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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없다! (행 3:1-10)
돈 없다! 이 말은 누가 잘 하는 말입니까? 돈을 달라는 자식에게 부모가 잘 하는 말입니까? 대체로 그렇습니다. 저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등록금(그 당시는 월사금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을 내지 않는다고, 수업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고 집으로 쫓겨온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의 어머님으로부터 듣는 말이 "돈 없다. 다음에 준다고 해라!"였습니다. 돈 없다! 요즘은 누가 주로 이 말을 합니까? 요즘에도 역시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 부모에게 돈을 달라고 졸라댈 때, 부모들은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자식들이 주로 학교 등록금 때문에 부모를 졸랐다면, 요즘에는 자식들이 주로 용돈을 달라고 부모를 졸라댈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돈 달라!"고 졸라대는 말은 어른들에 비하면 그래도 애교에 속하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진짜 돈이 없어서, 혹은 돈이 부족해서 "돈 달라!"고 졸라대는 자식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자들이나 모두가 한 목소리로 "돈 없다!"고 말합니다. 자식들이 자꾸 돈을 뜯어가려니까, 부모님들이 홧김에 이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 어른들도, "급한 데 쓰려고 하니,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하면, 한 마디로 "돈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이해가 갑니다. 남이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마다 "나 돈 많다"고 말하면서, 성큼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중에는 쥐꼬리만한 돈을 빌려줄지언정, 일단 "돈 없다!"라는 말부터 해 놓고 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요즘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식들이 졸라대거나 남이 빌려달라거나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돈 없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돈 없다!"고 말하니, 모두가 거짓말쟁이, 아니 가난뱅이요, 아니 거지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성경의 사람들 중에도 "돈 없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중에 바로 그런 말이 나옵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이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도 이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할까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돈 없다!"라는 말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에게 한 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이 말은 요즘 말로 "돈 없다!"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정말 돈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들에게 돈이 많았더라도, 돈보다 더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아니 그분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 주려고 "돈 없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돈 없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거짓말쟁이거나 그들도 알거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들이 인색한 사람들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돈 없다!"는 말은 사실 관계를 떠나서, 더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돈이 있으면 당장은 좋겠지만, 돈이 영원히 좋은 것은 아니다. 아니 지금 돈이 좀 없더라도, 당장 큰 일은 아니다." 그럼 뭐가 큰 일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가장 큰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부모 자식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듯합니다. 어떤 때는 의리와 신의보다, 아니 명예와 신앙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듯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만족이 없으니 언제나 "돈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돈 없다!"고 합니다. 언제쯤 솔직한 부자, 아니 가난해도 정말 부자라고 한번 허풍을 부려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돈이 없습니까?
오늘날 돈은 하나님과 같은 물건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데가 없다고 합니다. 어려운 신학 용어로 하나님은 편재(偏在)하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나라가 많습니다. 하지만 나라마다, 마음마다 구석구석에 돈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어디에도 돈이 없는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하긴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도, 장롱 밑이나 서랍 속에는 못 쓰는 동전 하나쯤은 굴러다닙니다. 그리고 돈은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못 하시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어려운 신학 용어로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과연 전지전능하신지 의심합니다. 하지만 돈은 정말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안 가는 곳이 없고,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은 지금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돈이 있는 곳이라면,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찾아갑니다. 투자 자금, 투기 자금이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그런데도 왜 현대인은 "돈 없다!"고 말하기를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각자가 알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을 볼 때, 정말 돈은 없습니다! "돈이 없다"는 말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돈으로 영혼의 가치를 잴 수 없고, 돈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돈은 이 세상에 살 동안만 유용합니다. 정말 돈은 때로는 아주 좋습니다. 돈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고, 좋을 일을 하는 데도 필요하고, 보람있는 일에도 쓰입니다. 돈은 삶을 편리하게 해줍니다. 돈은 건강과 노후 보장과 여행 등에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리고 돈은 교회 일에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잘 활용하십시오!
