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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1-4
철학자[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냉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미모의 여인으로부터 계속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확신에 찬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칸트의 마음이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여인이 하루는 칸트에게 분명한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칸트가 간단하게“생각해 보겠습니다.”그리고는 그 후로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대한 책들을 모두 뒤졌습니다. 결혼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고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여인의 아버지에게 칸트가 말했습니다.“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한 결과 당신의 따님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그랬더니 돌아 온 대답은“너무 늦었네.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네.”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가슴으로 느껴야할 것을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슴이 차가운 사람들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모릅니다. 사랑은 논리보다 감성이 앞선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사건이 결혼입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 동기가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의 애인이 좋아져서 가로채기 결혼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밥 먹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결혼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는 모습에 반한 사람, 걸음걸이에 반한 사람, 목소리에, 뒷모습에.....모두 다 결혼의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해서 살고 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한결 같은 대답입니다. 무엇일까요?“그때 내가 눈이 삐었었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게 좋았습니다. 팔자걸음도, 비뚤어진 입도 심지어는 코 푸는 모습까지도.... 이게 뭡니까? 바로 감정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것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 그를 사랑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분명 사랑은 논리가 아닙니다. 밥 먹는데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걸음걸이에 오묘한 논리가 숨어 있나요? 아니거든요. 또한 사랑은 이론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50대50이어야 된다거나, 30대70이어야 한다는 비율의 이론들은 사랑에는 성립되지 않는 말들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내 감정의 전부를 주는 것이 사랑이요 여기에서 곧 행복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왜 결혼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답은 맞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애매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동기를 전적으로 피차가 각각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만 생각하면 자칫 상대방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잘못 되는 것이 수단은 길들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부부들은“다홍치마 때 잡아야 된다.”,“신혼 초에 잘 길들여야 된다.”는 요상한 논리 때문에 결혼하면서부터 많은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던 행복이 이루지지 않을 때 헤어지자 하고 아주 쉽게 갈라서 버립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얼마나 높습니까? 요즘은 황혼 이혼도 늘어가고 있답니다. 결국은 몇 십 년을 살아봐도 내가 원하는 행복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결혼의 목적이 문제요, 행복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합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결혼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불편을 잠깐 참고 희생하면 배우자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더 풍성한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사랑이요, 결혼이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결혼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모든 진리는 역설적입니다.“죽으면 살고, 나누면 부해지고, 섬기면 지도자가 되고, 버리면 얻는다.”이 진리는 교회생활에서 뿐이 아니고 가정생활과 부부생활 모든 곳에 다 적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가정사역학회장]인<주수일>씨가“행복해지기 위해선 먼저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현대인의 이혼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성격이 맞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포기란 있을 수 없다는 이기심에서 생겨 난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행복은<누구를 만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만났는가!>가 아니라<어떻게 좋은 배우자가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행복한 부부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꾸준히 뜻을 맞추고, 목표를 일치시키기 위한 부단한 자기희생 속에 살아가면서 마침내 불만을 감사로 바꾸며 사는 사람들이 부부입니다.
여러분, 결혼반지는 왜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2천년도 더 된 서양의 전통에서 나온 얘깁니다. 넷째 손가락을 약지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넷째 손가락에 심장으로 직접 이어지는 신경이 있다고 믿었기에 이 손가락에 의미를 둡니다. 그리고 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는 의식은 독립의 포기와 순종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원래 넷째 손가락은 구조상 모든 손가락 중에 가장 독립성이 적은 손가락입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실험을 해보십시오. 다른 손가락은 잘 펴지지만 넷째 손가락만은 홀로 서기가 무척이나 힘들고 펴진다 해도 완벽하게 펴지지 않습니다. 넷째 손가락의 이 비 독립성을 서로에게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의식이 바로 결혼반지를 약지에 끼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왼손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왼손이 오른손에 비해 보다 연약하고 오른 손이 하는 일에 보조적이고 순종적이어서 서로에게 종속적인 역할에 적합하다는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 반지를 끼는 순간부터 나 혼자를 위해 살지 않고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서로를 위해 삽시다하는 다짐입니다.
