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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은 고난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계15:1-6)
오늘은 「정금은 고난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나의 믿음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 가지 재앙이 나오는데 일곱 인의 재앙, 일곱 나팔의 재앙, 일곱 대적의 재앙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일곱째 인을 나누면 일곱 나팔이 되고 일곱 나팔을 나누다가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일곱 대적입니다. 점점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각각 재앙의 특징이 있습니다. 일곱 인의 재앙은 성도들에게 ‘준비하라. 말세를 이렇게 준비하라’ 준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일곱 나팔은 경고에 목적이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살라.’ 일곱 대적의 재앙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나와 있습니다.
심판은 있어야 합니다. 심판은 시험하고 똑같은데 시험공부 열심히 한 사람에게 시험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결국 실미도 북파특공대의 문제도 열심히 훈련하고 난 다음 시험이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 아닙니까? 훈련을 했으면 목적을 이루어야 될 것 아닙니까? 목적이 사라져 버리니까 사람이 미치는 것이지요. 목표가 있어야 되는 것과 시험이 있어야 되고 마찬가지로 심판도 있어야 됩니다. 심판은 준비된 사람에게는 축복이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저주입니다. 그것이 심판이지요. 심판이란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시험이 없다고…… 마귀와의 싸움이 뭔지 몰라서 그렇지 시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고난과 시험이 있지요. 이제 다 끝났다 싶으면
어디선가 살아나서 공격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도 고난을 당했지만 풀리고 난 다음에도 고난이 있잖아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 홍해도 있고요. 절망, 원망,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가운데 시련과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절대적인 고난의 크기보다도 자기가 느끼는 고난이 더 큰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큰 고민은 이런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도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힘든데 최고의 영적침체는 신학적인 위기입니다. 이 고난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헷갈립니다.
예를 들어서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선교하니까 얼마나 헌신적입니까?
캄보디아에 있는 선교사님인 오영수 선교사님은 가족이 다 비행기타고 가다가 죽었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이상하다! 주의 일을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신학적으로 해석이 안 됩니다. 거기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안 그래요? 신앙이 굉장히 좋아요. 기도도 열심히 하고…그런데 결혼을 못해요.
시간은 가고…그럴 때 기도도 안 하고 껄렁껄렁한 애들은 시집만 잘 갑니다. 헷갈리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믿음 지키다가 이 꼴이 뭡니까!’ 이렇게 흔들리지 않습니까? 주변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얘기하잖아요. ‘뭐 대단한 신앙을 가졌다고 그러느냐 적당히 타협하고 평범하게 살지, 왜 그렇게 유별나게 사느냐. 고난이 임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가 위기입니다. 대충 살라고…대충 살면 더 잘산다고…사실 이런 것이 제일 큰 위기입니다.
왜 이럴 때 우리가 절망합니까? 끝이 아닌데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순종하는 대로 고난이 더 임하지요.
모세의 말을 듣고 출애굽을 했더니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잖아요. 말씀대로 순종한 꼴이 이거냐고……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까 더 큰 위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함을 얻고 애굽의 군대는 다 죽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 살아갈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위기는 더 큰 승리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한판의 큰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고난이 많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 인생이 뒤집어집니다. 평범한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을 보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해석했습니다.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세례의 두 가지 의미입니다.
그래서 침례교 같은 데서는 세례를 줄 때 물속에 확 빠뜨려버립니다.
침례교 교회를 보면 강대상 뒤에 수영장이 있지요. 뒤에 보면 목욕탕 같은 데가 있잖아요.
거기에다가 푹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었다가 건집니다. 대개 뒤로 집어넣습니다. 들어갈 때는 죽음, 올라올 때는 다시 살아남.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라는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죽음입니다. 과거의 고난과 죄로부터의 죽음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끊지 못하는 것을 끊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항상 애굽 애굽 애굽…… 애굽에 대해 연연해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홍해를 떠나면서 다 끊어버렸습니다. 죄악의 인연들을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왜 고난이 임합니까? 끊으라고! 끊으라고요!
