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10
김지철 교수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이 당시의 종교선생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행위'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의 행위가 당시의 행동주의자나 마술적인 기적행위자와 구별되는 이유 또한 그의 행위와 함께 나타난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 그의 '말씀선포'에 있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기적행위였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현대인들이 성서를 대할 때, 예수의 기적들이란 결코 쉽게 접근해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당혹스러운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증명과 반복의 가능성을 요청하는 오늘의 세계관이 기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회적인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기적행위는 첨예화된 중요사안임에는 분명하나 이를 목회현장에 접목시키는 데는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하면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이를 기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이나,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구원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예수의 기적사화를 새롭게 논의의 중심으로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예수의 기적사화는 복음서의 예수전승에 있어서 양적으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비평적인 신약학자들이 지닌 기적에 대한 역사적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은 예수의 기적사화를 그에 대한 이해의 중심적인 자리에 놓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더우기 케리그마에 의해 채색된 그리스도상이 복음서를 휘감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약학자들의 해석은 예수의 선포와 교훈에 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도록 했으나, 그 반면에 예수의 삶과 행동양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보다 저조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성은 독일에서 출간된 '예수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R.Bultmann, Jesus, 1958; G.Bornkamm, Jesus von Nazaerth, 19605, H.Braun, Jesus, 19692, M.Dibelius, Jesus, 19492 등). 그것은 어쩌면 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지상적 예수'를 찿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만들어낸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트만 이후 지속된 지상적인 예수에로의 관심전환은 상황변화를 일으켜 왔다. 즉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논쟁은 단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통전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J.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1970; P.Stuhlmacher, Jesus von Nazareth - Christus des Glaubens, 1988; 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Band I, 1992). 따라서 최근에 다시 예수의 삶과 사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다. 이는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변화라 할 수있다(G.Theissen, Der Schatten des Galil ers. Historische Jesusforschung in erz hlender Form, 1984; J.Gnilka, Jesus von Nau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1990; R.Schnackenburg, Die Person Jesu Christi im Spiegel der vier Evangelien, 1993). 특히 지상적 예수의 모습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은 말씀 선포와 교훈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몸으로 산 그의 행동양식과 삶에로의 관심의 전이를 가능하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어떻든 예수가 당시에 있어서 실제로 치유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신학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 예수가 치유자였는가 하는 것과, 기적으로서의 치유에 대해 역사적 진정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치유의 신학적인 해석과 더불어 목회
적인 적응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치유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물음은 성서해석의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초점은 이미 정경으로 쓰여진 복음서가 증거하는 본문의 틀에서 예수의 기적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 즉 치유기적사화에 대한 문학적인 구조분석과 편집사적인 맥락에서의 이해를 전제하면서 예수의 치유기적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에 그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의 구체적인 목회현장에서 예수의 치유를 신약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에 그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있어서 예수의 치유는 어떤 근거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제식으로 서술하며 본 논문을 이끌어 나가고자 한다.
1) 예수의 치유기적은 양식사적으로 보면 '기적사화'의 양식에 속해 있다. 이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에 대한 설명적인 전승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1. 복음서기자들은 예수의 기적사역을 예수의 말씀과 밀접히 관련시키고 있다. 마 5-7장의 산상설교와 마 8-9장의 기적사화, 막 1,15: 1,22의 말씀내용과 막 1,23-28; 1,29-34의 병치유와 축사, 그리고 눅 6,17.18; 10,9에서도 병자를 치유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의 관계가 그러하다. 또한 요한복음(5.6.9.11장)의 치유사건도 그것과 더불어 나타나는 그 표징의 의미가 깊이 관련되고 있다.
2. 기적사화의 틀은 광의의 범주에서는 ① 배경적인 설명, ② 치유의 과정 제시, ③ 결론적인 증명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R.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236-241 참조).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의 틀을 지닌 것이 발견된다(H.Van Der Loos, The Miracles of Jesus, 120-133 참조. G.Theissen, Wundergeschichte, 57-89에서 치유사건의 대한 33개의 다양한 모티브를 제시한다).
① 질병의 상태의 심각성 제시(막 5,3-5; 9,18-22; 질병들린 햇수명시: 막 9,21; 마 9,20; 눅 13,11; 요 5,5)
② 공식적인 의료행위의 실패(막 5,26)
③ 치유자에 대한 회중의 조소(막 5,40)
④ 치료의 어려움(치유과정의 복잡성 제시 막 7,33; 8,23).
⑤ 치유자와 치유대상자와의 만남(눅 4,39; 눅 7,11)
⑥ 치유처방(만짐/말씀:마 9,2; 9,22/침바름등)
⑦ 병치유받은 증거(막 1,31: 시중듬; 막 1,44; 2,12; 눅 5,25; 요 5,9; 막 5,43).
⑧ '곧'이라는 상황전이 부사가 등장
⑨ 귀신들의 간청과 반격(막 1,24; 5,7.12).
⑩ 회중들의 반응(막 6,51.52; 눅 6,11; 요 2,11).
3. 기적사화는 지상적 예수의 행위에 의거하여 치유받은 사람들과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어떠한 새로운 이해를 지니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들에게 예수의 기적사화는 아마도 원시기독교회의 선교적인 목적을 위해 전승 보존되었던 것 같다. 이 기적사화에서 예수는 우주적인 투쟁의 승리자로서 부각된다. 즉 마귀들의 세력보다 더 큰 분이 예수라고 하는 것이 그들이 이해하는 기적사화의 초점이다.
2) 갈릴리에서 활동한 나사렛 예수는 그의 공생애 사역기간에 실제로 질병들린 자들을 위해 치유사역을 행하고 귀신을 내쫒았다. 치유사역, 곧 귀신축출과 병치유는 예수의 사역을 결정적으로 특징짓는 것으로서 예수의 진정한 지상적인 행위(ipsissima facta)였다(O.Betz, art. Heilung, in TRE 14).
