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07
분류 |
---|
이갈렙목사 (산해원교회)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그 이스라엘 자손들의 손에 붙이셨는데, 성공한 케이스도 있지만 이렇게 쫓아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 그런 경우에 또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은「우리가 모델로 할 이스라엘의 기업 전략」이라는 주제로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체제 하에 들어가면서 모두 긴장하고 또 불안해 할 그때에 아마 여러분 기억하실 분은 하실 겁니다. 지금부터 약 삼 년 반여 전에 "삼 년 반 동안 긴장하나 그러나 삼년 반 후에는 다시 열리게 될 것이라." 했는데, 그 기간이 지나가고 지금 세계 여러 나라들은 파산하는 나라도 있고 또 여전히 IMF 하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나라도 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사랑하시고 복 주셔서 그 말씀대로 우리는 나라는 경제적으로 앞으로 좀 소망적인 그런 단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미 들어서서 국제적인 신인도가 올라가고 있어서 정말 이렇게 ''이제 일을 해 볼만한, 뭔가 이 전략을 따라서 이렇게 한번 움직여 볼만한 그런 시기에로 접어들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려운 삼년 반을 지내고 이제 2002년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해주시는 이 지혜들로써 좋은 방법, 모델로 삼아서 한번 그 우리 손에 붙여진 것을 실제로 차지하러 움직여보는 그런 해가 되었으면 하는데, 오늘 말씀으로 여러분이 지혜를 얻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2002 부요를 위하여 주께서 복된 말씀을 주셨으니 "이제 주린 자 그러나 그에게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요" 그러니까 주리고 있지만 배부를 복은 이미 그에게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린 자에게 배부를 복이 있고, 이제 우는 자 그러나 그에게 복이 있나니 웃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지금 울고 있지만 웃을 복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갖고 있다 라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우리에게 있는 그 배부를 복 그리고 여유로워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런 복을 가진 우리로서 마치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 주신 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리라 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땅을 결국 먼 훗날에 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제 네 손에 붙이노라" 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께서 땅 얻을 권리를 주신 줄로 알고 진격해 올라갔고 그리고 그 땅들을 차지했던 것처럼 우리가 배부를 복과 그리고 웃을 복이 이미 우리 속에 있는데, 이제는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현실화(現實化) 그것을 현품화(現品化)하기 위해서
오늘 대표로 기도하신 기도 속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었고 우리 모두 동감한 마음에서 아멘 했습니다마는 그것을 그 현품화 할 수 있는, 배부름을 현품화 하고 또 웃을 환경을 만들어서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권리를 이번 성회를 통해서 우리 주께서 이미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조상으로부터 마음에 기대하고 가져왔던 그 축복의 땅이 이제는 현품으로 바꾸어지는 그 현장들을 찾아가서 차지하는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배부름을 향하여 움직이고 또 웃을 일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이 이스라엘이 성공한 전략처럼 우리도 갖가지 형편을 따라서 그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 오늘 함께 생각하는 이 성경 속의 전략들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는 방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 손에 붙여진 그 가나안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또 이스라엘이 이렇게 확보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전략을 구사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전략들을 기뻐하셔서 그들과 동행해주신 내용들을 소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내용을 소개한다면 아마 이것은 지난주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연합전선 구축이었습니다.
사사기 1장 1절로 7절 사이에 유다가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붙여주신 가나안을 향하여 올라가 보려고 하니까 자기의 힘이 부족했습니다. 현재 진치고 있는 가나안의 힘이 자기 유다 족속의 힘보다 월등히 강한 것을 알고 그대로 나가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붙여주셨다는 것은 곧 이기게 해 주신다, 곧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손에 붙여주었으므로 자기의 능력을 헤아려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도 부족하지만 내 형제 중에 누가 또 부족해서 연합전선을 하고 서로 도울 수가 있겠는가? 품앗이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시므온이 그러했습니다.
시므온의 군대가 적은데, 시므온이 그려내었던 땅이 또 컸습니다. 그래서 이 유다가 형제 시므온에게 말하기를 "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가 싸우러 나갈 때에는 네가 나를 돕고 그리고 이기고 난 다음에 네가 너의 그렸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러 갈 때에는 내가 너를 돕는 것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약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은 만큼 갚아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합쳐서 이것 하나 이기고 또 이기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또 시므온의 땅의 가서 합해서 연합해서 성공을 거두자." 이렇게 해서 둘 다 대승(大勝)을 거두는 이런 현실을 보게 되는데, 앞으로 이런 일을 할 때에는 어물쩍 어물쩍 그저 "나 잘되거든 보자" 이런 식으로 하지말고 확실해야 됩니다. "네가 나를 도우면, 그 다음에 네가 싸울 때 내가 너를 돕는다." 이것은 약속을 했으면 계약을 했으면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그려내었던 그 기업을 여러분 자신이 차지하기 힘들면 첫째 전략으로서 공동전략, 연합전선을 한번 구축해 볼 수 있겠다 라는 말씀을 전 시간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이기고 나니까 어떻게 했는고 하면 아도니 베섹이라고 하는 그 상대국의 강한 자,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가지고서 엄지손가락을 자르고 또 엄지발가락을 잘랐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이 사람의 엄지손가락을 그냥 두면 칼을 들고 또 언제 공격을 해 올지 모를 사람이다 그겁니다. 그래서 칼을 못 쓰도록, 그러면 발가락은 왜 잘랐느냐? 이 몸은 도망을 가도 곤란하다 그겁니다. 제일 높은 사람이 도망가면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다시 군대를 만들어 가지고 나온다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업을 얻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유다와 시므온의 정책을 보면 한번 확보한 다음에는 그의 부하들은 내 부하로 삼을 수 있어요. 월급 주고 먹여주면 그 사람 주인이 누가 되든지 상관 안한 부하들은 쓸 수 있지만 거기에 보스(boss) 제일 큰 앞잡이 된 사람은 한번 앞잡이 된 사람은 끝내 앞잡이 하려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주 다시금 반역하지 못하도록 또 도망가서 새로이 군대를 만들지 못하도록 엄지발가락,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리는 그런 지혜를 써서 후한을 없게 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데리고 쓰던 사람들은 포로로 잡아 가지고서 사역을 시킬 수 있고 먹여만 주면 주인이 누구든지 돌아설 수 있지만, 맨 윗 사상가 맨 윗 주인은 항상 주인 하려는 기질이 있어서 처음에는 좀 굽신굽신하는 것 같지만 언제 반역을 할지 모른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싹이 나지 못하도록 했던 그러한 내용을 전 시간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다음 또 다른 전략을 하나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 전략은 무엇인가 하면 보상을 주겠다 라는 전제로서 남의 지혜나 기술이나 능력을 빌리는 겁니다. 이 여호수아 당시에 같이 일했던 갈렙이라는 사람은 건강해서 여호수아보다 좀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갈렙이라는 사람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큰 소리를 쳤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도 나이 팔십오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소리를 쳤습니다. 뭐라고 큰 소리 쳤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여호수아 14장 10절로 12절에 보면 "내가 지금 나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사십오세 때와 일반이라. 싸움에도 출입에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하고서 이 영감님이 계속 큰 소리를 땅땅 쳤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쳤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각 지파를 나누어주게 될 때 이 영감님이 팔십오세니까, 영감님이라고 해야 안 되겠습니까? 갈렙 영감님이 큰 소리 큰소리 쳐왔기 때문에 그리고 또 전에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들이 얻는 것처럼 자기도 기럇세벨이라는 땅을 얻었다 그겁니다.
그냥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지금 살고 있는 땅인데 네가 빼앗아서 네가 주인 되라."라는 이 다른 이스라엘 족속들이 땅을 얻는 것처럼, 제가 얻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가서 그 사람들 쫓아내고 주인 되라는 그런 말입니다. 이런 복을 가지고 가면 이기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팔십오세 된 노인도 "나 젊었다. 젊었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사십오세 때와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다." 하면서 사십대 사람들이 얻는 땅을 자기도 얻어내는 이런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팔십오세 된 노인이 "늙어서 아무 것도 못한다. 못한다." 했으면 그냥 주는 땅도 아니고 싸워서 확보하라는 땅인데 돌아왔겠습니까?
그러니까 연세 많이 드신 우리 장로님들께서나 우리 권사님들께서도 갈렙의 지혜를 좀 얻어 가지고서 "약하다, 약하다" 하지 마시고 "강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젊을 때와 똑같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셔야 다른 사람들이 약하게 안 보지 않겠는가? 혹 압니까? 육십 넘어서 칠십 팔십 되는데, 새장가 또 들 수 있을는지 압니까? 그런 경우에 "나 정말 사십대의 젊음이 그냥 있다." 이래야 어느 여자가 그래도 결혼하려고 하지 "아이고 내가 늙어서 언제 관속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러면 누가 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큰 소리를 치고 그리고 이제 저 갈렙이 기럇세벨을 얻은 것처럼 일단 얻어놓고 보니까 "아이고 기가 차네 이거. 정말 여자를 아내로 삼기는 삼았는데, 이거 노인이 다되어 가지고서 어쩔꼬?" 그럴 때 보신제를 고아서 마시든지 어떻게 하든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일단 땅을 확보하는데 그 노인으로서 큰 소리 쳤던 갈렙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그 기럇세벨이라는 그 땅을 얻게 되었는데, 사시기 1장 12절에 보니까 이 노인이 땅은 얻었지만 큰 소리 치면서 다른 젊은이처럼 비슷한 땅의 분량은 얻었지만 막상 얻어놓고 보니까 그리고 싸우러 나가려고 보니까 기력이 없다 그겁니다. 팔십오세인데 무슨 기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력이 없었어요. 기력이 없으니까 사시기 1장 12절에 보니까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했습니다. 이 정도 대단한 사람이니까 딸 하나 잘 키웠던 모양입니다. 아름다운 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 온 세상에 방을 붙여서 "내가 얻은 땅…"
그러니까 큰소리 쳐서 일단 땅은 얻었지만 자기가 막상 싸우러 가려니까 도무지 안되겠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자기 집에 있는 딸을 내어놓으면서 "내 딸 아주 이렇게 잘 키웠으니 이 딸을 아내로 주겠으니 기럇세벨을 싸워서 취할 사람 그리고 내게 갖다 바칠 사람 있으면 나 오라." 해서 광고를 했더니 여러 사람이 나왔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으로 줄 사람은 하나이지요.
그래서 당시에 굉장한 유력자 옷니엘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옷니엘이 나타나서 "내가 저 기럇세벨을 차지할 힘이 있습니다. 나에게 맡기십시오." 그래서 가만히 이제 갈렙이 보니까 감당할 능력이 있는 그런 장수가 나온 겁니다. "당신은 그러면 나가서 그 성읍을 차지해 오너라." 그렇게 해서 그 젊은 유력자 옷니엘을 이용해서 자기가 얻었던 땅을 확보하게 됩니다.
늙은 자기가 스스로 가 보았자 되지도 않기 때문에 유력자를 구해 가지고서 했는데, 이 사람 장사는 정말 남는 장사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젊은 사람 구해 가지고서 자기가 큰 소리쳐서 확보한 땅을 차지해서 자기 땅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준다 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빼앗긴다 라고만 생각하십니까? 누구집 딸이든지 어느 부모든지 딸은 누구에게 주어도 줍니다. 기왕이면 일등짜리에게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시에 옷니엘이라는 가장 능력 있는 장수에게 자기 딸을 주었으니까 이것은 뭐 장사를 곱장사를 한 것이지요. 땅을 차지해서 좋고 그리고 또 좋은 사위를 맞이해서 좋고.