하지만 돈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 세상 여행을 마칠 때까지 부릴 수 있는 종놈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상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모시고 할 수 있는 지체 높은 양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돈을 먼저 구하거나 돈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돈을 더 구하고, 돈 때문에 더 걱정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이를 말과 마차에 비교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셨다. 먼저 생명 있는 말(馬)을 앞세우라. 그러면 물질인 마차는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멍텅구리는 마차를 앞에다 세우고 말을 뒤에다 세워서 일을 거꾸로 하는 우스운 일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유물주의자, 자본주의자들이 물질 문제만 생각하고 영혼 문제, 생명 문제를 등한히 하는, 다 거꾸로 된 세상이 되어 이렇게 혼란과 아우성 소리가 천지에 사무친다."
그렇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아니 요즘 사람들은 돈을 부모자식보다 앞세우곤 합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10일에 경기도 파주시에서 형제 간에 유산다툼 때문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여 년 전에 부모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을 때, 장남 이씨가 둘째보다 적은 평수의 땅을 상속받은 문제로부터 형제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3년 전에 둘째가 1천58평을 4 억원에 매각하자, 갈등이 더 커졌다고 합니다. 이에 불만을 품던 장남이 엽총으로 제수 한씨와 한씨의 딸(13), 둘째 동생의 막내딸(26) 3명을 살해하고, 둘째 동생의 며느리(34)와 범행을 말리던 먼 친척 이모(45)에게도 엽총을 발사하여 중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항하는 둘째 동생의 큰 딸에게 상처를 입힌 뒤, 범행 현장에서 150m 가량 떨어진 둘째 동생 집에 찾아가 불을 질러, 40평 크기의 한옥을 완전히 불태운 후, 인근 야산으로 달아났다가 자신이 갖고 있던 엽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가족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남매가 돈 때문에 어머니와 조부모를 살해한 뒤, 시신을 절단해 지하실에 묻은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들 남매는 작년 12월 30일에 어머니 집에서 조부모의 은행 계좌에 들어 있는 10만 달러를 훔칠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에 동조하지 않은 어머니(53)를 흉기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이들은 어머니가 아프다며 할머니(75)를 집으로 불러 질식시켜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날 밤에 할아버지(91)가 잠들기를 기다린 뒤에 둔기로 살해한 후에 지하실에 구멍을 뚫고 시신들을 묻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돈이 없었더라면, 아니 부모형제에게 큰 돈이 없었다고 한다면, 아니 사람이 돈을 섬기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끔찍한 살인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돈을 원망해야 할까요, 아니면 돈 밖에 모르는 인간을 원망해야 할까요?
지난 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돈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자 나라일수록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3천 달러 시대에 도달한 우리 나라에서 자살자 증가율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놀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 강남에 집을 사고, 아이들을 고액으로 과외를 시켜 명문대학에 보냈더니, 식이장애, 우울증에 걸려버렸다고 합니다. 국민소득이 많은 나라, 가계소득이 많은 가정이라고 꼭 살맛 나는 건 아니랍니다. 그래서 미국의 학자들은 국민소득지수가 아니라 국민웰빙지수, 즉 행복지수를 보고, 나라를 운영하자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우리 나라가 얼마나 가난하고 더러웠는지, 어느 외국인이 쓴 글에 나옵니다. "1894년 겨울 서울. 더럽고 악취가 나는 수채 도랑은 때가 꼬질꼬질한 반나체의 어린아이들과 수채구덩이의 걸쭉한 점액 속에서 뒹굴다 나온, 크고 옴이 오른, 눈이 흐릿한 개들의 즐거운 놀이터이다. 이런 골목길에는 조그만 생활용품이나 아닐린 염료로 불길이 너울거리는 무늬를 입힌 알사탕 따위를 팔러 다니는 장사꾼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품들을 짊어지고, 질퍽거리는 곳에 깔 널빤지 몇 장을 들고 다니는데, 그들 상품의 가격은 전부 해야 1달러쯤 된다"(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런 나라가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26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스페인, 이스라엘, 뉴질랜드, 그리스와 비슷한 소비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택 보급률은 2002년에 100%를 넘어섰습니다. 한국의 교육, 주거환경은 비숍 여사가 서울 거리를 걸었을 무렵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갑니다. 2002년에 한국의 자살증가율은 OECD 국가 중에서 1위, 자살사망률은 4위로 올라섰습니다. 연간 35만 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그 중에서 1만932 명이 자살에 성공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분 30초에 1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8분에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어디서 왔을까요? 경기가 갑자기 침체되거나 정치 시스템이 갑자기 바뀌는 나라에서는 급작스럽게 자살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특히 빈부 격차가 상대적 박탈감을 높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소득을 평등하게 만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줄어들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숫자만으로 분석해 봤을 때, 자살 충동을 높이는 것은 급격한 경기 침체이지만, 경기가 호전되고 소득 불평등이 개선된다고 해서, 자살을 억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득과 행복이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 미시간대 사회조사연구소는 세계 82개국의 행복과 삶의 만족도를 조사했습니다. 세계행복지수 1위는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 2위는 멕시코였습니다. 3-7위는 덴마크,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스위스, 북아일랜드 등 유럽 국가들이 차지했습니다. 미국은 15위, 일본은 42위, 중국은 48위, 한국은 49위였습니다. 가난한 나라로 손꼽히는 나이지리아는 19위를 기록했습니다. 많은 소득이 행복을 높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왜 정치인과 정책가들은 언제나 경제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일반 국민들도 돈 버는 것을 인생의 최대 과제로 여길까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은 로봇처럼 "돈은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도록 자동적으로 길들여진 습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장 먹고살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경제 성장, 돈, 돈" 한다는 것입니다. 돈은 곧 행복이라는 생각은 미신이라고 합니다.
