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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철 목사
I. 위기목회상담에 대한 이해
1. 위기란 무엇인가
위기(Crisis)는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위험한 고비(crucial time)"과 “어떤 일의 전환점(turning point)”라고 정의되어 있다. 스톤에 의하면, 위기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보편적 위기와 우발적 위기다. 보편적 위기는 예측하기가 가능하며 우리 모두가 성장과정에서 겪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사춘기나 중년기에 나타나는 정서적 혼란 같은 것들이다. 우발적인 위기는 예외적이고 예측하기가 불가능하다. 비일상적인 환경에서 유래되는 정서적인 시련과 기능장에 등이다. 위기상담의 목적은 개인들로 하여금 우발적인 위기들을 잘 대처하도록 돕는 것이다. 우발적인 위기는 직업상실, 후원자의 상실, 존경받는 지위나 신분의 상실, 신체불구가 되는 사고, 질병, 유방 절제 같은 수술, 친구나 친척 혹은 자녀나 배우자의 죽음, 자신의 임박한 죽음, 배우자의 간통, 심한 알콜중독이나 약물중독, 새삼스러운 장애 발견, 원치 않는 임신, 임신 중절, 안정된 환경을 떠나야 하는 경우, 전쟁, 공황, 태풍 같은 국가적 재난이나 천재지변, 자살 등 많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 위기 당사자가 겪는 위기는 무엇인가?
위기는 흥분으로 마음이 들뜨거나 잠을 설치거나 깊은 생각에 빠지거나 채울 수 없는 공허감으로 허무해지거나 가슴에 주먹만한 것이 불쑥 올라와 숨이 막히거나 공포와 기대가 교차되는 순간이라고 한다. 위기는 영적, 정서적 균형을 깨뜨리는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다. 근본적으로 위기는 위협을 느끼거나 적응이 불가능한 사건을 만날 때 다가온다. 여기서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위기가 올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지 이미 그 사람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A. 위기를 불러오는 사건
극심한 위기를 가져오는 사건을 사람이 겪는 스트레스에 따라, a)남편이나 아내의 죽음 b)이혼 c)별거 d)감금생활 e)가족의 일원이 죽었을 때 f)크게 다치거나 병을 앓을 때 결혼 g)실직 h)헤어졌던 부부가 화해해서 다시 합칠 때 I)퇴직 등의 순으로 정리할 수 있다.
B. 사건이 일어난 후
리디아 라포포트(Lydia Rapoport)는 이렇게 말했다. “위기를 일으키는 요소는 3가지가 있다. 첫째,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둘째, 전에 위협당한 적이 있는 어떤 본능적 욕구가 다시 위협을 받으며 셋째, 적절하게 적응하는 능력을 잃는 것이다. 이 외에도 스트레스 양에 영향을 주는 7가지 요인으로, a)과거의 경험 b)사회적 지지 c)적응 능력 d)위기감을 느끼는 정도 e)인생관 f)위기의 목적에 대한 이해 g)창조적인 해결 등이 있다.
이 중에서 d)위기감을 느끼는 정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알버트 엘리스의 주장 중에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라는 이론이 그것이다. 즉 사건이 직접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그 중간에 한 단계를 더 거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관해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바로 그것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를 맞을 때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하면서 창조적으로 헤쳐 나가는 열쇠는 위기를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참 나’와 대화 하는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C. 위기의 영향
a. 상실
대부분의 위기는 a)자존감 b)자기 정체성 c)자기 역할 d)정상적인 양육 등의 상실감을 수반한다.
1) 자존감 : 자존감의 상실은 자기 비하나 열등감과 비슷한데, 이것이 위기 중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자긍심은 자기 용납과 자신감을 기초로 한다. 자긍심을 잃으면 자신을 용납하기가 매우 어렵고 당연히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2) 정체성 : 사람들은 대부분 위기를 만나면 자기 자신을 재평가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버리면 일상적인 방어기제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극심한 충격을 받게 된다.
3) 역할 :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위기로 인해 자긍심을 상실 할 때 자기 역할이나 사명도 쉽게 잃어버려서, 안정감과 평화가 급격하게 깨어지기 쉽다.
4) 양육 : 위기로 인해 양육이 위협을 받는다.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성인이라도 적절한 양육 없이는 살 수 없다. 위기의 정도는 지금까지 보살펴 주던 사람이 얼마나 따뜻하게 양육해주었는가, 또 위기 속에서 양육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리디아 라포포트가 언급한 위기로 인해 일어나는 ‘느끼다, 느낌’의 모든 감정은 바로 상실감의 정도를 말하고 있다. 즉 어떤 사건이 본능적인 욕구나 통전성을 위협할 때는 당연히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상실이나 위험한 사건으로 인해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위기 때 느끼는 감정의 유형은 그 사람의 성격과 관련이 있는데, 대부분 위기와 인한 감정은 불안과 우울증이 뒤섞여 있다.