그런데 현대라는 시대의 특징은<불확실성>입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부부가 내일의 남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세상이 현대입니다. 그야말로<불확실한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대의 가정은 가정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현대의 가정에는 아내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이다.”여러분,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가 있을 때 비로소 가정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만 있으면 가정이 아니라 동거일 뿐입니다. 가정에 아내와 남편이 없으니 아빠와 엄마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 무너져 내린 가정에서의 아이들은 동거남과 동거녀 사이에서 출생과 존재의 혼돈을 겪으며 자라고 있는 불쌍한 아이들이 되는 셈입니다. 참된 의미의 부모를 잃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그래서 먼저는 가정을 회복해야합니다. 특히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을 찾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참 행복한 부부입니다. 누굽니까? <브리스길라>와<아굴라>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참 이상적 결혼생활을 이루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소개되는 데 언제나 부부의 이름이 함께 소개됩니다. 바울이 세 번 소개하고, 누가가 세 번 소개하는 참 건강한 부부입니다.(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행 18:2, 18, 26)이들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유태인 추방령에 의하여 강제 이주를 당해 고린도까지 쫓겨 오게 됩니다. 이들은 천막제조기술을 가진 집시 상인이었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도시인 로마에 가서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졸지에 보따리를 싸고 만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업 터를 잃고 떠돌이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낯선 외지인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고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이릅니다. 사실 그들이 하던 천막 제조업으로 굉장히 거칠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둘이서 함께 힘써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같이 앉아서 늦은 밤까지 바느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나섭니다. 사업과 돈버는 목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인생의 비전이 거시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노후를 생각해서 돈을 악착 같이 벌어야 하고,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가지고 살아야 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과 같은 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을 만나고 그 속에 복음이 들어가자 달라진 것입니다. 사업의 목적, 돈 버는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목적마저도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가면 자기들도 거기 가서 장사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합니다. 어디든지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바울보다 먼저 하나님과 그 사역을 위해서 로마에 들어가 세계 선교의 비전을 함께 이룹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는 어떤 부부일까요? 저는 예수 믿지 않는 부부들에게 묻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 부부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부부가 가장 행복한 부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의 <브리스길라>와<아굴라>부부가 그랬습니다. 롬 16:3,4절을 보면 그들은 목숨 바쳐 헌신하는 교회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개척초기였기 때문에 아예 자기 집에서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소개하는지 보십시오.“나의 동역자”라고 자랑스럽게 부릅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헌신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참 간단한 공식으로 전개됩니다. 그것은 곧 헌신하는 만큼 성숙하고, 성화됩니다.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께 고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아무리 좋은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헌신하지 않는 한 결국 무용지물이 됩니다. 건강, 재물, 재산, 재능, 실력, 사회적 신분, 수준 높은 학력과 지식, 기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독교는 가정적 종교입니다. 창1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주례하셔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가정 되게 하시는 창조 역사의 클라이맥스(Climax)가 나옵니다. 모든 창조 역사가 마지막에 가정을 이루는 데 핵심을 두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맨 처음 이적을 나타내시고 찾아가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혼인잔치 집에 찾아가셔서 축복하신 것이 예수님 행하신 이적의 첫 번째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선택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현대의 슬픔은 사람마다 가정을 떠나서 행복을 찾기도 하고, 부부의 관계를 벗어나서 기쁨과 향락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독신주의에서 자유를 찾으려 하고, 방종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 사랑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일에서, 남이 봉사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봉사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란 신앙 위에 맺어져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부란 아주 간단합니다.“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것으로 끝입니다. 설교 초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은 이것 때문에 만나고 저것 때문에 만나고, 취미가 어떻고, 지식이 어떻고, 수준이 어떻고...별소리를 다 해봐야 죽을 때까지 맞추어도 못 맞춥니다.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른 조화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맞출 수 있는 것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신앙입니다. <브리스길라>와<아굴라>부부처럼 신앙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둘이 마주 보고 서로 자기의 욕구를 상대방을 통해서 충족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부부란, 둘이 한 방향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한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것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신앙적 가치, 신앙적 목적입니다. 