그래서 이 갈렙의 전략 전술은 무엇이냐? 일단 무엇인가 차지하려고 할 때는 약해지지 말고, 힘이 없지만 늙었지만 팔십오세지만 사십오세 때와 일반이다 하고서 일단 확보했는데, 확보해놓고 자기가 자기 손에 붙여졌기 때문에 나아가려고 보니까 "안되겠다." 그럴 때에는 이제 보상제도를 쓰라는 겁니다.
또 이 회사를 경영하시는 분들도 그 수하에 있는 직원들을 그저 열심히만 하라고 이렇게 또 "잘되거든 보자." 이렇게 대강 하지 말고 "너 이 일을 성공해내면 네가 이만큼 성과를 올리게 되면 네가 지금 계장인데 과장자리를 주겠다. 그리고 성과급으로 연봉을 얼마 주겠다. 이사 자리를 주겠다." 이렇게 무엇인가 확실하게 그 보상을 제의하게 되면 그 유력자가 해 보겠다는 사람이 나오고, 그 사람은 그 보상을 보고하기 때문에 자기의 전심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다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보상제도(補償制度), 요즘 가만히 보면 심지어 미장원 같은 데서도 "고객을 많이 데리고 오면 네 머리는 공짜로 해 주겠다." 또 무슨 의사들도 눈꺼풀 수술할 사람 열명 데리고 오면 네 눈꺼풀은 그냥 두개 만들어 줄게." 요즘 다 그런 보상, 그러니까 그것은 성과급이지요.
그러한 방법이 이 갈렙시대에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 갈렙은 나이 많지만 자기의 지혜와 담력을 가지고서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기럇세벨을 옷니엘의 손에 붙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갈렙의 손에 붙였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손에 붙여졌다고 해서 자기가 꼭 싸우라는 법이 아닙니다. 지혜로써 얻어내는 이런 것을 연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사기 1장 22절로 26절에도 보면 이는 요셉이 채택한 것인데, 어느 성을 공격하려고 들어가는데 성문이 꽉꽉 닫혀있느니 들어갈 수 없었는데, 마침 장보러 나가던 성민이 하나 있어 가지고서 그 사람을 붙들어 가지고서 "네가 이 성문의 입구를 내게 알려달라. 지금 이렇게 은폐를 해 놓았기 때문에 전부 성곽 같고 문이 어딘지 내가 모르겠는데 네가 성문을 대라. 그러면 내가 이겨서 성공할 때에는 너와 네 가족은 확실하게 살게 해 주겠다." 해 가지고서 그 사람이 자기 가족을 보장받고 성문을 일러주어서 이 요셉이 쳐들어가서 대승을 했습니다. 이런 것 이것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숨겨달라. 우리를 잡히지 않게 해 달라. 그러면 우리가 다시 들어올 때에 너와 네 가족을 구원하겠다. 우리가 들어올 때에 창가에다 베를 끌어 내려놓아라. 그러면 내가 네 집인 줄 알고 공격하지 않겠다." 해서 약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시켜놓고 "너 이것 잘 하고 우리 회사 잘되면 너 잘해주겠다." 이렇게 약속을 해 놓고 막상 회사가 큰 수입을 올렸는데, 몽땅 사주(社主)가 다 갖고 그 일한 사람들에게 안 준다면 그때는 뭐가 됩니까?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장님 얼굴 그려놓고 거기에 이것(×)을 그리고 허수아비 사장을 만들어놓고 불을 지르고, 이 꼴 되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러니까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야합니다. 성경에 보면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 교인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말했으면 지켜야 되는 겁니다. 왜? 그것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무너집니다. 철저한 겁니다.
그리고 말했다하면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강한 나라, 특히 저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 가면 거짓말하고는 못 삽니다. 다른 큰 죄를 짓고는 용서받아도 말하고서 행하지 아니하면, 거짓말 한 사람은 그 나라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적인 사상인데 이것이 철저해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보상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또 한 다른 전략이 있는데, 오늘 본문으로 채택해서 읽었습니다마는 사사기 1장 27절로 28절에 므나세 지파의 경우인데, 이 므나세 지파는 그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려고 들어가는데, 그 여러 작은 파벌들 족속들이 있었는데 많이 성공도 했지만 많이 못 쫓아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력이 되는 가나안 사람들이 결심하고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하겠다. 목숨 걸고 우리는 방어하겠다." 이거 무서운 겁니다. 목숨 내어놓으면 정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에 므낫세가 들어가는데, 가나안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결심하고 우리는 이 현장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니까 므낫세는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 손에 붙이셨으므로 나는 바로 이길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한번 싸워보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진격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피를 보지 않았습니다.
므낫세가 제안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너희 보다시피 우리 형제들은 다 차지해서 다 죽이거나 해서 이미 성공했는데, 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너희를 죽일 수 있다마는 너희가 결심하고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니 내가 너희에게서 피를 보기를 원치 않노라. 그러므로 같이 살자." 그랬다 그겁니다.
이것이 단기전이 아니고 장기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우리 한국 사람은 제가 세계 각 국으로 다니면서 이리 듣고 저렇게 배우고 한 바에 의하면 비교적으로 굉장히 급합니다. 급해요. 그저 속전속결(速戰速決) 이것은 군대에서나 할 일인데, 뭐든지 빨리 끝을 보아야됩니다. 아주 급해요.
세계에서 "빨리, 빨리"를 제일 많이 쓰는 나라가 한국이고, 저 남미 쪽으로 가면 "빨리, 빨리" 라는 단어를 거의 몇 년이 되어도 안 써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빨리라고 하는 것을 거의 통역을 제대로 못해요. 굳이 말한다면 스패니쉬로 "래피도"라고 하는데, "음식을 빨리 내어 달라. 뭐 체크인을 빨리 해 달라. 택시를 빨리 불러달라." 하면 참 이분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빨리 해도 해는 똑같이 넘어가고 안 해도 해는 여전히 넘어가는데, 천천히 천천히 하면서 살지 빨리 하다 죽으려고 났느냐?"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빠릅니다. 빨리 안 한다고 성내고 그리고 이것은 세계의 토픽감입니다마는 내 앞에 서서 전화부스에 들어가서 공중전화 하는 사람이 좀 오래 건다고 끄집어내어 가지고서 패 죽인 것이 이건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세계약을 한다든지 달세계약을 하면 "그 달세가 뭡니까? 달세? 달세?" 그리고 전세 일년씩 합니다. 큰 계약도 "일년마다 바꾸더라도 일년" 이럽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교회를 세내어서 건물을 세 얻어서 하는 경우들을 보니까 짧으면 오십년 길면 백년입니다. 그러니까 영국 사람들이 홍콩 반환하는 것도 그냥 백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므낫세의 경우는 보면 단기전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내가 해결 못한다 하더라도 좀 불편하더라도 저 사람들이 죽자살자 안 떠나고 지키겠다고 하니 저 사람들 죽이려고 하면 저 사람들도 많이 죽고 우리도 많이 죽을 테니까 피를 볼 것이 아니라 좀 불편하지만 같이 섞여서 살자." 해서 그냥 같이 지냈습니다.
그냥 같이 지냈는데, 초기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들어가는 므낫세보다도 그 성을 지키고 있던 가나안이 더 강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강한 쪽이 뭔가 큰 소리를 치니까 들어가는 므낫세 쪽이 오히려 벌벌 떨면서 눈치를 보았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땅에 가기는 갔지만 원주민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그겁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오늘 이 성경을 보니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쫓겨나기로 되어 있는 백성과 아직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땅을 네 손에 붙이노라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복을 얻은 백성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겁니다.
힘이 있어서 그 땅을 미리 차지하고 있던 사람에게서는 복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갈수록 손이 줄어지고 나는 자식들이 장수는 안 나고 빌빌하는 것들만 나오고 겁쟁이들만 나오기 시작하는데, 복을 받았던 므낫세 지파의 자식들은 어떤 자식들이 나오게 되었느냐? 강한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겁니다. 이 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처음 들어갈 때에는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눌려 살듯이 이렇게 살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복 받은 므낫세는 강하여지고 복이 없는 가나안은 아무리 뛰어보았자 나는 자식이 약하게 나더라 그겁니다. 그러면 뒤바꾸어지는 것이지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갈 때 겨우 겨우 목숨 붙이고 팔려 가지고 죽을뻔 하고 그렇게 갔지 않습니까? 애굽에 들어갈 때 정말 이 요셉이야말로 보디발의 집의 종으로 애굽의 종으로 감옥에 들어간 자로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들어갔지만 놀랍게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가 보디발 집에 가면 보디발 집이 잘 되고, 그가 감옥에 가면 감옥이 편하고, 그가 나라의 총리로 올라가게 되는데,
결국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 강성한 애굽에게는 복이 떠나가는 내용이었고, 그 애굽의 큰복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더니 말씀대로 애굽은 결국 누구의 손에 들어갔느냐? 요셉의 손에 들어갔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이제 주리고 있지만 그러나 너에게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요. 이제 울고 있지만 그러나 네게 복이 있나니 웃을 것임이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아멘으로 받으셨기 때문에 이 웃을 일을 향하여 가는 그 아름다운 부요한 환경과 그리고 이 부요한 창고를 위하여 나아가는 길에 여러분은 절로 강성해질 줄로 믿습니다.
지금 므낫세처럼 비록 약하지만 그 강한 어느 회사에 강한 어느 지역에 가서 비록 내가 눈치를 보면서 살지만 결국은 강성해진다 그겁니다. 야곱도 마찬가집니다. 그 아비로부터 복을 받았습니다. 그 복 받은 이유 때문에 형과 충돌이 있어서 이렇게 도망을 갔습니다마는 라반의 집에 들어가니 라반은 부자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이제 야곱이 들어오니 먹여줍니다. 입혀줍니다. 그저 집에서 일 시키고 그저 살게 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처음 야곱이 들어갈 때에는 외삼촌의 집에서 밥 먹고 또 집안에서 잠자고 입을 옷이 있으니까 그것만 해도 참 감사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복이 이어지기를 축복했던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복을 주었다 그겁니다.
맨 몸으로 들어가도, 여러분 복을 가지고 들어가면 많이 가지고 있다가 훅 날리는 것보다 복을 가진 사람이 알찬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므낫세는 내 손에 붙여진 기업이라 해서 무모하게 공격하지 않았고 차라리 남의 수하처럼 들어갔다 그겁니다. 남의 수하처럼 들어갔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서 결국은 수상이 되는 이런 축복이었지요.
오늘 본문으로 읽었는데, 사사기 1장 27절부터 쭉 보면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 손에 붙인 땅을 그 가나안 땅을 향하여 들어가면서도 다 쫓아내지를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들 밑에 시키는 대로 하고는 살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스라엘이 강성해졌다는 그겁니다.