왜 경제 성장, 돈에 대한 미신이 생겨났습니까?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섬겨야 할 그 무엇을 만들어야만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만큼 매력있고 힘있는 것은 바로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 적당한 돈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욕심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사람이 돈에 줄을 걸고 돈을 개처럼 부려야지, 돈에 목을 걸면, 즉 돈에 줄을 걸어놓고 그 줄에 질질 끌려 다니면, 언젠가 그 줄에 목이 졸려서 질식하고 맙니다. 돈에 사람의 목을 걸면, 돈이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댑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잠시 행복하게 해 줄 돈은 있지만,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돈은 없습니다. 우리를 잠시 편안하게 해 줄 돈은 있지만, 우리를 영원히 평안하게 해 줄 돈은 없습니다. 우리를 잠시 배부르게 해 줄 돈은 있지만, 영원히 배부르게 해 줄 돈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뭐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일어나 힘차게 걸을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만이 돈을 부리면서, 기쁘게 살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계십니다. 오직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예수님만이 계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섬기심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생명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돈 없다! 이 말은 누가 잘 하는 말입니까? 돈을 달라는 자식에게 부모가 잘 하는 말입니까? 대체로 그렇습니다. 저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등록금(그 당시는 월사금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을 내지 않는다고, 수업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고 집으로 쫓겨온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의 어머님으로부터 듣는 말이 "돈 없다. 다음에 준다고 해라!"였습니다. 돈 없다! 요즘은 누가 주로 이 말을 합니까? 요즘에도 역시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 부모에게 돈을 달라고 졸라댈 때, 부모들은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자식들이 주로 학교 등록금 때문에 부모를 졸랐다면, 요즘에는 자식들이 주로 용돈을 달라고 부모를 졸라댈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돈 달라!"고 졸라대는 말은 어른들에 비하면 그래도 애교에 속하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진짜 돈이 없어서, 혹은 돈이 부족해서 "돈 달라!"고 졸라대는 자식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자들이나 모두가 한 목소리로 "돈 없다!"고 말합니다. 자식들이 자꾸 돈을 뜯어가려니까, 부모님들이 홧김에 이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 어른들도, "급한 데 쓰려고 하니,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하면, 한 마디로 "돈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이해가 갑니다. 남이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마다 "나 돈 많다"고 말하면서, 성큼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중에는 쥐꼬리만한 돈을 빌려줄지언정, 일단 "돈 없다!"라는 말부터 해 놓고 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요즘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식들이 졸라대거나 남이 빌려달라거나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돈 없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돈 없다!"고 말하니, 모두가 거짓말쟁이, 아니 가난뱅이요, 아니 거지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성경의 사람들 중에도 "돈 없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중에 바로 그런 말이 나옵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이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도 이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할까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돈 없다!"라는 말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에게 한 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이 말은 요즘 말로 "돈 없다!"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정말 돈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들에게 돈이 많았더라도, 돈보다 더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아니 그분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 주려고 "돈 없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돈 없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거짓말쟁이거나 그들도 알거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들이 인색한 사람들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돈 없다!"는 말은 사실 관계를 떠나서, 더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돈이 있으면 당장은 좋겠지만, 돈이 영원히 좋은 것은 아니다. 아니 지금 돈이 좀 없더라도, 당장 큰 일은 아니다." 그럼 뭐가 큰 일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가장 큰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부모 자식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듯합니다. 어떤 때는 의리와 신의보다, 아니 명예와 신앙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듯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만족이 없으니 언제나 "돈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돈 없다!"고 합니다. 언제쯤 솔직한 부자, 아니 가난해도 정말 부자라고 한번 허풍을 부려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돈이 없습니까?
