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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자녀 사랑하기 (에베소서 6:1~4)
최근 TV에서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역은 어떤 극악무도한 젊은 사업가와 다소 거칠고 좌충우돌이긴 하지만 정의감이 강한 한 형사입니다. 젊은 사업가는 훌륭한 부모님을 두고 말쑥한 외모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자기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면서도 꼬리를 안 잡히게 완전범죄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르는 무서운 살인자입니다. 그는 20억원 정도의 투자로 600억원 가까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잡고 그 투자를 위해 아버지가 키워온 고아원을 처분하려하지만 고아원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자 아버지를 죽이고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같이 있던 어머니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합니다. 그는 예리한 칼을 사용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을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난도질을 했지만 수사를 위한 아무런 단서를 남기지 않을 만큼 또 한 차례의 완전범죄를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미궁에 빠질 뻔했던 이 사건은 한 형사의 집요한 수사에 의해 들통이 나고 맙니다. 부모를 죽인 범인이 바로 그 아들이었음이 드러나게 된 결정적 단서는 그 형사가 어머니의 시신을 다시 세밀히 살피던 중 칼에 찔려 벌어진 목구멍 틈에 걸려있던 한 조각의 손톱이었습니다. 범인은 그의 어머니를 마구 찌르다가 실수로 자기 자신의 손톱 끝을 조금 베었는데 쓰러져 죽어가던 어머니가 방바닥에 떨어진 그 손톱조각을 보고는 그것이 혹시 수사의 단서가 되어 범인이 자기의 아들임이 드러날까 염려하여 숨이 끊어져가는 상황에서 그 손톱을 주워 입에 넣고 삼켜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까지 죽이는 아들이었지만 끝까지 그 아들을 보호하려 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님을 최근에 일어난, 이와 너무나도 흡사한 한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이고 한결같은 자식사랑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사건이 지난달에 일어났습니다. 모일간지가 보도한 바를 옮기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서울시의 어느 경찰서에서 81세의 할머니가 길거리에 버려졌다는 112신고를 받고 그 할머니를 데려왔습니다. 할머니의 집이 어디냐고 묻는 경찰의 질문에 그 할머니는 “몰라. 길을 잃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자녀들에 대해서 묻는 경찰의 질문에도 할머니는 “우리 아들, 딸은 아무 잘못이 없어. 그냥 내가 길을 잃은 거야”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에서는 가족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 그 할머니를 그날 밤 경찰서 유치장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의 첫째 딸이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왔습니다. 그 딸은 어머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경찰에게 다가가 “난 엄마를 버리지 않았어요. 억울해요”라고 외쳤답니다. 오후에 경찰서에 나타난 아들도 오자마자 “난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더라는 것입니다. 남매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긴 경찰이 조사를 시작해서 알고 보니 할머니는 그 자식들이 버린 것이었습니다. 혼자 된지 21년 되었고 같이 살던 큰아들마저 3년 후에 죽자 할머니는 둘째 아들과 딸의 집을 전전해왔는데 5년 전부터 이 아들과 딸이 거의 매일 서로 “어머니를 데려가라”고 다투던 끝에 어머니를 상대방에게 떠맡기고는 다시 모시고 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두 집 문이 다 닫혀서 올 데 갈 데 없어진 할머니는 결국 길거리에 버려진 채로 있다가 신고에 따라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파악한 경찰은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를 모두 존속유기혐의로 입건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내가 오래 살아서 이렇게 됐다”며 “우리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다”고 경찰에 선처를 호소했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은 변하고 갈수록 험해집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대하거나 섬기는 방식도 변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의 부모사랑은 부모의 자식사랑을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무조건 공경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근 이천년 전 사도 바울이 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한 말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귀한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크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계명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계명 두 가지로 나눌 때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은 두 번째 종류의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을 두 돌판에 나누어 쓰라면 한 돌판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쓰고 다른 돌판에는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제5계명이 제1, 제2, 제3, 제4 계명과 함께 한 돌판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렇게 분류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또 참된 하나님 경외는 사랑과 순종이 함께하는 것이듯이 부모님에게도 사랑과 순종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한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보듯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한 후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 하고 이어서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중 제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과 부모에게 자녀를 사랑하라는 말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녀는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공경해야 할 것이며, 부모는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함으로써 자녀로 하여금 노여워하지 않고 부모를 절대적으로 공경하고 순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지도 않고 노엽게 하기만 하는 부모는 자녀로부터 절대적 순종과 공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먼저 명심해야 할 사실의 하나는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모든 생명처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단지 그 양육을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과 방식을 무시하며 자기 뜻과 방식대로 자녀를 양육하면 안 됩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함의 기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한이 없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고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이 없고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교훈도 훈계도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훈계”라고 번역된 단어는 말로 가르치는 것을 뜻하며, “교훈”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실제 훈련을 뜻하는 것으로 신체적인 벌까지도 포함하는 교육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매와 채찍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매와 채찍을 맞으면서도 노여워할 수 없을 만큼 그 매와 채찍이 사랑으로 가득 찬 매와 채찍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이 없어도 사랑이 없이 그렇게 한다면 그 자녀가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나중에 그 자녀로부터 감사와 존경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매를 때려도 사랑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그 자녀는 훌륭하게 될 가능성이 크며 훗날 반드시 그 자녀에게서 감사와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8~9년 전의 일입니다. 