1. 기적사화가 고정된 문학양식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이 예수의 치유보고를 부활절 이후에 생긴 경건한 환타지로 해석 해야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즉 기적사화를 통해서는 지상적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없고, 다만 원시기독교회의 신앙에 대한 정보만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은 결코 적절하지 못하다. 부활절 신앙이 예수의 치유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치유사역이 부활절 신앙과 결합되어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의 근거로 서술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옳다고 할 수 있다(참조 K.Seybold und U.M ller, Krankheit und Heilung, 95 이하). 따라서 원시기독교회의 부활신앙이 예수를 통한 새로운 치유기사를 만들어 낸 근거로서 확대, 과장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2.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가 불과 2-3년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된 것은 아마도 이 기적사건들, 곧 예수의 치유사역 때문이었을 것이다(막 1,28). 예수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축사와 병치유행위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색인되었고 그러한 예수의 지상생애의 치유활동과 관련한 예수의 기적전승이 그들에게 잘 기억되고 보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예수의 기적에 대한 적대자들의 비난은 당시 그의 기적사역(귀신축출과 병치유)이 지닌 진정성을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J.Gnilka, Jesus von Nazaret, 126). 특히 예수가 안식일에 행한 치유에 대한 논쟁(막 1,23-28; 3,1-6; 눅 13,10-17)과 그의 축사가 마귀와 결탁하여 이루어진다는 비난(막 3,22-27; 마 9,34; 12,24; 눅 11,17-19)등은 그 사건이 실제적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예수의 적대자들조차 예수가 치유기적과 귀신축출의 역사를 행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를 죽이려고 한 이유 역시 예수의 축사행위와 병치유(눅 13,32)로 인한 예수의 대중적 인기에 대한 위협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4.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도 마태(11,2-6)와 누가(7,18-23)는 예수의 치유행위가 '오실 자'의 사역의 중심부분임을 말해준다. 특히 누가는 마태와는 달리 예수의 대답이 있기 이전에 예수의 치유행위를 하나의 사건 보도로 삽입시키므로써 이 사실을 예수의 대답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보고는 곧 예수의 치유사건이 그의 구체적인 삶에서 일어난 것임을 보여준다(A.Suhl, Die Wunder Jesu. Ereignis und berlieferung, in Der Wunderbegriff im Neuen Testament, 487 이하 참조).
5. 복음서에 나타난 개체적인 보고와 포괄적인 요약보고는 모두 예수의 치유를 말하고 있다. 마태(4,24; 8,16; 12,15;14,14; 14,34 이하; 15,30이하; 19,2), 마가(1,32-34; 3,10; 6,53이하), 그리
고 누가(4,40; 5,17; 6,19; 7,21; 행 8,6 이하)는 특히 예수의 지상활동('예수께서 그에게 나아오는 자를 고치셨다')을 요약보고 형식을 통해서 예수의 치유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증거해 준다. 곧 복음서 본문에 나타난 구체적인 치유의 과정이나, 회중들의 반응등은 그 기적사화들이 현실적이고 구체적 사건이었음을 보여주는 전승들인 것이다.
6. 예수의 저주말씀(마 11,20-24; 눅 10,13-15)에서도 이러한 예수의 능력은 전제된다: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 )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7. 원시기독교회의 설교문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의 케리그마 또한 예수의 치유사역이 그의 지상생애를 가리키는 중심내용임을 말해준다(행 2,22;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이는 분명히 누가이전의 전승으로 보인다: R.Pesch, Die Apostelgeschichte, 343)
3) 질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죽음에로 몰고가며 억압하는 사탄적인 세력이다. 이 세력은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샬롬을 파괴하며, 인간에게서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박탈하는 반신적인 인격으로 등장한다. 질병은 한 인간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어야 할 가정안에서의 교제를 상실케 하고, 사회의 공동체안에서 누려야 할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1. 질병은 사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질병을 언제나 귀신들림에 의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나, 귀신과 병들림의 상관관계를 명백하게 보이는 귀절들도 공관복음서에서 여러번 나타난다. 예를 들면, 막 5,1이하(거라사 귀신들린 사람), 마 9,32(귀신들려 벙어리된 사람), 눅 11,14(벙어리 귀신을 쫒아내니 벙어리가 말하다), 눅 13,11(18년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 등을 펴지 못하는 여인: 사탄이 이 여인을 18년 동안 얽매어 놓았다;13,16), 막 7,24 이하 병행귀(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 막 9,17 병행귀(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 등이다. 예를 들면 귀신이 한 인간의 자기됨을 상실하게 하고 그 안에 거하면서 대답하고 있는 모습이다. 곧 귀신들린 자의 행위가 인간에 의해 조정되지 않고 귀신에 의해 억압받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막 9,14-29).
예수는 질병을 통해 나타난 인격화된 사탄의 세력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 다 귀신들림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모든 질병을 귀신축출을 통해서 치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으로 하여금 질병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그 자신의 사명임을 알고 있었던 예수에게 있어서 질병 치유란 죄와 죽음이 만연된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탄과의 투쟁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수는 인간을 위하여 이 세계 속에서 사탄과 대항한다. 그러기에 그 투쟁은 우주적 성격을 띈다. 귀신들은 이러한 예수를 향해 격렬하게 질문한다: "왜 우리를 없애려고 하는가?"(막 1,24). 예수는 바로 귀신축출을 치유로 이해했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샬롬이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2. 그러면 질병은 질병들린 개인의 죄악된 행위의 결과인가?
① 구약에 나타난 질병과 죽음은 개인 또는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됐다(창 3,16; 38,7.10; 민 11,33 이하; 25,8 이하; 신 28,21.22.27.28.59.60; 삼하 24,15 이하; 왕하 1,6 이하; 5,27; 15,5; 대하 26,16 이하; 시 32,3 이하; 38,2 이하; 51,10 이하; 88; 107,17-22 등). 예를들면 욥기의 엘리바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생각해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4,7). 그러나 욥기의 결말에서는 이러한 질병과 징계와의 상응하는 동일화과정이 극복되고 있다.