여기에서 위기 속에서 내적 치유의 중요성이 제기된다. 상실된 자존감과 자기 정체성, 꿈과 사명감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위기 상담의 목적이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위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 주어 위기의 연속인 인생을 창조적, 성장적으로 살게 해 주는 보람 있는 사역이 될 것이다.
b. 인간은 삼각형에 비유할 수 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삼각형의 한 변이 평면과 접하고 있어서 안정을 이룬다. 그러나 위기를 만나면 삼각형이 꼭지점을 바탕으로 일어서게 되어 안정을 잃게 된다. 몇 주 내로 이 삼각형은 넘어져서 변과 평면이 다시 만나게 되어 안정을 취한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변이 평면과 접하게 된다. 이때 삼각형은 두 방향 중 어느 한 쪽으로 넘어진다. 성장과 기능 향상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기증 저하 쪽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 위기를 당한 직후의 몇 주가 가장 중요하다. 이때 삼각형이 어느 방향으로 굴러갈 것인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길 수도 있고 반면 놀랍게 치유되어 크게 성장할 수도 있다.
2. 위기 목회상담
1) 위기 목회상담
만약 지금 닥친 위기를 아직 통과하지도 못했는데 제2, 제3의 위기가 몰려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스트레스가 계속 쌓인다. 그래서 우울증이나 정신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도 매우 높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견딜 수 있겠지만 점점 수위가 높아지면 적응 능력을 잃어버린다. 목회자들은 이처럼 위기의 순간에 위기를 당한 사람들을 붙잡아 주고 위로해 줄 준비와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아키발트 하트는 목회자의 피상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납, 훈련된 통찰, 신뢰의 분위기 등과 영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훈련을 강조한다.
위기(危機)에 대한 한자의 의미는 두 가지 상징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위기는 위험한 일이지만 그 이면에는 기회가 된다는 뜻이 있다.
한 개인의 경우 위기란 “어떤 외적 위험에 대한 개인의 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위기는 항상 위험하거나 나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외적인 성공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위기 당사자가 위기 속에서 상처를 통해 이제까지 전 삶의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할 수 있는 기회, 자신의 내재적인 능력과 성품과 은사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기회,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현실에 적용시켜 나가는 새로운 삶의 자세와 태도를 새롭게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위기는 새로운 삶의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위기 상담의 목표가 발생한다.
위기 상담의 두 가지 목표가 가능하다. 그것은 첫째로 위기의 발단이 된 사건의 충격을 가능한 한 감소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사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 스스로 힘을 돋우게 하고 미래의 문제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위기는 새로운 조치를 요구한다. 위기의 도전은 새로운 대처 방안을 자극한다. 그 대처 방안은 개인의 적응 능력을 증가시키며 심리적, 정신적 건강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위기상담이란 단지 붕대만 감아주는 등의 요법이 아니고 전인적인 성장상담인 것이다. 즉 위기 상담이란 위기 당사자가 위기를 통해 받은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돕고, 자신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게리 콜린스에 의하면 위기상담은 다음 몇 가지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효과적으로 위기 사태를 처리하고 평소의 기능 수준으로 되돌아오도록 돕는다. 둘째로 위기가 지난 후에도 계속될지 모르는 불안, 염려, 또 다른 위험을 줄인다. 셋째로 위기를 극복하는 가법들을 가르쳐서 장래에 일어날 위기들을 예상하고 처리하는 준비를 보다 잘 하게끔 도와준다. 넷째로 위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위기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도록 한다. 그는 이런 목표를 위해 상담자가 사용할 수 있는 다음의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a. 접촉을 한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도움을 얻기 위해 항상 상담자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자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온정과 이해심과 성실한 관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 위기 상담은 많은 시간을 요하며, 다른 행동적인 제안들을 하기에 앞서 피상담자의 견해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b. 불안을 줄인다.
상담자의 온화하고 편안한 자세를 말한다. 특히 이런 온화함이 위안을 동반할 때, 피상담자에게서 불안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 피상담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할 때 참을성 있고 주의 깊게 듣는다. 안심시키는 말을 한다(‘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효과적으로 행했을 때는 인정해주는 말을 한다(‘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잘 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어날 일에 관해 미리 말한다(‘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신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c. 문제들의 초점을 맞춘다
위기에 처했을 때 산더미 같아 보이는 혼란스러운 일들과 문제들에 의해 압도당하기 쉽다.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문제들을 피상담자가 결정하도록 돕는다.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태보다는 현재에 존재하는 사태에 초점을 맞추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d. 자원들을 평가한다.
