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살전4:13~18    

제목 :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이제 사도신경 강해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학교 공부는 3~6년의 연한이 지나면 졸업이 있지만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랫동안 다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의 기초가 허약한 경우가 의외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단의 꾐에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우리가 기초적인 신앙토대를 든든히 다지는 것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빌3:13~14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수없이 많이 외었지만 그 신앙고백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계속한 사도신경 강해설교 내용을 잘 기억하시면 우리의 신앙이 반석 위에 세운 집처럼 든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 설교 내용을 10%라도 기억하고 계신 분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반복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라는 고백의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죽음과는 상관없는 피조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는 흙으로 만드신 다음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최초의 아담과 하와는 흙으로 창조되었으나 죽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냐고요? 창2:16~17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아담)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에는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우리 인생들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히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인생들에게 죽음이란 피해갈 수 없으며,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누구와도 함께 갈 수없는 길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혼자서 외로운 나그네와 같이 머나먼 길을 떠나야하는 죽음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죽음은 계절도 없고, 시도 때도 찾아옵니다. 창백하고 병든 늙은이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직 못다 핀 꽃봉오리와 같은 젊은이에게도 찾아옵니다.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기둥같은 인물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성인도 영웅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고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큰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본문 13절 하반절에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죽음을) 슬퍼하지 않게하려 함이라”고 편지를 쓴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왕상17:17~24에 보면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 선지자가 살려주었고, 왕하4:32~35에는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을 엘리사 선지자가 살려주었습니다. 신약에도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독자,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죽었다가 일시적으로 살아났지만 얼마 후에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마지막 날에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이렇게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외에도 영혼의 죽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육체 외에도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육체라는 집에 유숙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죽어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육체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형벌로서,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죽음입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이 육체의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과는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둘째 사망, 즉 영혼의 죽음 혹은 영원한 지옥의 심판, 저주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 범위를 한정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14절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갔지만 그 육신은 땅 속에서 잠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9:24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는 사람을 깨우듯 “달리다쿰”(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니 그 소녀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또한 요11:11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나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을 찾아갔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났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죽음은 영원한 저주와 멸망이 아니라 편안히 쉬는 잠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잠은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잠을 잔다는 것은 언젠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기약없는 이별로 생각하여 슬퍼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슬픈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곧 부활을 의미하며, 부활은 곧 죽음에서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먼저 롬6:5를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답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함께 살아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음으로 고전6:14를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롬8:11에도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권능은 세상 마지막 날 우리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음 고전15:13~15를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다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장차 우리 성도들의 부활을 확증시키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1:21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는 이미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가겠네 천군 천사 나팔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

때때로 우리의 삶이 힘들 때 이제 그만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푸념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하여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 다시 부활하여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상급을 받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갈 소망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육체의 부활은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요5:29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여 다시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할 몸을 입되 성도는 영생을 얻어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가게 되지만, 악인은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는 영원한 불못에서 자기도 죽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고통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의 부활과 영원한 천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올립시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육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천국 혹은 지옥에 가 있다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변화된 육체는 연합하여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때 이미 죽은 자들의 육신은 무덤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요, 살아있는 자들도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어질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란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마치 한 식구가 한 방에 같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즐기다가 “아! 나는 피곤하다. 좀 쉬어야겠다”라고 말하면서 다른 방으로 옮겨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밝은 아침이 되면 모두 다 한 식탁으로 모여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이 땅에 강림하실 때에 무덤에 있는 성도가 먼저 일어나고, 땅 위에 생존해 있는 성도들이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하여 예수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소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