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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 (출1:15~22) (디모데후서1:3~14 참조)
우리 민족은 참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이 많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이라든가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거리에 구세군 자선 냄비가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경기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 자선 냄비를 통한 모금은 항상 목표를 초과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만큼 정이 많다고 하는 좋은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이 많다는 것이 좋지 못한 면도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만큼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지는 민족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공정한 게임이 펼쳐지기 어렵습니다. 망국적인 지역 감정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가 남입니까?"라고 하는 출신 지역에 따른 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요즈음 무슨 무슨 게이트라고 하는 것들도 사실 알고 보면 없는 정을 뇌물을 주고서라도 억지로 만들려고 하다가 말썽이 생긴 것입니다.
주위에서 누군가가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우리는 대뜸 뭐라고 합니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즉 배후에 든든한 누군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리한 짓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그 믿는 구석이라는 것이 그다지 오랫동안 믿을 것이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믿는 구석이라고 할 수 있는 배후 인물과 함께 분수에 넘치는 무리한 짓을 저질렀던 장본인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모습을 요즘도 종종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많아지는 히브리 노예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 매우 과격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즉 히브리 노예의 가정에 태어나는 사내아이는 그 즉시 죽여버리도록 산파들에게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조치는 별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왕의 엄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산파들이 왕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왕도 두려웠지만 그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감히 왕의 명령을 거역한 산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과격한 조치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좀 더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태어나는 모든 사내아이를 강물에 던져서 죽이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 왕의 새로운 조치는 과연 성공했겠습니까? 어찌 보면 부분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된 말씀 즉 모세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사를 볼 것 같으면 왕의 조치는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태어난 아이가 매우 준수한 것을 보고 차마 강물에 던져서 죽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거의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겨서 길렀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더 이상 숨겨서 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강물에 띄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갈대 상자는 그 옛날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게 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의 목숨만은 살리려고 하는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과 정성이 담긴 갈대 상자는 강물에 띄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위험에 처한 그 아이를 건져낸 사람은 놀랍게도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누나 미리암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어머니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아이의 어머니 요게벳은 그 아이의 유모로 일하면서 그 댓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왕의 딸은 강물에서 건진 그 준수한 아이를 자기의 양자로 삼았고 아이에게 모세라고 하는 애굽 식 이름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 2장 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의 출생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도 하나님에 관한 말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세의 출생과 성장을 비롯해서 그 모세가 이끌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나타나고 드러난 것은 인간의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준비 과정부터 실행에 옮기는 것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을찌라도..... 모세라고 하는 한 아이의 구원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통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앞에서 인간의 그 어떤 계획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로서 특히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란 그 믿음의 대상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뢰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하반절) 그의 순수한 신앙은 단순히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체험에 의한 것만은 아닙니다.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딤후 1:3참조) 디모데도 역시 순수한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가정의 신앙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 신앙은 분명히 그의 조상들로부터 전승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비록 율법은 폐기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더욱 뜨겁게 달아올라야 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오늘 우리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도 마땅히 마음 속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그가 말하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신앙은 힘만 가지고서도 아니 되고 사랑만 가지고서도 아니 되며 근신하는 마음만 가지고서도 결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상호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바람직한 신앙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최고의 자질을 갖춘 목회자가 되기를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자라."(딤후 1:10)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말을 사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우리 인간이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영원한 참 생명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우리 주님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또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아름다운 것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딤후 1:14참조) 여기서 아름다운 것이란 다른 말로 선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복음을 지키는 것이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임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복음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자기 책임을 다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는 자라야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구원하는 자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낭패와 실망만 안겨 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주님만 믿고 그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복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그 인도하시는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것을 결단하는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