담배 끊지 못하는 사람도 폐 한번 아파보니까 다 끊습니다. 고난당하니까 다 끊어버리더라고요. 우리가 대단한 존재입니까? 우리 스스로 못 끊어요. 하나님께서 끊지 못하는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만듭니다. 단절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만듭니다.
고난에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 아시지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만화책도 보십시오. 각 구단에서 쫓겨나 고난당하던 사람들 모아서 하나가 되잖아요. 동지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처녀총각들이 데이트할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평탄하게 서로 좋은 선물 주고받고 이러면 사랑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여자가 죽을병에 걸리든지 남자가 죽을병에 걸리든지 그래서 병치레하다가 정이 듭니다. 아니면 저는 그런 것을 권하고 싶은데 데이트도 돈이 없어야 합니다. 만날 걷는 데이트….걷고 걷다가‘여기 아닌가봐-’ 하면서 다시 가고 그러니까 똑같은 것을 느끼잖아요. 똑같이 힘들고 여름철에 목마르고…… 그럴 때 ‘목마르지?’ 그러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고 ‘힘들지?’하면 어떻게 나 힘든 것을 알았냐고 그러는 거예요. 원래 동병상련,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같이 느끼다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선교 갔다 오면 전체가 하나됨을 느낀답니다. 왜냐 같은 느낌을 가졌잖아요.
아침에 깨었을 때의 고단함, 졸림, 배고픔, 기쁨, 슬픔…같은 경험을 하다 보면 엄청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1대1로 만나 가지고 1시간씩 교제한다고 합시다.
1년 동안 매주 1시간씩 교제해 봐야 52시간밖에 더 됩니까?
선교 가서 2일 지나면 48시간입니다. 선교지에서 5박6일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시간인지 아시겠지요? 잠자면서 여자들은 자리 없다고 싸워요. 여자는 참 이상해요.
남자들하고만 있을 때는 천사 같다가 왜 여자들끼리만 모이면 마귀사촌같이 되어 버리나요? 저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성도들 웃음) 그것이 정드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도덕적 감화가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 고난에의 동참을 통해서 하나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고난당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3D업종이라면 목사입니다.
목사만큼 3D가 없습니다. 새벽에는 새벽대로 깨어야 되고 밤에는 밤대로 깨어야 되고 그다음에 성도들이 대개 예고 안 하고 돌아가십니다. (성도들 웃음)
여러분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훨씬 많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과 함께 연합한다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도 주님과 함께 동참한다면 영광이지요. 순금은 고난의 용광로를 안 무서워합니다. 순금은 안 무서워합니다. 들어가야만 내가 진짜 금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러니까 험난한 상황은 진짜와 가짜를 갈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제목과 마찬가지에요. 정금은 고난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 때문에 나의 정금됨이 더 빛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지 않는지 고난 당해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자기 힘 갖고 하는지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힘으로 하는지 고난 당해보면 압니다. 자기 힘으로 하면 타버립니다. 성냥불같이 재가 되어버려요.
그러나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힘으로 하면 살아남아요. 그런데 고난이 왜 두렵습니까?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종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비결 아니었습니까? 고난은 임해야 합니다. 고난을 환영합시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영광받는 것이지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도우심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9절 찾아봅시다. 중요한 구절이니까.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을 지키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격당하면서도 밝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두움을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길에도 불기둥이 있었다고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어둡습니까? 불기둥이 있잖아요.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 속을 걸어가지만 불기둥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가지만 인도하는 빛이 있다고요. 우리가 갈 길을 모릅니까? 왜 몰라요? 불기둥 가는 대로 가면 됩니다. 낮에 더워서 어떻게 사느냐. 광야에서 어떻게 사느냐! 몰라서 그렇지요.
우리에게는 구름기둥이라는 하나님의 파라솔이 있어요. 하나님의 파라솔! 파라솔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에게는 환경에 관계없이 밝은 길과 인도하는 빛이 있습니다. 무엇을 걱정합니까?