② 이러한 인과응보적인 죄와 질병과의 관계는 유대 랍비주의에서 더 짙어진다. 질병은 모두 다 구체적인 죄로 인한 결과로 간주되었다(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II, 193ff; 527ff).
③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구약적인 사상의 맥락을 띈 유대주의적인 인과응보의 교의적 이해를 거절한다(눅 13,1-5; 요 9,2-5). 인재(人災)와 자연재앙으로 말미암은 희생자들이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씀한다. 곧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자기 자신이나 부모의 죄때문에(출 20,5; 민 14,18; 신 5,9; 렘 31,29; 겔 18,2 등 참조) 발생한 징벌이라는 유대주의적인 단선적 인과응보적 사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특히 질병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과응보적 도식으로 축소 내지 집약시키는 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인과응보의 엄격한 구조를 지닌 생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에로 향하게 함으로써 회개의 자리로 초청한다. 따라서 인간이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시고 영광을 보여주는 은혜의 자리가 될 수도(요 9,3; 11,4) 있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서주로서의 종말적인 위기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눅 14,5)는 것이다.
④ 죄와 질병, 그리고 용서와 치유와의 관계는 구약에서 보면 하나의 순환적인 고리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질병과 재앙을 보내시고, 반면에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에게는 죄용서와 치유를 허락하신다. 기도하는 자를 들으시고, 죄용서와 더불어 병치유를 허락하시는 것이다(창 20,17; 시 30,2; 41,4; 사 19,2; 38,1-8; 렘 3,22; 17,14; 대하 7,14; 시 103,3; 사 19,22; 38,17; 57,18.19/ 렘 3,22; 6,14; 8,11; 33,6; 호 7,1; 11,3; 14,4).
예수에게 있어서도 죄용서와 질병치유의 관계(막 2,1-12 참조)는 매우 밀접하다(C.-H.Sung, Vergebung der S nden, 288-321 참조). 예수는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일으켜 세움으로 그가 하나님만이 소유한 죄용서의 권한(Billerbeck, I, 495f)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특별히 죄용서라는 내적인 치유와 병치유라는 외적인 치유가 결합돼 있음을 말해준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죄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자리가 곧 그의 육체적인 치유를 경험하는 자리임을 가르쳐준다. 그 때 비로서 한 인간의 전인적인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예수의 병치유의 사건에서도 죄용서가 이미 병치유 사건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죄용서나 병치유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수행된 것(ex opere operato)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덧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단지 병치유만을 하는 경우에도 '믿음'과 '구원'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대주의의 종교사회적인 틀에서 파악할 때 질병은 곧 한 인간의 종교적이며 사회적 자리까지 위협하고 파괴시키는 세력이었다.질병이란 언제나 반종교적이며 반가정적이고, 또한 반사회적인 특징을 지녔다. 종교적으로는 삶의 근간이 되는 율법에 의해 정죄되었고, 가정과 사회적 맥락에서는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분리와 소외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질병들린 자는 유대주의적 판단에 의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결한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문둥병(참조 Josephus, Bell.Jud, 6.426f.;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I, 520)은 하나님에 의한 저주의 병으로 간주되어(민 12,12; 레 12,45-46) 유월절 축제를 함께 나눌 특권이 없는 것은 물론 그 종교, 사회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었다. 귀신들린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정에서 부터 떠나 무덤과 산에서 방황하도록 버려졌다(막 5,1 이하; 그런 의미에서 "집으로 돌아가라"(5,19)는 명령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소경 또한 그러한 종교 사회적인 삶의 구조에서는 만년 가난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구걸로 생계를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막 10,46; 요 9,8).
4) 예수의 치유사역이란 하나님 나라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증거가 예수의 치유사역이다. 바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역사의 자리에 뚫고 들어왔다는 표지다.
1.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에 대해 예수가 선포했다는 것은 그 선포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를 거부하는 거대한 반신적인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세력들에 대한 멸절 선언이라는 부정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존엄성을 파괴시키고 자기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질병을 예수는 적대적인 마귀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쫒아내야 할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마귀는 죄와 질병과 사망이라는 불순종의 유산을 이용해 인간을 위협하고 억압하고 파멸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사탄과의 투쟁이었고, 그 구체적인 사역이 귀신추방과 병치유로 나타났던 것이다(마 12,28; 눅 9,2).
2.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예수의 귀신축출과 병치유를 통해서 현재화되었다.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눅 10,18)라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의 주권을 펼치고 계신다는 예수의 확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악의 근원자로서의 사탄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준비하신 그 일을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이 세상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귀신이 쫒겨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던 마귀는 패배를 당하고, 이제 그의 세력을 지녔던 시기는 종말을 고했다: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성령으로 귀신을 쫒아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눅 11,20; 마 12,28; 비교 막 3,27; 6,7.13; 눅 10,18;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출 6,19; 신 9,10; 출 31,16; 시 6,3을 참조하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손'이나 '하나님의 영'은 상응개념이다). 유대주의에서 미래에 올 것으로 기대됐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현존에 의해서 사탄과 그 능력은 끝나고(모세의 승천기, 10,1) 이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Qumran 공동체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알고 있었으나 중재하는 인격과 관계된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다스리신다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출현을 보여주는 지상적인 표지였다. 예수의 귀신축출은 말하자면 사탄, 곧 강한 자의 집을 쳐부수고 그 억압을 푸는 하나님의 사건이다(막 3,27). 병치유와 귀신축출은 따라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찿기 위한 예수의 사역의 핵심이었던 것이다(마 10,6-8; 눅 9,2). 그러한 예수의 사역은 현재를 하
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야적인 기대를 충족시켰던 것이다(H.D.Betz, Jesus als g ttlicher Mensch, in Der Wunderbegriff im Neuen Testament, 423).