뭡니까? 복을 가진 자는 끝내 강성해진다 그겁니다. 그렇게 강성해지고 나니까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켰다고요? 사역을 되시켰다 그겁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사역을 했지만 복을 가진 사람이 강성해지니까 이제는 주인과 종이 주종이 바꾸어져서 이제는 그 가나안 사람을 사역을 시켰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때는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그랬습니다. 왜 안 쫓아내었겠습니까? 험한 일을 시켜야 되니까요. 잘 사는 나라들이 이민을 왜 받아줍니까? 저 잘 사는 나라들이 이민 받아주는 이유는 가장 험한 일, 냄새나는 것, 위험한 것 그리고 또 그 일 종사하다보면 전부 병 걸리게 되는 이런 아주 3D직종이라고 할 수 있는 험한 일을 자기 잘 사는 일등 시민에게 시키지 아니하려고 외국으로부터 불러들여 가지고서 전부 다 하수구에 집어넣거나 전부 나쁜 일 시키려고 불러들인 것처럼 이 므낫세 지파는 어쨌느냐?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가 약해 가지고서 눈치보면서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복 주실 복을 기대하고 늘 결심하고 소망하고 살았더니 그 믿음과 소망을 따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강성해지게 되니까 전에 자기들을 지배하던 사람들이 도리어 자기들에게 사역을 해 주게 되니까 "이제는 내보낼 필요가 없다. 종으로 쓰자." 해서 쓰게 되었다 라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겠습니다.
또한 1장 34절로 36절 사이에 보면 단 지파의 경우가 되겠습니다마는 이 단 지파의 경우는 처음엔 아모리 족속과 싸움 붙을 때에는 처음부터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붙이신고로 이제 자기가 아모리 족속을 치러 들어갔지만 처음부터 아모리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싸우러 들어갔다가 아모리 산지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어디로 쫓겨 올라갔느냐? 저 산꼭대기로 쫓겨 들어갔다 그겁니다. 그리고 골짜기에 내려오면 죽인다 라고 하니까 골짜기에 내려오지를 못했어요. 골짜기에 내려와야 물이 있지요. 골짜기에 내려와야 무슨 곡식도 조금이라도 조금 되겠지요. 그런데 이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이 35절에 보니까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그랬어요. 이 단 지파는 들어가서 되쫓겨 가지고서 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지 못해요. 물 내려가는 그 밑으로 오지도 못하니까 짐승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이렇게 쫓겨 들어가 있는데, 자기 형제 중에 요셉이 강성해지는 것을 이 아모리 사람들이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겁니다.
그 요셉이 강성해진 것을 보고 가만히 "이 단 지파를 골짜기에도 내려오지 못하도록 오래 붙잡아 두었다가는 요셉 지파가 쳐들어와서 우리를 치면 어떡할까?" 해 가지고서 그냥 이 아모리 사람들이 필경 자기들이 손을 들고 오히려 "우리가 사역을 할테니 여기서 밥만 먹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었다 그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정이든지 어느 단체든지 모두 다 힘있는 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가족 중에는 형제들이 있고 또 이런 조직마다 직분들이 있는데, 모두가 다 기술 좋고, 모두가 다 권세 있고, 모두 다 지혜 있고, 모두 글 잘 쓰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의 형제들은 외부 사람들이 보아도 아주 형제들끼리 잘 지냈다 그겁니다. 요셉이 강성해지니까 그저 이 단은 요셉을 높였다 그겁니다.
만약에 요셉을 높이지 아니하고 또 그런 경우가 있지요. 형제들이 서로 으르릉 거리는 경우가 많아요. 형제들 부인들이 자기 형제만큼 또 자기 남편이 못 되면 "아이고 시아버지는 어떤데, 또 시동생은 어떤데, 당신은 이게 뭐냐?" 하면서 형제끼리 약간 경쟁심리가 있어 가지고서 똑같이 잘 살면 좋은데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 살고 하면 그만 정떨어지고 미워하고, 명절 때도 잘 모이지 않고 이런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 중에 단 지파와 요셉 지파는 남들이 보기에 어떠했느냐? 자기들 형제 중에 강성한 자가 있으니까 그를 높이고, 그를 울타리로 삼았다 그겁니다. 자존심 같은 것 내세워 가지고서 "아하"
여러분, 우리 나라 유명한 재벌들 형제들끼리 누가 다 큰 것 차지하느냐? 누가 좀 크려고 하니까 나는 그것 주고는 못 산다하고서 다 망하지 않습니까?
누가 유명한 사람이 하나 나타나면 그 유명한 사람을 자기의 업으로 삼으면 되는데, 그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못해요.
참 우리 굴지의 재벌들이 그저 형제 중에 하나가 나서면 밀어주고, 그 형제 밑에서 전무나 하고 그 밑에서 사장 하나 하라고 하면 그만 하면 될텐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해서 큰 회사하나 갖고 나가고 갖고 나가고 해서 그 큰 재벌이 다 깨어진다 그겁니다. 적자투성이 됩니다. 단 몇 년 사이에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보는데, 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자기의 동기생 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다든지, 자기의 모인 그런 어떤 조직 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다든지 할 때 그것을 시샘할 것이 아니라 이 단처럼 요셉이 강성해지면 요셉과 잘 지내고 있고, 요셉이 너무나 단을 사랑해서 언젠가는 단에게 힘을 보태줄 것이라는 것을 남이 알도록 우애를 가져라 그겁니다.
그것을 서로 이기려고만 하지말고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또 높여주고 다른 동생이 또 잘 나가면 그때 높여주고 그렇게 되어서 울타리로 삼았던 것이 바로 단이요, 요셉입니다. 그래서 형제 잘 된 것 때문에 아모리를 쫓아내고 필경은 아모리가 사역을 했다 라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지요.
처음 드린 내용은 연합전선(聯合戰線), 그리고 또 세 번째 드린 내용은 단번에 차지하지 아니하고 장기전(長期戰)이고 두 번째는 뭐냐? 보상제도(補償制度), 늙었지만 큰 소리쳐서 일단 확보를 해 놓고 확보한 다음에 내 실력이 부족하면 내가 무엇을 줄 테니 하겠느냐 해서 보상제도, 이렇게 했고
그 다음에 므낫세 지파는 단기전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장기전으로 나갔다는 것, "지금은 내가 수하로 들어가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수상 만들어 줄 것이다. 내가 아니면 내 다음 대에라도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렇게 아주 느긋하게 나가는 장기전, 이것 무섭습니다. 이렇게 해야 별로 충돌 없이 자기가 성공을 할 수 있다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집안이나 자기의 이웃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시기해서 깔아 낮추려고 하지말고 그 사람을 자기의 울타리로 삼아라는 겁니다. "그것을 남이 보도록 하라. 그렇게 되면 바로 강성한 자의 힘이 그 약한 자에게 있다는 것을 그 적들이 보고 함부로 하지 못한다." 이런 작전입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러한 일들로 해서 우리 성도님들 손에 2002를 위하여 붙여주신 그 배부를 복과 그리고 또 그 웃을 복을 여러분께서 확보를 해 나가시겠는데 그러나 여러분께서 작전 내용들을 가만히 전략들을 듣고 보니까 ''야 그 전략은 다 좋지만 나에게는 해당이 되는 것이 없구나. 나는 내게도 실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와줄 자도 없으니 그리고 배경이 될만한 형제도 하나 없으니 나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2002년 부요는 나는 예외가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되시는 분들이 있겠습니다마는
이제 그런 경우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다음 주일에 그 원하는 바를 그야말로 여러분께서 누가 도울 자도 없고 광야에 생활하는 외롭게 된 여러분 같은 그런 입장이라면 그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 하셔서 안겨주시는 그런 진리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다음 시간에 말씀을 드리게되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작전을 세워가면서 친히 이겼을 경우에도 그러하고 또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주어서 안겨주었을 경우도 그러한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완전하게 다 주지 아니하고 일부를 하나님께서 남긴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려낸 땅, 우리가 그려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리라고 한 그 가나안땅을 향하여 들어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유다와 시므온처럼 자기 힘이 강해서 바로 다 차지하고 저들의 엄지발가락 엄지손가락을 다 끊어서 맥을 못 추게 만드는 그런 상황이라도 절대로 다 주지 아니하고 일부를 남겼다 그겁니다.
백프로 차지하게 하지 않았다 그겁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냥 안겨 주실 때에도 백프로 다 주지 않고 일부를 남기고 그리고 또 우리 힘으로 어떤 전략을 써서 이겼을 경우에도 일부를 남겼다는 겁니다.
왜 남기셨는가? 여러분께서 그려내신 그림이 있을 겁니다. 소망했던 소망이 있을 겁니다. 지난해에 이 어려운 우리 한국경제 속에서도 또 그 어려운 여러 가지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아마 이스라엘 지파만큼 얻었다면 이미 다섯 지파쯤은, 열둘 중에 다섯 지파쯤은 이미 그려낸 대로 다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린 줄로 믿습니다.
많은 경우가 감사하고 또 이렇게 알려와 주신 분이 많습니다. 그렸던 대로 되었습니다 하는 분이 한 다섯쯤 된다면 이스라엘에 해당한다면 아직 축복을 받고도 그려내고도 아직 차지하지 못한 지파가 몇 지파라고 했지요? 일곱 지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일곱 지파 정도는 아직까지 조금만 확보했거나 아직도 출발도 못했거나 이런 형편에 있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완전하게 천국 갈 때까지 다 된 경우는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부를 남기신다 그겁니다. 왜 남기실까요? 왜 그려낸 것을 한꺼번에 다 주시지, 직접 나가서 싸워도 다 못 차지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도 다는 주지 않고 일부를 남기신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사기 3장을 한 번 봅시다. 1절부터 6절까지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땅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참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셨습니다. 이 아브라함 때문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나기도 전에 수백 수천년 전에 조상 잘 만나 가지고서 땅을 얻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겁니다. 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가나안을 주노라. 그려 오라. 네 손에 붙이노라." 했던 이것은 그들과 처음 약속한 것이 아니라 네 열조에게 약속한대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조상은 잘 만났지요.
여러분 우리 산해원 1세대에 계시는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을 비롯한 여러분, 이 교회와 더불어 눈물 흘리며 충성한 그 충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뻐하사 아직도 언제 날지도 모르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노라 라고 하는 축복들을 정말 이 교회와 함께 충성하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여러분이 받으시고 하나님 부르실 때 하나님의 나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몇 대 후에 나타날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했던 약속은 반드시 이루셨다 그겁니다. 한없는 세월이 흘렀어도 이루었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그 아들을 백세에 준다는 것은 간단한 것이고, 먼 후일 이스라엘 열두 지파 보지도 못한 자식들입니다. 그들에게 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주겠노라 했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아직 생길 생각도 하지도 않는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주었으니
주안에서 충성스러운 여러분, 이 아브라함처럼 여러분의 당대 2세나 3세 혹은 저 십대손에 내려가서라도 큰 인물이 나거나 큰 부자가 날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큰 자가 날 수 있는 복을 미리 받으신다면 약속에 진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인하여 반드시 그때에 가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는데, 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복을 따라서 가나안땅에 들어갔는데, 이 므낫세도 들어가고, 단도 들어가고, 유다도 들어가고, 시므온도 들어가고 싸움을 하면서 들어가고 철병거 때문에 멈칫 하기도 하고 이렇게 평생을 장기전을 하면서 이 땅을 차지했는데, 그 땅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 땅의 주인이 되고 난 다음에 태어나는 자식들은 아주 곱게 큰다 그겁니다.
