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부부   (마태복음 5:31~32)

우리가 세상에 나와서 죽을 때까지 칠,팔십년 사는 동안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의 수가 모두 얼마나 될까요? 아무도 계산해 본 일은 없겠지만 아마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의 만남이 마치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의미 없이 그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만남은 세상에서 흔히 쓰는 말로 숙명적인 만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숙명적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섭리적인 만남, 나의 한 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단 한번의 만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섭리적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람과 만나도록 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런 섭리적인 만남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을 하나 뽑으라고 하면 부부가 된 남녀의 만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막상 결혼해 놓고 한 십년 이십년 살면서 생각하면 그때 무슨 파티자리에서 만난 것이 이렇게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구나 하고는 감격하기도 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혼합니다.

결혼 하면 부부가 된 사람들이 끼워야 할 첫 단추가 있습니다. 부부의 알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9장 6절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첫 단추입니다. 우리는 사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했다고 늘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서, 내 눈에 들어서 내가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유 선택 배후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나와 누구를 만나게 함으로 짝지워야겠다는 계획입니다. 그 계획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한걸음 한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수십만 명 되는 총각 중에 어느 사람 하나와 그 수십만 명 되는 처녀 중에 어느 사람 하나가 그렇게 서로가 만나는 것은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서 만나게 한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났다고 일이 됩니까? 남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자기 눈에는 굉장한 사람으로 들어온단 말입니다. 이것도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소위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습니까? 그것이 다 인연이 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인연이 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짝지워 주시려고 각본을 짜 놓으셨기 때문에 내가 그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려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이 짝지워 주셨다는 것은 부부의 알파요, 첫 단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의 오메가요, 마지막 단추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만나게 하시고 부부가 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짝지워 주셨고 허락 없이 나눌 수 없다고 하는 이 틀 속에서 둘이 만나 한 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절대 명령, 절대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외 단서나 예외 조항이 따라다닐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십계명에 명시된 중요한 계명입니다. 여기에는 예외 단서가 없습니다. 누구는 죽여도 좋고, 누구는 안 죽여도 좋고, 누구는 반쯤 죽여라. 이런 예외 단서가 없습니다. 무조건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이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도 예외 단서가 붙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엄숙한 명령이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혼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달아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남자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들려 내보내라. 그리고 그 여자는 나가서 또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절대로 나누지 못한다고 해놓으시고 예외 조항을 붙이신 것입니다. 수치되는 일이 있어서 마음이 별로 달갑지 않으면 여자를 내보내라. 그 당시는 여자를 데리고 사느냐 내보내느냐 하는 모든 권한이 남자에게 있었기 때문에 남자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수치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참 애매모호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5장 32절에 보면 이 수치되는 일을 음행하는 일로 해석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는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 음행한 문제가 생기면 즉 부부가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고 성적으로 탈선을 하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단서 조항을 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성적 탈선, 즉 정절을 어기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해석하셨습니다.

서신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도 이혼의 조건이기 때문에 아마 수치스러운 일에 포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여자가 갈리거든 즉 나누어 지기를 원하면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로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래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꼭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져라. 믿지 않는 부인이 꼭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져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불신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가진 사람은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초대교회의 사정을 아시겠지만 그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과 바꾸는 것입니다. 핍박 받는 때입니다. 대부분 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는 노예나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짓밟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먼저 영접했습니다. 어느 가정에 부인이 먼저 예수 믿고 거듭나서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뺏겼다고 합시다. 남자가 보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만 믿으라고 경고합니다. 그래도 부인이 말을 안 듣습니다. 생명을 걸고 믿겠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그러면 드디어 남편과 부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남자가 자기 말 안 듣자 나중에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집에서 쫓아내기도 하고 야단 법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가 도무지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바울이 염두에 두고, 남자가 자기와 도저히 살 수가 없다 하고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면 이혼하라고 이야기입니다. 또 반대로 남자가 예수를 믿었는데 여자가 죽어도 안 믿겠다고 하면서 집에만 들어오면 바가지를 긁습니다. 저녁에 들어올 때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 주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날마다 생활이 지옥처럼 변한다면 그것 때문에 정상적인 신앙생활 못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나누어지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몇 가지 사연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다시 한번 가슴에 느낍니다. 사람이 절대 나눌 수 없느니라. 하고 엄하게 말씀해 놓으시고는 그 다음 이런 이런 경우는 나눌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달아 놓으셔서 탈출구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부족함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이처럼 배려를 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다시 한번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부부가 있습니다. 남자가 보기에 여자가 좀 수상한 것 같은데 증거는 없습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것 같고 다른 누구와 좋아하는 것 같고 소문에 의하면 여자가 바람을 피웠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증거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 되면 남자가 이제는 얼굴 표정을 바꾸지 않겠습니까? 자주 싸움을 하고 나중에는 폭력을 행사하고 집안에서 나 죽는다. 하는 비명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혼을 하면 안 된다. 만약 이혼을 하면 사형이다. 하고 하나님께서 못을 박으시고 절대로 탈출구가 없도록 만들어 놓으셨다면 이 남자와 여자는 이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자는 결국 온몸이 성한 곳 없이 죽어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지경이 되어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최악의 경우는 이혼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힌트를 주시고 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아시고 마련해 두신 이런 예외 조항을 악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나누어지라고 해 놓자, 얼씨구나 좋다. 하고는 유대인들은 이 수치스러운 일을 코에 갖다 붙이면 코걸이 귀에 갖다 붙이면 귀걸이 식으로 해석하여 제 맘대로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남자들이 여자를 쫓아내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어떤 남자는 음식을 짜게 만들었다고 아내를 쫓아내 버리고, 어떤 남자는 밥을 태웠다고 쫓아내고, 어떤 남자는 남 앞에서 남편에게 면박을 주었다고 쫓아내 버렸습니다. 심지어 랍비 아키바와 같은 사람은 데리고 살던 여자보다도 더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여자가 생기면 아내를 갈아치우라고 가르쳤습니다.

