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다빈치(Leonardo Da Vinci)
활동년도 : 1452~1519
작가소개 : 수학에서 음악까지...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전성기 르네상스의 최초의 대가라는 영예를 차지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는 신동인양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여 그의 부친은 친구인 베로키오에게 사사토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다빈치는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 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선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완성하였고 더욱이 그것의 정신적인 깊이를 마련하여 가면서 주관적인 순화를 꾀하여 고전 예술에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 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사실상 15세기 초 이래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한 걸음씩 더듬어 노력하여 온 사실 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을 성공한 것이 다빈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지양하고 다음에 오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이미 15세기 말엽에 완성하였습니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활동 시기의 반이상이 15세기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빈치 예술의 특징-공기원근법, 명암법, 색채에 대한 연구, 단색화법

그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투시 원근법의 연구에 힘썼고, 직접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여 근육의 조직을 알아보는 해부학을 처음으로 미술에서 쓰기도 하였습니다. 또 유채 기법을 개량하여, 이것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고 어두움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모나리자」를 보면 육체의 정확한 묘사 위에 정신의 깊이나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의 미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여 낸 독특한 명암법 때문입니다. 즉, 색칠을 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고 흐리게 하여, 머리나 팔의 은은한 입체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예술에 있어서 다빈치의 중요한 과제는 '조화'에 있었습니다. 자연과 인간, 예술 세계과 인간...그들의 대립이 아닌 한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회화에 있어서의 다른 거장들의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회화의 공간을 꽉 메우고 있지만 다빈치의 인물들은 화면에서 구성 요소입니다. 회화의 주역이 아니라 바위, 꽃, 하늘과 같은 회화의 통일된 주제를 이루는 부분입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단연 풀도, 물도 자세하게 묘사되어집니다. 또한 그는 당대의 화가들보다 해부학과 기하학의 조회가 훨씬 깊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떠한 선도, 어떠한 운동성도 그의 과학적인 지식을 강력하게 반영하지 않습니다. 회화 속에서 한 흐름으로 녹아 있습니다.

Sfumato(스푸마토-공기원근법)
다빈치는 기하학적 원근법이 표현하고 있는 견고성, 입체성이 오히려 화면 전체의 조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선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보다는 인물이나 기타 소제들의 윤곽선을 없애주거나 아주 연하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스푸마토'입니다. 이는 화면의 원거리감이나 공간감과 더불어 화면 전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주며 회화의 소제들이 화면에서 튀는 것이 아닌 전체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Chiaroscuri(명암법)
프란체스카나, 보티첼리 등은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밝은 색이 화면을 지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다빈치는 반대로 어두운 부분이 증대되어 신체나 특히 윤곽선이 강조되어 인물을 회화의 분위기에 특히 몰입되도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화면의 조화에 기여하도록 합니다.
Monochrome(단색화)
다빈치는 색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대 다른 거장의 그림들과 비교해볼 때 그의 그림의 색조들은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색'의 뜻이 아닙니다. 그는 회화적인 통일과 조화를 위하여 색조조차도 화면 속에 녹여 조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색채를 혼합함으로써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여러 가지 색의 혼합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색을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중간색으로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것이 자연과 인간을 따로 때어놓고 보는 오만한 생각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써 인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진정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술가, 건축가, 발명가, 기계공학자, 해부학자...Leonardo

예술사가들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를 가리켜 르네상스의 절정기라 부릅니다. 이 무렵 로마, 밀라노, 베니스, 플로렌스(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배출했습니다. 16세기의 여명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거장들 중 Leonardo da Vinci, Michelangelo, Raffaelo(Rapheal) 세 사람을 꼽습니다. 이들은 이제껏 발현해내지 못했던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약 1495년에서 1520년까지만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전성기를 일구어낸 위대한 사람들이 1520년대에 이르러 작고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나이가 가장 많으며 르네상스를 고전으로 이끌어간 인물입니다. 조각, 건축, 토목, 수학, 과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인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입니다.