마태에 의하면 산상설교가 메시야의 가르침인 것처럼 예수의 치유사역은 바로 메시야적인 행위들이었다(마 11,2이하). 예수의 병치유는 곧 종말론적인 메시야 왕국의 선취적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말하자면 인격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구체적인 현현이었다. 그의 나타남 자체가 사탄과 귀신들의 세력들로 둘러싸인 세상을 향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이 세계는 그들로 말미암아 죄와 질병으로 비틀어지고, 악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이 억압된 세계를 하나님의 기뻐하는 세계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신 표징이 예수의 치유행위였다. 이로써 미래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던 우주적인 구원의 기다림이 예수의 기적 치유를 통해 현재적으로 그 실체가 현현된 것이다.
3.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말씀과 사역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은 예수의 낮아진 삶, 곧 그의 비천성과 민중성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다. 예수는 병치유를 통해서 고난당하는 민중과 만났다. 치유는 긍휼히 여기는 예수와 그를 향해 간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예수의 귀신축출과 병치유의 기적행위는 은폐성을 띄고 있다. 마 11,6의 "나를 인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감추어진 계시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의 은폐성이란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지닌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이 종말론적인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삶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의 인격 곧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인간이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판명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치유사역은 단순히 일반 의사의 치유활동과는 유비 될 수 없다.
5) 예수의 치유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연속선에 놓여있다. 예수의 치유는 긍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1. 예수의 병치유는 구약과의 밀접한 관계를 지닌 행위였다. 첫째는 복음서가 예수의 병치유를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의 성취요 완성(마 11,5; 사 29,18; 35,5; 61,1 이하)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둘째는 예수의 치유사역을 말해주는 중요한 본문인 눅 4,17 이하와 마 11,4이하(눅 7,21이하)가 근본적으로 구약말씀의 인용인 것을 통해 알 수 있다(참조 사 61,1; 29,18; 32,3 이하; 35,5.6). 특히 예수의 치유는 이사야의 하나님의 종과 상응하는 사역으로서(마 8,16.17; 사 53,4/ 마 12,15-21; 사 42,1-4) 구약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부각되고 있다. 셋째로 예수가 행한 구체적인 치유기적 서술 또한 구약적인 문학적 틀의 영향을 받고 있다(막 5,35-43; 요 4,46-54; 참조 왕상 17,17-24; 왕하 5,1-14).
2.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위대한 치유자였다(창 20,17; 신 28,27.35; 왕하 5 장; 20,1-11; 출
15,26; 시 6,2; 103,3). 인간이 질병의 고통중에서 궁극적인 도움을 청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셨다. 예수는 이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은 자(눅 4,18.19; 사 61,1.2), 능력을 지닌 인자(막 2,10.11; 참조 시 103,3; 단 7,13.14)로 오셔서 연약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용납하신 것이다.
3. 예수의 병치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는 긍휼이다(눅 1,68; 7,16; 출 4,31; 룻 1,6).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긍휼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막 5,19:; 마 9,13).
6) 하나님의 긍휼에 기초한 예수의 치유는 전인적인 인간회복운동이었다. 예수는 인간을 전인적으로 이해하고 전인적인 인간구원의 구체적인 표지로서 질병치유를 행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구체적인 신체성(身體性)이라 할 수 있다. 육체적인 억압으로 이해되는 질병은 인간을 영적인 억압에로 나아가게 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창조신학적이며, 동시에 구속신학적인 창조와 구원의 회복운동을 의미한다(명제 11 참조).
1. 예수의 병치유란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는 구원의 신체성(身體性)이라(E.Kaesemann, Wunder im NT, RGG3, 1835-1837 참조) 할 수 있다. 구원이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성을 띈 전인적인 것임을 알리는 증거다. 예수의 치유는 인간을 전인적인 의미에서 자유롭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에서 치유라는 용어와 구원이라는 용어는 서로 교환(막 5,23; 마 9,21; 눅 7,50)되고 있다. (막 5,23.28; 6,56; 마 9,21.22; 눅 8,36.50)은 치유를 의미하며 동시에 인간의 전체적인 구원을 지향한다. 예수의 치유란 의사들이 행하는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병자에게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로의 구원초대를 의미한다.
2. 병치유와 죄용서가 예수의 치유사역에서 결합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적 구원의 전인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해된다(앞 3) 2.④ 참조). 이는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인간의 온전한 회복을 가능하게 함으로 다시 삶의 일상성에로 돌아오게 하기 때문이다(막 2,1 이하).
3. 예수가 육체로 오심은 고난당하는 인간의 육체의 고귀함을 가르치고 그 육체에 건강(온전)함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성육신의 사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천하의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기에(막 2,27) 예수는 사탄의 세력을 정지시키고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회복시키기 위하여 치유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난 당하는 인간을 위한 예수의 치유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얽매인 율법/안식일법보다 언제나 우선한다(막 2,27). 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질병을 개인과 사회, 그리고 종교적인 죄를 묻는 근거요 내용으로 삼고, 병자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킨 제자들이나 유대인들과는 달리 예수는 고난 당하는 병자의 삶의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연대한다(요 9,1 이하). 이것이 예수의 진정한 사회성이요 통전성이라 할 수 있다.
7) 예수의 기적사화에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절망과 고난이,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색인되어 있다. 예수는 인간의 고난에 대해 결코 수동적인 수용이나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고통을 제거하며 극복하고 있다.
1. 예수의 병치유 기적사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절망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애절한 간청이다. 거기엔 질병들린 자들의 기대와 부르짖음과 더불어 종종 이웃(친구)의 정성스런 간구도(막 2,3이하 병행; 막 5,21 이하 병행; 마 8,5 이하 병행 등) 나타난다.