남자들이 이렇게 여자를 쫓아내면서 성경에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한대로 이혼 증서를 써 주었습니다. 이혼 증서 하나 써 주는 것을 놓고 큰 선심을 쓰는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이혼 증서를 안 써주고 쫓아 낼 수도 있지만 여자에게 신분증이 되기 때문에 써 준다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는 이제 홀몸이라는 신분 증명서가 되어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될 때도 신분 증명서가 되고, 혼자 살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재판석에서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있는 신분 증명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 큰 선심 쓰는 줄로 알고 이것을 써 주면서 이혼을 제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의 상황이 이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비웃는 아주 잘못된 행위요, 짝지워 주시고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엄숙한 명령에 정면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함부로 이혼하는 자는 자기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보내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간음죄를 범하게 하고 또 그 여자와 만나는 남자로 하여금 간음죄를 범하게 하는 아주 무서운 잘못을 범하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특별히 성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는데, 정절을 잃어버렸다든지 하는 일이 없는데도 아내가 싫어서 그저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 보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렇게 하면 그 여자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여자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도 간음죄를 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적 문란 행위를 조장한다는 말입니다. 이혼하는 남자는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성적으로 문란하게 만드는 성적 문란을 조장하는 죄를 범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혼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책임을 져야 되는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당시 이혼 증서를 받고 집에서 쫓겨나가는 여자들은 갈 길이 세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인심 좋은 친척 집에 붙여 살면서 그 집의 하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혹은 눈에 드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도 평생 불량품으로 취급받는 것은 면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창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길로 가든지 이 여자의 앞날의 생각하면 쫓아낸 그 남자가 모든 영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됩니다. 주님이 이것을 지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수치되는 일이 있으면 이혼하라는 단서를 악용하여 막무가내로 여자들을 쫓아내자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말라기 2장 16절입니다. 나는 이혼하는 자를 미워하느니라.

여러분 오늘날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이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혼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제 위험수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어느 의사는 가족 제도를 폐지하자고 소리치고 나오는가 하면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는 어떤 여자 지도자는 지금까지 여성들을 노리개감으로 취급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여성들을 인간 대우하지 않았던 기존의 결혼 방식, 가정 제도를 완전히 말살시켜야 된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더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남자들이 쫓아냈지만 이제는 여자들이 남자를 쫓아낼 정도로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피터 드러커라는 미래학자를 아십니까? 이 사람은 미래의 조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자꾸 늘어나기 때문에 그와 함께 이혼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어서 지금은 최고 수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추세로 계속 나가면 미국 같은 경우에는 결혼한 가정 중에 반 이상이 이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들어와 미국의 통계가 이 사람의 예언이 적중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혼자보다도, 이혼하지 아니한 가정보다도 이혼한 가정의 수치가 앞선 것입니다. 엄청난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작년 통계에 의하면 하루 평균 이천 스물 여섯 쌍이 결혼하는데 그 가운데서 이백 쉰 다섯 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금년 수치는 어떤지 아십니까? 작년까지는 이혼율이 1/4이었는데 금년에는 1/3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즉 열 쌍 중 서 너 쌍은 이혼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조사를 근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도 이혼을 더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복음적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 근본주의적 혹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목에 핏대를 올리며 떠드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렇지 못한 교인보다도 이혼율이 6%나 더 높다고 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믿는 집안의 경우를 말씀드립니다. 얼마나 부자인지 모릅니다. 너댓 명 되는 그 집 식구들 한 사람이 매달 1억씩 써도 평생 다 쓸 수 없는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다가 예수 믿는 집안입니다. 그렇다면 좀 관용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참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한 1,2년 정도 살았나 봅니다. 이 여자가 자기 카드를 가지고 자기 옷 백 몇 십만원 어치인지를 백화점에서 샀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된 시아버지가 남의 집에 와서 재산 털어 먹으려고 한다면서 결국 아들하고 이혼을 시켜버렸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집안 중에서 이런 집안도 있습니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불가피한 사연도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대부분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극복하기가 싫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입니다. 또 반드시 극복해야 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지기 싫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입니다.

