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마16:13~20          

제목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먼저,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을 잠시 복습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성경 66권외에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고백이 왜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었지요?

첫째, 초대교회에 이단사상이 침투하기 시작하자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을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단이 있습니다.(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등) 우리가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자녀들과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잘 가르치고,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하여 성경 66권의 내용을 잘 요약한 신앙고백이 필요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저희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 중에서 “내가 믿사오며”(I believe in God)라는 고백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상급도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고, 구원받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신앙도 각자의 신앙에 따르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다 함께 모여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각자 개인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 누가 예수님을 믿고, 자기 집안의 누가 목사, 장로, 권사라 할찌라도 그것으로 자기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내가 믿고, 바로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가 응답되는 놀라운 체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고백하고 믿는다고 하였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치못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고,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과 역사라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루실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함을 받고,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 집니다. 세상의 의학이 고치지 못할 육신의 질병이라도 하나님은 능히 고치십니다. 물질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롬8:31~32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채워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창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말씀이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천하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의 주인되심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심을 믿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창조주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축복주기를 원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요 신앙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능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의 극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시도록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여러분의 자식을 죽도록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한에서 간부가 한 주민에게 물었습니다.

“동무, 만약 집에 소가 두 마리 있으면 한 마리를 당(黨)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겠소?”

“네, 물론이지요. 소 두 마리가 있으면 기꺼이 한 마리를 드릴 수 있지요”

“만약 돼지 두 마리가 있으면 역시 한 마리를 내어놓을 수 있겠소?”

“네 물론이지요. 돼지 두 마리가 있으면 한 마리 드릴 수 있지요”

“만약 동무 집에 닭 두 마리가 있으면 한 마리를 내어놓을 수 있겠소?”

“그건 안되겠어요.”

“아니, 소나 돼지도 내겠다면서 닭은 왜 안되겠다는거요?”

“지금 우리 집에 소나 돼지는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닭은 두 마리가 있으니 안되지요”

자신의 소유가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요?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 - 망나니였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기를 쉬지 않으신 아버지, 아들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꺼이 맞아주신 그 아버지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인생들이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며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그의 자녀들이 말씀을 거역하여 불순종하며, 죄에 빠져 살아갈 때에 징계를 통하여 잘못된 자리에서 돌아서서 아버지와의 은혜의 날개아래 들어 와서 거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징계를 받는 순간에서도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몇 가지 내용을 함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 ? 성령으로 잉태 및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심  ?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 ? 장사지냄(3일간 무덤에 머무르심) ? 부활하심 ?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  ?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 등 7가지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로 그것은 고난과 영광이 함께 수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때가 이르면 자기를 거부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을 때 크게 높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받기를 원하면 먼저 내가 섬겨야하고, 높임받기를 원하면 낮아져야하고, 사랑받기 원하면 먼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남을 위하여 먼저 버리면 몇 배로 돌려받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축복의 원리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내용에 살아계실 동안의 사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이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더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람이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고귀한 교훈을 줄 때가 있습니다. 시인 모윤숙씨의 시 중에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바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중략)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중략)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서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이하 생략)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중요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4:25에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매우 초보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수많은 논란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오늘날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 또는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야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저들은 아직도 오시지 않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마호멧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들은 아브라함-모세-예수를 거쳐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Mohamed)가 참 메시야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외아들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아들이란 말의 뜻은 ‘독특한 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에 잉태하게 하셔서 이 땅에 보내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나 사도신경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육신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2천년 전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부터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아들이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시기 이전부터 하나님과 예수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고백한다고 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의미에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외아들)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는 아닌가요? 요10:10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신  말과 모순이 되지 않나요? 도대체 하나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어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를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고아원에 나이어린 고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부부가 그 고아원을 찾아왔습니다. 이 노부부는 자식이 없어서 쓸쓸한 노후를 보내다가 상의 끝에 고아원에 있는 아이 중 하나를 입양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 가운데서 똑똑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도 있었지만 그 노부부는 병약한 아이 하나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깨끗하게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교육을 받도록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호적에 올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법적으로 상속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입양된 고아는 자기가 잘나고 훌륭해서 그 가정에 입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 가정에 입양하여 그 노부부의 자녀-양자(養子)가 된 것은 오직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양자)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는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유일하고 영원하신 독생자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고백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 예수님의 만찬을 진행하는 도중에 제자들이 ‘선생과 주’라고 불렀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나를 통치하시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계획, 나의 가정, 나의 직장, 나의 사업, 나의 건강, 나의 자녀 등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온전하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사랑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분께서 내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타고 가시던 배가 광풍을 만났습니다.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안드레, 요한이 그 배에 타고 있었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거친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거친 바다가 잔잔해졌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거친 바다가 잔잔해졌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소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또한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입술을 벌여 우리의 주되신 주님을 찬양하고, 그 분께 우리 인생의 모든 키를 맡깁시다.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고 우리가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심령과 직장과 사업체 위에 찾아오시고,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려 함이지만 나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저희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우리의 영육간의 삶을 풍성케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넘쳐나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