2.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수는 두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인간을 억압하며 괴롭히는 질병과 귀신 그리고 자연 환경의 위협에 대해서는 분노(막 1,43; 요 11,33)이며, 다른 한편으로 고통받으며 신음하는 사람에 대한 긍휼과 불쌍히 여김이다(막 1,41; 마 14,14; 참조 막 6,34 병행; 9,22; 눅 7,13; 10,33). 전자는 인간이 지닌 존엄성과 특권을 위협하고 상실케 하는 적대적 세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귀신과 질병, 그리고 자연의 위협을 향해서 통분히 여기며 꾸짖는다(눅 4,38-39; 막 1,25; 막 4,39).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귀신들린 자, 병자, 고난의 자리에 든 자를 향해서는 사랑과 긍휼히 여김을 보여준다(개인에 대한 불쌍히 여김: 막 1,41; 마 20,34; 눅 7,13/ 공동체에 대한 불쌍히 여김: 막 6,34; 8,2; 마 9,36; 14,14/ 외부인의 예수에 대해 긍휼을 요청: 막 7,32; 8,22;9,22 등). 예수의 이러한 불쌍히 여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어휘인 는 동정과 연민의 정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긍휼함이다(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긍휼: 눅 15,20; 강도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 눅 10,30이하; N.Walter, in EWNT 참조). 이는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동정과 같은 개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예수의 진정한 목자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막 6,34; 마 9,36; 요 10,11; 참조 민 27,17; 겔 34,4.5.23; 렘 23,4).
3. 분노와 긍휼을 동반한 복합적인 예수의 이 모습은 곧 탄식과(막 7,34; 8,12) 통분히 여김(요 11,33.38)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 상황에 대한 "어찌하여"라는 물음의 표시로서, 한편으로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언자적인 비판과(R.Pesch, Das Markusevangelium I, 408(HThK II)), 또한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한 통분(R.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310), 그리고 인간에게 슬픔을 야기시킨 저 죽음의 세력에 대한 통분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적인 격앙이 나타날 때마다 치유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복음서 기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8) 예수의 치유는 전시효과를 노리는 기적과는 상관이 없다.
1.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행한 기적을 나타내는 어휘로 (놀랄만한 것)나 (기사)
를 사용치 않고 그대신 (능력: 마 11,20-23; 13,54.58; 막 6,2.5; 눅 10,13; 19,37)를 사
용한다. 예를 들면, 예수에게 주의 능력( )이 함께 있었다(눅 5,17), 이 능력( )
이 예수에게서 나와 모든 사람을 치유했다(눅 6,19)고 기록하고 있다. 혈루병앓는 여인이 예
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도, 예수는 자기 안에서 능력( )이 나간 것을 아셨다(막 5,30;
눅 8,46)고 기록해 준다. 는 오히려 적그리스도가 행하는 이상한 일을 의미할 때 사용
된다(막 13,22; 마 24,24).
요한복음에서는 표징( )이라는 어휘(2,11.23; 3,2; 4,54; 6,2; 7,31; 9,16; 11,47; 12,18;
20,30)가 기적을 의미하는 어휘로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행동
하시는 능력으로서 치유사역을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예수 공생애의 초기 사건으로 나타나는 사탄의 유혹이야기도 예수의 능력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사탄이 전시효과적인 기적을 예수에게 요구했을 때, 예수는 이를 거절한다(마 4,1이하; 눅 4,1 이하). 기적을 행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마술적이고 전시효과적인 기적은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치유를 바알세불에 의해 도움 받아 행한 마술적인 기적이라고 비난한 적대자들의 모습은 그 오해의 여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막 3,22 병행).
3.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따라서 예수에게서는 오히려 불신앙의 표지였다(막 8,12). 그런 자들에게 줄 것은 단지 요나의 표적(눅 11,29) 뿐이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탄식하시며 회개를 요청한다(마 12,38 이하; 눅 11,16.29이하; 마 16,1이하; 막 8,11 이하; 눅 23,8 이하; 요 4,48 이하). 외면적인 관심으로의 기적이란 예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전시효과를 노리는 기적은 철저하게 거부한다(막 6,5; 마 12,38 이하; 16,1 이하' 눅 11,29 이하; 막 8,11 이하).
5. 예수가 치유를 행할 때, 병자를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킨 것 또한(막 5,40; 막 7,33; 막 8,23;
참조 행 9,40; 왕상 17,19; 왕하 4,33) 대중들의 호기심에 의해서 병치유 사건이 세속화되는 것을 거절하기 위한 행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지 않는 기적이란 어떤 기적도 사람들의 믿음의 증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눅 16,19-31) 그것을 말해준다. 나사로를 다시 살려 보내는 부활의 기적이 나타난다 해도 말씀(성서)의 증거를 듣지 않는 자에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활의 기적조차도 사람을 설득하여 변화시킬 수 없다는 명백한 진술이다.
6. 병치유에 대한 예수의 침묵명령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치유사건에 대한 침묵멸령의 경우 예수는 하나는 귀신에게(막 1,25.34; 3,12), 다른 하나는 나음을 입은 자들에게(막 1,44; 3,12; 5,43; 7,36; 8,26; 마 12,16) 행해진다. 그것은 분명 지킬 수 없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 침묵명령을 행한다(막 5,43). 그렇다면 왜 침묵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명령(막 7,36)을 했는가? 그러면 혹 이러한 예수의 침묵명령은 복음서 기자의 편집적인 창작사상(W.Wrede)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본래적 전승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전시효과적인 기적을 거부했듯이 예수의 치유가 외면적인 측면에서 단순히 기적행위자로서 오해받을 것을 거절하기 위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치유는 과시적이기 보다는 침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마술적인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나타나길 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치유기적의 소문은 그 능력 자체 때문에 사방에 퍼지게 된다.
9) 병치유는 질병들린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또한 그 믿음은 예수를 통해 병치유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경험하게 한다.
