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과 현주소  (롬6:15-18)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에 고멜이라는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주 음란한 여인으로 창녀촌에서 몸을 팔며 아주 자유분방하게 삶을 엮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선택한 또 하나의 삶의 방법인 줄만 알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어, 방법이 없어 하고 자신의 삶을 합리화 시키며 하루하루의 삶을 엮어갔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자신의 삶이 나중 어떤 대가를 지불하게 될지도 모른채 마치 내일은 몰라 오늘만 살면 되는거야 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몸을 팔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누가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도 그리고 인상이나 느낌을 보더라도 창녀촌에 드나들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거룩하게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 청혼을 받는 것입니다. 그냥 하룻밤이 아니라 평생의 동반자로 한 지붕아래서 살고 한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만 한다는 강력한 사명적 청혼 앞에 이 여인은 선택의 고민을 할 사이도 없이 결혼을 하여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자격 없는 여인은 너는 복 받은 줄 알라며 축복과 부러움의 시선을 많은 사람들에게 받았고 사실 자신도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남자와 결혼하여 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이었지만 여인에게 있어 그 결혼은 행복한 결혼이 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가정에서 거룩을 요구하는 삶에 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 자녀들까지 두었지만 사랑할 줄 모르는 여유가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행복하다 느낄 수 없는 결혼생활에 깊은 실의에 빠졌고 급기야 그 여인은 짐을 싸 환락가 아래의 여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또 남편이 찾아 온 것입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돌아 온 이 여인을 자녀들도 남편도 예전보다 더욱 사랑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몇해가 지나고 여인은 다시 환락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과거의 생활을 정리하지 못하고 이러한 일을 반복하는 이 여인에게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해 주시겠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그럴 수 없다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입니다. 어디에 순종하며 마음을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냐는 것입니다. 또는 너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될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특별하게 각색한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입니다.  

15절의 말씀에 대한 답입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입니다. 성도는 죄에 대한 승리자여야 합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의 안타까움은 여전히 죄 앞에서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또한 죄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파산된 여러분에게 아버지가 와서 공개적으로 빚을 갚아주었는데 여전히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고 자신 없어 한다면 이것이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는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는 영적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도는 죄 문제를 해결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에게 죄의 갈등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죄인 줄 모르는 사람과 죄를 죄인 줄 아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신앙 안에서 죄에 대한 갈등이 있음은 복음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움만 있을 때는 어두움이 어두움인 줄 알 수 없습니다. 빛이 올 때 어느 정도의 어두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빛이 우리 삶에 오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 갈등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린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히12:4절에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 까지 대항하여 싸울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들로서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 앞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넘어지는 것은 일어나기 위해 넘어지는 것입니다. 걷기 위해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승리자입니다. 십계명이 성도들에게 짐이긴 합니다. 시작부터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졌고 할 것 같은 것들에 대해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라는 것에만 신경 쓰고 살면 됩니다.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고멜이라는 여인이 거룩을 닮아가는 일에 갈등이듯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너 나은 거룩에 드려지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와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과 씨름하는 사람입니다. 14절은 무엇이라 합니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 하였습니다. 성도는 누가뭐라해도 자격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은혜아래 있는 성도의 확신은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12시 통금시간에 있을 때에 치외법권인 지역이 있었으니 경주, 제주도, 충청북도입니다. 경기도에서 놀다 통행금지시간에 장호원과 감곡을 잊는 다리가 있어 그 다리를 건너면 충청북도 즉 통금치외법권지역으로 들어가게 됨으로 경찰은 구속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이제는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이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은혜동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 안에 있다가 다시 율법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렇다면 죄를 지어도 문제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던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입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우리는 소유하고 싶어 하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두 큰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용납 될 수 없는 적수입니다. 마치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 누구든지 동시에 이 두 세력아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쪽 아니면 저쪽입니다. 요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으로 누구의 노예인가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누구에게 순종하던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첫째 큰 변화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이제 너희는 입니다. 거룩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은혜의 사람들입니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내게 있었음을 확실하게 정리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의 변화입니까? 소유권에 대한 변화입니다. 16절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간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질상 죄의 노예요 진노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외에게 될 수 없습니다. 목사의 자녀도 성인들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의 가능성을 지닌 중성으로 태어나진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를 선택해서 죄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선택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입니다. 여기에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했습니다. 이것을 원죄라 합니다. 인류는 본질 상 그런 존재입니다.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예수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시인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그대로 있으면 그대로 죽으면 영원한 어두움, 지옥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져다주는 무서운 국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하니 나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로의 변화입니다. 죄에 해방되어 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입니다. 사도들이 자신을 명칭 할 때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 이런 식 으로 예수의 사도와 종 됨을 선포하였습니다. 지금 나에 대한 정의나 확신이 있습니까? 나도 전에 죄의 노예였으나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노예요 의와 거룩의 노예이다. 이것이 우리를 참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라.

17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입니다. 들려온 진리 들려온 말씀 앞에 순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진리를 지적으로만 인정하는 것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전 인격적입니다. 지정의입니다. 만일 의지가 수반되지 않으면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사죄만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 하면서도 계속해서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만 같고도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의지가 필요합니다. 거룩을 거룩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이것이 원래 우리의 모습이라면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 하여는 들려진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들려온 말씀 즉 진리를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을 즉 순종으로 믿음과 순종의 동의어로 보시면 됩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이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삭이 더 대단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씀앞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순종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모습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순종을 요구합니다. 말씀에 잘 순종하는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갑니다.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철저히 배우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순종함을 배웠다 말씀합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순종하다보면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거룩과 씨름하며 거룩을 위해 드려진 사람들이 더 큰 은혜를 누립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말씀 앞에 순종하여 더 큰 은혜를 경험함으로 더 이상 죄와 법의 노예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의인되었음을 선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