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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순종 (창세기 12장 1~4절)
2002년도 한 해 동안도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와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 각 가정을 지켜주신 데 대하여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바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오늘 “아브라함의 순종”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는 성도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그보다 더 축복 받는 생활이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이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선거하는 날 저녁 내 생각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고, 우리 나라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보고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아 무릎꿇고 기도를 몇 시간 하고 났더니 이사야 55장 8~9절 말씀이 영음으로 들려 왔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과 방법은 우리 인간의 마음과 생각으로는 다 측량할 수도 없고, 왜 그렇게 행하시는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잠도 잘 수가 있었고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무조건 순종한 데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 일이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부모 형제들이 있고 땅도 있고 집이 있는 하란, 평안히 안일하게 살 수 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다 버리고 과감하게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목적지를 가르쳐 주면서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알면 그나마 순종하기가 쉬울텐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도 없이 무조건 다 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려면 이유 따지고, 이해득실을 계산해 보고, 자기 뜻에 맞아야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란에 정착하기 전에는 갈대아 우르에 살았는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본래 앗수르 족속이었는데 달을 숭배하고 우상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란에 살면서도 우상 장사를 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아버지데라가 죽자, 그 죄악된 장소 하란을 박차고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부모 형제들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형제들과 친척들이 붙잡으며 떠나지 말라고 하는데도 용감히 박차버리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큰 계획과 축 복을 가지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이런 엄청난 축복을 예비하시고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곳을 떠나지 않으면 이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큰 섭리와 계획이 성취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명령을 하실 때는 반드시 축복과 상급을 예비해 두시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운 명령일수록 그만큼 큰 복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얻을 것이다”는 말씀은, 그의 후손 가문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어 세계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떠나야 할 자리, 죄의 유혹을 받는 자리에서 과감히 떠나야 예비하신 축복을 받습니다. 시편 1편 1~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 순종하지 못하고 친척을 다 떠나라고 했는데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자식도 없으니 너무 허전했던 모양입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적인 불순종이 아브람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하게 했습니다. 훗날 아브람의 집 종들과 롯의 집 종들과 싸우고 다투는 일이 발생했고, 결국 롯은 아름다운 땅 요란들을 차지했고 아브람은 섭섭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순종할 바엔 100%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새해가 되려면 죄악된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19편 115절에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애굽을 떠나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엊그제 유귀진 장로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 믿고 은혜 받기 전에 술을 엄청 많이 마시고 담배를 하루 두 갑씩 피웠는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끊지 못하다가 청계천 전자제품 취급하던 자리를 떠난 다음에야 완전히 끊었다고 합니다. 떠나야 할 자리는 과감히, 손해가 나고 친구가 떨어져도 떠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준비한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2.“내어 쫓으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두 번째 어려운 명령에 순종한 것은, 여종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는 명령인데 이것도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는데도 100세가 가깝도록 주시지 않으니까 사라가 잔머리를 굴려서 고안한 것이, 여종들 중에 하갈이란 여자가 인물이 예쁘고 똑똑하니까 “내가 눈감아 줄테니까 당신이 동침해서 아들을 하나 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은 것이 “이스마엘”인데, 그 다음부터 후에 나은 이삭을 이스마엘이 괴롭히고, 여종 하갈이 주모 사라를 멸시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명령했습니다.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인하여 “깊이 근심하다가” 드디어 결단을 내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끊임없이 피 흘리고 싸우는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각을 잘못해서 범죄한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 하갈고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자기 아내 사라는 늙고 쭈글쭈글한 할머니인데 하갈은 젊고 싱싱한 여자이니 육신적으로 얼마나 사랑하고 정이 컷겠습니까? 이삭을 낳기 전에 처음으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으니 얼마나 정이 들고 사랑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인정사정 보지 않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참으로 순종하기 힘든 일인데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참으로 죄악된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서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죄악을 청산하지 않고는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해선 안됩니다. 목사로서 제일 입장이 곤란한 것은 죄악된 생활을 여전히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다고, 예배 봐 달라고 하고 축복 기도 해 달라고 할 때입니다. 