오늘날 돈은 하나님과 같은 물건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데가 없다고 합니다. 어려운 신학 용어로 하나님은 편재(偏在)하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나라가 많습니다. 하지만 나라마다, 마음마다 구석구석에 돈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어디에도 돈이 없는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하긴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도, 장롱 밑이나 서랍 속에는 못 쓰는 동전 하나쯤은 굴러다닙니다. 그리고 돈은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못 하시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어려운 신학 용어로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과연 전지전능하신지 의심합니다. 하지만 돈은 정말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안 가는 곳이 없고,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은 지금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돈이 있는 곳이라면,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찾아갑니다. 투자 자금, 투기 자금이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그런데도 왜 현대인은 "돈 없다!"고 말하기를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각자가 알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을 볼 때, 정말 돈은 없습니다! "돈이 없다"는 말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고, 돈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돈으로 영혼의 가치를 잴 수 없고, 돈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돈은 이 세상에 살 동안만 유용합니다. 정말 돈은 때로는 아주 좋습니다. 돈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고, 좋을 일을 하는 데도 필요하고, 보람있는 일에도 쓰입니다. 돈은 삶을 편리하게 해줍니다. 돈은 건강과 노후 보장과 여행 등에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리고 돈은 교회 일에도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잘 활용하십시오!
하지만 돈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 세상 여행을 마칠 때까지 부릴 수 있는 종놈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상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모시고 할 수 있는 지체 높은 양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돈을 먼저 구하거나 돈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돈을 더 구하고, 돈 때문에 더 걱정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이를 말과 마차에 비교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셨다. 먼저 생명 있는 말(馬)을 앞세우라. 그러면 물질인 마차는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멍텅구리는 마차를 앞에다 세우고 말을 뒤에다 세워서 일을 거꾸로 하는 우스운 일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유물주의자, 자본주의자들이 물질 문제만 생각하고 영혼 문제, 생명 문제를 등한히 하는, 다 거꾸로 된 세상이 되어 이렇게 혼란과 아우성 소리가 천지에 사무친다."
그렇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아니 요즘 사람들은 돈을 부모자식보다 앞세우곤 합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10일에 경기도 파주시에서 형제 간에 유산다툼 때문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여 년 전에 부모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을 때, 장남 이씨가 둘째보다 적은 평수의 땅을 상속받은 문제로부터 형제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3년 전에 둘째가 1천58평을 4 억원에 매각하자, 갈등이 더 커졌다고 합니다. 이에 불만을 품던 장남이 엽총으로 제수 한씨와 한씨의 딸(13), 둘째 동생의 막내딸(26) 3명을 살해하고, 둘째 동생의 며느리(34)와 범행을 말리던 먼 친척 이모(45)에게도 엽총을 발사하여 중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항하는 둘째 동생의 큰 딸에게 상처를 입힌 뒤, 범행 현장에서 150m 가량 떨어진 둘째 동생 집에 찾아가 불을 질러, 40평 크기의 한옥을 완전히 불태운 후, 인근 야산으로 달아났다가 자신이 갖고 있던 엽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가족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남매가 돈 때문에 어머니와 조부모를 살해한 뒤, 시신을 절단해 지하실에 묻은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들 남매는 작년 12월 30일에 어머니 집에서 조부모의 은행 계좌에 들어 있는 10만 달러를 훔칠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에 동조하지 않은 어머니(53)를 흉기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이들은 어머니가 아프다며 할머니(75)를 집으로 불러 질식시켜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날 밤에 할아버지(91)가 잠들기를 기다린 뒤에 둔기로 살해한 후에 지하실에 구멍을 뚫고 시신들을 묻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돈이 없었더라면, 아니 부모형제에게 큰 돈이 없었다고 한다면, 아니 사람이 돈을 섬기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끔찍한 살인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돈을 원망해야 할까요, 아니면 돈 밖에 모르는 인간을 원망해야 할까요?