그 빛이 또 여러 가지로 쓰입니다. 원수가 추격할 때 주님이 막아주십니다. 뜨거워서 못 오게 막아주십니다. 우리가 전진할 때는 우리 앞에 가다가 우리가 쉴 때는 우리 뒤로 와서 적이 못 쳐들어오게 막아줍니다. 그런 불기둥과 구름기둥 안에 살아가는 백성들이 뭐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려워 할 것 하나도 없지요. 문제는 불기둥이 없으니까 문제지요. 구름기둥이 없으니까 문제지요. 있는 것은 기둥서방밖에 없으니까 문제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으면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불기둥과 구름기둥 있습니까? 그것 있으면 원수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때는 홍해로 이끄실 때가 있고 광야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면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고난은 끊지 못하는 것을 끊게 만들고 오히려 고난은 나의 정금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설명 다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믿음하나 붙들자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만사형통합니다. 왜 만사형통하지요 ? 이 복잡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너무 좋은 사람은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이 중간과정을 다 잃어버리거든요. 믿음하나 붙들고 사니까 자기가 왜 잘되는지 몰라요. 설명이 안 됩니다.
꼭 고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설명을 잘합니다. 자동차도 고물자동차 타고 다니는 사람은 설명을 잘합니다. 기름 새는 것도 잘 맞추고 어디가 망가졌는지 금방 압니다. 고물이니까요. 그런데 워낙 좋은 것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뭐가 뭔지 몰라요. 시동 틀면 가는 줄 알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줄 압니다.
그런데 브레이크 밟아도 안서는 차가 있거든요. 이런 차를 타보면 차를 어떻게 세우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믿음 붙들면 승리합니다.
이것은 마치 시동 걸면 차가 가더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 붙들면 됩니다.
3. 고난의 결과는 영광
시험에서 승리하고 고난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찬송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은 홍해를 건너고 난 다음에 불렀던 이스라엘의 찬송이었습니다. 찬송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을 맛보고 난 다음에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왜 찬송이 없느냐.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막상 자기 자신이 당한 고난이 아니면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 해도 내가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었다가 살 것도 없습니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도 찬송이 나와요. 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 신앙에는 청각적인 신앙이 있고 시각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시각이 없는 사람, 청각만 있는 시각장애인에게 주홍빛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홍빛은 트럼펫소리와 같아.’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합니다. 똑같을 수 없지요. 물론 비슷한 이미지는 와요. 이미지는 오지만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시각장애인이 장님 코끼리다리 만지듯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체험하면 느껴집니다. 설명은 안 되어도……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안 됩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느끼니까 찬송합니다. 설명은 안 돼요. 다만 찬송이 나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우리 삼일교회의 모든 믿음의 청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본 것 때문에 찬송하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 것 때문에 나오는 찬송!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설명하는 무리가 아니에요. 설명이 안 되거든요. 불신자는 시각장애인이에요. 영적 시각장애인입니다. 안 보이는 사람에게 어떻게 주홍빛을 설명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찬송할 뿐이지요. 시각장애인은 뭐라고 우리에게 왜 그러느냐. 우리는 멋진 것을 보면 찬송이 나와! 멋진 것을 보이면 저런 찬송을 하더라. 여러분들 깊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면 출애굽기 15장을 보면서 여러분의 눈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보인다고요. 그래서 통쾌한 그 찬송이 나와요. 그리고 내 인생 가운데도 홍해가 갈라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홍해는 나에게는 영광이요 적군에게는 사망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고난의 용광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무장해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모든 난관들이 오히려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만드는 첩경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두 가지 놓고 기도합시다. 내 앞에 고난이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내가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지면 그것을 통과했을 때에 영광이 드러날 줄로 확신합니다.
정금 같은 믿음 달라고 이 시간에 다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합시다. 기도합시다!