재물이 많지요. 적이 없지요. 평안하게 되니까 아이들 교육 많이 시키고 아이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곱게곱게, 험한 일은 아모리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 사역시키고 자기 자식은 곱게 키웠다 그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자식들은 곱게 크는 것은 당연하다 그겁니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이 알고 싶었던 것은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 "그 아이 나는 아이들이 계속 교육을 받아서 자기 열조와 같이 신앙생활 하면 이 남겨둔 것을 마저 저희들에게 주려니와 저희들 조상처럼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대부분의 경우 어려우면 하나님 찾지만 복을 주어서 여유를 갖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의 쾌락을 향하여 나가게 되어 있는데,
이 너희 후손들이 만약에 너희의 이 충성스러움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므로 확보한 이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젖을 먹으며 꿀을 먹으면서 복되게 살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없어도 살겠다 싶어서 딴 짓을 하고 신앙생활을 그 부모처럼 하지 아니할 경우를 대비해서 일으킬 적을 남겨두었으니 히위 사람도 얼마, 가나안 사람도 얼마, 그 사람들 다 남겨둔 것이라. 절대 한꺼번에 다 주지 아니한 것을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그들을 시험하려 하셨다 그겁니다.
바로 3장 1절에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그러니까 얻어서 성공한 후에 태어나는 자식들은 아주 곱게 크겠지요. 키도 더 클 겁니다.
우리 요즘 자녀들 아이들 얼마나 컸던지 고등학생이 되면 어머니가 전부 자식들을 쳐다 봐야됩니다. 전에는 굶고 배고프고, 열심히 노력하고 아이들 나면 바닷가에서는 뱃놈 만들려고 하고, 들판에서는 농사꾼 만들려고 하고, 산에서는 산지기 만들려고 하고 이러니까 새끼들이 클 수가 있어야지요.
못 먹고 잘 못 크니까 작은데, 그런데 지금은 쑥 쑥 커서 얼마나 잘 생겼는지 우리 성도들 자녀들 들어올 때 보면 전부 미인이고 전부 미남이라. 키고 쑥쑥 크고 얼굴도 어찌 그리 하얗고 좋은지 말입니다. 그렇게 잘 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를 이어서 믿음을 보시겠다는 겁니다.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세대 중에서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브론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그 열조처럼 청종하나 아니하나를 보겠다" 했다 그겁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잘 먹고 잘 살다 보니까 "우리가 거룩한 민족끼리 구별된 민족끼리 결혼을 해야 되겠다" 이것이 아니고 잘먹고 잘살다보면 뭔가 성적으로 나가고, 타락으로 나갑니다. 색시하고 잘생기고 이런 사람을 보고 쫓아나갑니다. 네 민족이 되었거나 내 민족이 되었거나 막 이렇게 섞였다 그겁니다.
결과는 어찌되었겠습니까? 망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겨두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으나 뭔가 고민 거리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항상 이것이 나에게 가시로구나 하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경성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 믿는 믿음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 복되게 자라나고 성장하는 것 참 좋지만 이것을 훗날에 잊어버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을 하나님께서 시험하기 위해서 각 족속의 종족 얼마씩을 남겨두었으니 믿음을 조상처럼 이어나가면 그 남겨진 족속들이 끝까지 사역을 하겠지만 믿음에서 떠나 열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조금 남은 것이 씨앗이 되어 먼저 빼앗은 큰 것을 되 삼킬 것이라 그랬다 그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바 복을 대를 이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2장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조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2장 6절 이하를 읽어보겠습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이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그리고 여호수아를 도와서 함께 나왔던 장로들의 이 세대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겁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도 죽고 여호수아와 함께 하였던 그 장로님들도 세상을 다 떠나 열조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그겁니다. 그런데 이 여호수아가 살아있고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그 내력을 다 경험했던 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자식들도 그 부모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부모님들이 자꾸 얘기 해 주니까 어느 정도 "그랬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저 광야로부터 요단을 마르게 해서 건져내셨구나" 하는 것을 그 부모들이 그 하나님 역사하신 것을 보았던 장로들과 그 직접 경험했던 여호수아 생전에는 자식들이 복되게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 섬기던 대가 다 열조에게로 가고 그 자식의 자식들이 이제 교회 주역이 되었는데, 그 주역들은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가벼이 여기고 나는 자기 자식들 손자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한 삼대 째에는 도무지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하여 무엇을 했는지 아는 자가 없더라 그겁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망한 것이지요. 철저히 망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셨으면 그 큰 복 받아 가지고 다음 평생에 내가 얼마나 살겠습니까? 오늘 기도의 말씀에도 있었습니다마는 우리의 사후라는 것은 이제 좀 더 있으나마나 별것 아닙니다. 많은 것을 얻는다고 해서 이후 밥 다섯 끼 여섯 끼 먹고 소화시킬 그런 능력 없습니다. 더 빨리 죽지요.
우리의 남은 얼마 안되는 사후가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나라 그리고 영원히 이어져 내려가야 될 우리의 후손들이 성공해야 내 성공인 것이지, 바짝 축복 받아 가지고 내 대에만 화끈하게 놀다가 벌써 내 자식까지는 어느 정도 아비를 따라서 교회도 나오고 신앙을 그대로 지키다가 그 자식은 절실하게 자기 자손에게다 하나님 역사하셨던 일을 일러주지 아니하므로 잘 살게 되니까 받은 복으로써 그냥 곁길로 나가게 됨으로써 망하게 되는 이 역사가 성경 속에 있는데, 왜 그러한 역사를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1대나 2대만에 그치지 말고 갈수록 창대 해지기를 바라서 하나님께서 이런 기사를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이 큰 성공을 거두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 된다 그겁니다. 주의 훈계와 진리로써 양육해야 된다 그겁니다.
그리고 우리 산해원 교회는 보통 교회가 아닌 것을 여러분이 잘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일으키실 때 역사 하신 역사를 저와 함께 돕고 역사하셨던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 연세 드신 분들이 다 눈으로 보았다 그겁니다.
그리고 그때에 역사한 역사 속에서 죽을병에서 살아난 자, 꼬부라진 사람이 펴진 자, 여기에 다 앉았다 그겁니다. 이러한 분들이 있는 날 동안에는 참으로 복되어서 듣고 보기 때문에 그 신앙을 지켰으나 그 다음에 이어지지 아니하면 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무엇인가 흔적이 있으면, 요단을 건너올 때에도 열두 지파의 돌 하나씩 가져다가 그것을 모아놓고서 "이것이 요단을 마르게 건넜다."
그리고 야곱이 돌 베개 했던 것을 성전 돌기둥으로 만들어 놓고서 또 그것을 기둥 삼아 모든 자손들에게 일러주려고 애를 쓰고 그리고 그들은 이 눈썹과 눈썹 미간사이에다 딱지를 붙이고 문설주에도 딱지를 붙입니다. 쉐마라고 하는 것을 붙여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 조상과 함께 하셨으면…" 이것을 항상 교육을 시켰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아버지 어머니 따로, 할머니 할아버지 따로, 아이들 밀가루 음식 따로 스파게티 따로, 그렇지 않아요. 반드시 같이 앉아서 음식을 먹는 동안에 후닥닥 먹는 것이 아니라 전부 우리 열조로부터 하나님이 어찌하셨다는 것을 아이에게다 주입을 시킨다 그겁니다.
어린이가 말 배우는 것 깨달아서 배웁니까? 자꾸 들으면 그냥 주입이 되어서 입이 툭 터져버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입을 시킨다 그겁니다. 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 나라와 이 민족에서 떠나지 않고 나의 후손들도 우리 열조와 나와 같이 복을 누리기를 바라서 후손이 여전하게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어야 성공인 것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오히려 없음만도 못하지 않느냐 그겁니다. 차라리 없으면 올라갈 수나 있지만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형편은 안되겠지요.
아무쪼록 산해원을 위해서 역사하신 하나님과 그 행하신 일들을 여기 계신 우리 어른들께서 직접 보았고 그 일이 나타나도록 기도했고 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도록 전부 쓰임 받았던 분들이 현재 그 1대가 같이 있다는 것 참 다행한 일인데,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시는 젊은이들이여, 이 1대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이 불모지에 귀신 역사 많던 이 현장에 이 수원지 골짜기에 이만한 교회를 이루었고, 몇 번이고 쫓겨나고 몇 번이고 쫓겨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눈치보고 저 눈치보고, 우리 교회 앞에 들어오는 저 아스팔트 공장이 있을 때 여름에 아스팔트 공장 일하는 사람들, 하기야 그 아름에 불을 떼고 골탄을 태우니까 덥기도 더웠겠지마는 옷이나 입습디까? 온통 골탄 묻은 팬티하나 겨우 걸쳐 가지고서 돌아다니는데, 옷 좀 입고 사람들 다니는데 예 좀 갖추라고 그 말 한마디 못했다 그겁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나가라 하니까.
누구처럼 했습니까? 이 이스라엘 민족처럼 그냥 기여 다녔습니다. 그리고 20년 간 장기전을 폈습니다. 이 땅이 다 들어왔지 않습니까? 전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기죽어 살았지만 지금 뭡니까? 이 동네가 전부 교회 덕을 봅니다. 전에는 이 동네 사람들이 예배드리면 와 가지고 온갖 오물을 퍼붓고 야단이었습니다. 간판을 눕혀 가지고서 지지고 밟고 야단이었습니다.
