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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의 반체제 작가인 솔제니친이 강제수용소에서 힘든 노역을 하면서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의 경험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와 십자가를 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르더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곳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고, 자신을 죄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영광으로 부르신 그 사랑 안에서 감사하고 기쁨으로 주를 섬깁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주님의 그 은혜, 그 사랑이 살아 숨쉬는 듯한 감동을 받습니다. 참 아름답게 시작하는 믿음입니다. 사실 큰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이 스스로의 느낌으로 최고의 수준같이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솔제니친처럼 죽음을 코앞에 둔 인생의 쓴잔을 마실 때에는 바라보는 십자가는 약간의 위로는 될지언정 큰 환난을 이기는 능력의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 때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운명이 된 것을 그대로 믿고, 주를 따라가야 합니다. 옛 목숨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새 목숨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영적인 경지를 맞보게 됩니다. 그 때부터 진짜 십자가의 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래 전 한 외국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비행기로 김포공항 상공에서 내려다 보니 십자가의 불바다가 흡사 공동묘지 같더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묘소에 십자가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의 숲을 바라보고 한국교회의 부흥된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하고,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무안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한 동안 보수적인 강단에서 안 보이든 십자가를 슬그머니 하나씩 걸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쳐 자신의 옛 육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걸어두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욕과 저주를 받아 율법의 저주아래 있던 우리를 속량(다시 찾아 옴)하셨음에도 성도들을 십자가 앞에 일렬로 줄 세워 죄와 사망의 멍에를 메우는 우매한 일이 일어 날까 염려가 됩니다. 바라보는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의 도를 가슴에 품고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지고 따르는 십자가의 능력과 영광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버리는 목숨과 얻는 목숨이 교환이 되는 신기한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