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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창세기에 나타난 남녀 관계

창세기1:26~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천명하는데 남자와 여자라고 부연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차별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표자 혹은 대리자로 세워졌다는 뜻이다.

창2:18~25절은 아담이 주가 되고 여자가 아담에게 종속되는 것으로 보지만 돕는 배필이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돕는 배필이라고 성경은 언급하기도 한다(전4:9~10, 12).
적어도 창세기3:16절부터는 타락의 질서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남자 우월적이고 여성 종속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구약은 남자의 우월성과 주권을 천명하고 여자들은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설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신약의 복음

그런데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질서에서는“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상전도 없고 노예도 없다.
모두 하나다.”라는 것이다.

첫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남녀를 공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셔서 자기의 통치권을 대행하게 하셨듯이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통해 옛 세상의 대표적인 구분들, 인종적 구분, 성적 구분, 신분적 구분을 극복하게 하셨다.

첫 창조(창1장)와 새 창조의 위대한 천명(갈3:28)은 그리스도인들의 남녀 관계 이해에 있어 원칙이요, 열쇠로 작용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여성에 대한 보호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인격체로 보지 않았던 유대 사회에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로 세우셨다.
유대교에서는 여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 안 되었고 어떤 랍비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방인, 노예, 그리고 여자로 창조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여성에게도 토라를 가르쳤고 부활하신 후에는 첫 증인으로 마리아를 세웠으며 복음서도 당시의 문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웠다.


예수의 이혼 금지에 담긴 남녀 동등성의 원리

예수의 이혼 금지에 대한 가르침은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여 여자를 보호하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막10:11~12; 마5:31~32; 마19:8~9; 눅16:18).

일부일처제를 창조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일부다처제가 가져오는 여성의 종속과 여성의 재산화, 남편의 소유물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남편과 아내를 동등한 상황 속에서 짝지어 준 것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성적으로 소유하듯이 아내도 남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아내를 버리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성적 소유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간음하는 것이다(고전7:2~6).

예수는 왜 열둘 속에 여자를 끼워 넣지 않았는가?

12명의 제자를 남자로 세운 것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족장들에게 상응하는 새 언약에 의한 새 하나님의 백성의 12기둥들을 상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다 본질적인 구원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본질적인 메시지가 신뢰를 얻고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이런 문화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갈라디아서3:28 새 창조 질서의 원칙 : 남녀의 동등성 이 구절은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과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불평등과 불의를 가져오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들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7:2~16 부부 생활 그리고 이혼 : 부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부부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
서로의 (성적)권리를 빼앗지 말라(고전7:2~5).

” 바울은 이어서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성관계를 중단할 수 도 있는데 그때는 서로 합의해서 하라고 말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철저한 동등성과 상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전서7:10~16에서 이혼에 관한 가르침도 남녀동등을 주장하고 있다.

고린도전서11:2~16 여자들도 교회에서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 바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교회 생활에서도 적용했다(고전11:2~16).

바울은 회당예배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같은 방에서 예배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공 예배에서 여자들도 대표기도와 예언(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며 구약을 해석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설교)을 하도록 했다.

갑자기 자유를 얻은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은 남자들과 평등하게 예배에 참여하면서 공적인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굉장히 시끄럽게 했으며 머리에 쓰던 너울조차 벗어 던지고 떠들어 대니 예배의 분위기가 아주 어지럽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질서를 잡아야 했으며 여자들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명령하기보다 계속하되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는 교회가 헬라인, 유대인 어느 누구에게나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고전10:32; 14:23; 고후8:21; 살전4:12).

여기서 바울이 “머리”론을 펴다 중단하는 것 (고전11:11~12)은 어디까지나 여자들에게 머리에 수건 쓰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이를 일반화 하여 남편이 아내의 권위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에베소서5:21~33 가정생활-동등성과 상호주의

바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가족 윤리 또는 가족 간의 상호 의무 조항을 규정하는 것에도 적용한다(엡5:21~33).

그런데 이 문맥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22절 즉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말씀부터 읽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21절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이다.
이 부분이 부부관계에 대한 가르침 전체에 대한 큰 제목이다.

그 원칙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22절에서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하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23~24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고 26~33절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을 두 번 더 되풀이 한다.

당시 남편 우위의 고대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보편적이었기에 두어 마디로 끝낼 수 있었지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데는 특별한 설득이 필요했으므로 거듭 강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여자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동사를 썼고 남편에 대해서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동사를 썼으니까 남편은 위고 아내는 아래로 보고 있다.

그러면 본문은 갈라디아서3:28의 말씀과 근본적으로 모순을 일으킨다.

기능적 차이만을 인정하는 어떤 이들은 남녀는 본질적으로나 구원론적으로 동등하나 5:21절의 “서로 복종하라”는 기본 논지를 무시한다.

복종은 일종의 자기희생이지만 사랑은 복종을 포함하는 더 총체적 자기희생(자기를 내어줌: 자아포기의 삶)이다. “머리”, “복종”이라는 표현을 붙들고 자신의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한다면 그는 그 행위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5:21~31의 말씀을 더 이상 가부장적 부부관계를 지탱하는데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함으로 모든 것을 아내와 상의하여 결정하되 의견이 상충할 때는 최종 결정권은 남편이 가져야 하고 아내는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내가 더 많은 지혜를 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율법주의적으로 남편의 “머리됨” 또는 “대표권”을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예수와 사도 바울의 정신에 합당한 것이며 가정에 유익한 것인가?

고린도전서14:34~3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전14:34~35(개역성경)는 갈라디아서3:28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어떤 사본들에는 이 절들이 40절 이후에 놓여 있다.
또 그들은 문맥을 끊고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예배 도중 중구난방으로 방언하고 예언하여 무질서한 상황이 이루어진 것을 바로잡고 있는 중이다.
고린도전서14:32~38을 보면, 34~35절이 나중에 선지자들에 대한 바울의 타이름의 문맥을 끊고 삽입된 것임이 드러난다.

34~35절을 제쳐놓고 32~33절에서 36~38절로 직접 이어 읽어 보라.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영감하므로 자신들은 예배 질서에 아랑곳없이 계속 예언해야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타이르는 내용으로 일관되지 않는가?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이 디모데전서2:11~15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은 디모데전서가 쓰일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쓰여 졌다고 본다.

고린도전서14:34~35도 그 무렵 영지주의의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 때 성경 해석이나 교리에 대해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는 시끄러운 상황(고전14:35)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록되어 고린도전서14장에 삽입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바로 앞에서 썼던 고린도전서11:2~16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이 고린도전서14:34~35과 디모데전서2:11~15을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권위는 실추되고 만다.


맺는말 : 올바른 해석학의 중요성

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복음을 왜곡하여 선포할 때는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억압을 가져오는 것이다.

해석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몇몇 구절만 인용해서 그들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야 한다.

특히 원칙적이고 중심적인 가르침과 문화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을 구분하여 해석해야 하며 성경 말씀의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후3:6).

따라서 갈라디아서3:28과 고린도전서14:34~35 중 어느 구절이 그리스도 복음에 더 정확한 표현인지 생각해야 한다.

완성된 계시인 신약을 저버리고 예비 계시였던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성을 완전히 차별하는 규정들을 들이대며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이는 가정으로 연계되어 성경과 거리가 먼 유교주의에 빠져 있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며 자기 명령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정을 화평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고 순종 잘하는 아내로부터 대접받고 사는 남편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사실상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무지에서 나오는 주장은 심히 우려가 된다.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한국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 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버린 셈이다.

여자들이 잠잠하라고 억눌림을 받고 있다니 이 얼마나 씁쓸한 역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