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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의 기도하는 집 (막11:15-18)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대부분의 국민들도 그랬겠지만, 아프간 문제로 거의 모든 시간과 생각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량한 인질들이 극도의 고통과 두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장에 그리로 달려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싶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사실 샘물교회의 박은조 목사님과 그리로 함께 가자는 말을 나누었고 그렇게 하자고 합의를 했습니다. 물론 아직 까지 정부로부터 허락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겸허한 자세를 지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태는 단순한 인질 사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운명과 깊이 연결되고 나라의 운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조소와 공격의 글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만약 이번 사태가 불행한 결과로 끝난다면 반미 감정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의 감정이 폭발할 것입니다. 나라는 극도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양극화는 극도에 달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겸허한 자성과 처절한 회개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고 눈물과 희생의 제물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사이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 인질을 살려주시옵소서. 저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아프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미국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럴 때마다 저의 가슴과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오늘 아침에는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아마 우리 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축복은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 일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일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아마 우리 죄인들에게 있어서 또 하나 가장 놀라운 축복은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나 뵈오면서 하나님께 음성으로 아뢰는 일일 것입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후 음성으로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대하6:19).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 곳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고, 그리고 하나님께 음성으로 아뢰는 곳입니다. 특별히 위기에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음성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랬고 히스기야 왕이 그랬고 길선주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 곳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음성으로 아뢰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선지자 이사야도 오래 전에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 오늘 아침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첫째,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두 해 여름 뉴욕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뉴욕 번화가에 있는 유명한 선물 판매 상점에서 판매원(sales man)의 일을 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서 가지 각색의 선물을 파는 일이었는데 아주 재미 있었고 아주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배운 한 가지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판매원(sales man)의 판매 술(sales talk)에 좌우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좋은 인상과 친절한 말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여자 손님들은 거의 100% sales man의 말 즉 sales talk 에 좌우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sales talk 하는 것이 너무 재미 있었고 물건을 많이 파는 것이 너무 재미가 있었습니다. 손님들에게 자기 나라 말로 인사를 하면 그들이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상점에서 손봉호 박사와 마루야마 박사와, 김영익 목사와 함께 일을 했는데 제가 물건을 제일 많이 팔았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이야기 하려는 것은 뉴욕의 유명한 선물 상점에서 물건들을 잘 팔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우리가 맨하튼에 있는 한인교회 건물 지하에 방을 얻어 함께 지내고 있었고 주일마다 그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교회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기 보다는 만민의 교제하는 집 같이 보였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국 땅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한인들이 일요일 마다 함께 모여서 교제하고 음식을 나누면서 좋아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교회가 예배와 기도의 장소라기 보다는 교제와 사교의 장소 같이 보인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주일 광고 시간에는 아무 날 아무 곳에서 댄스 파티가 있다는 광고까지 했습니다. 교제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 인간적인 교제만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인 예배와 기도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뉴욕뿐 아니라 서울 안에도 사업적인 관심 때문에, 정치적인 관심 때문에, 동향인의 관심 때문에, 또는 다른 어떤 인간적인 관심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도 제대로 된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업적인 관심 때문에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시고 무섭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 곳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보아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들을 그들에게 팔았을 때 너무 비싸게 팔아서 폭리를 챙긴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당하게 이익을 챙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업적 목적으로 성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11:15-17).