피상담자의 지적인 능력, 기술, 과거의 경험이나 학습, 또 동기를 포함한다. 상호관계의 자원들, 금전과 같은 실제적인 도움, 시간 등의 추가적인 자원들도 있다. 또한 상담자의 돕는 자세가 위기에 처한 피상담자를 도울 수 있는 자원이 되고, 성경의 약속들과 성령의 인도하심 등 영적인 자원들도 중요한 자원이다.
e. 중재를 계획한다.
“구체적으로 이제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면서 피상담자 스스로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도록 돕는다.
f. 행동을 격려한다.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후에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은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상담자는 피상담자가 실행하고, 과정을 검토하고, 또한 이 행동이 현명하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 때까지 계획과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격려한다. 한편 사랑하는 하는 사람이 죽거나,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발견하거나 혹은 중요한 기회에 승진하지 못했을 때 등과 같은 위기에서 다른 행동을 취했음에도 위기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때 피상담자가 정직하게 사태를 직시하도록,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도록, 생활방식을 재조정하도록, 또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안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염려들을 아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돕는다.
g. 희망을 불어 넣는다.
희망은 장래에는 사태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고통을 덜어준다. 기독교 상담은 세 가지 방법으로 희망을 불어 넣을 수 있다. 첫째, 말씀과 하나님의 본성에 의거해서 확신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성경의 진리들을 함께 나눈다. 둘째, 피상담자가 “난 절대로 낫지 않는다” “최악이다” 등과 같은 생각들에, “난 절대로 낫지 않는다 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등과 같은 부드러운 질문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도전한다. 셋째, 상담자는 피상담자에게 무슨 일을 시킬 수 있다. 아주 작은 활동일지라도 무엇인가 했다는, 피상담자로 하여금 자신이 무력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h. 환경 중재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서 위기에 있는 사람을 휘해 기도하고, 물질 등의 지원이나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i. 추후지도
위기 상담은 대체로 짧다. 한두 번 상담을 한 뒤에 다시 상담하러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상담자는 종종 전화나 방문으로 추후 지도에 관심을 가지면 피상담자를 격려할 수 있으며 또한 누군가 여전히 그를 보호하고 기억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다.
2) 위기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위기에 빠진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위기와 고난을 만나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그런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어떻게 고난을 헤쳐 갔는지, 고난을 통해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을 통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하여 정태기 교수는 ‘우리는 고난에 처했을 때 흔히 하나님의 징벌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오는 징벌이라면 왜 고난을 통해서만 인간은 성숙해지고, 신앙도 성숙해지는가?’ 라며 고난을 통한 인간의 성숙과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를 피력한다. 어떻게 고난을 통해 인간은 성숙되고 역사는 발전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성서적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십자가는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 사람과 역사의 아픔을 함께 하신다는 사랑의 계시이고, 부활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역사에 새로운 소망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간의 아픔을 모르는 무감각한 하나님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희랍사상과 중세기 신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아픔을 나눈다는 사상은 성서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다. 유대 히브리사상(Shekinah)이나 유대 신비주의자들(Cabala)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결 같이 이 세상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신앙은 근본적으로 세상과 인간을 지으셔서 에덴을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고, 실낙원 이후 죄의 확대 속에서 홍수 심판과 무지개 언약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이 역사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알게 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들이라 불리 우는 이스라엘 족장사는 유랑할 수밖에 없는 족장들의 삶과 그 연약함에 참여하시고 연단시키시어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 이스라엘 신앙고백의 실역사인 출애굽 사건은 고난당하는 히브리인들의 삶과 역사에 하나님이 동참하시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40년 동안 광야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연단시키어 가나안의 새 비전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계시하고 있다. 예언자적 전통을 통해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세우시고 보내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삶,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역사적 참여는,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인간의 궁극적인 고난의 원인을 제거하셨고 부활을 통해 고난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이자 궁극적인 소망인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여셨다. 또한 성령을 보내심으로 사도들을 부르시고 인간의 고난을 함께 위로하며 고난을 넘어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관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교회를 이루셨다. 다시 말해 성서는 민중, 인간의 고난과 이 고난의 삶과 역사를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이 고난의 현장에 내재하시는 신이시고 역사의 참여 속에서 그 성품을 계시하셨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고난의 삶을 이겨 성장적인 삶, 성숙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위기 목회상담은 고난당하는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사역인 것이다.
성서해석의 구속사적 방법론은 성서를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 이해한다. 약속이란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고, 성취는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향한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이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향한 약속의 성취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진 것이다.
이런 고난과 구속의 관점에서 정태기 교수는 ‘고난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파괴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니엘 데이 윌리엄스와 다른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고통이 갖는 구속적인 역할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게 된다. 즉 나 자신의 실존과 인간성이 고통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로, 고통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인간의 마음을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킨다. 세 번째로, 고통은 우리의 대인관계 즉 사귐을 증진시킨다. 도로테 죌레가 주장했듯이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즉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고통 하는 사람을 위해 일할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넷째로, 고통은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고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게 되며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접할 수 있게 한다.