고난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금 같은 믿음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히려 고난 때문에 우리의 정금됨이 들러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정금은 고난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나의 믿음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 가지 재앙이 나오는데 일곱 인의 재앙, 일곱 나팔의 재앙, 일곱 대적의 재앙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일곱째 인을 나누면 일곱 나팔이 되고 일곱 나팔을 나누다가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일곱 대적입니다. 점점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각각 재앙의 특징이 있습니다. 일곱 인의 재앙은 성도들에게 ‘준비하라. 말세를 이렇게 준비하라’ 준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일곱 나팔은 경고에 목적이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살라.’ 일곱 대적의 재앙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나와 있습니다.
심판은 있어야 합니다. 심판은 시험하고 똑같은데 시험공부 열심히 한 사람에게 시험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결국 실미도 북파특공대의 문제도 열심히 훈련하고 난 다음 시험이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 아닙니까? 훈련을 했으면 목적을 이루어야 될 것 아닙니까? 목적이 사라져 버리니까 사람이 미치는 것이지요. 목표가 있어야 되는 것과 시험이 있어야 되고 마찬가지로 심판도 있어야 됩니다. 심판은 준비된 사람에게는 축복이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저주입니다. 그것이 심판이지요. 심판이란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시험이 없다고…… 마귀와의 싸움이 뭔지 몰라서 그렇지 시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고난과 시험이 있지요. 이제 다 끝났다 싶으면
어디선가 살아나서 공격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도 고난을 당했지만 풀리고 난 다음에도 고난이 있잖아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 홍해도 있고요. 절망, 원망,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가운데 시련과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절대적인 고난의 크기보다도 자기가 느끼는 고난이 더 큰 것입니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큰 고민은 이런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도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힘든데 최고의 영적침체는 신학적인 위기입니다. 이 고난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헷갈립니다.
예를 들어서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선교하니까 얼마나 헌신적입니까?
캄보디아에 있는 선교사님인 오영수 선교사님은 가족이 다 비행기타고 가다가 죽었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이상하다! 주의 일을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신학적으로 해석이 안 됩니다. 거기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안 그래요? 신앙이 굉장히 좋아요. 기도도 열심히 하고…그런데 결혼을 못해요.
시간은 가고…그럴 때 기도도 안 하고 껄렁껄렁한 애들은 시집만 잘 갑니다. 헷갈리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믿음 지키다가 이 꼴이 뭡니까!’ 이렇게 흔들리지 않습니까? 주변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얘기하잖아요. ‘뭐 대단한 신앙을 가졌다고 그러느냐 적당히 타협하고 평범하게 살지, 왜 그렇게 유별나게 사느냐. 고난이 임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가 위기입니다. 대충 살라고…대충 살면 더 잘산다고…사실 이런 것이 제일 큰 위기입니다.
왜 이럴 때 우리가 절망합니까? 끝이 아닌데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순종하는 대로 고난이 더 임하지요.
모세의 말을 듣고 출애굽을 했더니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잖아요. 말씀대로 순종한 꼴이 이거냐고……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까 더 큰 위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함을 얻고 애굽의 군대는 다 죽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 살아갈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위기는 더 큰 승리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한판의 큰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고난이 많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 인생이 뒤집어집니다. 평범한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을 보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해석했습니다.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세례의 두 가지 의미입니다.
그래서 침례교 같은 데서는 세례를 줄 때 물속에 확 빠뜨려버립니다.
침례교 교회를 보면 강대상 뒤에 수영장이 있지요. 뒤에 보면 목욕탕 같은 데가 있잖아요.
거기에다가 푹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었다가 건집니다. 대개 뒤로 집어넣습니다. 들어갈 때는 죽음, 올라올 때는 다시 살아남.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라는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죽음입니다. 과거의 고난과 죄로부터의 죽음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끊지 못하는 것을 끊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항상 애굽 애굽 애굽…… 애굽에 대해 연연해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홍해를 떠나면서 다 끊어버렸습니다. 죄악의 인연들을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왜 고난이 임합니까? 끊으라고! 끊으라고요!