교회는 물론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장소이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장소입니다. 사실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서 음성으로 아뢰면서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에게만 그것도 제한된 시간에만 주어졌던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과 성령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므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를 가로 막았던 성전의 휘장을 찢어 없애셨습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 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23:44,45).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죄인들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키므로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5,16).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고 누구나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그 시작부터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을 썼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행복한 신자는 주의 집에 거하는 신자이고 기도의 대로가 활짝 열려있는 신자라고 시편 84편이 기록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4,5).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말은 그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기도의 길이 활짝 열려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이 교회에 모일 때 기도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런 신자들은 올바른 신자들도 아니고 행복한 신자들도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도의 길이 넓게 열려 있다가 시간에 지나감에 따라서 기도의 길이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시간에 지나감에 따라서 새벽기도를 아예 중단하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면 마음에 뜨거움이 있고 가슴에 눈물이 흐르다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이 사라져 버리는 불행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기도의 길이 놓여지지도 않고 기도의 길이 열리지도 않은 불행한 신자들의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눅18장에 보면 오히려 기도를 유창하게 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고 기도를 떠듬떠듬 회개하면서 했던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기도가 막힌 신자는 불행한 신자이고 기도가 열린 신자는 행복한 신자입니다. 기도에 정성을 기울이는 신자는 행복한 신자이고 기도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신자는 불행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나와서 기도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데서나 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장소인 교회에서 하는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7:15,16). 예루살렘 교회에 120명이 모여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안디옥 교회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금식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하는 신자는 행복한 신자입니다.
둘째,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백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만민의 집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입니다. 믿음이 많은 사람도 나올 수 있고 믿음이 적은 사람도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강변교회 교인들이 나올 수도 있고 다른 교회 교인들이 나올 수도 있는 곳입니다. 안흥규 장로님같이 오래된 신자도 나와서 기도할 수 있고 진덕순씨처럼 새로 나온 신자도 나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백두옥씨 오송자씨 백부기씨처럼 다른 교회 교인들도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입니다. 눅18장에 보면 바리새인도 성전에 올라왔고 세리도 성전에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마21장에 보면 소경과 저는 자들도 성전에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누구나 나올 수 있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흑인은 올 수 없고 백인만 올 수 있는 교회는 올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경상도 사람도 전라도 사람도 강원도 사람도 충청도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누구나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셋째,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를 바로 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감화 감동을 간절히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자기 생각대로 기도하면 욕심에 이끌려서 기도하게 되고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게 되고 사람들 들으라는 연설 같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기도하면 사람의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기도하게 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되고, 대화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기도를 하게 되고, 입의 말이 아닌 가슴의 말로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를 바로 하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예수의 이름은 지옥의 문을 닫고 천국의 문을 여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빽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과 다른 공로가 가미되면 그 기도는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기도를 바로 하려면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마다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요17:1).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22:42).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 기도의 마음이 열리게 되고 기도의 영이 통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라고 반복만 하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고 주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라고 부른 다음 기도의 내용을 대화식으로 아뢰었습니다. 기도를 제대로 하도록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려면 바른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회개하는 자세를 취하여야 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야 하고, 진솔한 자세를 취하여야 하고, 간절한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가 없는 기도를 받지 않으시고, 교만한 사람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진솔하지 않은 위선적인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간절하지 않은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벧전5: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기도를 바로 할 수 있는 비결 하나를 더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오래 전에 나겸일 목사님이 합동신학교에 와서 설교하시면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저는 그 내용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주 올바른 기도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찬양의 기도를 하면 기도가 잘 됩니다. 둘째로 감사의 기도를 하면 기도가 가볍게 하늘로 올라갑니다. 셋째로 회개의 기도를 하면 기도가 하나님께 직통합니다. 넷째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힘이 있게 됩니다. 다섯째로 자기를 위한 간구의 기도를 하면 그 기도는 저절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 즉 기도의 길이 열려 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막혔으면 그 대로를 다시 뚫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길을 다시 수축하여야 하겠습니다. 주의 집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핑계와 장애물과 싸워서 이겨야 기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시간은 새벽입니다. 물론 기도는 언제나 할 수 있지만 새벽에 나와서 하는 기도가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른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 계실 때 항상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가르친 것이 새벽마다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네 목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4). 우리의 목소리가 부드럽지도 못하고 우리의 얼굴이 아름답지도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나아와서 기도하는 우리들의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들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야 말도 하나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기도 드리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와 우리 한국교회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하여야 할 때이고, 아프간에 억류되어 있는 인질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 할 때이고, 아프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할 때이고, 미국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부어주십니다. 죄 사함과 병 고침을 받는 은혜도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게도 하시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우리들에게 다니엘의 기도를 주시고 사무엘의 기도를 주시고 예레미야의 기도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