위기 상담은 치유 사역과 만날 때, 그 온전한 사역을 완성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정태기 교수는 고난과 치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백성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음과 몸이 병든 자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셨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는 고난에 처한 사람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요구에 따라서 치유도 행하셨다. 예수는 육신 자체가 병들어 고난을 받는 자도 치유하였지만,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병들어서 불구가 된 사람들에게는 그 죄를 용서함으로 치유해 주었다. 물질은 풍부했으나 아무도 자기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이가 없어 외로움에 병이 들었던 삭개오에게 자신을 던져주심으로 외로움의 응어리를 풀어 주기도 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으면서도 영혼의 갈증이 심해 위기를 겪고 있던 수가 성의 여인에게 영적인 의미를 불어넣어 새 생명의 삶을 누리게도 해 주었다. 예수의 삶은 어린이로부터 어른에게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이 고난에 처해있는 모든 사람을 치유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생애였다. 이런 예수님의 삶을 눅 4: 18-19에서는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치유 태도는 고난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고난에 처한 사람의 아픔에 함께 동참해서 깊이 공감하는 자세였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자신의 위기와 상처를 은혜의 눈으로 치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으로 위기에 처한 자들을 섬길 뿐 아니라, 교회가 치유 공동체로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할 때 위기목회상담이 창조적으로 완성되어질 뿐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공동체 안에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3)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자원
저드슨 쉬하드와 제럴드 리차드슨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5가지 영적 자원을 마련해 놓으셨다고 소개한다.
A. 하나님의 성품
우리 크리스찬은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껏 의지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우리가 어떤 위기를 만나도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깨달음은 우리를 지켜 주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위기로 인해 마음의 평화가 깨질 때에도 이 사실만 떠올리면 다시 평정을 찾을 수 있다(롬 8:31-32)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절망과 실의에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시 23편)을 묵상하면 큰 힘이 된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신실하신 분임을 선포했다(왕상 8:22-24). 즉 위기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오늘날 크리스찬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위기나 극심한 변화로 안전이 위협받을 때는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며 궁극적인 안전과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삶을 위한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다. 렘 29:11에 “너희를 향한 나의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롬 12:2에서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위기와 고난을 다루시는 이유나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서, 롬 8:28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약 1:2-4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 롬 5:3-4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과 연관 지어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의 40년 연단이 있었듯이, 지금의 환난과 고난이라는 위기(광야)는 소망(가나안)을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누릴 수 있도록 하시는 사랑의 연단’임으로 ‘환난과 시험(위기)을 만나거든 오히려 기뻐하라’ ‘지금의 환난과 시험(위기)는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룰 텐데, 이 위기가 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있어 필요한 인내와 연단의 과정임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겠다.
스티븐 코비는 성격(개성, Personality)윤리와 성품(인성, Character)에 대한 설명에서 현대인들은 삶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함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 건국 후 최초 150년간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성품윤리라고 부르는 인성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예컨대 언행일치, 겸손, 충성, 절제, 용기, 정의, 인내, 근면, 소박, 수수함, 그리고 황금률 등이 있다. 대표적인 문헌으로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들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깊이 감추어진 내면적 원칙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습관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을 다루고 있다. 성품 윤리에 따르면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기본원칙이 반드시 있어야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원칙을 배우고 또 이것을 자신의 기본적인 성품에다 통합시킨다면, 진정한 성공과 행복한 삶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성공을 보는 기본적 시각은 성품윤리에서부터 소위 성격 윤리로 바뀌어 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해주는 성격, 대중적 이미지, 태도와 행동, 나아가 기법과 기술이야말로 성공에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이와 같은 성격 윤리는 근본적으로 2가지 분야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개인 및 대중을 상대할 때 필요한 각종 기법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런 성격 중심의 접근법은 조작적이며 심지어는 기만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해 술수를 쓰게 되고, 또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다른 사람의 취미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마치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듯이 보이도록’하거나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위협적인 수단을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현대 우리 민족은 이런 성격 윤리적 가치관과 문화에 젖은 지 오래이다. 또한 이런 가치와 문화는 교회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서, 대형 교회만을 추구하는 교회 성장학이나 소위 외적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가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사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위기의 사회 문화적 원인은 성격 윤리적 문화와 그 가치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에 편승하지 못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소위 위기를 경험하면서, 내적인 상처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스티븐 코비를 빌어 필자가 다루고 있는 위기 상담과 내적 치유는 성격 윤리적 패러다임에서 성품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즉 위기를 통해 자신의 ‘하나님 형상, 내면의 성품, 속사람, 은사 등 : 참 나’를 오히려 발견하고, 그 스스로(형상, 성품과 내면, 속사람, 자신만의 은사 등)의 힘으로 현재에 적용하며 현실을 창조적으로 헤쳐 나가는 삶에로의 인도가 위기 상담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한가?