1. 치유사화에 나타난 '믿음'은 부활절 이후의 선교적인 케리그마에 의해 나타난 믿음이나, 바울신학에 의한 기독론적으로 각인된 교의적인 의미의 '믿음'이 아닌,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예수의 기적사화에서는 기적에 선행하는 믿음(마 8,10; 9,18; 14,31; 막 2,4; 5,36; 눅 7,50;17,6)과 믿음에 선행하는 기적(막 3,3; 눅 24,13-35; 요 9,1-38; 10,37; 12,37; 20,31)이 양자 모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믿음이 기적에 선행한다는 것이 치유하는 능력의 원천으로 믿음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소위 '믿음-치료'라는 심리학적이거나, 또는 사회심리학적인 치료를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2. 믿음은 오히려 궁핍함과 고난의 자리에서 예수를 향해 부르짖는 질병들린 자의 부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긍휼을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는 예수에게 간절히 나오는 모습(막 1,40; 5,25-26; 마 9,27)으로, 때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막 1,40)으로, 그리고 어떤 때는 친구를 들것에 메고 지붕을 뚫어 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간구, 즉 "당신이 원하시면"(막 1,40),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9,27.28; 막 10,48; 눅 17,13)라는 간구도 바로 그들이 예수에게로부터 모든 것을 받을 준비가 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대와 믿음의 한 표현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믿음을 보았다'(막 2,5; 마 8,10), '믿음이 크다'(마 15,28), 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막 5,34; 10,52 등)라는 말씀으로 믿음을 형상화했던 것이다. 특히 혈루병 앓는 여인의 모습(막 5,25-34)은 그것을 보다 분명히 해준다. 그녀의 인간적인 병치유의 노력이 한계상황에 다다른 것은 여러 의사를 통해 진단을 받았으나 재산만 탕진하고 치유의 효력이 전혀 없었다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예수의 옷가라도 만져 보고자하는 구체적인 그녀의 행위로 나타났을 때, 이 여인은 예수로부터 '믿음'을 지닌 사람으로 칭찬 받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해 메시야적인 구원의 삶의 통전성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 바로 인간의 믿음이란 예수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예수를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덧입는 통로임을 말해주고 있다.
3. 믿음이란 따라서 단순히 치유가 일어날 것이라는 심리학적 기대이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치유가 당사자가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의 믿음에 의해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막 9,14-29; 마 15,21-28). 말하자면 치유당사자의 믿음과는 상관 없이도 치유당사자를 위한 중재적인 간구를 통해서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장소적인 거리를 뛰어넘기도 한다. 병자가 예수와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치유가 의학적으로나, 심리적, 정신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임을 의미한다(백부장의 하인 치유: 마 8,5-13; 눅 7,1-10; 요 4,46-54)/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막 7,24-30; 마 15,21-28/ 왕의 아들: 요 4,46-54). 마치 구약에서 엘리야가 나아만을 직접 만나보지 않고도 고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이다(왕하 5,9 이하).
4. 믿음은 이렇듯 예수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나 그렇다고 그 믿음이 단순히 회의와 의심이 전혀 없는 신앙을 말하지는 않는다(예를 들면, 막 4,35-42: 물위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부르짖는 제자들은 믿음 없음의 모습으로 예수에게 꾸중받고 있다). 믿음이란 때로 "내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막 9,22-24)는 의심하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믿음이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에게 기대한다는 고백으로 나타났을 때,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5. 기적은 그 자리에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의 정체성을 묻게 한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이니이까?"(막 1,27 병행; 4,41 병행; 마 12,23). 이러한 놀람의 질문은 실상은 자기의 삶의 자리에 안주하던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 질문을 통해서 그들은 질문하는 자기 자신을 예수에게 개방하게 되고, 진정한 예수에 대한 이해에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아갈 수도 있게 한다(막 3,21 이하). 그런 점에서 치유기적은 그것을 대면한 사람들에게 신앙과 불신앙을 가름하는 잣대 역할을 하게 된다(마 11,6).
6.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예수도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막 6,5 이하; 마 13,58).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치유는 믿음 안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막 5,34.36b; 4,40; 9,23f; 마 8,10; 병행 눅 7,9(Q); 눅 17,19). 그렇다고 해서 치유의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치유기적은 믿음을 자극하고 자기 근거를 확인해 준다(W.Kasper, 예수 그리스도, 160-161). 따라서 믿음이란 치유의 전제조건으로 요구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치유의 수행에 있어서 결론적으로 확인되는 자리라(막 5,34; 마 8,10 병행 눅 7,9; 막 10,52) 할 수 있다.
10) 예수의 치유 목표는 치유받은 자가 다시 자기 삶의 일상성에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육체가 치유되고 정신이 온전해 지므로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그가 버림받은 가정으로 돌아가 그 동안 박탈당한 종교적인 특권을 다시 회복하며, 고통받는 자리에서 벗어나 평안의 자리에 들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질병들린 상태의 일상성이란 인간에게 바람직한 일상성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예수의 명령과 그에 따라 치유받은 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 앉아있다(막 5,15)
- 집으로 가라(막 2,11; 마 9,6; 눅 5,24/ 막 5,19; 8,26; 10,52('가라'는 명령을 받고도 예수를
뒤따른 소경 바디매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 받으라"(막 1,44; 마 8,4; 눅 5,14)
-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 들더라(막 1,30; 마 8,15; 눅 4,39)
- 평안히 가라: (막 5,34; 눅 8,48)
-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막 5,43)
예수의 이러한 명령은 한 인간이 질병으로 빼앗겼던 모든 것을 이제 다시 누리도록 그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들처럼 가정공동체의 기쁨을 나누는 일이며, 사회적인 삶의 특권을 영위하고, 종교적으로 불결한 죄인으로 규정받던 법조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즉 한 인간이 박탈당한 가정성과 사회성과 종교성에 대한 복권인 것이다.
11) 이렇게 회복된 일상성이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치유행위는 혼돈의 세계 속에서 원래적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행위와도 상응하는 것이다.