과학자 다빈치

다 빈치는 예술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 발명가였습니다. 위대한 상상력으로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비행선, 대포, 전차 등 현대인이 사용하는 각종 장비들을 그는 벌써 생각해내고 자세하게 스케치 해두었습니다. 또한 당시 종교적 이유로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도 그의 인체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아주 정교합니다. 사람의 몸에 혈액이 흐른다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유럽인입니다. 그의 연구결과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있습니다.그의 방대한 수기는 평생에 걸친 여러 과학(물리학, 역학, 광학, 천문학, 지리학, 해부학, 기계공학, 토목공학, 식물학, 지질학 등)의 연구 및 예술론과 인생론이 비롯된 것입니다. 다 빈치가 죽은 후에 그의 방대한 수기는 애제자인 Francesco Melzi의 소장이 되었고, 후에는 점차로 흩어져 지금은 밀라노의 암브로지아나 도선관, 투리브루치오 백작가, 파리의 앙스티튜드 드 프랑스, 영국의 윈저궁, 대영 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 산재되어 있으며, 남아 있는 것만도 4쳔 페이지가 넘습니다. 현재는 서구 각지에 분산 소장되어있습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과학사에 있어서 그 선구적 의의가 큽니다. 전 분야에 걸친 그의 지칠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 '全人(L'uomo universale)의 최고 전형이라 할만 합니다.



작품명 : 지네브라 벤치의 초상
제작년도 : 1474~76
작품재료 : 패널에 유채
작품크기 : 42x37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그림은 1474년경 그려진 것으로 지네브라 벤치가 1474년 1월 15일 17세 나이로 결혼하였을 때 그 기념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만년의 여성 그림에 나타난 미소가 보이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있으나,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의 필치에 의해서 대상 인물에 깊은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구도가 가슴부터 윗부분을 잡았기 때문에 약간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그림의 뒤에는 종려와 월계수,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아름다움은 덕을 장식한다.]라는 글씨가 작품 뒤쪽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네브라가 덕을 갖추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작품명 : 베노아의 마돈나
제작년도 : 147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9.5x31.5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꽃이나 고양이와 같은 매개물을 그려서 서로간의 애정 교류를 이룩하고, 회화적인 표현으로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흰 꽃도 그와 같은 애정의 교류물로서 소녀와 같은 성모와, 그의 동생과 같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기 예수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커서 성모의 얼굴과 별로 다를 바 없을 정도이다. 두 사람은 성모자 이기보다는 남매와 같은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나, 배경의 공허한 느낌이나 색채의 변화가 없는 것이 눈에 띈다.



작품명 : 세실리아 갈레리니의 초상
제작년도 : 1483~90
작품재료 : 패널에 유채
작품크기 : 53.4x39.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원래 이 작품은 1485년부터 149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서, 18세기 말 폴란드의 아담 찰르레스키 황태자가 사들여 그의 처 이사벨라의 콜렉션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얼굴의 부분과 껴안고 있는 동물의 상반신과 손의 부분 등의 레오나르도적인 감각이 농후하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거의 나중에 덧칠을 하고 배경도 뭉개 버렸다. 그것은 보존 상태가 나빠서 수리하면서 이렇듯 평범한 톤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인물의 윤곽이 수정되고, 얼굴의 왼쪽이 다시 그려지고, 두발도 다시 그렸다고 한다.



작품명 : 비례연구
제작년도 : 1487
작품재료 : 펜과잉크
작품크기 : 34.3x24.5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마돈나 리타
제작년도 : 1490~91
작품재료 : 캔버스에 템페라
작품크기 : 42x3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것은 엄격히 따지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굳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그의 목록에 첨가한 것은 이 그림과 같은 레오나르도 자신의 작품의 존재가 다른 데생을 통해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작 연대는 1490년경으로서 <암굴의 성모>와 같은 시대 작품일 것이다.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의 주제는 12세기말부터 되풀이하여 그려지고 있다. 주목할 것은 아기 예수가 왼손에 갖고 있는 작은 새로서, 그것은 '영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명 : 밀라노 왕궁 여인의 초상
제작년도 : 1490~95
작품재료 : 패널에 유채
작품크기 : 63 x 45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레오나르도가 그리기 시작했던 작품을 제자들이 한 장의 그림으로 팔기 위해서 손쉽게 정리하였던 경향이 있었지만, 이 그림은 그와 같은 경향이 한층 짙다. 얼굴이나 어깨등에 레오나르도적인 감각은 남아 있으나, 그곳에 다시 칠한 흔적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가라 앉은 인상을 준다. 특히 앞 쪽 난간의 부분에는 아름다운 손이 그려졌어야 할텐데 난잡하게 잘리어져 있다. 확실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90년대 밀라노 궁정 시대에 공방에서 제작한 초상화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1642년 컨템플로 궁에 작품이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명 : 최후의 만찬
제작년도 : 1498
작품재료 : 템페라
작품크기 : 460x880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수태고지를 위한 습작
제작년도 : 1500
작품재료 : 드로잉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습작은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受胎告知>의 제작을 위한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세부적인 관찰을 한 다면 이 습작과 원화에 그려진 성모와의 표현상의 차이가 있다고도 보겠으나, 분명히 이 습작은 얼굴 표정의 유사성 때문에 그것을 위한 준비 대상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눈과 머리의 묘사 방법에 있어 크레디풍의 솜씨가 엿보이므로, 그 당시 레오나르도와 크레디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만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작품명 : 암굴의 성모
제작년도 : 1503~06
작품재료 : 패널에 유채
작품크기 : 189.5x120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레오나르도의 완성된 최초의 대작인 이 작품은 거의 레오나르도 혼자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제작 연대는 1483년으로서 밀라노의 성당과 계약하고, 작품을 완성한 것은 12월 8일 성모 마리아의 날이었다. 물기를 먹고 있는 암굴 속에서 청록색의 옷을 입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풀 위에 앉아 있는 아기예수에게 요한을 인사시키고 있다. 빨간 망토를 걸친 천사는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 무성한 식물들에 담겨진 물의 존재는 청정(淸淨)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요한에 의한 세례를 암시하고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있던 것이 1506년 이전에 팔려 1842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작품명 : 그리스도의 세례
제작년도 : 1473
작품재료 : 패널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그림은 1473년에 그린 것이라 추정되는데 작품의 주문자는 성 사르빅 성당이라고 전한다. 신약성서 마태 복음 제3장 13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된 그리스도 세례의 장면이지만, 천사가 곁에 그려져 있고, 더욱이 등을 보이며 머리를 옆으로 묘사하는 수법은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손에 들고 있는 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와 천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몸의 움직임과 더불어 가운데 세례 장면을 강조하려는 배려가 보인다. 이들은 조형적인 의미이지만 풍경도 요단 강의 연장이고, 물 또한 정화(淨化)의 상징이며, 암벽의 돌은 신의 존재를 지칭하고 있다고 하겠다