가정 법률 상담소의 자료를 보면 남자들이 주로 이혼하면서 대는 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격 차이가 너무 심해서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성격 차이가 너무 극단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 수 없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한 부부들은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성격 차이가 없는 부부가 어디 있습니까?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 똑 같은 성격이 어디 있습니까? 또 여자들이 이혼하면서 많이 들고 나오는 명분이 무엇인가 하면 폭력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잘못하는 것입니다. 어디 때릴 사람이 없어서 여자를 때립니까? 그 다음 또 하나 들고 나오는 이유가 가치관이 너무 형편없어서 같이 못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치관이 똑 같은 부부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구실이 될 수가 없는 것인데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이것을 구실로 해서 갈라서고 있습니다.

이혼이 증가하면 이혼하는 당자들이 겪는 정신적인 육적인 피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암이나 고혈압, 뇌졸증 등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병들이 생겨서 빨리 죽을 확률이 이혼자에게 훨씬 높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혼하면 설혹 자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담배를 매일 한 갑 이상 피우는 사람 만큼 발병률이 높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신 건강이 파괴됩니다. 백인 사회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의 25%가 이혼 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혼한 사람은 정신 병동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될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도 열 배로 높다고 합니다.

당자는 그렇다고 할 지라도 자녀들이 입는 정신적인 피해, 정서적인 황폐화를 우리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혼해서 결손이 된 결손가정의 자녀들이 범죄할 수 있는 확률, 사회적으로 범죄의 뿌리가 될 수 있는 확률이 정상적인 가정의 두 배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명령에 예외 조항이 있어도 그것을 최후 수단으로 사용해야지 잠깐 어려운 고통을 피하는 도피처로 사용하면 모두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도 망하고 자녀손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고 다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정말 행복한 나날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회의 앞날이 밝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노래하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올까요? 이런 식으로 나가면 비관적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깨지는데 거기에 어떻게 행복이 있고, 서로가 믿고 사는 사회가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짝 지어 주신 하나님의 본심은 나누어지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자식을 결혼시켜 놓고 살기 싫으면 한달 만에라도 그만 두라고 말하는 부모가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부모는 다 자식이 오래오래 잘 살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고 나눌 수 없도록 하신 이 부부 관계를 우리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소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갈 데까지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누가 살고 싶어 사나? 애 때문에 사는 거지. 하는 식으로 부부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이번에 송길원 스페셜을 보고 어떤 자매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차마 아이 때문에 엄두가 안 나서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갈라서자는 소리를 하루에 백번 해도 모자랄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 결혼 생활이라면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짝을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혼하신 부부들은 제가 들려 드리는 몇 가지 항목을 잘 들으시고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 청신호가 켜 있는지 적신호가 켜 있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따온 내용입니다. 결혼 생활의 위험 신호들은 이런 것들이라면서 몇 가지를 예를 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함께 둘이서 웃지 않습니다. 당신은 속 마음을 부부가 서로 털어놓기 보다는 친구를 더 많이 찾습니다. 당신은 부부 관계가 활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당신은 배우자가 보기 싫어 귀가를 꺼립니다. 당신은 의견 충돌이 생길 때마다 꼭 부부 싸움으로 번집니다. 당신은 배우자에게 잘 보이려고 몸치장을 아예 포기해 버렸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관심사나 사교 생활에 배우자를 끌어 들이려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항상 혼자 논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배우자에 관해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모조리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은 둘이 함께 살아 가야 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우울해 집니다.

