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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교수 2004.09.09 조회 : 510
I. 기독론의 단초(Ansatzpunkt)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告白)하였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8:29);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빌2:11); "예수는 주님이시다"(고전12:3).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은 예수에 대한 단순히 형이상학적 진술이 아니다. 이러한 고백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예수와의 만남 속에서 역사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한 것을 총체적으로 요약 진술한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한 예수에 대한 인격적 진술이다. 그렇다면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와의 만남 속에서 경험한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대한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건을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기독론적 명제들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결정적인 선언과 증언 아래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이 체계적인 진술이 되기 위해서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과 인식의 출발점이 된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론은 '예수가 누구냐?'는 진술로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역사적 증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는 신앙고백적 진술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역사적 증언에 대한 확증을 전제할 때만이 참된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기독론 연구 방법은 기독론을 단지 순수 학문적 추구의 과제로 삼아왔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예수의 형상"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진술 안에서 논하게 된다. 그래서 순수 학문적 방법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예수의 사역을 역사와 인간 이성의 한계 속에 제한시켜서 신학을 인간학(人間學)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초월(超越)의 세계를 인정하는 신앙(信仰)을 겸비한 신학적 방법은 인간의 불신앙을 극복하고(마 9:24) 새로운 차원, - 즉 이세상과 저 세상, 지금과 그때(nunc et tunc), 그리고 종말론적 먼 훗날이라는 다차원적(多次元的) 경지에서 - 그리스도에 관하여 논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기독론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증언, 즉 "예수는 부활하셨다" 혹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어록(Logion: 복음서 기록의 원전<Quelle>이 됨)과 행위(行爲) 즉 예수의 역사적 삶을 전해 주고있다. 그런데 이 보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진술되고 기술 되었다. 따라서 복음서는 그들이 보도하고 전하는 분이 "누구였는가?"라고 하는 과거사실을 기술하려 하기보다는 '지금 예수가 오늘날 우리를 위하여 누구인가?'를 기술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과거의 주님이 아니라 지금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지나간 역사적 사실 보다는, 그 과거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전하려고 주력하였다(참. 요 20:31).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기독론의 출발점이 되는 나사렛 예수의 부활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현실성을 밝혀내는 것을 연구의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예수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 혹은 역사적 객관성이 밝혀지지 않으면, 예수에 대한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기독론적 명제, 더 나아가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그리스도론에 대한 진술을 시작한다고 해서, 예수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 내지 사실(historische Wirklichkeit bzw. Facktum)을 과거 지나간 사실에 한정해서 추구하지 않겠다. 이러한 방법을 취할 경우 우리는 다시금 일찌기 역사적 예수 연구가 실패하였던 그 전철을 밟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증언된 진술은 어디까지나 경험되고, 고백되고, 전승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활 논증의 출발점을 '예수가 우리와 무엇이 다르냐'는 존재론적인 교리적 진술에서 - 예를 들면, '예수가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다' - 출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본 논문은 '예수가 무엇을 행하였느냐'는 그의 사역에 대한 진술, 곧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고백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을 형성하게된 예수의 사역와 그의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을 밝히는데서 출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신격화하거나, 예수 부활을 역사성이 결여된 것으로 종교화할 때에,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술은 그 실제성(Realität)과 현실성(Wirklichkeit)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II. Esse sequitur agere in nunc - 현재적 사역에서 형성된 존재
복음서의 기술이 그리고 최초의 목격자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의 傳記가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죽었다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성서의 증언자나 최초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은 예수의 전기(傳記)에 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의 메시아성(Messianität)은 전기적으로, 즉 역사적(historisch)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여 오늘날 지금(nunc) 현현하시는 그의 현존(Gegenwart) 속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전기적 혹은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는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즉. 요단에서의 세례 - 갈릴리에 등장 - 예루살렘입성 - 재판과 십자가처형). 그러나 이러한 전기적 기술도 복음서 자체에서 조차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예수에 대한 기술, 보도들이 예수를 메시아(Messia)로,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告白)하고 있는가?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서 현재적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한 예수의 현현은 최초 그리스도인들을 형성하였고, 그에 대한 신앙고백을 창출해 내었다. 그래서 최초 그리스도 공동체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초기 교회공동체는 "예수의 역사적 사실성", 즉 예수가 그 말을 직접 했느냐 안했느냐?"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의 살아나심을 경험하고, 그것을 증언하며, 그 분과의 다시 만남에 그들의 주된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데 그 중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것을 전도하고, 증거하는데 보내다가 순교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적 카리스마와 예언자적 카리스마가 가지고 있는 "부활증언"에 대한 역할에 대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은 견지에서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제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반론(Einwand)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불트만(R. Bultmann)이 말하듯이,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는 그 어느 복음서도 참되게 진술하고 있지 않는가?, 또 그 역사적 예수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육적(肉的)인 예수", 즉 역사적 예수는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고, 역사적 그리스도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노력해서도 안되는 것인가? 또 반면에 그렇다고 해서 판넨베르크(W. Pannenberg)처럼 "예수의 역사(Geschichte)"의 계시적 성격에 대한 사실적(史實的) 규명을 제공하고, 예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의 첫 과제인가? 아니면 몰트만(J. Moltmann)처럼 사실적 방법과 종말론적 방법을 상호 관련시킴으로써 주어진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들의 선포들은 - 비록 그리스도적 전승(傳承)과 그 전승을 전하고자 하는 기자들의 의도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 예수의 역사(歷史)들을(그의 오시고, 죽고, 부활하신 사건) 하나님의 행위 곧 하나님 자신의 행위(Akt)로 기술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사역(Werk)으로 고백 되어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 조상으로 더 소급하면 노아와 행하신 약속(Verheißung) 내지 계약(Bund)을 실현시키고 성취시키신 사건으로 고백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은 예수의 역사(자서전)를 기록하려 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고자 하는데 그 주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참. 요 20:31). 이러한 근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적 내지는 역사적 사실성에 근거에서 증언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 곧 구약성서로 소급해서 기술되어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은 역사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역(使役)이라는 차원에서 논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하나님의 사역이 - 더 자세히 말하면 성령의 사역으로 인식된 - 창출해된 최초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고백과 오늘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논증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현재적으로 논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 앞에서 기술한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여기서 예수를 철저히 유대교의 혈통 속에서 이해하고자하는 마태복음의 기술과 "족보도 없는(agene alogetos)"(히 7:3)이라는 히브리서 사이의 상반된 진술의 종합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술은 단지 역사적 예수(historischser Jesus)에 관한 진술일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족보도 없는"(히 7:3) 종교적이고 추상적 존재로 고양시키는 것이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술을 예수의 혈통이 갖는 인간성,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인간성, 그렇지만 결코 인간의 족보에 제한을 받지 않는 "족보 없는 자"라는 사실에서, 다시 말해서 그의 부활 속에 있는 역사적 현실성(geschichtliche Wirklichkeit)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즉 고전 2:9에서 얘기하듯이 "모든 인간적인 이해와 파악을 훨씬 넘어서는" 차원에서, 그에 대한 신앙고백을 오늘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재인식하는 것을 그에 대한 진술의 단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재인식은 "어떤 인간적인 가능성, 욕구, 소원 또는 논리적 필연성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역사 속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그 근거를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즉 칼 바르트(K. Barth)가 얘기하듯이, 예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Gottes Selbstoffenbarung)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론의 학문적인 한계와 초월성이 한데 맞물려 있는 것이다. 즉 신학과 타학문과의 한계성 내지는 넘어갈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