은 목회 리더십, 그 밖에도 민중 크리스천의 절대적 카르스마로 자리한 대중 설교가들이나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의 설교와 목회는 기독교가 지닌 매력을 현실적으로 절박한 민중들 간에 한껏 발휘되게 하였고 주저 없이 교회와 그 신앙에 희망을 두고 선택하도록 독려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다면 이 시대 민중들은 어떤 배경에서 기독교에 대한 희망, 기대를 강력히 걸었을까. 그리고 그런 기대상황은 어떤 신앙양태를 가속적으로 창출하기에 이르렀을까. 여러 가지 해석과 전망 등이 가능하지만, 앞선 시대의 절망과 위기, 곧 전쟁과 사회혼란의 와중에서 극도의 불안과 위협을 느낀 민중들이 현세축복적인 신앙유형으로 탐닉되었다는 견해도 충분히 경청할 만 하다.
"한국교회의 과대한 기복적 경향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요인으로 선택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총체적 파국상황이었다."32)
이러한 견해와 연계하여, 한국인의 심성 안에 내재된 현세적 축복신앙유형의 자극적 발로,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일제 하 일정한 시기 한국교회 안에서 팽배되었던 내세 피안적 부흥회 신앙의 재현 등의 관련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이를 사회적 영향으로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분단과 전쟁이라는, 조금은 역사적 간격이 있는 원인(遠因)보다는, 현세적 신앙이 구체적으로 팽배된 1970-80년대와 가까운 근인(近因)에 무게를 두는 경우도 있다. 즉 70년대 본격화된 고도 경제성장속에서 빈부간의 계층불화, 산업사회 속에서 감지되는 사회 불안심리와 개인의 내면 갈등을 우선적으로 앞세우는 경우를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론이나, 배경이해가 이 시기 한국교회의 신학, 신앙 양태의 문제점을 논의하는 전체가 되지는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앙양태가 지닌 특성의 진단과 그 타개책, 혹은 그 안에 내재된 긍정, 혹은 부정적 기제 등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선 이러한 최근의 한국교회 신앙현상을 또 하나의 위기로 단정하고,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경향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요건과 견주어, 결격되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여전히 ''역사성''의 부족이나, 결핍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의 위기 국면을 탐색해 오면서 1920-30년대의 주된 신앙경향 안에서 역사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개인적이며, 탈속적인 신앙유형을 진단하고 이를 ''역사성 상실''로 명명한바 있다. 그런데 최근의 현세축복적 특성, 개인구복적 특성 안에서도 양상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사성'' 부족의 측면을 충분히 지적해 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이러한 신앙유형은 이미 경험했지만, 교회의 양적 팽창, 물량적 성취, 혹은 역동적 선풍을 일으키는 데는 큰 기능을 할지 모르지만, 기독교회가 역사를 향해 져야 할 사명과 책무를 충실히 감당하기에는 일정한 문제점을 잉태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경향은 때로, 특수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현세를 부정하고 몰역사적 신비주의를 형성하는 신앙써클과는 전적으로 다른, 지극히 역사실존적인 신앙양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인의 신앙수요와 그 성취, 치병과 물질축복에 일관하거나 몰입하면, 기독교의 역사적 책무인 공의의 문제나 윤리 실천의 문제, 희생적 대속의 문제가 간과되어서, 결과적으로는 탈 역사적 신앙노선에 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또 다른 위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새로운 위기의 때에 한국교회는 여전히 희망적 변혁 기제를 발휘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독교회가 사회의 가장 강력한 종교신앙 공동체의 동력으로 자리할 수 있는 에너지를 확보해 나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 시대에 기독교 고도성장의 저편에서, 역사적 종교로서 기독교가 수행해 나가야 할 예언자적 투쟁의 발로로서 참여신학의 운용, 한국적 컨텍스트에 충실한 신학의 창출, 신앙가치의 내재적 구현에 중심을 둔 실험적 목회의 등장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회사는 이토록 항상 위기의 어두운 때에도 이미 희망의 새로운 불씨는 당겨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결론 - 과제와 희망
"올바른 문화적 적응의 기독교를 창출하는 일은 공통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문화의 범주는, 이른바 신학적 담론으로서의 ''토착''이나, 전통의 종교나 사상, 혹은 여러 대중 관습과의 무분별한 ''습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와 미래의 가장 평균률적인 가치에서 상징되는 문화와 잘 어울려 상응하고 거기에 성육신하는 진리를 선포하는 일이 될 것이다."33)
현재의 한국교회 위기를 자주 말한다. 그런데 대개 그 위기의 정체를 되물으면, 양적 성장의 멈춤, 혹은 하강, 재정형편의 약화, 잘해야 한국교회 전체적인 리더십의 응집력 저하나 수준 약화, 사회적 인식 속에서의 부정적 폄하, 더욱 세부적으로는 교회를 사고 팔거나 신자를 담보하는, 일부 교역자와 교회공동체의 윤리적 경제적 부정의, 때로는 여전히 발호 하는 사이비종파집단과 파렴치한 교주의 기독교 지도자 행세, 또한 자성적이기는 교회의 계속되는 분열과 사회를 향한 찢어진 목소리 등으로 함축되고 있다.