이런 몇 가지 증세들 중에 한두 가지만 있어도 부부관계가 대단히 위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생각하십시오. 이런 정서의 분위기를 방치해 두면 서로 말문을 닫아 버리게 되고 나중에는 비난하게 되고 마음으로 경멸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자기 방어에 급급하여 너무나 살벌한 가정 분위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관계가 계속 누적되면 그 부부는 파탄에 이르고 맙니다. 결혼한지 7,8년 전후가 가장 위험하다고 합니다. 결혼한지 16년에서 20년 사이가 가장 위험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부부관계를 잘 점검하십시오. 조금이라도 이와 같은 적신호의 경고가 있으면 가만히 계시면 안됩니다. 위기 없는 결혼 생활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살다가 보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못살겠구나. 정말 이제 포기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옵니다. 그러나 강한 부부가 누구입니까? 이런 위기를 잘 극복하는 것이 강한 부부입니다. 훌륭한 부부 관계란 어떤 것입니까? 거의 끊어질 만큼 늘어나고 가늘어져서 이제는 안되겠다 싶을 때에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강한 부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요즘에 부부 농사 제대로 짓자는 표어를 걸고 좋은 남편 모임이 아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봅니다. 상당히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부부입니다. 나누어 질 수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누면 자기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별히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서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받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고치지 못하는 약점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더 좋은 것을 원해도 그 사람이 해 주지 못할 때는 해주지 못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수용입니다. 수용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완전한 배우자라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완전한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완전한 아내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끼리 만나 한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만났다고 완전해집니까? 아닙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평생 팔짱 끼고 불안정한 대로 걸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불안정하면서 남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고, 자기도 남에게 만족을 못 주면서 상대방에게 무조건 자기를 만족시키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기주의 중의 극단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역자들과 여름 수련회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바닷가로 갔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시간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교역자들이 일년 내내 스트레스 받고 일하다가 그렇게 쉬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습니까?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바닷가에 갔으니 우리 한번 고기나 낚으러 가자. 제가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고깃배를  찾아서 전세를 내기로 했는데 부두에 나가보니 조그마한 배들이 대여섯 척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긴 것이 다 비슷비슷합니다. 통통통통 소리를 내는 원시적인 배입니다. 그 배에 오륙 명이 타면 많이 타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이 전부 나누어 타야 되기 때문에 한 일곱 척 이상 나누어서 타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한 그 배들 가운데서 모양이 그래도 깨끗하고 잘 나갈 것 같이 보이는 배가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내가 헤드니까 그 배를 탔죠. 그러니까 이제 다른 교역자들도 몇 명 나하고 탔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역자들이 배를 나누어 타고 바다를 향해 나갑니다. 뭐 한 7분 정도 10분 정도 나가는데 내가 탄 배보다도 늦게 출발한 배들이 막 쌩쌩쌩쌩 하고 막 앞으로 달려가는 거야. 그러데 내가 탄 배는 나가지를 않아요. 소리만 텅텅텅텅 하고는 속도가 너무 느린 거요. 아이고, 화 나대요, 진짜. 옆에 지나가는 배들은 막 금방 저쪽으로 가는데 속으로 야, 이렇게 늦게 가 가지고 낚시 하는데 가서는 흉내도 못 내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안좋아요.

여러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 가지 대단이 있겠죠. 이 무슨 배가 이래? 겉으로는 멀쩡하면서 말이야. 타고 보니까 속도가 없어. 에이 안되겠다. 물에 빠져 죽자 하고는 내가 그냥 바다에 뛰어 들어요? 아니면 선장 목을 잡고 왜 속도가 안나간다고 팻말을 안 붙여 놓고 나를 속였느냐 뭐 이렇게 하고는 항의도 할 수 있겠죠. 아니면은 그 나보다도 먼저 막 달려가며 기분이 좋아 가지고 옆 배에 타고가는 교역자들이 손을 막 흔들고 이러는데 그것 쳐다보며 이를 뿌득 갈면서 그냥 분을 못 이겨 가지고 나 혼자서 그저 흥분하든지. 아니면은 털썩 주저 앉아 가지고 내 팔자 이 정도 밖에 알 수 없다 하고는 그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든지 하여튼 몇 가지 선택할 조건이 있어요. 그렇죠?

어느 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수용을 안하는 자세죠. 수용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늦게 가는 것도 좋은 점이 있어. 바다를 감상하는 것이 좋고 하늘을 감상하기 좋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가면 되는 거요. 그래서 우리 그 배에 탄 교역자들은 하늘도 쳐다 보고 바다를 쳐다 보고 그러면서 오늘 이렇게 좋은 시간을 주신 거 감사했어요. 먼저 가는 배 안봐요. 그냥 우리끼리 이렇게 뭐 좋아가지고. 그리고 뭐 찬송가도 부르고 낚시할 때 쓸 짐들 내 놓고 점검하고 뭐 이러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이런 식으로 배를 타고 갔어요.