담배 끊지 못하는 사람도 폐 한번 아파보니까 다 끊습니다. 고난당하니까 다 끊어버리더라고요. 우리가 대단한 존재입니까? 우리 스스로 못 끊어요. 하나님께서 끊지 못하는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만듭니다. 단절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만듭니다.
고난에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 아시지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만화책도 보십시오. 각 구단에서 쫓겨나 고난당하던 사람들 모아서 하나가 되잖아요. 동지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처녀총각들이 데이트할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평탄하게 서로 좋은 선물 주고받고 이러면 사랑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여자가 죽을병에 걸리든지 남자가 죽을병에 걸리든지 그래서 병치레하다가 정이 듭니다. 아니면 저는 그런 것을 권하고 싶은데 데이트도 돈이 없어야 합니다. 만날 걷는 데이트….걷고 걷다가‘여기 아닌가봐-’ 하면서 다시 가고 그러니까 똑같은 것을 느끼잖아요. 똑같이 힘들고 여름철에 목마르고…… 그럴 때 ‘목마르지?’ 그러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고 ‘힘들지?’하면 어떻게 나 힘든 것을 알았냐고 그러는 거예요. 원래 동병상련,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같이 느끼다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선교 갔다 오면 전체가 하나됨을 느낀답니다. 왜냐 같은 느낌을 가졌잖아요.
아침에 깨었을 때의 고단함, 졸림, 배고픔, 기쁨, 슬픔…같은 경험을 하다 보면 엄청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1대1로 만나 가지고 1시간씩 교제한다고 합시다.
1년 동안 매주 1시간씩 교제해 봐야 52시간밖에 더 됩니까?
선교 가서 2일 지나면 48시간입니다. 선교지에서 5박6일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시간인지 아시겠지요? 잠자면서 여자들은 자리 없다고 싸워요. 여자는 참 이상해요.
남자들하고만 있을 때는 천사 같다가 왜 여자들끼리만 모이면 마귀사촌같이 되어 버리나요? 저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성도들 웃음) 그것이 정드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도덕적 감화가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 고난에의 동참을 통해서 하나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고난당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3D업종이라면 목사입니다.
목사만큼 3D가 없습니다. 새벽에는 새벽대로 깨어야 되고 밤에는 밤대로 깨어야 되고 그다음에 성도들이 대개 예고 안 하고 돌아가십니다. (성도들 웃음)
여러분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훨씬 많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과 함께 연합한다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도 주님과 함께 동참한다면 영광이지요. 순금은 고난의 용광로를 안 무서워합니다. 순금은 안 무서워합니다. 들어가야만 내가 진짜 금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러니까 험난한 상황은 진짜와 가짜를 갈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제목과 마찬가지에요. 정금은 고난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 때문에 나의 정금됨이 더 빛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지 않는지 고난 당해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자기 힘 갖고 하는지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힘으로 하는지 고난 당해보면 압니다. 자기 힘으로 하면 타버립니다. 성냥불같이 재가 되어버려요.
그러나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힘으로 하면 살아남아요. 그런데 고난이 왜 두렵습니까?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종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비결 아니었습니까? 고난은 임해야 합니다. 고난을 환영합시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영광받는 것이지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도우심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9절 찾아봅시다. 중요한 구절이니까.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을 지키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격당하면서도 밝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두움을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길에도 불기둥이 있었다고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어둡습니까? 불기둥이 있잖아요.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 속을 걸어가지만 불기둥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가지만 인도하는 빛이 있다고요. 우리가 갈 길을 모릅니까? 왜 몰라요? 불기둥 가는 대로 가면 됩니다. 낮에 더워서 어떻게 사느냐. 광야에서 어떻게 사느냐! 몰라서 그렇지요.
우리에게는 구름기둥이라는 하나님의 파라솔이 있어요. 하나님의 파라솔! 파라솔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에게는 환경에 관계없이 밝은 길과 인도하는 빛이 있습니다. 무엇을 걱정합니까?