모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된 여러분은 이 신앙적 가치관을 잘 지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들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철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철학자[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냉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미모의 여인으로부터 계속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확신에 찬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칸트의 마음이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여인이 하루는 칸트에게 분명한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칸트가 간단하게“생각해 보겠습니다.”그리고는 그 후로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대한 책들을 모두 뒤졌습니다. 결혼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고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여인의 아버지에게 칸트가 말했습니다.“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한 결과 당신의 따님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그랬더니 돌아 온 대답은“너무 늦었네.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네.”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가슴으로 느껴야할 것을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슴이 차가운 사람들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모릅니다. 사랑은 논리보다 감성이 앞선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사건이 결혼입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 동기가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의 애인이 좋아져서 가로채기 결혼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밥 먹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결혼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는 모습에 반한 사람, 걸음걸이에 반한 사람, 목소리에, 뒷모습에.....모두 다 결혼의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해서 살고 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한결 같은 대답입니다. 무엇일까요?“그때 내가 눈이 삐었었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게 좋았습니다. 팔자걸음도, 비뚤어진 입도 심지어는 코 푸는 모습까지도.... 이게 뭡니까? 바로 감정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것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 그를 사랑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분명 사랑은 논리가 아닙니다. 밥 먹는데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걸음걸이에 오묘한 논리가 숨어 있나요? 아니거든요. 또한 사랑은 이론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50대50이어야 된다거나, 30대70이어야 한다는 비율의 이론들은 사랑에는 성립되지 않는 말들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내 감정의 전부를 주는 것이 사랑이요 여기에서 곧 행복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왜 결혼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답은 맞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애매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동기를 전적으로 피차가 각각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만 생각하면 자칫 상대방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잘못 되는 것이 수단은 길들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부부들은“다홍치마 때 잡아야 된다.”,“신혼 초에 잘 길들여야 된다.”는 요상한 논리 때문에 결혼하면서부터 많은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던 행복이 이루지지 않을 때 헤어지자 하고 아주 쉽게 갈라서 버립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얼마나 높습니까? 요즘은 황혼 이혼도 늘어가고 있답니다. 결국은 몇 십 년을 살아봐도 내가 원하는 행복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결혼의 목적이 문제요, 행복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합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결혼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불편을 잠깐 참고 희생하면 배우자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더 풍성한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사랑이요, 결혼이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결혼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모든 진리는 역설적입니다.“죽으면 살고, 나누면 부해지고, 섬기면 지도자가 되고, 버리면 얻는다.”이 진리는 교회생활에서 뿐이 아니고 가정생활과 부부생활 모든 곳에 다 적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가정사역학회장]인<주수일>씨가“행복해지기 위해선 먼저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현대인의 이혼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성격이 맞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포기란 있을 수 없다는 이기심에서 생겨 난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행복은<누구를 만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만났는가!>가 아니라<어떻게 좋은 배우자가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행복한 부부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꾸준히 뜻을 맞추고, 목표를 일치시키기 위한 부단한 자기희생 속에 살아가면서 마침내 불만을 감사로 바꾸며 사는 사람들이 부부입니다.
여러분, 결혼반지는 왜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2천년도 더 된 서양의 전통에서 나온 얘깁니다. 넷째 손가락을 약지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넷째 손가락에 심장으로 직접 이어지는 신경이 있다고 믿었기에 이 손가락에 의미를 둡니다. 그리고 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는 의식은 독립의 포기와 순종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원래 넷째 손가락은 구조상 모든 손가락 중에 가장 독립성이 적은 손가락입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실험을 해보십시오. 다른 손가락은 잘 펴지지만 넷째 손가락만은 홀로 서기가 무척이나 힘들고 펴진다 해도 완벽하게 펴지지 않습니다. 넷째 손가락의 이 비 독립성을 서로에게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의식이 바로 결혼반지를 약지에 끼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왼손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왼손이 오른손에 비해 보다 연약하고 오른 손이 하는 일에 보조적이고 순종적이어서 서로에게 종속적인 역할에 적합하다는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 반지를 끼는 순간부터 나 혼자를 위해 살지 않고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서로를 위해 삽시다하는 다짐입니다.