작품명 : 모나리자
제작년도 : 1500~10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77×53Cm
소장위치 : 파리 루브르 미술관
작품설명 :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일뿐더러 인류 회화상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작품이다. 그것은 이 그림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올바른 감상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제작 연대는 1500년에서 1510년 사이로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이사벨라데스테 후작 부인의 상을 그리고, 그 화고를 가지고 1500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이 모델이 모나리자라는 설도 있으나, 당시의 주변 기록이나 레오나르도가 조콘다 부인과 접촉했다는 아무런 확증도 없다. 좌우간 신비로운 이 모델에 의해서 모나리자의 신화가 창조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퍼지게 된 것이다.



작품명 : 바커스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레오나르도의 진품이 아니라고 이야기되어 왔으나, 17세기에 <성 요한>상에서부터 <바커스>상으로 고증이 달라짐에 따라서 레오나르도 설은 더욱 희박해졌다. 이 <바커스>상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된 <성 요한>상이 있으나, 이것이 <바커스 >상 이전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포도의 관, 범 가죽, 지팡이 등이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데생은 그 바위의 묘사 등에서 레오나르도적인 것이 적고, 또 체구나 얼굴의 표현이 딱딱해서 품격 높은 레오나르도의 필치라고 생각할 수 없다.그러나 프랑소와 1세의 수집품에서부터 1625년에는 컨템플로 궁으로 입수되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루브르 미술관 소장품이 되었다.



작품명 : 레다
제작년도 : 1498-9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112×86Cm
소장위치 : 로마 보르게제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이 작품은 화고(畵稿)의 형식으로 존재하여 원화는 분실되었다고 생각된다. 제작 연대는 1498년부터 1499년 사이이다. 레오나르도의 <레다>에 라파엘로의 모사 스케치가 있지만, 그것은 1503년 이후에 피렌체에서 그린 것으로서 적어도 그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레오나르도의 머리 형태에 대한 추구는 독특한 것이 있어서 밀라노 시대의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 <레다> 화고를 밀라노 함락 후 피렌체에 가지고 갈 때 죠르죠네에게도 보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죠르죠네의 같은 주제의 그림이 제작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아쎄의 방'을 그렸을 무렵, 밀라노 시대 최후 시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작품명 : 여성의 초상
제작년도 : 1490
작품재료 :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은 사랑스러운 초상화이지만 그 묘사의 안이함이 날카로운 레오나르도의 맛을 없애고 있다. 1490년경의 작품으로서 일설에는 앙브로지오 디 프래디스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나, 프래디스의 화풍이 일정하지 않아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주제가 된 여성이 누구인지 오늘날에는 알 길이 없다. 앞에서 이 야기한 음악가의 초상이 밀라노 공의 초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의 짝으로서 밀라노 공 부인 베아트리 체 데스테의 상이라고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상들이 짝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델의 문제는 여러가지 억측을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