잠 4: 23의 “네 자신의 마음속을 최선을 다해 찾아보라.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말씀처럼 자신의 내면을 통해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 발견하는 것이 그 열쇠이다. 이 열쇠는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묵상하며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까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히 13:8)을 닮아 가는데 있는 것이다. 빌 2:5에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라고 말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하고 그 마음을 품는 것이 근본적으로 위기를 대응할 수 있는 하나님 성품과 그 인도하심을 확신하는 길이고, 나의 성품을 하나님 형상대로 가꾸어 현실을 극복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B. 방향
성경은 단순히 율법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지침서이다. 딤후 3:16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말씀처럼, 성경은 위기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우리 삶의 인도자 역할을 한다. 잠 16:3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의 말씀처럼, 성경은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에 있어서도 방향을 제시해 준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공포, 우울, 낙심 등과 같은 구체적인 감정 상태에 따라, 롬 8:37-39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엡 2:13-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등과 같은 성경구절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좋다.
C. 기도의 능력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빌 4:6-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리라” 말씀처럼 위기 속에서 우리 마음을 분열시키는 모든 염려를 기도를 통해 토하며 하나님께 맡길 때,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는 마음과 생각에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D. 성령의 위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다. 이 위로가 우리의 놀라운 영적 자원이다. 성령의 위로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마음 깊은 곳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안을 간직할 수 있다. 요 14: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에 나오는 보혜사 성령은, It나 Power가 아니라 우리를 곁에서 보호하시고 위로하시며 상담해 주시는 인격적인 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통해, 우리는 삶의 위기 속에서 겪을 수 있는 마음의 근심과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 등을 넘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령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에서 더욱 진전된 계시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연약할 때 연약함과 연약함을 겪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정죄하는 마음이 있을지 모르나, 성령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연약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도와주시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아픔과 탄식에 참여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에 나오는 “흙과 생기”가 성령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롬 8:26의 “연약함과 도우심(루아흐)”이라고 성찰한다. 그래서 위기와 관련해서 ‘우리는 흙과 같은 연약한 존재요 인생이나, 성령의 생기와 도우심으로만 생령(위기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보람, 행복을 느끼고 가꾸어 갈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고 성찰하고 있다.
E.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이 깊은 교제 가운데서 서로 위로하고 가르치기를 원하신다. 고통스러운 위기가 찾아올 때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이 몸의 지체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도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의 한 부분이 상처를 받으면 몸 전체가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다(고전 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의 한 지체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부분이 협력하고 도와주어야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다.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는 방법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막 12:30-31)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인 것이다.
한편 사도바울은 롬 15:1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아니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논리로 볼 때, 위기 속에 있는 연약한 자를 무능력한 자나 세상의 낙오자 등과 같이 취급할 때가 많다. 또한 연약한 자의 약점이 보이면 감싸주거나 덮어주기 보다는 들추어내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을 때가 많다. 그러나 교회란, 그리스도인이란 상대방의 연약함이나 약점을 자기 문제로 담당하면서 함께 고난과 삶의 위기를 나누는 공동체이자 삶이라는 말씀이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자기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자기 의를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다. 한편 연약한 자의 약점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 강한 자가”, 우리는 개인적으로 믿음이 강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서로 신뢰하고 연약함을 책임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 자신이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성품을 주 안에서 계발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삶의 위기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면서 ‘치유하고 위로하며 회복시킬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목회를 펼쳐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와 설교, 관계 중심의 소그룹 프로그램 계발, 리더들의 양성과 섬김 등의 목회가 펼쳐져야 한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자에 의해 치유되고 회복된 연약한 자가 다시 믿음이 강한 자가 되어 연약한 자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5가지 영적 자원에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추가한다. 히 4:15-16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다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 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다. 높은 곳에서 호령하고 우리의 아픔과 상처는 보살펴 주지 않을 것 같은 신이 아니라, 공생애를 통해 우리가 삶의 위기를 통해 겪을 수 있는 눈물과 상처와 아픔과 시험을 다 겪으셔서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위기에서 아프고 상처 받은 연약한 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담대히 주 앞에 나아가 통곡하고 아픔을 토하라는 말씀이다. 그리하면 여러 가지 삶의 주기를 따라, 그것이 위기일 때라도 ‘때를 따라 도와주시는 주의 은혜’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야말로 위기와 관련하여 큰 영적인 자원이 될 것이다.
