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10
권성수목사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 한 분이 영국의 어느 시골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몸은 피곤하고 목이 마른 상태에서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어떤 작은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길가의 표지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길을 가리키면서 '들어와서 냉수 좀 드세요' 라고 쓴 표지판이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니까 얼음처럼 시원한 샘물이 있었고 그 위에 조롱 바가지가 걸려 있었다. 근처의 벤치에는 여름 사과들이 들어 있는 바구니와 함께 '좀 드세요' 하는 안내문이 있었다. 작가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 작은 집에 사는 노인 부부를 찾아 그 안내판과 그 과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 때 그는 그 부부가 아이가 없었다는 것과 농장에서 나오는 것으로 근근히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그 노부부는 시원한 샘물과 과일이 있어서 그 길로 지나가는 어떤 사람과도 그것을 나누어 먹고 싶었했다고 했다.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선 단체에 기부할만한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것을 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환대(hospitality)라는 것이다. 지나가는 막연한 사람에게 작은 사랑을 베푸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매우 귀하다.
본문은 마태복음 10장 선교훈화의 결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것은 선교훈화가 복음 사역자를 환대하면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다는 교훈으로 끝을 맺는다는 점이다. 복음 사역이 참으로 귀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이다. 목회자나 선교사나 전도자도 복을 받지만 목회자나 선교사나 전도자를 지원하는 자들도 복을 받는다.
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정부나 종교나 사회나 가정의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예수님은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는 자도 하나님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지적하심으로써 복음 사역자를 격려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신하들을 노예 집단으로 취급하는 폭군이 아니다. 예수님은 복음 사역자를 귀하게 보고 복음 사역자를 최대한 격려하신 것이다.
1. 제자 영접은 하나님 영접 (40절)
(1) 엄청난 위상.
예수님은 제자-사도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영접한다는 것은 집 안으로, 생활 속으로, 마음 속으로 모셔 들이는 것과 사역자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사도들을 영접하는 것이 어째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어째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10:1,2).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행자들(agents)이고 예수님의 대사들이다. 한국이 미국 대사를 환영하는 것은 미국을 환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파송하신 제자-사도들을 환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환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란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 (요 20:21). 여기에 파송의 고리가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을 대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예수님을 대변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다.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그 위상이 엄청난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 사역자에게 한 봉사를 자신에게 한 봉사로 간주하신다.
(2) 성경의 교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 5:12-13).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딤전 5:17-18).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17).
(3) 엄청난 특권.
성경은 이렇게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는 것이 결국 예수님을 대접하고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보다 더 풍성한 축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사도들, 선교사, 목회자, 신학교수, 장로, 강도사, 전도사, 순장, 전도자, 각종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대접하고 싶으면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면 된다. 하나님에게 좋은 것을 드리고 싶으면 복음 사역자에게 좋은 것을 드리면 된다는 것이다.
2. 영접과 상급 (41-42절)
(1) ...의 이름으로.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다. 선지자는 감동적인 말로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의인은 탁월하게 의로운 삶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선지자의 이름으로”, 즉 ‘선지자라는 이유로,’ 또 “의인의 이름으로,” 즉 ‘의인이라는 이유로’ 선지자나 의인을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2)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
“선지자의 상”은 선지자를 영접한 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주시는 것과 똑 같은 상, 선지자가 받는 것과 똑 같은 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각자의 동기와 말과 행동에 따라 갚아주시므로 각자가 받을 상이 각기 다르다.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은 선지자를 영접한 상과 의인을 영접한 상을 말한다.
(3) 구약의 예.
엘리사 시대에 수넴에 한 여인이 있었다. 성경은 그 여인이 선지자 엘리사를 대접한 것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 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들어갔더라” (왕하 4:8). 성경은 그 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했다. 그 여인이 간청하여 선지자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하니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 여인의 집에서 편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왜 대접했고 어떻게 대접했는지가 그녀가 남편에게 한 말에 드러나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왕하 4:9-10). 그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란 이유로 엘리사에 무엇이 필요한 지를 알아서 극진히 대접하였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조심스럽고 치밀)하도다”고 했다 (왕하 4:13).
하나님은 그 수넴 여인에게 선지자를 영접한 상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 여인에게 아들을 주셨고, 그 아들이 아파서 죽었을 때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시는 상을 주셨다 (왕하 4:14-37).
3. 냉수 한 그릇이라도 (42절)
(1) 확실한 보상.
예수님은 이어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자”, 즉 명성과 실력과 지위 등에 있어서 미미해 보이는 사람에게 냉수 한 컵이라고 주는 자를 반드시 보상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것을 “누구든지”, “이 소자 중 하나”,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역자를 대접하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진리를 권위의 도장으로 찍어 클라이막스로 강조하신 것이다.
(2)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지극히 작은 봉사도.
하나님은 초라해 보이고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신자에게 냉수 한 컵이라도 대접한 자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신다. ‘소자’는 금방 믿은 신자일 수도 있고, 평생 믿었으나 사람들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신자일 수도 있다. 예수님의 포인트는 하나님의 백성 중 어떤 사람에게 어떤 봉사를 하든 예수님은 그 봉사를 반드시 기억하여 보상하시겠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제자에게 한 가장 작은 봉사라도 하나님이 보시지 않거나 보상하시지 않은 경우가 없다.
(3) 은혜의 경제학.
남들이 우리에게 복의 통로가 되면 남들이 복을 받는다. 우리가 남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면 우리가 복을 받는다. 또한 하나님은 상급에 있어서 후하시기 때문에 상급의 샤워를 내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급은 우리의 행위보다 더 크다.
복음 사역은 복을 운반하는 사역이다. 하나님은 복음 사역을 역사상 어떤 사역보다 더 귀하게 보신다. 복음 사역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업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전개하기 위해 직간접으로 봉사한 자는 반드시 풍성한 상을 받는다.
어떤 목사님이 어느 날 천국에 대해 설교했다. 다음 날 아침 갑부 교인이 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어제 천국에 대해 좋은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천국에 대해서는 다 말씀하셨는데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랬군요. 그럼 오늘 아침이 마침 좋은 기회입니다. 저는 저 언덕에서 방금 오는 길인데요, 저 언덕 오두막집에 매우 가난한 교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병으로 열이 나서 누워 계십니다. 그녀에게 양식을 넉넉하게 가지고 가셔서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자매님, 저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양식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달라고 해서 시편 23편을 읽으시고 무릎을 꾸신 다음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 모든 일을 하시는 동안 천국을 체험하시지 못하신다면 제가 쓰신 만큼 돈으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갑부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저는 확실하게 천국을 보았고 천국에서 15분을 보냈습니다.” 소자 한 사람을 대접한 신자가 하나님의 상을 받은 것이다.
복음 사역은 매우 귀한 것이다. 복음 사역자는 예수님의 사도,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 사역자를 대접하는 자에게 반드시 보상하신다. 이것은 복음 사역자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