그런데 현대라는 시대의 특징은<불확실성>입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부부가 내일의 남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세상이 현대입니다. 그야말로<불확실한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대의 가정은 가정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현대의 가정에는 아내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이다.”여러분,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가 있을 때 비로소 가정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만 있으면 가정이 아니라 동거일 뿐입니다. 가정에 아내와 남편이 없으니 아빠와 엄마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 무너져 내린 가정에서의 아이들은 동거남과 동거녀 사이에서 출생과 존재의 혼돈을 겪으며 자라고 있는 불쌍한 아이들이 되는 셈입니다. 참된 의미의 부모를 잃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그래서 먼저는 가정을 회복해야합니다. 특히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을 찾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참 행복한 부부입니다. 누굽니까? <브리스길라>와<아굴라>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참 이상적 결혼생활을 이루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소개되는 데 언제나 부부의 이름이 함께 소개됩니다. 바울이 세 번 소개하고, 누가가 세 번 소개하는 참 건강한 부부입니다.(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행 18:2, 18, 26)이들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유태인 추방령에 의하여 강제 이주를 당해 고린도까지 쫓겨 오게 됩니다. 이들은 천막제조기술을 가진 집시 상인이었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도시인 로마에 가서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졸지에 보따리를 싸고 만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업 터를 잃고 떠돌이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낯선 외지인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고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이릅니다. 사실 그들이 하던 천막 제조업으로 굉장히 거칠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둘이서 함께 힘써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같이 앉아서 늦은 밤까지 바느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나섭니다. 사업과 돈버는 목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인생의 비전이 거시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노후를 생각해서 돈을 악착 같이 벌어야 하고,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가지고 살아야 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과 같은 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을 만나고 그 속에 복음이 들어가자 달라진 것입니다. 사업의 목적, 돈 버는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목적마저도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가면 자기들도 거기 가서 장사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합니다. 어디든지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바울보다 먼저 하나님과 그 사역을 위해서 로마에 들어가 세계 선교의 비전을 함께 이룹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는 어떤 부부일까요? 저는 예수 믿지 않는 부부들에게 묻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 부부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부부가 가장 행복한 부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의 <브리스길라>와<아굴라>부부가 그랬습니다. 롬 16:3,4절을 보면 그들은 목숨 바쳐 헌신하는 교회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개척초기였기 때문에 아예 자기 집에서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소개하는지 보십시오.“나의 동역자”라고 자랑스럽게 부릅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헌신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참 간단한 공식으로 전개됩니다. 그것은 곧 헌신하는 만큼 성숙하고, 성화됩니다.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께 고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아무리 좋은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헌신하지 않는 한 결국 무용지물이 됩니다. 건강, 재물, 재산, 재능, 실력, 사회적 신분, 수준 높은 학력과 지식, 기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독교는 가정적 종교입니다. 창1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주례하셔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가정 되게 하시는 창조 역사의 클라이맥스(Climax)가 나옵니다. 모든 창조 역사가 마지막에 가정을 이루는 데 핵심을 두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맨 처음 이적을 나타내시고 찾아가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혼인잔치 집에 찾아가셔서 축복하신 것이 예수님 행하신 이적의 첫 번째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선택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현대의 슬픔은 사람마다 가정을 떠나서 행복을 찾기도 하고, 부부의 관계를 벗어나서 기쁨과 향락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독신주의에서 자유를 찾으려 하고, 방종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 사랑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일에서, 남이 봉사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봉사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란 신앙 위에 맺어져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부란 아주 간단합니다.“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것으로 끝입니다. 설교 초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은 이것 때문에 만나고 저것 때문에 만나고, 취미가 어떻고, 지식이 어떻고, 수준이 어떻고...별소리를 다 해봐야 죽을 때까지 맞추어도 못 맞춥니다.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른 조화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맞출 수 있는 것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신앙입니다. <브리스길라>와<아굴라>부부처럼 신앙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둘이 마주 보고 서로 자기의 욕구를 상대방을 통해서 충족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부부란, 둘이 한 방향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한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것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신앙적 가치, 신앙적 목적입니다. 모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된 여러분은 이 신앙적 가치관을 잘 지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들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철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