Ⅱ. 내적 치유
1)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① 내적치유는 속사람의 치유(Inner Healing)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안에서, 영혼 안에서 일하신다. 내적 치유는 인간의 기억들, 깊은 마음들, 인간의 삶의 경험들 안에서 잘못된 부분을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다. 그래서 인격, 성격의 변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영혼의 참 자아를 불러내고, ‘참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살아가지 못하는 영혼을 자유케 하여 자신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② 내적치유는 기억, 상한 감정들의 치유
(Healing of Memories, Healing of wounded Heart/Emotion)이다.
기억이 우리를 묶고 정신적인 면에서나 인간관계의 불구자, 절름발이가 되게 한다. 씨맨즈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인도의 어느 마을의 바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팔고 사고 있었다. 한 농부가 메추라기 몇 마리를 가져왔다. 그는 새의 한쪽 다리를 철사줄로 묶어 놓았다. 그리고 그 철사의 다른 쪽 끝을 한 데 묶어서 말뚝에 고정시켜 놓았다. 슬픈 듯이 줄에 묶여서 말뚝 주위를 뱅글 뱅글 돌았다. 마치 좁은 우리 안에 갇힌 노새처럼...아무도 메추라기에 관심을 갖거나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독실한 힌두교 신자가 왔다. 그는 힌두교의 교리에 따라서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는 묶여 있던 메추라기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다. 그는 이 메추라기의 가격을 물어보고는, “이것들을 모두 사지요.”라고 말했다. 그 장사꾼은 크게 기뻤다. 그러나 그는 돈을 받은 후,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것들을 다 놓아 주시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이 안 들립니까? 철사를 다 끊고 발에 묶인 것을 다 풀어서 놓아 주세요.” “그래요? 할 수 없죠. 좋으실 대로 하세요.” 농부는 칼로 철사줄을 모두 끊어 새들을 놓아 주었다. 그런데 그 새들은 여전히 묶여 있던 말뚝의 주위를 돌로 있는 것이었다. 이 힌두교도는 “휘이! 휘이!”하고 소리를 지르며 새를 쫓았다. 새들은 놀라서 말뚝에서 좀 멀리 달아났지만, 이번에는 멀리서 더 큰 원을 그리면서 빙글 빙글 돌기 시작했다. 자유로워졌고 묶인 것도 풀렸고 놓임을 받았지만 여전히 묶여 있는 것처럼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위의 이야기가 내적 치유를 잘 예시해 준다. 새들은 현재 철사줄 때문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철사줄에 묶여 있던 자신의 기억에 의해 현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들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생명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굴레가 되어 불구나 절름발이가 되게 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기억들과 상처들을 서로 나주지 않고 영혼의 어둠 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들이 너무 강해져서 나중에는 위의 새들처럼 우리가 그 파워에 묶여 버릴 수도 있다.
③ 내적치유는 하나의 과정(Process)이다.
현재의 문제가 과거의 상처라는 역사적인 뿌리에서 자라 나온 것이므로 뿌리를 제거해서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켜 주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과정 안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1주일이 걸렸다. 우리를 살펴 볼 때도, 현재의 우리가 되는데 수십 년이 걸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적 치유도 하나의 과정으로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인 것이다. 씨맨즈는 이에 대하여‘나무를 잘라보면 놀랄 만큼 수많은 나이테들이 있다. 이 나이테들은 기나긴 역사와 세월들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다. 어떤 나이테는 그 당시에 겪었던 극심한 가뭄을 담고 있고, 어떤 나이테는 벼락을 맞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또 별 탈 없이 보낸 세월도 담고 있다. 또 다른 나이테는 온 수목이 타 없어질 만큼 엄청난 산불을 목격했다. 또 견디기 힘든 병해를 겪은 나이테도 있을 것이다. 이 나이테들은 모두 이 나무의 성장에 관한 자서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와 같은 나이테가 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은밀히 감춰진 나이테와도 같은 인생의 기록이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무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나이테가 형성된다. 인간의 영혼도 상처를 입을 때마다 영혼의 나이테를 갖게 된다. 나이테 수만큼 하나하나의 나이테를 치유해 가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다.
2) 치유의 성경적 기초
○ 삼위일체의 하나님
* 성부 하나님
렘 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 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 성자 하나님
히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성령 하나님
롬 8:26-2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내적치유/마음과 관련된 성경
*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리라”
*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 예수 그리스도는 눅 4:17-19에서 위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다. 곧 주의 사역은 이사야 예언을 성취하신 것으로‘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마음의 치유에 관심하신 것이다.
* 마 11:28-2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리”
*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3) 무엇을 치유할 것인가?