지난 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돈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자 나라일수록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3천 달러 시대에 도달한 우리 나라에서 자살자 증가율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놀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 강남에 집을 사고, 아이들을 고액으로 과외를 시켜 명문대학에 보냈더니, 식이장애, 우울증에 걸려버렸다고 합니다. 국민소득이 많은 나라, 가계소득이 많은 가정이라고 꼭 살맛 나는 건 아니랍니다. 그래서 미국의 학자들은 국민소득지수가 아니라 국민웰빙지수, 즉 행복지수를 보고, 나라를 운영하자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우리 나라가 얼마나 가난하고 더러웠는지, 어느 외국인이 쓴 글에 나옵니다. "1894년 겨울 서울. 더럽고 악취가 나는 수채 도랑은 때가 꼬질꼬질한 반나체의 어린아이들과 수채구덩이의 걸쭉한 점액 속에서 뒹굴다 나온, 크고 옴이 오른, 눈이 흐릿한 개들의 즐거운 놀이터이다. 이런 골목길에는 조그만 생활용품이나 아닐린 염료로 불길이 너울거리는 무늬를 입힌 알사탕 따위를 팔러 다니는 장사꾼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품들을 짊어지고, 질퍽거리는 곳에 깔 널빤지 몇 장을 들고 다니는데, 그들 상품의 가격은 전부 해야 1달러쯤 된다"(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런 나라가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26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스페인, 이스라엘, 뉴질랜드, 그리스와 비슷한 소비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택 보급률은 2002년에 100%를 넘어섰습니다. 한국의 교육, 주거환경은 비숍 여사가 서울 거리를 걸었을 무렵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갑니다. 2002년에 한국의 자살증가율은 OECD 국가 중에서 1위, 자살사망률은 4위로 올라섰습니다. 연간 35만 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그 중에서 1만932 명이 자살에 성공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분 30초에 1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8분에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어디서 왔을까요? 경기가 갑자기 침체되거나 정치 시스템이 갑자기 바뀌는 나라에서는 급작스럽게 자살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특히 빈부 격차가 상대적 박탈감을 높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소득을 평등하게 만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줄어들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숫자만으로 분석해 봤을 때, 자살 충동을 높이는 것은 급격한 경기 침체이지만, 경기가 호전되고 소득 불평등이 개선된다고 해서, 자살을 억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득과 행복이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 미시간대 사회조사연구소는 세계 82개국의 행복과 삶의 만족도를 조사했습니다. 세계행복지수 1위는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 2위는 멕시코였습니다. 3-7위는 덴마크,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스위스, 북아일랜드 등 유럽 국가들이 차지했습니다. 미국은 15위, 일본은 42위, 중국은 48위, 한국은 49위였습니다. 가난한 나라로 손꼽히는 나이지리아는 19위를 기록했습니다. 많은 소득이 행복을 높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왜 정치인과 정책가들은 언제나 경제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일반 국민들도 돈 버는 것을 인생의 최대 과제로 여길까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은 로봇처럼 "돈은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도록 자동적으로 길들여진 습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장 먹고살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경제 성장, 돈, 돈" 한다는 것입니다. 돈은 곧 행복이라는 생각은 미신이라고 합니다.
왜 경제 성장, 돈에 대한 미신이 생겨났습니까?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섬겨야 할 그 무엇을 만들어야만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만큼 매력있고 힘있는 것은 바로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 적당한 돈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욕심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사람이 돈에 줄을 걸고 돈을 개처럼 부려야지, 돈에 목을 걸면, 즉 돈에 줄을 걸어놓고 그 줄에 질질 끌려 다니면, 언젠가 그 줄에 목이 졸려서 질식하고 맙니다. 돈에 사람의 목을 걸면, 돈이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댑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잠시 행복하게 해 줄 돈은 있지만,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돈은 없습니다. 우리를 잠시 편안하게 해 줄 돈은 있지만, 우리를 영원히 평안하게 해 줄 돈은 없습니다. 우리를 잠시 배부르게 해 줄 돈은 있지만, 영원히 배부르게 해 줄 돈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뭐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오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일어나 힘차게 걸을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만이 돈을 부리면서, 기쁘게 살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계십니다. 오직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예수님만이 계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섬기심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생명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