그 빛이 또 여러 가지로 쓰입니다. 원수가 추격할 때 주님이 막아주십니다. 뜨거워서 못 오게 막아주십니다. 우리가 전진할 때는 우리 앞에 가다가 우리가 쉴 때는 우리 뒤로 와서 적이 못 쳐들어오게 막아줍니다. 그런 불기둥과 구름기둥 안에 살아가는 백성들이 뭐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려워 할 것 하나도 없지요. 문제는 불기둥이 없으니까 문제지요. 구름기둥이 없으니까 문제지요. 있는 것은 기둥서방밖에 없으니까 문제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으면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불기둥과 구름기둥 있습니까? 그것 있으면 원수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때는 홍해로 이끄실 때가 있고 광야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면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고난은 끊지 못하는 것을 끊게 만들고 오히려 고난은 나의 정금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설명 다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믿음하나 붙들자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만사형통합니다. 왜 만사형통하지요 ? 이 복잡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너무 좋은 사람은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이 중간과정을 다 잃어버리거든요. 믿음하나 붙들고 사니까 자기가 왜 잘되는지 몰라요. 설명이 안 됩니다.
꼭 고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설명을 잘합니다. 자동차도 고물자동차 타고 다니는 사람은 설명을 잘합니다. 기름 새는 것도 잘 맞추고 어디가 망가졌는지 금방 압니다. 고물이니까요. 그런데 워낙 좋은 것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뭐가 뭔지 몰라요. 시동 틀면 가는 줄 알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줄 압니다.
그런데 브레이크 밟아도 안서는 차가 있거든요. 이런 차를 타보면 차를 어떻게 세우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믿음 붙들면 승리합니다.
이것은 마치 시동 걸면 차가 가더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 붙들면 됩니다.
3. 고난의 결과는 영광
시험에서 승리하고 고난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찬송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은 홍해를 건너고 난 다음에 불렀던 이스라엘의 찬송이었습니다. 찬송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을 맛보고 난 다음에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왜 찬송이 없느냐.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막상 자기 자신이 당한 고난이 아니면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 해도 내가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었다가 살 것도 없습니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도 찬송이 나와요. 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 신앙에는 청각적인 신앙이 있고 시각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시각이 없는 사람, 청각만 있는 시각장애인에게 주홍빛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홍빛은 트럼펫소리와 같아.’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합니다. 똑같을 수 없지요. 물론 비슷한 이미지는 와요. 이미지는 오지만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시각장애인이 장님 코끼리다리 만지듯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체험하면 느껴집니다. 설명은 안 되어도……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안 됩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느끼니까 찬송합니다. 설명은 안 돼요. 다만 찬송이 나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우리 삼일교회의 모든 믿음의 청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본 것 때문에 찬송하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 것 때문에 나오는 찬송!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설명하는 무리가 아니에요. 설명이 안 되거든요. 불신자는 시각장애인이에요. 영적 시각장애인입니다. 안 보이는 사람에게 어떻게 주홍빛을 설명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찬송할 뿐이지요. 시각장애인은 뭐라고 우리에게 왜 그러느냐. 우리는 멋진 것을 보면 찬송이 나와! 멋진 것을 보이면 저런 찬송을 하더라. 여러분들 깊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면 출애굽기 15장을 보면서 여러분의 눈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보인다고요. 그래서 통쾌한 그 찬송이 나와요. 그리고 내 인생 가운데도 홍해가 갈라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홍해는 나에게는 영광이요 적군에게는 사망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고난의 용광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무장해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모든 난관들이 오히려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만드는 첩경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두 가지 놓고 기도합시다. 내 앞에 고난이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내가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지면 그것을 통과했을 때에 영광이 드러날 줄로 확신합니다.
정금 같은 믿음 달라고 이 시간에 다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합시다. 기도합시다!
고난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금 같은 믿음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히려 고난 때문에 우리의 정금됨이 들러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