대개는 옳은 진단이고, 현하 한국기독교회의 위기를 논하기에 충분한 근거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근본적으로 문제되는 위기는 따로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역사는 늘 위기였고, 대개는 시대마다가 절박한 때때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참 위기는 그와 같은 시대적 문제점을, 변혁이나 새로운 전환으로 견인할 수 있는, 비전의 여부에 관건이 있다. 위기를 변혁으로 ''패러다임 쉬프트''할 수 있는 역동적 의지나 실행의 판도가 그 시대와 공동체 구성원 안에 존재하느냐의 여부로 우리는 희망의 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다음 몇 항목은 한국교회 변화와 희망의 관건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첫째, 그 선교적, 신학적 패러다임을, ''정치''를 비롯한 전통적 가치에서부터 ''문화''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물론 이러한 명제에 대한 탐색은 더욱 시간을 두고 정교하게 진행시켜야 할 것이지만, 이미 한국기독교회의 새로운 역할이나 스스로의 성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형식이나 명분적 차원에서 탐색하기에는 시대가 많이 경과하였다. 문화적 감응으로 한국기독교회가 한국의 신앙이요, 이 땅에 성육신한 복음의 구현체인가, 우선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34)
둘째, 연합정신의 진정한 실현의 가능성 문제이다. ''에큐메니즘''의 과제는 오늘날만의 단속적인 과제는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 늘 일부 신학적 진보편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던 에큐메니칼 정신을 한국교회의 전 영역과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일은 현실 위기의 해결책인 동시에 새로운 한국교회의 중심적 희망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하나 된 연합기구를 탄생시킬 경우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져 경쟁함으로써 나타나는 중복사업을 피하고 인력과 예산을 절감하면서 선교와 교육, 봉사활동 등의 분야에서 효율성이 극대화 될 수 있을 것임을 기대했다."35)
여기서 논의하는 에큐메니즘은 보수적인 선교, 신학 측의 상대적 개념의 신학지평이 아니라 한국교회에서 최근 제기되고 있는 하나 된 새로운 교회연합기구 조성 운동에서와 같은 총체적 개념의 새로운 교회운동을 의미한다.
셋째, 복음주의 계열의 대(對)사회운동의 적극적 성과와 강력한 추진력이 지닌 가능성 문제이다. 현하 한국교회의 희망과 과제로서 하나의 뚜렷한 움직임은 이른바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져 역사적으로 그 존재양식을 달리하던 계열의 상호교차적인 선교적 실천 방식이다. 특히 복음주의계열의 강력한 사회참여 운동은 앞서 논의한 진정한 의미의 에큐메니즘을 구현하는 바탕이 될 수 있다. 이 운동의 대표적 예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다.
"이 운동은 그 취지문이 밝히고 있듯,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 자신들의 행동과 삶이 윤리적이 되고 교회가 윤리적이 되도록 하며, 나아가서 국가와 사회가 윤리적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운동은 그 동안 한국교회 일각에서 제창해 온 바, 사회 구조부터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과는 정반대의 행동 순서를 설정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는 개량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결코 구조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며 공해문제, 핵무기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시민 불복종운동까지 전개할 수 있음을 행동강령에서 밝히고 있다."36)
정교한 의미의, 운동실천 방식에서 차별성을 선언하고는 있으나 한국기독교의 사회갱신과 참여의 선봉을 진보 그룹에게 미루지 않는, 새로운 실천무드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한국교회 영성 진작의 가능성 문제이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신앙적 열정은 대개 부흥회 타입이나 기도원 타입의 외형적 열혈성에 의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대해 이른바 진보적 신학그룹은 비판적 시각을 지녀왔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신학적 완급이나 신앙형태의 좌우 차별을 불문하고, 깊은 영성의 회복과 진지한 성찰의 신앙을 새로운 신앙운동의 유형으로 설정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는 기독교운동의 역사적 회귀를 통한 갱신의지인 동시에 교회의 극단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존중되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역사이해 자체가, 위기와 변혁의 관계를 논구하는 것이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변화와 희망의 과제 또한, 그 위기의 지평 위에서 함께 호흡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논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교회 농촌목회연구원)
[미주]
1) 욥기 8.8, 10-11.
