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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기의 명수 (빌립보 1:12-21)
저는 운동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운동구경은 퍽 좋아하는 편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경기가 있습니다. 70년대초 빌리그래함이 한국에서 전도집회를 하고 있던 그 시간에 동대문 운동장에서 이스라엘과 한국간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후반전 5분을 남기고 한국이 1:0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그 남은 5분만에 차범근 선수가 연속 두 골을 넣어 이스라엘을 이긴 적이 있습니다.
70년대 후반엔 홍수환 선수가 네 번을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카라스키야를 K.O.시켜 4전 5기의 신화를 만들었던 권투경기 또한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운동선수를 할만한 사람은 못되지만 여러 운동들 가운데 한 가지는 어릴 때 기초 훈련도 받아 본 적이 있고 또 짧은 기간이기는 합니다만 선수 생활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믿지 않겠지만 믿거나 말거나 제가 씨름선수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요즘도 제 몸이 거구는 아니지요. 그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대부분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하고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이 가장 통쾌하게 이길 수 있는 기술이 한가지 있습니다. 큰 사람 밑으로 파고 들어가 뒤집어 버리는 겁니다. 혹은 넘어지는 순간에 몸을 뒤틀어서 상대와 위치를 바꾸는 겁니다. 소위 "대치기" "뒤집기"라고 하고 기술입니다.
그 묘미가 무엇일까? 모두 역전승의 묘미요 뒤집기의 감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과 시대를 역류해서 살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큰 통나무도 물결 속에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잘려지고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피라미는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죽어있는 성도들은 세상물결 속에 떠내려갑니다. 시류에 휩싸여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살아있는 성도들은 환경을 역류합니다. 시류를 거슬러 살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악조건을 뒤집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있다면 뒤집기 선수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뒤집기의 명수]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듯 패배하는 듯 하나 상황을 반전시키고 역전시키는 힘이 있더란 말이죠.
오늘 본문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로한 바울 서신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라는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가 루이 암스트롱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 속에 음악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정의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음악이 없다면 음악에 대해 아무리 훌륭한 정의를 내린다 할지라도 당신에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내 속에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오늘 현대인들이 기쁨을 모르는 것은 기쁨에 대한 정의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기쁨의 필요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기쁨을 다 빼앗기고 그 속에 기쁨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까?
첫째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환경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나의 당한 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입니다. 17절에서 "저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고 하는 실존의 문제인데 본문은 "죽는 것" 즉 죽음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가는 어느날 문득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환경 때문에 혹은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혹은 질병과 죽음의 문제,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환경의 위기와 꼬인 인간관계 그리고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기쁨을 빼앗기기는 커녕 "도리어" 풍성한 삶과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고 오늘 본문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에서 키워드가 되는 말은 "도리어" 라는 단어입니다. 모든 문제를 뒤집어 행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그 비결을 얻고 싶지 않습니까?
빌립보서를 가리켜 성경학자들은 기쁨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4장으로 구성된 짧은 성경이지만 그 가운데 기쁨이란 단어가 무려 19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기쁨이란 주변환경이 평탄하고 평안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도와주고 인정해주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질병도 없고 고난도 없고 건강하기만 해서 오는 행복이 아니더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 무한한 생의 역경과 시련, 물밀 듯이 밀려오는 핍박,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위험, 이런 상황속에서 그는 도리어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감옥에서 쓴 글입니다. 감옥에 갇혀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우리에게 너희도 이런 환경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고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참된 기쁨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어떤 모습입니까? 한 마디로 "뒤집기의 명수"라는 것입니다.
II. 환경 뒤집기 선수
사도 바울, 그는 무엇을 뒤집는 선수였습니까? 첫째, 그는 환경 뒤집기 선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12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누가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겠습니까 만은 특별히 사도 바울은 복음을 힘있게 전하기 위해서 자유의 몸이 되기를 그토록 원했는데 환경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포 자기, 절망, 불평, 원망의 넉두리를 하기 쉽습니다. "바로 살아 보겠다 몸부림하는 나를 5년세월 감옥에 넣어두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부귀 영화를 위해서 달려왔단 말인가?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달려왔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나의 모든 것은 끝났다, 깨끗이 포기하자, 그만두자, 전도고 뭐고 이제 나는 끝이다."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감옥이 나의 꿈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풍랑이 나의 믿음을 흔들어 놓지 못할 것이다. 환경이 내 비전을 뒤집어 놓지 못할 것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환경 뒤집기 선수"였습니다.