1. 구속신학적인 치유가 죄용서라고 한다면 창조신학적인 치유는 질병에서의 치유라고 할 수 있다(앞서 죄용서와 병치유란 서로를 제한하거나 배타할 수 없는 인간의 전체성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W.Schrage, Heil und Heilung im Neuen Testament, EvTh 46, 1986, 210)고 말한다). 치유란 자연질서에 대한 방해나 파괴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질서의 본래적 조화와 샬롬을 회복하는 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첫 창조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치유를 통해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에로의 전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2. 예수가 안식일에 '착한 일'을 행한 것은 따라서 창조신학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막 3,1-6; 마 12,9-13; 눅 6,6-10). '착한 일'이란 메시야적인 구원의 행위로서 이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해 주어진 복(출 18,9; 민 10,29이하; 호 8,3; 14,3)을 의미하며, 또한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축복을 나타낸다(렘 32,42). 이렇게 볼때 사도행전에서 예수가 지상에서 선한 일과 병치유를 행한 것으로 예수 케리그마를 요약한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행 10,38). 따라서 예수의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는 말씀은 자신을 단순히 하나님과 동일화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연속선에서 자기 자신의 일이 창조신학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씀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3. 예수의 병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놀라 환호한다: "그가 하는 일은 다 좋다( )"(막 7,37). 이는 창 1,31의 창조이야기와 사 35,5-6에서 보여준 메시야 시대의 복을 연상시킨다. 하나님께서 상한 자와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것처럼 예수께서 친히 귀먹은 벙어리를 치유한 것은 분명히 메시야적인 행위요,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선하심에 대한 회복임을 말해준다. 병치유는 창조의 보존이요, 회복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질병과 죄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깨뜨리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적대적인 세력이며, 치유란 하나님의 창조의 복과 메시야적인 시대를 회복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R.Schnackenburg, Die Person Jesu Christi, 37).
12) 예수의 병치유는 그렇다고 그 자체가 긍극적인 구원의 자리는 아니다. 병치유는 마지막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의 부활의 능력을 미리 맛보는 선취적인 자리이긴 하나, 그 치유는 다만 임시성과 부분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에게서조차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완성은 미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막 14,25: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병치유는 시간과 공간적인 차원에서 육체적인 제한성을 지닌다. 그러나 구원은 그 완성에 있어서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로의 인간 부활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병치유는 죽음 이편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의 표식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에 있어서는 자기 한계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이러한 병치유의 한계성을 넘어선 예수의 치유사건이 나타난다. 곧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예수의 죽음에로의 길이다. 그는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친히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 들어갔다. 그의 죽음으로 긍극적인 생명의 치유역사를 이루기 위함이었다(막 10,45). 자기 목숨을 내 놓음으로써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긍극적인 치유사건이다.
13) 예수의 치유는 치유받은 자에게 감사와 찬양을 가능하게 했다. 치유받은 자와 더불어 치유기적에 동참한 사람들은 이웃을 위한 삶과, 그리고 선교의 자리로 나아간다.
1. 치유의 결과를 지켜 본 사람들은 놀람과 두려움을 갖게된다(막 5,15 이하; 마 9,33; 눅 5,26; 요 11,45; 참조 행 3,10; 9,42 등). 여기서 놀람이란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반응이다(막 1,27 병행; 5,42 병행; 7,37; 눅 9,43). 치유기적은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움과 새로움을 선물하므로 인간적인 불신앙을 극복하게 했던 것이다. 인간은 그때 비로소 자기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포착한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 예수의 표징들이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었음을 명백히 해준다(2,11; 4,53; 10,41; 20,30.31).
2. 치유는 이웃을 위한 삶의 자리로 인도한다.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를 받고 나자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식사로 봉사한다(막 1,31). 그것은 치유에 대한 감사 때문일 것이다(참조 눅 17,11-19). 실제로 병치유는 가능한 한 예수와의 은밀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나, 그 치유에 대한 결과는 감사, 섬김, 그리고 선포등으로서 공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둥병자나, 거라사 귀신들렸던 자는 치유받은 후에 가서 예수의 치유사역을 직접 선포하기도 했던 것이다(막 5,20). 요한복음은 특별히 이같은 예수의 치유를 보다 선교적인 측면에서 편집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자기와 온집안이 믿었다"; 요 4,53). 이것은 제자 선택과 파송 때의 예수의 위임명령(막 3,14.15; 눅 10,9 병행)과, 또한 헤롯을 향한 예수의 말(눅 13,32: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칠 것이다")과도 상응하는 것이다.
14) 예수의 치유능력은 제자들에게 위임되고 전승되었다.
1. 예수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축출하고 병을 치유할 능력을 주었다(막 6,7; 마 10,1; 눅 9,1).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권위( : 눅 9,1; 참조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였으나 이제 예수를 통해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예수는 제자를 파송하면서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주라"(마 10,8)고 명령하므로써 이 권위가 계속해서 간직되고 전수되어야 할 것임을 말씀한다.
2.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예수의 능력과 권능은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계속 위임되고 지속되었다(행 3,1 이하; 4,20; 9,36 이하 등). 바울 자신도 사도의 징표로서 자기를 통해 나타난 표적과 기사와 능력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롬 15,18.19; 고후 12,12). 또한 바울의 선교공동체 내에서도 이런 질병치유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전 12,9.10).
3. 예수는 치유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고 종말론적으로 소집하여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치유받은 사람들은 주로 버려진 자들, 가난한 자들, 세력없는 자들로서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유사역을 통해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차별성이 극복된 하나님의 백성이 생겨지게 되었다.