더욱이 헌금도 두둑히 내놓고 책 사 보라고 목사한테 봉투를 내놓을 때, 집어던지고 나오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면 그나마도 교회에 안나올 것 같고 참으로 입장이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죄는 깨닫는 즉시 속한 시일 내에 끊어버리고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먼 미래에 불행을 막을 수가 있고 슬픔과 근심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잔꾀와 인간의 조급함 때문에, 인간의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촉진시켜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불화와 큰 근심과 슬픔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잘못된 생각이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피 흘리는 전쟁이 계속되게 한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 선거 후 생각하게 된 것은 이회창 후보가 두 번이나 대선에 패배하고 그를 지지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실망과 불안을 안겨준 원인이, 물론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만, 두 아들이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큰 결과를 가져올 줄 알았다면 군대에 나가서 죽는 한이 있어도 군대에 갔을 것입니다. 두 아들은 두고두고 부모에게 미안할 것입니다. 또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실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일수록 그의 죄와 불법은 크게 다루는 법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일수록,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불법과 죄악을 용서는 하되 그 죄의 대가를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치루는 법입니다. 알고 지은 죄가 그래서 무섭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심판이 없는 것은 사후에 무서운 심판과 형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가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1~32절에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큰 불행과 고통을 당하기 전에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끊고 돌아서야 합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악한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마음속에 죄악된 생각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했지 “행실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범죄케 할 때 생각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것쯤은 괜찮다고 합리화시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왕, 가장 큰 축복 받은 다윗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이 죄를 숨기려고 충성된 우리아 장군을 죽게 한 무서운 죄를 범하고 난 뒤 큰 고통과 슬픔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시편 32편 5~6절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더니 홍수가 범람하는 것 같은 환난과 시험이 닥쳐와도 다 막아낼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와 함께 축복도 같이 받으리라고 착각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잘못된 생활, 크리스찬으로서 합당치 못한 습관을 다 끊어 버립시다.
3. “독자를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명령도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세 번째 명령, 마지막 명령은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100세나 되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에 모래알과 같이 번창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주신 아들인데 번제로 잡아 바치라고 하니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핑계 대지 않고, 반항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3일 길을 가서 장작더미 위에 아들을 묶어 놓고 칼을 들이댔습니다. 이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 낳게 하신 하나님이 태운 재에서 다시 살리실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믿음으로 이미 결단을 내렸습니다.
창세기 22장 16~17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고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22장 1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일류 대학일수록 그 시험이 어려운 것 같이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어려운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아들을 바칠 각오를 했는데, 하나님은 산양을 준비해 두었다가 대신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시험해 보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큰 복을 주실 사람에게 보통 사람이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실 때가 있습니다. 제일 귀한 것, 제일 사랑하는 것, 하나밖에 없는 것, 내 생명과 같은 것을 바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그것은 안됩니다.” 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도 실망하시고 축복의 손을 거두시고 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정성을 표시하기를 원한다면 제일 첫 것(The First)을 언제나 바치기로 힘써야 합니다. 자기가 쓸 것 다 쓰고 나중에 드리는 것은 같은 양의 물질이라도 정성의 무게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잠언 3장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가장 좋은 것(The Best)을 드리도록 항상 힘써야 합니다. 마음에 큰 것, 중간 것, 제일 작은 것, 세 가지 생각이 들 때 언제나 제일 큰 것,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고 우리의 바치는 손길을 유심히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것(The Last)을 드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사르밧 땅의 과부가 마지막 두 식구의 생명과 같은 것은 것을 드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마지막 남은 생활비 전부를 드렸을 때 주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Benny Hinn 목사님은 그 마지막 남은 것이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축복의 열쇠가 되는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하는데, 제일 첫 번에 드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제일 새 돈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면 감사 헌금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거짓은 안 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것이라도 드리십시오. 굶어도, 빚을 져도 드리십시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헌금 생활 해보지 않으면 기적과 축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늘 간증하는 바이지만, 저희 가족이 피난 생활 때 십일조를 드리다 쌀이 떨어지면 못하고 또 하다간 못하다가, 하루는 일곱 식구가 굶으면서 십일조를 드렸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말라기 32장 10절을 꼭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체 십분의 일” 온전한 십일조로 드리면서 복빎을 받았습니다. 축복 받는 중요한 비결이 십일조 드리는 것입니다.
출처/김홍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