환경을 뒤집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은 생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 생의 목적만큼 고상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의 목적이 고상한 사람은 그만큼 인격이 고상한 사람입니다. 생의 목적이 저급한 사람은 그만큼 인격이 저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생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전파였습니다. 모든 환경과 사건을 평가하는 그의 기준이 복음전파였습니다. 그것이 고난이든 평안이든 복음전파에 유익이 되면 성공이요, 복음전파에 해를 가져오면 실패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매일같이 산해진미를 먹고 마시고 살아도 그걸로 인하여 내가 복음전파에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내 영성이 무디어 지고 복음전파에 방해거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요, 내가 비록 고난에 처하고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면, 내 영성이 맑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기름진 밥을 먹느냐 못 먹느냐?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 내가 고생을 하느냐 대접을 받느냐? 소위 출세를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따위는 도무지 안중에도 없어 보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출세와 성공과 안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 여러분 믿습니까? 당신의 모든 환경은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그 어떤 환경도 우연히 전개된 것은 없습니다. 재수가 없어 그렇게 된 것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경륜과 섭리가 있습니다. 질병도 실패도 불행도 심지어 돌발적인 사고도 절망적인 환경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와 사랑이 숨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소설가 오이겐자부로라고 하는 사람이 몇 해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문학계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문학 평론가로 혹은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어느날 내 삶에 큰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가 정박아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이것 때문에 우리 부부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고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나의 문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소설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정박아 히로키. 그 아이는 나의 문학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내 글 속에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그 힘은 바로 내 아이 히로키로부터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남들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환경속에서, 실패라고 생각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발견하고, 인생이 새로워지고, 불행과 실패의 환경을 뒤집는 역전드라마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들은 모두 환경 뒤집기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III. 사람 뒤집기
우리의 행복을 위협하는 두 번째 요인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를 뒤집는 뒤집기 선수들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가 잘못되었을 때에, 큰 이유없이 나를 비난하는 사람앞에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기고 부모 자식간의 신뢰가 깨어질 때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때에 오는 낙심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환경의 위기보다 더 한층 어렵고 복잡한 것이 인간관계의 위기 아닙니다. 심지어는 현대인들의 간질환, 위장병 등이 인간관계의 뒤틀림에서 많이 온다고 합니다. 인간관계의 위기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를 고독하게 만듭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이들"이라고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나오고 17절에 "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따르고 돕는 사람들이었고, "저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롭히는 사람들, 오히려 바울이 감옥에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 무신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지들임에도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그래서 바울이 없는 사이에 자기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괴롭힐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18절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너희들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내게 괴로움을 더하는 길이라도 그 일을 했지만 나는 도리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어떤 방법 어떤 동기로든 복음이 전파되는 것 - 그것이 바로 나의 기쁨이다." 할렐루야.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내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겠다는 겁니다. 옹졸하고 외소한 내 시선에서가 아니고 예수의 시선을 가지고, 왜곡된 내 심장을 가지고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건을 보고 사람을 보고 미래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원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까지 기뻐했습니다. 나는 갇혔고 나는 고생을 했지만 도리어 저들이 일하게 되었으니 기쁘다는 것 입니다.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으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50개국에서 출간된 베스트셀러가 한 권 있습니다.
앤드류 매튜스라고 하는 세계적인 일러스트 작가가 쓴 "Being Happy"라고 하는 책입니다. "행복 찾기" "행복해지는 법"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그 틀대로 살아갑니다. 패러다임(Paradigm) 즉, 각자의 마음속에 어떤 사고의 틀이 있다는 거죠. 그 틀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겁니다. 인생관,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틀에 따라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 크게 두 가지 가치관 즉, 부정적인 가치관과 긍정적인 가치관이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분은 꼭 상황을 어둡게 보고 스스로 불행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몇 가지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가치관이 건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할 때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의 좋은점이 많이 보여 칭찬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도 칭찬을 많이 하면 친구로 변합니다.
결혼주례 할 때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두 남녀가 펜팔로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나고 보니 남자가 애꾸눈 이예요. 여자가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당신은 멀리서 날 바라보고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한번도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없었단 말이냐?"고 말합니다. 그때 남자가 펄쩍 뛰면서 말합니다. "무슨 얘기냐 내가 첫 번째 편지에 분명히 당신에게 고백했다." "아니 내가 편지를 안 읽었다는 얘기냐?" "언제 고백했냐?"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느냐? 당신을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했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우리 마음의 눈이 부정적인 것을 보는 눈이 있고 긍정적인 것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을 보는 눈을 애꾸눈으로 감으면 가정이 행복해 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비밀도 칭찬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할 때 항상 좋게 소개하는 훈련을 하라!고 말합니다.
나를 나타낼 때는 언제나 밝은 얼굴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걱정이 많아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화평한 모습, 즐거운 모습, 행복한 모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하다 보면 그것들이 점점 쌓이면서 내 성격을 긍정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계속해서 기뻐하고 유쾌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살면 삶이 진짜 그렇게 변합니다.