15) 질병은 악마화하고, 병자는 탈악마화하는 일, 그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수의 치유사건이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효한 치유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과학적 합리성은 질병을 마귀와의 관련성에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병자를 귀신들린 자로 간주함으로 말미암아 병자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폐해는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질병들린 자를 귀신들렸다고 해석함으로써 그를 가정과 사회로부터 축출했고, 따라서 병자들은 병과 더불어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이중적인 고통과 저주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신학적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질병들을 악마의 사슬에서 탈출시키는 일이었다. 즉 질병들을 '탈악마화'하는 일이야 말로 환자를 치료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J.Moltmann, 예수 그리스도의 길, 164).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써 질병과 병치유의 문제가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질병과 병자를 예수의 본래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지 질병들을 탈악마화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질병은 그 배후세력과 더불어 '악마화'하고, 그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병자는 '탈악마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본래적인 예수의 치료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을 개체적 귀신의 역사로 일반화시켜 간주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유대주의적인 질병이해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적인 이해는 병든자와 장애인을 하나님에 의해서 징계받는 자로 간주함으로서 그들을 공동체에서 제거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병과 병자를 동시에 악마화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병은 악마화하고 거절했으나, 병자와 고통받는 자들은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초청한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또한 될 수 있는 사람들임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질병들린 사람들(고통/고난 당하는 자)을 보면서 이것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질병(고난)을 야기시키는 거대한 적대적인 세력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것들의 직, 간접세력과 영향력이 병자에게 더 이상 발휘되지 못하도록 내
어 쫒으므로 병든 사람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치유사역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들로서 예수가 위임한 치유의 사역을 위하여 질병을 야기시키는 거대한 악의 세력들에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아니면 종교적이든 상관없이- 대해서는 '아니오'를 선언하고, 그것 때문에 병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예'를 선언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를 생각하며...
예수님이 보신 인간이란 전인적인 존재이다. 손가락 하나가 가시에 찔려도 온 몸이 고통을 받고, 스쳐가는 말 한마디에도 마음에 상처가 나 괴로워하는 게 인감임을 아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위에는 생을 살아가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들, 종교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 와 위로 받기를 원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치유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나타난 치유에 대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1) 예수님은 인간이 현재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이란 자기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단선적인 인과응보 사상을 거부하신다(눅 13,1-5; 요 9,2-5). 오히려 예수님은 인간이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능력을 베푸시고 영광을 보여주시는 은혜의 자리가 될 수(요 9,3; 11,4)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병 치유 모습은 구약에 치유자로서 나타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과도 같다(창 20,17; 출 15,26; 시 6,2; 103,3).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기름부은 자(눅 4,18.19; 사 61,1.2)와 능력을 지닌 인자(막 2,10.11)로 지상에 오셔서 연약하고 병든 인간을 치유하셨던 것이다.
2)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 현재적으로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눅 10,18)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의 주권을 펼치고 계심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눅 11,20; 마 12,28). 예수님의 현존으로 사탄과 그 능력은 끝이 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나타낸다. 미래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던 우주적인 구원의 기다림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서 현재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행하신 병치유는 구원이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성을 띈 전인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육체의 치유가 전인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서에는 '치유'라는 용어와 '구원'이라는 용어가 같은 의미로(막 5,23; 마 9,21; 눅 7,50) 사용되고 있다.
3)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이러한 치유행위의 태도는 따라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인간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질병과 귀신 그리고 자연 환경에 대해서는 분노하시며 꾸짖으셨다(막 1,43; 4,39; 눅 4,38-39; 요 11,33). 다른 한편,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다(개인: 막 1,41; 마 20,34; 눅 7,13/ 공동체: 막 6,34; 8,2; 마 9,36; 14,14). 예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질병에 대해서는 그것을 악마화하고 거절하셨으나, 고통받는 병든 사람을 향해서는 긍휼히 여기고 그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초청하셨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또한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질병은 그 배후 세력과 더불어 철저하게 거절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 거부하지만, 그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서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은 악마화하되, 반면에 병자는 탈악마화하신 것이다.
4) 예수님의 치유 목표는 분명하다. 예수님은 치유받은 사람에게 다시금 삶의 일상성에로 돌아가 거기서 삶의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 치유받은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치유를 확인받게 하거나(막 1,44; 마 8,4; 눅 5,14), '집으로 돌아가라'(막 2,11; 마 9,6; 눅 5,24)고 하심으로 질병으로 인해 빼앗겼던 모든 것을 회복하고 그동안 소외당했던 일상적 삶의 복을 누릴 것을 명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가정공동체의 기쁨을 다시 나누는 일이며, 사회적인 삶의 특권을 영위하고, 종교적으로는 불결한 죄인으로 규정받던 법조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5)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따라서 흑암과 혼돈 속에서 조화와 샬롬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속신학적인 치유가 죄용서라고 한다면 창조신학적인 치유는 질병에서의 치유임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치유란 자연질서에 어긋나는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적 자연질서에의 조화와 샬롬을 회복하는 일로서 이해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첫 창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서 인간의 삶이 지닌 카오스(무질서)를 코스모스(질서의 세계)로 전환시키고 계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병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환호한다: "그가 하는 일은 다 좋다"(막 7,37). 이것은 곧 창 1,31의 창조이야기와 사 35,5-6에서 보여준 메시야 시대의 복을 의미한다.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야적인 행위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선하심에 대한 회복임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치유란 하나님의 창조의 보존이요,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병치유는 마지막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로 하여금 미리 맛보게 하는 선취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병치유가 예수님의 부활 능력의 표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지니기에 궁극적인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한 구원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활이 있음을 기다리게 된다.
6) 예수님의 치유능력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임되고 전승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축출하고 병을 치유할 능력을 주신 것이다(막 6,7; 마 10,1; 눅 9,1).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권위(눅 9,1; 참조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통해 모든 제자된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주라"(마 10,8)고 예수님은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병치유를 행함에 있어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의 병치유는 결코 전시효과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전시효과적인 기적은 불신앙의 표지로서(막 8,12) 사탄의 유혹이 될 수 있음을 늘 경고하셨던 것이다.우리는 목회 현장에서 영적-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예수님의 치유를 깊이 생각하며 기도해 본다.
"주님,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목회자들의 치유 속에 동행하셔서 치유의 사건을 만들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 나타나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