이제 이 동네 큰 사람 작은 사람 모두 교회 덕을 보고 "평일에 우리 차 좀 갖다 데면 안되겠습니까?" 합니다. 그래서 막 갖다 대기에 우리 직원들보고 그랬습니다. "번호 적어 가지고 적어도 고마운 것을 알도록 하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보통 현장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현장이 아닙니다. 그런 현장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 아는 사람은 한참 타락을 하려고 해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현장을 경험한 사람이 타락하기가 어렵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자랑이나 교만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뻔히 알고 보고 어떻게 타락하겠습니까? 이때는 좋은 때입니다. 또 이 같은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 산해원 건축 40년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이미 받았다 그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20년에 이만큼 이루었습니다. 3개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되니까 이제 다된 줄 아는데, 어느새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산해원 건축 40년이라는 그 표어가 각 교회 주보나 사방 보면 슬슬 사라져간다 그겁니다,
여러분 이게 만족이 아닙니다. 산해원 건축 40년의 그 40년에 완벽한 성전의 작품은 남겨 두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20년 사역하면서 전부 땅을 사 모으고 그리고 3개 교회를 이렇게 세워 드릴 때 완벽한 교회까지 지어드릴 마음이 제 개인적으로 정말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니까 후손을 위하여 한 대에 완전하게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오늘 젊은이들이여, 이 설교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이 성도 중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집권자 대통령이 나올 것도 그리고 여러 장관이 나올 것도 우리는 영을 통하여 받은바가 있습니다. 이것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겨두신 하나님의 사역, 이렇게 세 개 교회 지은 것 대 성전 갖고 있는 것 여기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러 제가 그래서 "완전 건물 하지말고 판넬로써 가건물화 된 것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빨리 후닥닥 다 짓고 경제적으로 돈 아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줄 믿습니다. 대를 이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성공을 가져가야 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고 우리 후손을 위하여 한꺼번에 주셔도 감사하고 남겨두신 것도 감사하고, 경성하고 깨어있어서 이 1세대가 이만큼 이루었으니 지금 젊은이들이여, 이 설교를 잊지 마시고 산해원 건축 40년에 새로운 완전한 작품을 하나님 위하여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산해원 40년에 큰 인물을 주시겠다 하는 것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잊지 마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싹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그 이스라엘 자손들의 손에 붙이셨는데, 성공한 케이스도 있지만 이렇게 쫓아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 그런 경우에 또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은「우리가 모델로 할 이스라엘의 기업 전략」이라는 주제로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체제 하에 들어가면서 모두 긴장하고 또 불안해 할 그때에 아마 여러분 기억하실 분은 하실 겁니다. 지금부터 약 삼 년 반여 전에 "삼 년 반 동안 긴장하나 그러나 삼년 반 후에는 다시 열리게 될 것이라." 했는데, 그 기간이 지나가고 지금 세계 여러 나라들은 파산하는 나라도 있고 또 여전히 IMF 하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나라도 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사랑하시고 복 주셔서 그 말씀대로 우리는 나라는 경제적으로 앞으로 좀 소망적인 그런 단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미 들어서서 국제적인 신인도가 올라가고 있어서 정말 이렇게 ''이제 일을 해 볼만한, 뭔가 이 전략을 따라서 이렇게 한번 움직여 볼만한 그런 시기에로 접어들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려운 삼년 반을 지내고 이제 2002년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해주시는 이 지혜들로써 좋은 방법, 모델로 삼아서 한번 그 우리 손에 붙여진 것을 실제로 차지하러 움직여보는 그런 해가 되었으면 하는데, 오늘 말씀으로 여러분이 지혜를 얻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2002 부요를 위하여 주께서 복된 말씀을 주셨으니 "이제 주린 자 그러나 그에게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요" 그러니까 주리고 있지만 배부를 복은 이미 그에게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린 자에게 배부를 복이 있고, 이제 우는 자 그러나 그에게 복이 있나니 웃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지금 울고 있지만 웃을 복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갖고 있다 라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우리에게 있는 그 배부를 복 그리고 여유로워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런 복을 가진 우리로서 마치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 주신 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리라 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땅을 결국 먼 훗날에 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제 네 손에 붙이노라" 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께서 땅 얻을 권리를 주신 줄로 알고 진격해 올라갔고 그리고 그 땅들을 차지했던 것처럼 우리가 배부를 복과 그리고 웃을 복이 이미 우리 속에 있는데, 이제는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현실화(現實化) 그것을 현품화(現品化)하기 위해서
오늘 대표로 기도하신 기도 속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었고 우리 모두 동감한 마음에서 아멘 했습니다마는 그것을 그 현품화 할 수 있는, 배부름을 현품화 하고 또 웃을 환경을 만들어서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권리를 이번 성회를 통해서 우리 주께서 이미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조상으로부터 마음에 기대하고 가져왔던 그 축복의 땅이 이제는 현품으로 바꾸어지는 그 현장들을 찾아가서 차지하는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배부름을 향하여 움직이고 또 웃을 일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이 이스라엘이 성공한 전략처럼 우리도 갖가지 형편을 따라서 그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 오늘 함께 생각하는 이 성경 속의 전략들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는 방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 손에 붙여진 그 가나안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또 이스라엘이 이렇게 확보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전략을 구사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전략들을 기뻐하셔서 그들과 동행해주신 내용들을 소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내용을 소개한다면 아마 이것은 지난주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연합전선 구축이었습니다.
사사기 1장 1절로 7절 사이에 유다가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붙여주신 가나안을 향하여 올라가 보려고 하니까 자기의 힘이 부족했습니다. 현재 진치고 있는 가나안의 힘이 자기 유다 족속의 힘보다 월등히 강한 것을 알고 그대로 나가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붙여주셨다는 것은 곧 이기게 해 주신다, 곧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손에 붙여주었으므로 자기의 능력을 헤아려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도 부족하지만 내 형제 중에 누가 또 부족해서 연합전선을 하고 서로 도울 수가 있겠는가? 품앗이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시므온이 그러했습니다.
시므온의 군대가 적은데, 시므온이 그려내었던 땅이 또 컸습니다. 그래서 이 유다가 형제 시므온에게 말하기를 "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가 싸우러 나갈 때에는 네가 나를 돕고 그리고 이기고 난 다음에 네가 너의 그렸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러 갈 때에는 내가 너를 돕는 것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약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은 만큼 갚아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합쳐서 이것 하나 이기고 또 이기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또 시므온의 땅의 가서 합해서 연합해서 성공을 거두자." 이렇게 해서 둘 다 대승(大勝)을 거두는 이런 현실을 보게 되는데, 앞으로 이런 일을 할 때에는 어물쩍 어물쩍 그저 "나 잘되거든 보자" 이런 식으로 하지말고 확실해야 됩니다. "네가 나를 도우면, 그 다음에 네가 싸울 때 내가 너를 돕는다." 이것은 약속을 했으면 계약을 했으면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그려내었던 그 기업을 여러분 자신이 차지하기 힘들면 첫째 전략으로서 공동전략, 연합전선을 한번 구축해 볼 수 있겠다 라는 말씀을 전 시간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이기고 나니까 어떻게 했는고 하면 아도니 베섹이라고 하는 그 상대국의 강한 자,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가지고서 엄지손가락을 자르고 또 엄지발가락을 잘랐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이 사람의 엄지손가락을 그냥 두면 칼을 들고 또 언제 공격을 해 올지 모를 사람이다 그겁니다. 그래서 칼을 못 쓰도록, 그러면 발가락은 왜 잘랐느냐? 이 몸은 도망을 가도 곤란하다 그겁니다. 제일 높은 사람이 도망가면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다시 군대를 만들어 가지고 나온다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업을 얻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유다와 시므온의 정책을 보면 한번 확보한 다음에는 그의 부하들은 내 부하로 삼을 수 있어요. 월급 주고 먹여주면 그 사람 주인이 누가 되든지 상관 안한 부하들은 쓸 수 있지만 거기에 보스(boss) 제일 큰 앞잡이 된 사람은 한번 앞잡이 된 사람은 끝내 앞잡이 하려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주 다시금 반역하지 못하도록 또 도망가서 새로이 군대를 만들지 못하도록 엄지발가락,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리는 그런 지혜를 써서 후한을 없게 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데리고 쓰던 사람들은 포로로 잡아 가지고서 사역을 시킬 수 있고 먹여만 주면 주인이 누구든지 돌아설 수 있지만, 맨 윗 사상가 맨 윗 주인은 항상 주인 하려는 기질이 있어서 처음에는 좀 굽신굽신하는 것 같지만 언제 반역을 할지 모른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싹이 나지 못하도록 했던 그러한 내용을 전 시간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다음 또 다른 전략을 하나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 전략은 무엇인가 하면 보상을 주겠다 라는 전제로서 남의 지혜나 기술이나 능력을 빌리는 겁니다. 이 여호수아 당시에 같이 일했던 갈렙이라는 사람은 건강해서 여호수아보다 좀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갈렙이라는 사람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큰 소리를 쳤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도 나이 팔십오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소리를 쳤습니다. 뭐라고 큰 소리 쳤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여호수아 14장 10절로 12절에 보면 "내가 지금 나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사십오세 때와 일반이라. 싸움에도 출입에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하고서 이 영감님이 계속 큰 소리를 땅땅 쳤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쳤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각 지파를 나누어주게 될 때 이 영감님이 팔십오세니까, 영감님이라고 해야 안 되겠습니까? 갈렙 영감님이 큰 소리 큰소리 쳐왔기 때문에 그리고 또 전에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들이 얻는 것처럼 자기도 기럇세벨이라는 땅을 얻었다 그겁니다.
그냥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지금 살고 있는 땅인데 네가 빼앗아서 네가 주인 되라."라는 이 다른 이스라엘 족속들이 땅을 얻는 것처럼, 제가 얻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가서 그 사람들 쫓아내고 주인 되라는 그런 말입니다. 이런 복을 가지고 가면 이기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팔십오세 된 노인도 "나 젊었다. 젊었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사십오세 때와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다." 하면서 사십대 사람들이 얻는 땅을 자기도 얻어내는 이런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팔십오세 된 노인이 "늙어서 아무 것도 못한다. 못한다." 했으면 그냥 주는 땅도 아니고 싸워서 확보하라는 땅인데 돌아왔겠습니까?
그러니까 연세 많이 드신 우리 장로님들께서나 우리 권사님들께서도 갈렙의 지혜를 좀 얻어 가지고서 "약하다, 약하다" 하지 마시고 "강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젊을 때와 똑같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셔야 다른 사람들이 약하게 안 보지 않겠는가? 혹 압니까? 육십 넘어서 칠십 팔십 되는데, 새장가 또 들 수 있을는지 압니까? 그런 경우에 "나 정말 사십대의 젊음이 그냥 있다." 이래야 어느 여자가 그래도 결혼하려고 하지 "아이고 내가 늙어서 언제 관속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러면 누가 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큰 소리를 치고 그리고 이제 저 갈렙이 기럇세벨을 얻은 것처럼 일단 얻어놓고 보니까 "아이고 기가 차네 이거. 정말 여자를 아내로 삼기는 삼았는데, 이거 노인이 다되어 가지고서 어쩔꼬?" 그럴 때 보신제를 고아서 마시든지 어떻게 하든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일단 땅을 확보하는데 그 노인으로서 큰 소리 쳤던 갈렙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그 기럇세벨이라는 그 땅을 얻게 되었는데, 사시기 1장 12절에 보니까 이 노인이 땅은 얻었지만 큰 소리 치면서 다른 젊은이처럼 비슷한 땅의 분량은 얻었지만 막상 얻어놓고 보니까 그리고 싸우러 나가려고 보니까 기력이 없다 그겁니다. 팔십오세인데 무슨 기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력이 없었어요. 기력이 없으니까 사시기 1장 12절에 보니까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했습니다. 이 정도 대단한 사람이니까 딸 하나 잘 키웠던 모양입니다. 아름다운 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 온 세상에 방을 붙여서 "내가 얻은 땅…"
그러니까 큰소리 쳐서 일단 땅은 얻었지만 자기가 막상 싸우러 가려니까 도무지 안되겠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자기 집에 있는 딸을 내어놓으면서 "내 딸 아주 이렇게 잘 키웠으니 이 딸을 아내로 주겠으니 기럇세벨을 싸워서 취할 사람 그리고 내게 갖다 바칠 사람 있으면 나 오라." 해서 광고를 했더니 여러 사람이 나왔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으로 줄 사람은 하나이지요.
그래서 당시에 굉장한 유력자 옷니엘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옷니엘이 나타나서 "내가 저 기럇세벨을 차지할 힘이 있습니다. 나에게 맡기십시오." 그래서 가만히 이제 갈렙이 보니까 감당할 능력이 있는 그런 장수가 나온 겁니다. "당신은 그러면 나가서 그 성읍을 차지해 오너라." 그렇게 해서 그 젊은 유력자 옷니엘을 이용해서 자기가 얻었던 땅을 확보하게 됩니다.
늙은 자기가 스스로 가 보았자 되지도 않기 때문에 유력자를 구해 가지고서 했는데, 이 사람 장사는 정말 남는 장사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젊은 사람 구해 가지고서 자기가 큰 소리쳐서 확보한 땅을 차지해서 자기 땅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준다 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빼앗긴다 라고만 생각하십니까? 누구집 딸이든지 어느 부모든지 딸은 누구에게 주어도 줍니다. 기왕이면 일등짜리에게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시에 옷니엘이라는 가장 능력 있는 장수에게 자기 딸을 주었으니까 이것은 뭐 장사를 곱장사를 한 것이지요. 땅을 차지해서 좋고 그리고 또 좋은 사위를 맞이해서 좋고.