: 상한 감정의 치유 씨맨즈의 상한 감정의 치유워크북을 참고하고, 평소 이에 대한 필자의 관심을 정리해 보았다.
a. 자기비하, 분노, 욕구불만, 열등감
이것은 “나는 좋은 사람이 못돼. 나는 아무 쓸모가 없어.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어. 내가 하는 일은 되는 일이 없어”이와 같은 감정이다. 열등감은 ‘내가 어딘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마음의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얼마 동안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그의 안의 모든 감정은 “다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기도?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하나님이 나의 말을 들으신다고? 그 누구도 나를 돌보지 않아. 그 누구도 나의 근심을 경감시킬 수 없어.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겠어? 세상에 나처럼 나쁜 사람은 없어”라는 자기 비하, 열등감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열등감의 한복판에는 부끄러움, 수치감이라는 감정이 있다. 부끄러움(수치감)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민 13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보고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이들 중에서 10명은 가나안 땅을 악평한다. 왜냐하면 가나안 거민(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을 보고 이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다가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메뚜기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메뚜기 병이 곧 열등감이다. 10명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은 두려워서 울며 떤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이들과 달랐다. 가나안 땅을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하고 있다. 물론 2사람도 가나안 거민을 보았지만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땅을 보았는데, 이들의 보고가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0명은 가나안과 가나안 거민을 이스라엘 자신들과 비교하였기 때문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거민들과 자신들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가나안의 비전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열등감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과 나를 향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붙들 때 가능하다.
b. 완벽주의 콤플렉스-지나친 완벽주의, 율법주의
이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에게 늘“나는 제대로 해낼 수 없어. 무슨 일이든지 만족스럽게 처리할 수 없을까?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을 제대로 기쁘게 해드릴 수 없을까?”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완벽을 기해야 한다는 내적인 강박관념 때문에 늘 무언가를 찾고 더듬고 캐보려 하며 애쓴다. 만족감이 없고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낀다. “나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저 정도는 해야 한다. 조금 더 잘해볼 수는 없을까?”그는 정상을 향해 쉬지 않고 올라가지만, 영원히 그 정상을 밟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완벽을 기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마치 그가 올라야 할 정상에 있을 그 무언가로 느껴진다. 그는 자신에게 “이제는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열심히 올라가야 해. 나는 그분의 자녀이고, 무엇보다도 그분을 기쁘게 해드려야 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곳까지 올랐을 때, 하나님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그는 좀 더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한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결국 새로운 정상에 올랐을 때,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시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노예 감독자처럼 느끼게 된다. 이런 완벽주의 콤플렉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악 영향을 미치며,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에 있지 못하게 한다. 내가 완벽주의 콤플렉스에 걸려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평소 나는 ‘칭찬과 축복을 잘 하고 사는지’를 보면 된다.
롬 4:1-8에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았다는 것’이고 ‘이런 은혜, 이런 사실을 아는 자가 복이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는 자는 자신이 일을 해서 그 삯으로, 그 대가로 은혜가 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일하는 자가 완벽주의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이다. 은혜에 대한 이런 사고체계는 결국 신관에까지 그 영향을 미쳐, 하나님께 잘 보이고 은혜받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완벽주의 콤플렉스로부터 자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첫째로 복음의 은혜를 온전히 깨우치고 누리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도바울의 외침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은혜로 보고 감사로 누리는 복음의 삶을 깨우쳐야 한다. 둘째로 만족이다. 완벽주의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들은 ‘조금 더’의 병에 걸려있다. 즉 늘 부족한 점을 보는 눈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자족하고 만족스럽게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일이다.
c. 두려움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봐 겁을 낸다. 두려움에 가득찬 사람은 늘 ‘이 정도만’이라는 단서를 항상 붙이며 생각하고 말한다. “이 정도만, 혹은 저 정도만 하라면 쉽게 할 수 있겠는데.”라는 식이다. ‘돈이 많았으면, 사업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그때 이 사람을 만나지만 않았다면’등의 ‘이 정도만의 상황과 환경 탓’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역설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오히려 성취할 수 없다. 이들이 만약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믿음 자체를 매우 위험스럽게 여길 것이다. 믿음을 갖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또 남에게 신앙을 증거 하기도 매우 어렵다. 신앙을 결단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성령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복종하라는 요구 자체가 그에게는 큰 충격일 것이다.