그래 우리가 좀 늦게 도착했는데 가서 보니 다른 배는 낚시하느라고 야단인데요. 참 웃기는 것은 늦게 도착한 우리 배가 먼저 낚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우리가 더 많이 낚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배에 있는 교역자들이 뿔이 나 가지고 막 배를 타고 저리 갔다가 여기 갔다가.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죠. 정자 좋고 물 좋은 데가 없어. 배가 느리면 그대신 고기를 많이 잡느니라. 배가 쌩쌩 잘 나가면 고기를 못잡을 수도 있어. 그저 인생은 다 공평합니다. 그렇죠? 공평합니다.

내가 처음에 탁 볼 때 눈에 들어요. 야, 이쁘다. 정말 저 여자하고 살았으면 평생 한이 없겠다 하고는 결혼했는데 하고 나서 보니 속도가 느려. 성격도 느리고 음식을 해 오는데 맛도 없고 뭐 로맨틱할 것 같은데 무뚝뚝하고. 이거 참 곤란하죠.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야, 저 남자 같으면 내가 평생 의지할 만 하다 했는데 막상 결혼해 놓고 보니 버릇이 나빠 가지고 늦잠 자죠. 직장에 가서는 적응을 못해 가지고 혼자 조퇴하죠. 사람 미치게 만드네요.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좋아서 탄 배라 말이요. 어떻게 할 거요? 바다에 몸 던져요? 하나님이 짝 지어 주셨는데 무엇이 중요합니까?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카터 대통령에게 참 부인이 좋은 부인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두 사람이 종종 싸우는 원인이 하나 있었다고 그래요. 카터는 칼날 같이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래요. 약속을 하면 항상 1분 전까지는 가야 된대요. 절대 지각 하는 법이 없대요. 그런데 이 부인은 그걸 못따라가는 거요. 부인 버릇을 아니까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 되기 전부터 적어도 몇 십분 미리 막 가자고 부인을 설득해 가지고 뭐 이렇게 해서 시간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부인이 또 어디 그렇게 됩니까? 화장 하느라고 앉으면 이러다가 보면 오분 넘어가고 넘어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둘이서 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요. 그래 어느 땐가 부인 생일이었는데 남편이 카드를 쓰다가 가만히 생각 하니 부인이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못고치는 저 버릇 내가 수용해야지. 그러고는 카드에다 이렇게 썼답니다. 여보, 내가 오늘까지 당신 너무 많이 괴롭혔는데 지금부터 당신은 시간 지키는 면에 있어서는 자유하시오. 내가 당신 봐 드리리이다. 이래 가지고 카드 써 보냈대요. 부인이 그걸 받고 얼마나 좋아했던지 자주자주 이런 말을 한답니다. 당신이 나에게 준 가장 최고의 생일 선물, 시간 지키는 데서 자유해라.

그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못 고치는 상대방의 약점, 어떻게 할거요? 아무리 잘해 보려고 해도 상대방이 갖고 있는 한계점이 있지 않아요. 그거 받아 주는 거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짝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한 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행복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그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지 밖으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혼한 사람을 조사했더니 이혼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후회한다는 사람이 열 중에 여덟명입니다. 통계상. 뛰쳐 나오면 행복할 것 같죠? 천만에요. 그러므로 짝지어 주시고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우리를 위한 절대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좀 갔습니다만은 결혼식때 잘 부르는 찬송이 하나 있더라구요. 그 찬송 한번 불러봤으면 좋겠는데 자막이 아마 뜰거예요. 한번 불러 봅시다. 아내는 남편을 생각하고 남편은 아내를 생각하고. 또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은 미래의 아내를 생각하고 미래의 남편을 생각하면서 한번 불러봐요.

주께 두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춰 주소서. 오 주 우리 모든 허물을 보혈의 피로 씻기어 하나님 사랑 안에서 행복을 갖게 하소서. 서로 믿음 안에서 서로 소망 가운데 서로 사랑 안에서 손 잡고 가는 길. 오 주 사랑의 종 소리가 사랑의 종 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주께 두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주가 예비하신 동산에 항상 있게 하소서. 오 주 우리 맘의 새 빛이 어두움 밝게 하시어 진리의 말씀 안에서 늘 순종하게 하소서. 서로 참아주면서 서로 감싸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께로 가는 길. 오 주 사랑의 종 소리가 사랑의 종 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