간장, 위장과 관련된 질병 및 신경성 질병은 호탕하게 하루에 몇 번만 웃으면 대게 낫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지 말고 자기가 앞으로 되고 싶은 사람을 늘 생각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면 건강하게 되고, 삶 전체가 아주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또한 긍정적으로 살려면, 무엇인가 필요할 때 깨끗하게 그 필요를 알리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결혼기념일이나 자기 생일에 "남편이 알아주나!"하고 노려보고 기다렸다가 그냥 넘어가면 그때부터 삐쳐서 일주일 동안 말을 안 합니다. 그러면 삶이 피곤해집니다. 대게 남편들은 살아남기 위해 직장 상사에 관심을 가지고, 고객에 관심을 가지며 삽니다. 그런 남편의 정신적인 짐을 덜어주려고 남편에게 "이런 관심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자기도 남편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이 되고 진정한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기념일에 무엇인가를 바라면 "어디 두고 보자!"고 사랑을 시험하기보다 그냥 아침에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조금 일찍 들어오세요"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것이 없이 자기 기준으로 "사랑의 증거"를 만들어 놓고 그 증거가 없는 것 같다고 "사람 잘못 봤어! 내가 결혼 잘못했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행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긍정적으로 살려면 "내가 당한 일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때로 사업이 망해도 사업이 망한 것이지 나 자신이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가 대학 시험을 치면 떨어질 수도 있고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떨어지면 인생이 망하고, 가문이 망가진 것처럼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학 못 가면 저 대학을 가면 되고,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됩니다. 내가 당한 일에 나의 존재와 목숨을 다 걸면 항상 초라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지만 내가 당한 일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더 격려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세워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판자를 품어 친구로 만들고 원수로 인하여 내 행복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IV. 죽음 뒤집기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세 번째 요인은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뒤집어 영생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뒤집기의 명수들입니다.
돈을 가졌으나 그것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높은 권세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려올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지금은 건강하나 병들 수 있다는 불안감, 지금은 젊었으나 반드시 늙는다는 불안감이 있습니까? 결국 그것은 모두 죽음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죽음의 위기가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입니다. 20절 - 21절 "이제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나는 살아도 유익하지만 죽음도 환영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담력입니까? 죽지 않으려고 벌벌 떠는 모습처럼 초라한 것은 없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종종 임종을 지켜드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목사님 나는 지금 죽을 수 없어요. 살려주세요. 한 번만 살려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더 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또 한편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저는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존귀한 분이십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승리의 모습입니까?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뒤집는 명수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음을 뒤집어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유한한 인생의 한계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이 힘이 옵니다. 예수 안에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즁꼬 고맙다"라는 야마모도 야에꼬의 작은 책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20여년전에 죽은 즁꼬라는 여인의 이야기 이지요. 저자는 즁꼬의 어머니입니다. 즁꼬는 난산으로 제왕절개 수술을하여 이 땅에 태어났고 그 때 상처로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계속 낳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즁꼬의 동생을 보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는 즁꼬에게 무서운 애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즁꼬는 대학시절 멋진 남자 노부 유끼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만 첫 아이를 가진 7개월 만에 남편은 방광암, 즁꼬는 위장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가족들은 절망감에 목을 놓아 울었고 즁꼬의 어머니는 몽유병 환자처럼 거리를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병상에서 즁꼬는 예수를 영접했고 남편은 물론 양가족이 모두 주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이때부터 이들의 기도는 처절하기까지 했고 금식, 철야, 절규, 통곡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즁꼬와 남편은 서로 번갈아 가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자기 몸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서로를 간호합니다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병상에 누워 애절한 사랑을 주고 받습니다. 처절하기까지 한 기도를 나눕니다. 읽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뭉클하게 만드는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통증으로 새우등처럼 꼬부라져 몸부림하면서도 "착한 아내를 살려주세요" 기도하는 남편은 우리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듭니다. 핏덩이를 쏟아가면서 "하나님 남편 좀 살려 주세요" 애원하는 여인의 모습은 글을 읽는 이들의 눈물을 자아내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6개월 간격을 두고 친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겨놓은 채 천국으로 함께 떠나갑니다.
정말 순수하게 살다간 그들의 기도 중에 이러한 마지막 내용이 나옵니다. "내겐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이 땅에 머무는 것이나 천국에 가는 것이나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 당신의 뜻입니다. 주 예수님,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신뢰합니다. 하나님 나는 세상의 모든 의료를 기대할 수 없어 당신 앞에 돌아갑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두 사람은 가족과 목사님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구절을 부를 때에 그 찬송을 입에 머금은 채 가족을 위로하고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저들의 죽음이 도리어 얼마나 인생을 빛나게 하고 있습니까? 저들의 죽음이 도리어 얼마나 그 사람들을 순수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도리어 저들의 죽음이 얼마나 큰 감동을 남겼습니까?
V. 맺으며
환경이 여러분들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까? 사람중에 그 누가 여러분의 행복을 앗아가고 있습니까? 죽음이 여러분의 기쁨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그 모든 것들을 뒤집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뒤집기의 명수이니라" 사도 바울은 환경 뒤집기 선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관계 뒤집기 선수였습니다. 바울은 죽음과 유한성 뒤집기 선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1. 이 시간 여러분이 처한 환경이 무엇입니까? 그 환경을 뒤집어 선으로 바꾸어 승리하십시오.
2. 어떤 인간 관계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까? 뒤집어 보십시오. 모두 친구요 한 가족인 것을.
3. 당신의 두려움과 공포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질병이 두렵습니까? 죽음이 두렵습니까? 주의 능력과 힘으로 뒤집어 살아가십시오. 내가 연약할 때 도리어 주께서 강하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