그래서 이 갈렙의 전략 전술은 무엇이냐? 일단 무엇인가 차지하려고 할 때는 약해지지 말고, 힘이 없지만 늙었지만 팔십오세지만 사십오세 때와 일반이다 하고서 일단 확보했는데, 확보해놓고 자기가 자기 손에 붙여졌기 때문에 나아가려고 보니까 "안되겠다." 그럴 때에는 이제 보상제도를 쓰라는 겁니다.
또 이 회사를 경영하시는 분들도 그 수하에 있는 직원들을 그저 열심히만 하라고 이렇게 또 "잘되거든 보자." 이렇게 대강 하지 말고 "너 이 일을 성공해내면 네가 이만큼 성과를 올리게 되면 네가 지금 계장인데 과장자리를 주겠다. 그리고 성과급으로 연봉을 얼마 주겠다. 이사 자리를 주겠다." 이렇게 무엇인가 확실하게 그 보상을 제의하게 되면 그 유력자가 해 보겠다는 사람이 나오고, 그 사람은 그 보상을 보고하기 때문에 자기의 전심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다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보상제도(補償制度), 요즘 가만히 보면 심지어 미장원 같은 데서도 "고객을 많이 데리고 오면 네 머리는 공짜로 해 주겠다." 또 무슨 의사들도 눈꺼풀 수술할 사람 열명 데리고 오면 네 눈꺼풀은 그냥 두개 만들어 줄게." 요즘 다 그런 보상, 그러니까 그것은 성과급이지요.
그러한 방법이 이 갈렙시대에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 갈렙은 나이 많지만 자기의 지혜와 담력을 가지고서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기럇세벨을 옷니엘의 손에 붙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갈렙의 손에 붙였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손에 붙여졌다고 해서 자기가 꼭 싸우라는 법이 아닙니다. 지혜로써 얻어내는 이런 것을 연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사기 1장 22절로 26절에도 보면 이는 요셉이 채택한 것인데, 어느 성을 공격하려고 들어가는데 성문이 꽉꽉 닫혀있느니 들어갈 수 없었는데, 마침 장보러 나가던 성민이 하나 있어 가지고서 그 사람을 붙들어 가지고서 "네가 이 성문의 입구를 내게 알려달라. 지금 이렇게 은폐를 해 놓았기 때문에 전부 성곽 같고 문이 어딘지 내가 모르겠는데 네가 성문을 대라. 그러면 내가 이겨서 성공할 때에는 너와 네 가족은 확실하게 살게 해 주겠다." 해 가지고서 그 사람이 자기 가족을 보장받고 성문을 일러주어서 이 요셉이 쳐들어가서 대승을 했습니다. 이런 것 이것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숨겨달라. 우리를 잡히지 않게 해 달라. 그러면 우리가 다시 들어올 때에 너와 네 가족을 구원하겠다. 우리가 들어올 때에 창가에다 베를 끌어 내려놓아라. 그러면 내가 네 집인 줄 알고 공격하지 않겠다." 해서 약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을 시켜놓고 "너 이것 잘 하고 우리 회사 잘되면 너 잘해주겠다." 이렇게 약속을 해 놓고 막상 회사가 큰 수입을 올렸는데, 몽땅 사주(社主)가 다 갖고 그 일한 사람들에게 안 준다면 그때는 뭐가 됩니까?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장님 얼굴 그려놓고 거기에 이것(×)을 그리고 허수아비 사장을 만들어놓고 불을 지르고, 이 꼴 되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러니까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야합니다. 성경에 보면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 교인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말했으면 지켜야 되는 겁니다. 왜? 그것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무너집니다. 철저한 겁니다.
그리고 말했다하면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강한 나라, 특히 저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 가면 거짓말하고는 못 삽니다. 다른 큰 죄를 짓고는 용서받아도 말하고서 행하지 아니하면, 거짓말 한 사람은 그 나라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적인 사상인데 이것이 철저해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보상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또 한 다른 전략이 있는데, 오늘 본문으로 채택해서 읽었습니다마는 사사기 1장 27절로 28절에 므나세 지파의 경우인데, 이 므나세 지파는 그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려고 들어가는데, 그 여러 작은 파벌들 족속들이 있었는데 많이 성공도 했지만 많이 못 쫓아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력이 되는 가나안 사람들이 결심하고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하겠다. 목숨 걸고 우리는 방어하겠다." 이거 무서운 겁니다. 목숨 내어놓으면 정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에 므낫세가 들어가는데, 가나안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결심하고 우리는 이 현장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니까 므낫세는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 손에 붙이셨으므로 나는 바로 이길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한번 싸워보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진격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피를 보지 않았습니다.
므낫세가 제안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너희 보다시피 우리 형제들은 다 차지해서 다 죽이거나 해서 이미 성공했는데, 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너희를 죽일 수 있다마는 너희가 결심하고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니 내가 너희에게서 피를 보기를 원치 않노라. 그러므로 같이 살자." 그랬다 그겁니다.
이것이 단기전이 아니고 장기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우리 한국 사람은 제가 세계 각 국으로 다니면서 이리 듣고 저렇게 배우고 한 바에 의하면 비교적으로 굉장히 급합니다. 급해요. 그저 속전속결(速戰速決) 이것은 군대에서나 할 일인데, 뭐든지 빨리 끝을 보아야됩니다. 아주 급해요.
세계에서 "빨리, 빨리"를 제일 많이 쓰는 나라가 한국이고, 저 남미 쪽으로 가면 "빨리, 빨리" 라는 단어를 거의 몇 년이 되어도 안 써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빨리라고 하는 것을 거의 통역을 제대로 못해요. 굳이 말한다면 스패니쉬로 "래피도"라고 하는데, "음식을 빨리 내어 달라. 뭐 체크인을 빨리 해 달라. 택시를 빨리 불러달라." 하면 참 이분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빨리 해도 해는 똑같이 넘어가고 안 해도 해는 여전히 넘어가는데, 천천히 천천히 하면서 살지 빨리 하다 죽으려고 났느냐?"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빠릅니다. 빨리 안 한다고 성내고 그리고 이것은 세계의 토픽감입니다마는 내 앞에 서서 전화부스에 들어가서 공중전화 하는 사람이 좀 오래 건다고 끄집어내어 가지고서 패 죽인 것이 이건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세계약을 한다든지 달세계약을 하면 "그 달세가 뭡니까? 달세? 달세?" 그리고 전세 일년씩 합니다. 큰 계약도 "일년마다 바꾸더라도 일년" 이럽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교회를 세내어서 건물을 세 얻어서 하는 경우들을 보니까 짧으면 오십년 길면 백년입니다. 그러니까 영국 사람들이 홍콩 반환하는 것도 그냥 백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므낫세의 경우는 보면 단기전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내가 해결 못한다 하더라도 좀 불편하더라도 저 사람들이 죽자살자 안 떠나고 지키겠다고 하니 저 사람들 죽이려고 하면 저 사람들도 많이 죽고 우리도 많이 죽을 테니까 피를 볼 것이 아니라 좀 불편하지만 같이 섞여서 살자." 해서 그냥 같이 지냈습니다.
그냥 같이 지냈는데, 초기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들어가는 므낫세보다도 그 성을 지키고 있던 가나안이 더 강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강한 쪽이 뭔가 큰 소리를 치니까 들어가는 므낫세 쪽이 오히려 벌벌 떨면서 눈치를 보았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땅에 가기는 갔지만 원주민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그겁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오늘 이 성경을 보니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쫓겨나기로 되어 있는 백성과 아직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땅을 네 손에 붙이노라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복을 얻은 백성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겁니다.
힘이 있어서 그 땅을 미리 차지하고 있던 사람에게서는 복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갈수록 손이 줄어지고 나는 자식들이 장수는 안 나고 빌빌하는 것들만 나오고 겁쟁이들만 나오기 시작하는데, 복을 받았던 므낫세 지파의 자식들은 어떤 자식들이 나오게 되었느냐? 강한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겁니다. 이 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처음 들어갈 때에는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눌려 살듯이 이렇게 살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복 받은 므낫세는 강하여지고 복이 없는 가나안은 아무리 뛰어보았자 나는 자식이 약하게 나더라 그겁니다. 그러면 뒤바꾸어지는 것이지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갈 때 겨우 겨우 목숨 붙이고 팔려 가지고 죽을뻔 하고 그렇게 갔지 않습니까? 애굽에 들어갈 때 정말 이 요셉이야말로 보디발의 집의 종으로 애굽의 종으로 감옥에 들어간 자로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들어갔지만 놀랍게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가 보디발 집에 가면 보디발 집이 잘 되고, 그가 감옥에 가면 감옥이 편하고, 그가 나라의 총리로 올라가게 되는데,
결국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 강성한 애굽에게는 복이 떠나가는 내용이었고, 그 애굽의 큰복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더니 말씀대로 애굽은 결국 누구의 손에 들어갔느냐? 요셉의 손에 들어갔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이제 주리고 있지만 그러나 너에게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요. 이제 울고 있지만 그러나 네게 복이 있나니 웃을 것임이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아멘으로 받으셨기 때문에 이 웃을 일을 향하여 가는 그 아름다운 부요한 환경과 그리고 이 부요한 창고를 위하여 나아가는 길에 여러분은 절로 강성해질 줄로 믿습니다.
지금 므낫세처럼 비록 약하지만 그 강한 어느 회사에 강한 어느 지역에 가서 비록 내가 눈치를 보면서 살지만 결국은 강성해진다 그겁니다. 야곱도 마찬가집니다. 그 아비로부터 복을 받았습니다. 그 복 받은 이유 때문에 형과 충돌이 있어서 이렇게 도망을 갔습니다마는 라반의 집에 들어가니 라반은 부자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이제 야곱이 들어오니 먹여줍니다. 입혀줍니다. 그저 집에서 일 시키고 그저 살게 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처음 야곱이 들어갈 때에는 외삼촌의 집에서 밥 먹고 또 집안에서 잠자고 입을 옷이 있으니까 그것만 해도 참 감사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복이 이어지기를 축복했던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복을 주었다 그겁니다.
맨 몸으로 들어가도, 여러분 복을 가지고 들어가면 많이 가지고 있다가 훅 날리는 것보다 복을 가진 사람이 알찬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므낫세는 내 손에 붙여진 기업이라 해서 무모하게 공격하지 않았고 차라리 남의 수하처럼 들어갔다 그겁니다. 남의 수하처럼 들어갔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서 결국은 수상이 되는 이런 축복이었지요.
오늘 본문으로 읽었는데, 사사기 1장 27절부터 쭉 보면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 손에 붙인 땅을 그 가나안 땅을 향하여 들어가면서도 다 쫓아내지를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들 밑에 시키는 대로 하고는 살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스라엘이 강성해졌다는 그겁니다.