환경미화원인 아버지와 작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어머니가 어느 날 고급 브랜드의 청바지를 입고 들어온 아들을 보고는 의심이 들어 어떻게 된 것인지 다그쳐 물었습니다.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아들은 며칠 만에 버스 정류장에서 남의 손지갑을 훔친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며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하게 했습니다.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아들의 범죄사실이 한 가지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일로 마음 아파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판이 있는 날 법정에서 어머니는 울먹이며 판사에게 말하기를 “남편의 뜻대로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한 벌을 내려주세요” 해서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판결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검사는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예상밖의 판결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검사가 밝힌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잘 안 듣는 아들을 둔 어느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번번이 부모와의 약속을 어기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최후의 경고를 했습니다: “우리 집안의 규칙을 한 번만 더 어기면 다락방으로 보내겠다.” 그러나 며칠 후 아들은 또 부모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부모에게 어디로 가는지 알리지도 않고 집을 나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밤이었지만 다락방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아들을 다락방으로 보낸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너무 춥고 무서울 거라며 한숨을 쉬었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그 아이를 다락방에서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소리를 들으며 괴로움에 잠 못 이루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은 추운 다락방의 딱딱한 바닥에서 베개도 없이 얼어붙은 듯 쪼그리고 잠들어있었습니다. 아들을 내려다보던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 곁에 누웠습니다. 아들을 꼬옥 안고 팔베개도 해주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도 다락방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들을 안고 누운 아버지와 그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안겨 철없이 잠든 아들을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아들을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맞은편에 살며시 누워 아들의 뺨에 볼을 갖다 댔습니다. 양쪽에서 안아주는 부모님의 체온에 몸이 녹고 눈을 뜬 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닫고 “아버지,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자녀를 참된 사랑과 바른 교훈으로 양육하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자식을 오히려 망치고 사회의 질서까지도 파괴하는 빗나간 자식사랑의 사례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발생해서 세인이 모르게 덮어질 뻔 했다가 알려져 지금 한창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사건도 그 한 예입니다. 모 대재벌그룹의 총수가 자기 아들이 어느 술집에서 폭행을 당하자 이에 격분하여 아들과 경호원들과 조직폭력배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데리고 몰려가 아들을 폭행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보복폭행을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고 그 재벌회장은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지만 피해자들과 증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폭력영화에서나 보곤 하는 섬뜩한 집단폭행이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회장의 진두지휘 하에 벌어진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일반에 알려지고 비난여론이 일자 그룹 측에서는 회장의 각별한 자식사랑 때문이라고 사건의 문제성을 희석시키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리 각별한 자식사랑이라 해도 우리 국민의 정서가 그러한 보복폭행을 덮어주고 넘어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행위가 단지 자식사랑에서 나온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 하드라도 그것은 분명 잘못된 자식사랑입니다. 알려진 바가 대체로 사실과 일치한다면 그러한 처사는 자녀교육상으로도 아주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자녀를 위하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의 자녀를 망치고 자신도 망치고 사회도 망치는 일일 뿐입니다. 그 재벌회장의 아들이 폭행을 당한 일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각별히 사랑하는 아들이 폭행을 당한 일에 분노하는 아버지의 심정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고 아들을 데리고 직접 보복폭행에 나서는 일은 아들에게 불법적인 폭력을 가르치는 것이며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 자신이 당한 불법적인 폭력행위가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우리 사회에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으로 아직도 엄청난 충격 속에 있습니다. 분노를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고 법을 존중할 줄 모르며 생명을 경외할 줄 모르는 한 개인이 얼마나 끔찍한 대량살상을 낳을 수 있는지를 목격한 우리에게 이번 사건은 또 한 차례의 대형충격을 안겨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를 바 없지만 사람마다 그 표현방법은 다름을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한 말이 다시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자녀들을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온유와 인내와 절제를 가르치는 것이 참된 자녀사랑이며 바른 자녀교육입니다. 이번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유별난 자녀사랑 때문에 종종 빗나가기 쉽고 이기주의에 빠지기 십상인 우리 사회의 부모들이 다시 한 번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번에 보복폭행 사건의 피의자가 대기업의 회장이고 그 수법과 정도가 심각했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동안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가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다 교사에게 야단을 맞거나 조금이라도 체벌을 받으면 학교로 찾아와 교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퍼붓고 난동에 가까운 행패를 부림으로써 교육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행동도 본질적으로는 이번 재벌총수의 보복적 폭력행사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참된 자녀사랑이며 바른 자녀교육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자녀를 바르게 사랑하며 양육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를 보다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