2) 이사야 43장 이하.
3) 최남선, 박은식, 신채호 등의 경우 주목.
4) [推案及鞫案- 邪學罪人嗣永等推案], 1808. 10. 11 (서울: 한국학문헌연구소, 1978).
5) 위 같은 자료, 1801. 10. 9.
6)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p. 121 참조.
7) 서정민,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기독교회와 민족국가 관계론 연구], 한울아카데미, 2002, pp. 247-248.
8) Notes from the Wide Field, The Missionary Herald, 1898. 3, p. 112,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pp. 221-222 재인용.
9) 1888년 서울 장안에서 격랑처럼 진행된 이른바 ''영아소동''(baby riot)은 기독교에 대한 경계가 보수적 척사파라는 일정한 세력에게서만 강고했던 것이 아니라 민중적 다수 정서도 기독교에 대한 배척과 혐기(嫌忌)의 편에 있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10) "장로회공의회일기" 중, <그리스도신문>, 1901. 10. 3 (현대 표기로 옮김).
11) "開書-鮮人基督敎會堂再建の資金を募る," <敎界時報>, 第1456號, 1919. 7. 11.
12) 李光洙, "今日 朝鮮 耶蘇敎의 缺點," [靑春], 1917. 11.
13)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 p. 372 참조.
14) 李光洙, 위 같은 글.
15) 姜元敦, "韓國民族民主運動에 비추어 본 韓國基督敎Ⅰ," [神學思想], 제60호, 1988, pp. 14-15.
16) J. S. Ryang, "The Aims of Methodist Union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27. 7, p. 152.
1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Ⅱ], 기독교문사, 1990, pp. 186-187.
18) 위 같은 책, pp. 99-146 참조.
19) 최중진, 김장호, 이만집, 변성옥, 박승명 등의 조선적 자치교회가 구조적인 실패를 거듭했다면, 이용도의 예수교회, 최태용의 복음교회 등이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이룩했고, 제도교회의 비판과 이른바 무교회적 경향으로 인해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재고해 보아야 하지만, 신학적인 독특성은 역시 김교신의 ''조선적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다.
20) 金鎭憲, "現代의 進步와 敎會의 覺悟," [靑年], 제2권 3호, 1922. 3, pp. 16-17.
21) "日本基督敎 朝鮮長老敎團 實踐要目" 중 제5항부터 9항까지의 皇民의 鍊成 부분, [日本基督敎朝鮮長老敎團 慶南敎區會錄], 1943. 5 附錄; <基督敎新聞>, 1943. 10. 6 "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常置委員會의 顚末".
22) <朝鮮監理會報>, 1941. 11. 1.
23) 閔庚培, 위 같은 책, p. 501. 성서뿐만 아니라 찬송가 중에서도 국체에 부정하다는 이유로 다수의 음곡을 삭제하기를 강제하였다.
24) 隨越智生, "朝鮮續信," <福音新報>, 第2211號, 1938. 7. 21.
25) 金敎臣, "弔蛙," <聖書朝鮮>, 1942, 3, 현대표기로 풀어 적음, 서정민 [겨레사랑 성서사랑 김교신 선생], 말씀과 만남, 2002, 부록 ''성서조선 명문장 읽기'' 중, pp. 236-237.
26) 서정민, [겨레사상 성서사랑 김교신 선생], pp. 128-129.
27) 서정민, [한국교회사이야기 하], 말씀과 만남, 2002, p. 233.
28) 위 같은 책, p. 287.
29)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pp. 21-22.
30) 이데올로기의 편향성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용공시비'' 등 세계교회와의 협력체계 형성에 제한점을 보인 측면, 혹은 사회구제나 원조의 배분 등에서 지나친 집단이기주의적 행태를 보인 점 등이 최근 자주 거론된다.
31) 서정민,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설교사 이해-모성적, 민중적 성령운동가 조용기의 설교를 중심으로," [한국교회 설교가 연구 1], 한국교회사학연구원, 2000, p. 83.
32) 김흥수, 위 같은 책, p. 195.
33) 서정민, [한일기독교관계사연구], 대한기독교서회, 2002, p. 382.
34) 김흥수, "기독교는 한국 종교인가?" <종교와 문화>, 제4호,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8 참조.
35) <한국기독공보>, 2002. 8. 10, 박만서, ''뉴스정책해설'' 중.
36)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선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