뭡니까? 복을 가진 자는 끝내 강성해진다 그겁니다. 그렇게 강성해지고 나니까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켰다고요? 사역을 되시켰다 그겁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사역을 했지만 복을 가진 사람이 강성해지니까 이제는 주인과 종이 주종이 바꾸어져서 이제는 그 가나안 사람을 사역을 시켰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때는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그랬습니다. 왜 안 쫓아내었겠습니까? 험한 일을 시켜야 되니까요. 잘 사는 나라들이 이민을 왜 받아줍니까? 저 잘 사는 나라들이 이민 받아주는 이유는 가장 험한 일, 냄새나는 것, 위험한 것 그리고 또 그 일 종사하다보면 전부 병 걸리게 되는 이런 아주 3D직종이라고 할 수 있는 험한 일을 자기 잘 사는 일등 시민에게 시키지 아니하려고 외국으로부터 불러들여 가지고서 전부 다 하수구에 집어넣거나 전부 나쁜 일 시키려고 불러들인 것처럼 이 므낫세 지파는 어쨌느냐?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자기가 약해 가지고서 눈치보면서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복 주실 복을 기대하고 늘 결심하고 소망하고 살았더니 그 믿음과 소망을 따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강성해지게 되니까 전에 자기들을 지배하던 사람들이 도리어 자기들에게 사역을 해 주게 되니까 "이제는 내보낼 필요가 없다. 종으로 쓰자." 해서 쓰게 되었다 라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겠습니다.
또한 1장 34절로 36절 사이에 보면 단 지파의 경우가 되겠습니다마는 이 단 지파의 경우는 처음엔 아모리 족속과 싸움 붙을 때에는 처음부터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붙이신고로 이제 자기가 아모리 족속을 치러 들어갔지만 처음부터 아모리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싸우러 들어갔다가 아모리 산지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어디로 쫓겨 올라갔느냐? 저 산꼭대기로 쫓겨 들어갔다 그겁니다. 그리고 골짜기에 내려오면 죽인다 라고 하니까 골짜기에 내려오지를 못했어요. 골짜기에 내려와야 물이 있지요. 골짜기에 내려와야 무슨 곡식도 조금이라도 조금 되겠지요. 그런데 이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이 35절에 보니까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그랬어요. 이 단 지파는 들어가서 되쫓겨 가지고서 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지 못해요. 물 내려가는 그 밑으로 오지도 못하니까 짐승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이렇게 쫓겨 들어가 있는데, 자기 형제 중에 요셉이 강성해지는 것을 이 아모리 사람들이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겁니다.
그 요셉이 강성해진 것을 보고 가만히 "이 단 지파를 골짜기에도 내려오지 못하도록 오래 붙잡아 두었다가는 요셉 지파가 쳐들어와서 우리를 치면 어떡할까?" 해 가지고서 그냥 이 아모리 사람들이 필경 자기들이 손을 들고 오히려 "우리가 사역을 할테니 여기서 밥만 먹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었다 그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정이든지 어느 단체든지 모두 다 힘있는 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가족 중에는 형제들이 있고 또 이런 조직마다 직분들이 있는데, 모두가 다 기술 좋고, 모두가 다 권세 있고, 모두 다 지혜 있고, 모두 글 잘 쓰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의 형제들은 외부 사람들이 보아도 아주 형제들끼리 잘 지냈다 그겁니다. 요셉이 강성해지니까 그저 이 단은 요셉을 높였다 그겁니다.
만약에 요셉을 높이지 아니하고 또 그런 경우가 있지요. 형제들이 서로 으르릉 거리는 경우가 많아요. 형제들 부인들이 자기 형제만큼 또 자기 남편이 못 되면 "아이고 시아버지는 어떤데, 또 시동생은 어떤데, 당신은 이게 뭐냐?" 하면서 형제끼리 약간 경쟁심리가 있어 가지고서 똑같이 잘 살면 좋은데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 살고 하면 그만 정떨어지고 미워하고, 명절 때도 잘 모이지 않고 이런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 중에 단 지파와 요셉 지파는 남들이 보기에 어떠했느냐? 자기들 형제 중에 강성한 자가 있으니까 그를 높이고, 그를 울타리로 삼았다 그겁니다. 자존심 같은 것 내세워 가지고서 "아하"
여러분, 우리 나라 유명한 재벌들 형제들끼리 누가 다 큰 것 차지하느냐? 누가 좀 크려고 하니까 나는 그것 주고는 못 산다하고서 다 망하지 않습니까?
누가 유명한 사람이 하나 나타나면 그 유명한 사람을 자기의 업으로 삼으면 되는데, 그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못해요.
참 우리 굴지의 재벌들이 그저 형제 중에 하나가 나서면 밀어주고, 그 형제 밑에서 전무나 하고 그 밑에서 사장 하나 하라고 하면 그만 하면 될텐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해서 큰 회사하나 갖고 나가고 갖고 나가고 해서 그 큰 재벌이 다 깨어진다 그겁니다. 적자투성이 됩니다. 단 몇 년 사이에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보는데, 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자기의 동기생 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다든지, 자기의 모인 그런 어떤 조직 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다든지 할 때 그것을 시샘할 것이 아니라 이 단처럼 요셉이 강성해지면 요셉과 잘 지내고 있고, 요셉이 너무나 단을 사랑해서 언젠가는 단에게 힘을 보태줄 것이라는 것을 남이 알도록 우애를 가져라 그겁니다.
그것을 서로 이기려고만 하지말고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또 높여주고 다른 동생이 또 잘 나가면 그때 높여주고 그렇게 되어서 울타리로 삼았던 것이 바로 단이요, 요셉입니다. 그래서 형제 잘 된 것 때문에 아모리를 쫓아내고 필경은 아모리가 사역을 했다 라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지요.
처음 드린 내용은 연합전선(聯合戰線), 그리고 또 세 번째 드린 내용은 단번에 차지하지 아니하고 장기전(長期戰)이고 두 번째는 뭐냐? 보상제도(補償制度), 늙었지만 큰 소리쳐서 일단 확보를 해 놓고 확보한 다음에 내 실력이 부족하면 내가 무엇을 줄 테니 하겠느냐 해서 보상제도, 이렇게 했고
그 다음에 므낫세 지파는 단기전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장기전으로 나갔다는 것, "지금은 내가 수하로 들어가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수상 만들어 줄 것이다. 내가 아니면 내 다음 대에라도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렇게 아주 느긋하게 나가는 장기전, 이것 무섭습니다. 이렇게 해야 별로 충돌 없이 자기가 성공을 할 수 있다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집안이나 자기의 이웃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시기해서 깔아 낮추려고 하지말고 그 사람을 자기의 울타리로 삼아라는 겁니다. "그것을 남이 보도록 하라. 그렇게 되면 바로 강성한 자의 힘이 그 약한 자에게 있다는 것을 그 적들이 보고 함부로 하지 못한다." 이런 작전입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러한 일들로 해서 우리 성도님들 손에 2002를 위하여 붙여주신 그 배부를 복과 그리고 또 그 웃을 복을 여러분께서 확보를 해 나가시겠는데 그러나 여러분께서 작전 내용들을 가만히 전략들을 듣고 보니까 ''야 그 전략은 다 좋지만 나에게는 해당이 되는 것이 없구나. 나는 내게도 실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와줄 자도 없으니 그리고 배경이 될만한 형제도 하나 없으니 나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2002년 부요는 나는 예외가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되시는 분들이 있겠습니다마는
이제 그런 경우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다음 주일에 그 원하는 바를 그야말로 여러분께서 누가 도울 자도 없고 광야에 생활하는 외롭게 된 여러분 같은 그런 입장이라면 그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 하셔서 안겨주시는 그런 진리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다음 시간에 말씀을 드리게되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작전을 세워가면서 친히 이겼을 경우에도 그러하고 또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주어서 안겨주었을 경우도 그러한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완전하게 다 주지 아니하고 일부를 하나님께서 남긴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려낸 땅, 우리가 그려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리라고 한 그 가나안땅을 향하여 들어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유다와 시므온처럼 자기 힘이 강해서 바로 다 차지하고 저들의 엄지발가락 엄지손가락을 다 끊어서 맥을 못 추게 만드는 그런 상황이라도 절대로 다 주지 아니하고 일부를 남겼다 그겁니다.
백프로 차지하게 하지 않았다 그겁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냥 안겨 주실 때에도 백프로 다 주지 않고 일부를 남기고 그리고 또 우리 힘으로 어떤 전략을 써서 이겼을 경우에도 일부를 남겼다는 겁니다.
왜 남기셨는가? 여러분께서 그려내신 그림이 있을 겁니다. 소망했던 소망이 있을 겁니다. 지난해에 이 어려운 우리 한국경제 속에서도 또 그 어려운 여러 가지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아마 이스라엘 지파만큼 얻었다면 이미 다섯 지파쯤은, 열둘 중에 다섯 지파쯤은 이미 그려낸 대로 다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린 줄로 믿습니다.
많은 경우가 감사하고 또 이렇게 알려와 주신 분이 많습니다. 그렸던 대로 되었습니다 하는 분이 한 다섯쯤 된다면 이스라엘에 해당한다면 아직 축복을 받고도 그려내고도 아직 차지하지 못한 지파가 몇 지파라고 했지요? 일곱 지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일곱 지파 정도는 아직까지 조금만 확보했거나 아직도 출발도 못했거나 이런 형편에 있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완전하게 천국 갈 때까지 다 된 경우는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부를 남기신다 그겁니다. 왜 남기실까요? 왜 그려낸 것을 한꺼번에 다 주시지, 직접 나가서 싸워도 다 못 차지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도 다는 주지 않고 일부를 남기신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사기 3장을 한 번 봅시다. 1절부터 6절까지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땅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참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셨습니다. 이 아브라함 때문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나기도 전에 수백 수천년 전에 조상 잘 만나 가지고서 땅을 얻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겁니다. 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가나안을 주노라. 그려 오라. 네 손에 붙이노라." 했던 이것은 그들과 처음 약속한 것이 아니라 네 열조에게 약속한대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조상은 잘 만났지요.
여러분 우리 산해원 1세대에 계시는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을 비롯한 여러분, 이 교회와 더불어 눈물 흘리며 충성한 그 충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뻐하사 아직도 언제 날지도 모르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노라 라고 하는 축복들을 정말 이 교회와 함께 충성하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여러분이 받으시고 하나님 부르실 때 하나님의 나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몇 대 후에 나타날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했던 약속은 반드시 이루셨다 그겁니다. 한없는 세월이 흘렀어도 이루었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그 아들을 백세에 준다는 것은 간단한 것이고, 먼 후일 이스라엘 열두 지파 보지도 못한 자식들입니다. 그들에게 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주겠노라 했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아직 생길 생각도 하지도 않는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주었으니
주안에서 충성스러운 여러분, 이 아브라함처럼 여러분의 당대 2세나 3세 혹은 저 십대손에 내려가서라도 큰 인물이 나거나 큰 부자가 날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큰 자가 날 수 있는 복을 미리 받으신다면 약속에 진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인하여 반드시 그때에 가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는데, 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복을 따라서 가나안땅에 들어갔는데, 이 므낫세도 들어가고, 단도 들어가고, 유다도 들어가고, 시므온도 들어가고 싸움을 하면서 들어가고 철병거 때문에 멈칫 하기도 하고 이렇게 평생을 장기전을 하면서 이 땅을 차지했는데, 그 땅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 땅의 주인이 되고 난 다음에 태어나는 자식들은 아주 곱게 큰다 그겁니다.