성경이 두려움에 대하여 문제 삼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대상 그 자체보다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가진 파괴적인 위력 때문이다. 두려움은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매사에 자신감을 잃게 한다. 둘째로 우리의 내면을 마비시킨다. 셋째로 우리의 꿈과 비전을 상실시킨다. 넷째로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달란트 비유의 말씀을 보면, 주인으로부터 각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둔다. 그의 삶 자체가 땅속에 묻혀있는 재물과도 같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종은 주인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웠고, 실패가 두려웠고, 자신들의 달란트를 효과적으로 투자한 다른 두 종과 비교되는 것이 두려웠고, 실패의 위험을 지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두려움이 이 종과 우리의 내면을 마비시키고 자신감을 잃게 하여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 사단이 바라는 것은 우리를 두려움에 꽁꽁 묶어 두어 결국 자신의 잠재력에 비해 형편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믿음의 첫 번째 열매는 자신감-용기이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 예수에 십자가 처형이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 초대교회 역사, 로마 카돌릭에 대한 개신교의 종교 개혁사 등은 믿음의 첫 열매가 용기와 자신감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의 이면은 바로 용기와 자신감을 포함하는 것이다. 한편, 10명의 가나안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은 ‘두려워 울기 시작했다’라고 전해진다. 두려움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이스라엘 지도자를 포함하여 서로에 대한 신뢰를 파괴시키는 장면이다. 이에 반해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비전을 당당히 말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어떤 약속인가?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어떻게 자유 할 수 있는가?
* 수 1:9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과 의식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살게 한다.
*시 56:1-4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요 14: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시편 기자처럼 두려워하는 날에 즉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하는데, 요한은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께 모든 것을 상담하고 가르침을 받아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평안을 누리라’고 깨우쳐 주고 있다.
* 요한1서 4: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딤후 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사랑의 상실이 두려움과 그 형벌 속에 우리를 가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데,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인 능력과 사랑과 근신(지혜)로운 마음으로 회복하여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d. 과민증, 민감증
과민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대개 심한 감정의 상처를 받는다. 이런 사람은 사랑을 추구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애정을 구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며 그의 마음 속에는 깊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는다. 그들은 때때로 남들은 보지 못한 것들을 보며 느끼지 못하는 것까지 느낀다. 그런데 때로는 이들이 민감한 감각이 무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러 차례 상처를 받은 나머지 그들의 민감한 성격을 거칠고 무뚝뚝한 모습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소유하고 지배하기를 원하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자신의 돈, 지위, 권위, 섹스 등을 동원하기도 한다.
과민증의 한 형태는 질투이다. 질투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삼상 9장 이하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인물이 준수하고 키도 컸다. 또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으려할 때,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중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사람이고 나의 가정은 베냐민 지파 중 가장 미약한 가정입니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사울이 이런 초기의 겸손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사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울이 언제부터 잘못되었는가? 삼상 18장을 보면, 다윗이 블레셋 무리를 무찌르고 돌아온다. 그때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외친다. 이 소리를 사울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리를 들은 사울이 불쾌해 하고 분노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간 사랑하는 신하 다윗에 대한 질투의 감정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울은 하나님이 떠났고 악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일생 다윗을 쫓아다니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자신의 칼에 자기를 찔러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자녀들도 몰살되게 만들어 버린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다윗에 대한 질투의 감정에서 출발하였다. 만약 사울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위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이라는 말에 자신의 수하 중 위대한 인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었더라면, 다윗과 상대방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도량을 가졌더라면, 그의 일생이 행복했을 것이고 후대에 크게 칭송받는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과민증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까? 첫째로 마 6:2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고 나팔을 불지마라. 저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의 말씀처럼, 사람의 영광과 인정함에 민감하여 땅의 상급을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상급을 구하는 삶에로의 전환이다. 둘째로 자신의 것을 감사하고, 상대방의 영역을 존중하되 하나님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눈을 갖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무지개로 표현하고 싶다. 이것은 자신의 색깔은 자신대로 발하고, 상대방의 색깔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함께 어울려 무지개 빛깔을 발하는 공동체적인 삶을 가리킨다.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와 일치 속에서의 열려진 선교’라고 표현하고 싶다.
4)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먼저, 나 자신에 대해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에 대하여 오우츠는 ‘정신 의학자들은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항정신제 약품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의사를 찾아가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정신 의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정신 요법을 실험할 기회가 거의 없다. 이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결혼과 직장 문제로,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풍랑을 만나 인생의 배가 좌초되었건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내면을 드러내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배우려 하지 않는 자세-이것은 마음의 강퍅함이다-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거쳐서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오랜 가르침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배우며, 강퍅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과거에 받았던 이 가르침을 다시 지워 버려야 한다. 부모나 교사, 의사나 목사 등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다시 돌이켜 회복시켜야 할 어떤 것도 없다면, 그는 정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잘못된 인격적 장애나 상한 감정을 치유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청된다. 이에 대하여 씨맨즈는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롬 8:26)으로 상담과 치료의 한 부분을 담당하신다면, 우리는 ‘a.문제를 직시하라 b.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라 c.진심으로 치료받기를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d.문제와 관련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 e.자신을 용서하라 f.당신의 문제를 정확히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이를 위해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도록 성령님께 기도하라’라는 치료의 6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