재물이 많지요. 적이 없지요. 평안하게 되니까 아이들 교육 많이 시키고 아이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곱게곱게, 험한 일은 아모리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 사역시키고 자기 자식은 곱게 키웠다 그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자식들은 곱게 크는 것은 당연하다 그겁니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이 알고 싶었던 것은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 "그 아이 나는 아이들이 계속 교육을 받아서 자기 열조와 같이 신앙생활 하면 이 남겨둔 것을 마저 저희들에게 주려니와 저희들 조상처럼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대부분의 경우 어려우면 하나님 찾지만 복을 주어서 여유를 갖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의 쾌락을 향하여 나가게 되어 있는데,
이 너희 후손들이 만약에 너희의 이 충성스러움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므로 확보한 이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젖을 먹으며 꿀을 먹으면서 복되게 살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없어도 살겠다 싶어서 딴 짓을 하고 신앙생활을 그 부모처럼 하지 아니할 경우를 대비해서 일으킬 적을 남겨두었으니 히위 사람도 얼마, 가나안 사람도 얼마, 그 사람들 다 남겨둔 것이라. 절대 한꺼번에 다 주지 아니한 것을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그들을 시험하려 하셨다 그겁니다.
바로 3장 1절에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그러니까 얻어서 성공한 후에 태어나는 자식들은 아주 곱게 크겠지요. 키도 더 클 겁니다.
우리 요즘 자녀들 아이들 얼마나 컸던지 고등학생이 되면 어머니가 전부 자식들을 쳐다 봐야됩니다. 전에는 굶고 배고프고, 열심히 노력하고 아이들 나면 바닷가에서는 뱃놈 만들려고 하고, 들판에서는 농사꾼 만들려고 하고, 산에서는 산지기 만들려고 하고 이러니까 새끼들이 클 수가 있어야지요.
못 먹고 잘 못 크니까 작은데, 그런데 지금은 쑥 쑥 커서 얼마나 잘 생겼는지 우리 성도들 자녀들 들어올 때 보면 전부 미인이고 전부 미남이라. 키고 쑥쑥 크고 얼굴도 어찌 그리 하얗고 좋은지 말입니다. 그렇게 잘 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를 이어서 믿음을 보시겠다는 겁니다.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세대 중에서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브론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그 열조처럼 청종하나 아니하나를 보겠다" 했다 그겁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잘 먹고 잘 살다 보니까 "우리가 거룩한 민족끼리 구별된 민족끼리 결혼을 해야 되겠다" 이것이 아니고 잘먹고 잘살다보면 뭔가 성적으로 나가고, 타락으로 나갑니다. 색시하고 잘생기고 이런 사람을 보고 쫓아나갑니다. 네 민족이 되었거나 내 민족이 되었거나 막 이렇게 섞였다 그겁니다.
결과는 어찌되었겠습니까? 망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겨두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으나 뭔가 고민 거리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항상 이것이 나에게 가시로구나 하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경성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 믿는 믿음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 복되게 자라나고 성장하는 것 참 좋지만 이것을 훗날에 잊어버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을 하나님께서 시험하기 위해서 각 족속의 종족 얼마씩을 남겨두었으니 믿음을 조상처럼 이어나가면 그 남겨진 족속들이 끝까지 사역을 하겠지만 믿음에서 떠나 열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조금 남은 것이 씨앗이 되어 먼저 빼앗은 큰 것을 되 삼킬 것이라 그랬다 그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바 복을 대를 이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2장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조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2장 6절 이하를 읽어보겠습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이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그리고 여호수아를 도와서 함께 나왔던 장로들의 이 세대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겁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도 죽고 여호수아와 함께 하였던 그 장로님들도 세상을 다 떠나 열조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그겁니다. 그런데 이 여호수아가 살아있고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그 내력을 다 경험했던 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자식들도 그 부모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부모님들이 자꾸 얘기 해 주니까 어느 정도 "그랬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저 광야로부터 요단을 마르게 해서 건져내셨구나" 하는 것을 그 부모들이 그 하나님 역사하신 것을 보았던 장로들과 그 직접 경험했던 여호수아 생전에는 자식들이 복되게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 섬기던 대가 다 열조에게로 가고 그 자식의 자식들이 이제 교회 주역이 되었는데, 그 주역들은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가벼이 여기고 나는 자기 자식들 손자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한 삼대 째에는 도무지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하여 무엇을 했는지 아는 자가 없더라 그겁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망한 것이지요. 철저히 망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셨으면 그 큰 복 받아 가지고 다음 평생에 내가 얼마나 살겠습니까? 오늘 기도의 말씀에도 있었습니다마는 우리의 사후라는 것은 이제 좀 더 있으나마나 별것 아닙니다. 많은 것을 얻는다고 해서 이후 밥 다섯 끼 여섯 끼 먹고 소화시킬 그런 능력 없습니다. 더 빨리 죽지요.
우리의 남은 얼마 안되는 사후가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나라 그리고 영원히 이어져 내려가야 될 우리의 후손들이 성공해야 내 성공인 것이지, 바짝 축복 받아 가지고 내 대에만 화끈하게 놀다가 벌써 내 자식까지는 어느 정도 아비를 따라서 교회도 나오고 신앙을 그대로 지키다가 그 자식은 절실하게 자기 자손에게다 하나님 역사하셨던 일을 일러주지 아니하므로 잘 살게 되니까 받은 복으로써 그냥 곁길로 나가게 됨으로써 망하게 되는 이 역사가 성경 속에 있는데, 왜 그러한 역사를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1대나 2대만에 그치지 말고 갈수록 창대 해지기를 바라서 하나님께서 이런 기사를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이 큰 성공을 거두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 된다 그겁니다. 주의 훈계와 진리로써 양육해야 된다 그겁니다.
그리고 우리 산해원 교회는 보통 교회가 아닌 것을 여러분이 잘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일으키실 때 역사 하신 역사를 저와 함께 돕고 역사하셨던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 연세 드신 분들이 다 눈으로 보았다 그겁니다.
그리고 그때에 역사한 역사 속에서 죽을병에서 살아난 자, 꼬부라진 사람이 펴진 자, 여기에 다 앉았다 그겁니다. 이러한 분들이 있는 날 동안에는 참으로 복되어서 듣고 보기 때문에 그 신앙을 지켰으나 그 다음에 이어지지 아니하면 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무엇인가 흔적이 있으면, 요단을 건너올 때에도 열두 지파의 돌 하나씩 가져다가 그것을 모아놓고서 "이것이 요단을 마르게 건넜다."
그리고 야곱이 돌 베개 했던 것을 성전 돌기둥으로 만들어 놓고서 또 그것을 기둥 삼아 모든 자손들에게 일러주려고 애를 쓰고 그리고 그들은 이 눈썹과 눈썹 미간사이에다 딱지를 붙이고 문설주에도 딱지를 붙입니다. 쉐마라고 하는 것을 붙여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 조상과 함께 하셨으면…" 이것을 항상 교육을 시켰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아버지 어머니 따로, 할머니 할아버지 따로, 아이들 밀가루 음식 따로 스파게티 따로, 그렇지 않아요. 반드시 같이 앉아서 음식을 먹는 동안에 후닥닥 먹는 것이 아니라 전부 우리 열조로부터 하나님이 어찌하셨다는 것을 아이에게다 주입을 시킨다 그겁니다.
어린이가 말 배우는 것 깨달아서 배웁니까? 자꾸 들으면 그냥 주입이 되어서 입이 툭 터져버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입을 시킨다 그겁니다. 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 나라와 이 민족에서 떠나지 않고 나의 후손들도 우리 열조와 나와 같이 복을 누리기를 바라서 후손이 여전하게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어야 성공인 것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오히려 없음만도 못하지 않느냐 그겁니다. 차라리 없으면 올라갈 수나 있지만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형편은 안되겠지요.
아무쪼록 산해원을 위해서 역사하신 하나님과 그 행하신 일들을 여기 계신 우리 어른들께서 직접 보았고 그 일이 나타나도록 기도했고 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도록 전부 쓰임 받았던 분들이 현재 그 1대가 같이 있다는 것 참 다행한 일인데,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시는 젊은이들이여, 이 1대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이 불모지에 귀신 역사 많던 이 현장에 이 수원지 골짜기에 이만한 교회를 이루었고, 몇 번이고 쫓겨나고 몇 번이고 쫓겨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눈치보고 저 눈치보고, 우리 교회 앞에 들어오는 저 아스팔트 공장이 있을 때 여름에 아스팔트 공장 일하는 사람들, 하기야 그 아름에 불을 떼고 골탄을 태우니까 덥기도 더웠겠지마는 옷이나 입습디까? 온통 골탄 묻은 팬티하나 겨우 걸쳐 가지고서 돌아다니는데, 옷 좀 입고 사람들 다니는데 예 좀 갖추라고 그 말 한마디 못했다 그겁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나가라 하니까.
누구처럼 했습니까? 이 이스라엘 민족처럼 그냥 기여 다녔습니다. 그리고 20년 간 장기전을 폈습니다. 이 땅이 다 들어왔지 않습니까? 전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기죽어 살았지만 지금 뭡니까? 이 동네가 전부 교회 덕을 봅니다. 전에는 이 동네 사람들이 예배드리면 와 가지고 온갖 오물을 퍼붓고 야단이었습니다. 간판을 눕혀 가지고서 지지고 밟고 야단이었습니다.
이제 이 동네 큰 사람 작은 사람 모두 교회 덕을 보고 "평일에 우리 차 좀 갖다 데면 안되겠습니까?" 합니다. 그래서 막 갖다 대기에 우리 직원들보고 그랬습니다. "번호 적어 가지고 적어도 고마운 것을 알도록 하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보통 현장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현장이 아닙니다. 그런 현장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 아는 사람은 한참 타락을 하려고 해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현장을 경험한 사람이 타락하기가 어렵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자랑이나 교만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뻔히 알고 보고 어떻게 타락하겠습니까? 이때는 좋은 때입니다. 또 이 같은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 산해원 건축 40년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이미 받았다 그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20년에 이만큼 이루었습니다. 3개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되니까 이제 다된 줄 아는데, 어느새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산해원 건축 40년이라는 그 표어가 각 교회 주보나 사방 보면 슬슬 사라져간다 그겁니다,
여러분 이게 만족이 아닙니다. 산해원 건축 40년의 그 40년에 완벽한 성전의 작품은 남겨 두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20년 사역하면서 전부 땅을 사 모으고 그리고 3개 교회를 이렇게 세워 드릴 때 완벽한 교회까지 지어드릴 마음이 제 개인적으로 정말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니까 후손을 위하여 한 대에 완전하게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오늘 젊은이들이여, 이 설교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이 성도 중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집권자 대통령이 나올 것도 그리고 여러 장관이 나올 것도 우리는 영을 통하여 받은바가 있습니다. 이것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겨두신 하나님의 사역, 이렇게 세 개 교회 지은 것 대 성전 갖고 있는 것 여기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러 제가 그래서 "완전 건물 하지말고 판넬로써 가건물화 된 것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빨리 후닥닥 다 짓고 경제적으로 돈 아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줄 믿습니다. 대를 이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성공을 가져가야 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고 우리 후손을 위하여 한꺼번에 주셔도 감사하고 남겨두신 것도 감사하고, 경성하고 깨어있어서 이 1세대가 이만큼 이루었으니 지금 젊은이들이여, 이 설교를 잊지 마시고 산해원 건축 40년에 새로운 완전한 작품을 하나님 위하여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산해원 40년에 큰 인물을 주시겠다 하는 것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잊지 마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싹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