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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믿음 (마태복음 9:1-8)
은행에 가면 돈을 내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세히 보면 예금을 하기 위해서 돈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벌금을 내기 위해서 돈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돈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돈을 내지만 그 사람들의 기분은 전혀 다릅니다. 예금을 하고 적금을 넣기 위해서 돈을 건네는 사람은 보람이나 기쁨을 가지고 내겠지만 빚을 갚기 위해서 돈을 내는 사람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똑같은 돈 내는 일인데도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사는 그런 개념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 반 컵을 보고는 반 컵밖에 안남았구나 라고 탄식할 수도 있고 아직도 반 컵이나 남아 있다고 소망스럽게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회의 양면
에릭 프롬은 인간에 대해 깊은 분석을 한 사람인데 우리 안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는 사람은 죽음 지향적인 사람으로서 의식 속에 항상 좋지 않은 쪽으로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오필리아(Biophilia)라는 사람은 생명 지향적인 사람으로서 항상 좋은 방향으로 지향하는 정서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이오필리아 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환경이 부딪힐수록 더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수록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어려운 환경에서 더 기뻐하고 더 감사하고 더 잘되는 방향으로 발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크로필리아의 사람은 좋은 것도 전부 안 좋은 쪽으로 이끌어 갑니다. 정반대로 간다는 것입니다.
'Opportunity(기회)'라는 말로 이렇게 문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Opportunity is no where' 하면 기회는 아무 데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no 라는 단어 뒤에 장소를 말하는 where의 'w'를 떼어 붙이면 now가 됩니다. 그리고 뒤의 단어는 'here'라는 말이 됩니다. 'Opportunity now here' 기회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글자 한자만 옮겨 뒤로 붙여 버리면 기회는 아무 데도 없다는 말이 되고 앞에다 붙이면 기회는 지금 여기 있다는 말이 됩니다.
주어진 기회
본문 9장 1절에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라고 했습니다.
본 동네는 가버나움을 말합니다. 갈릴리 가운데 가장 큰 동네가 가버나움인데 예수님이 배를 타시고 건너서 가버나움에 갔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상당히 오시기 어려운 걸음을 하신 것입니다. 예사로 가버나움에 오신 게 아니고 배를 타서 건너야 하고 제자들도 타야 되며 또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갈릴리 바다를 춘천에 있는 의암호수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큰 바다입니다. 그래서 그 바다를 건너는 것은 제법 빠른 유람선을 타고도 근 사십분은 가야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밤새도록 노를 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가버나움에 가셨는데 이 중풍병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렇게 오신 것은 가버나움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가버나움에 중풍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가버나움에 지난밤에 배를 타시고 바다를 건너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침상에 누워있는 이 병자는 희망이 없습니다. 친척도 이웃도 동네사람도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는 사람인데 그 동네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지만 그 이웃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만 생각합시다.
첫째는 이 중풍병자에게 왔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저는 자라는 아이들에게 기회라는 의미를 잘 가르쳐 주어야 된다고 봅니다. 인생은 한 평생을 살면서 많은 기회를 만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정상적으로 공부하면서 자라는 학생들은 정말 큰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춘기 시절에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배우면서 자라는 그 자체만 해도 대단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청소년 시절에 기회라고 하는 이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기회를 잃어버리거나 기회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청소년기에 바로 배우고 바로 자란다는 자체가 기회입니다. 그 기회 안에 의미가 있는데도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청소년기를 지난 지는 상당히 오래됩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저에게 누군가가 기회에 대해서 일러주었더라면 더 효과적인 성장을 할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저도 여러 가지 기회를 양면으로 겪어 보았습니다. 시험 쳐서 낙방해 본 적도 있고 또 합격해 본 적도 있습니다. 또 선거에 나가서 낙방도 하고 당선도 되어 본 적도 있습니다. 이것 저것 다 겪어보았는데 그 가운데도 기회라는 의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낙방이나 불합격이 기회의 상실이 아니라 또다른 인생의 기회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어떻게 보면 기회를 잃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기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지금 기회가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절망의 사람, 도저히 기회가 있다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이 사람에게 이제 인생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회가 동네 사람들의 열심에 의해서 살아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살리는 기회
마가복음 2장에 "지붕을 열고 예수님께 달아 내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문으로는 못 들어가니까 지붕을 열고 달아 내려서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은 동네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주인공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제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동네 사람들이 데리고 왔는데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2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상대한 게 아니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동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는 그 중풍병자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동네 사람들의 입장부터 생각해 봅시다.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힘입어 죄 사함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 네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보시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믿음이 있고 연합된 믿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믿음, 교회의 믿음, 민족의 믿음도 하나님이 인정하고 계십니다. 저희의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희의 믿음을 통해서주님이 역사하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저희의 믿음은 동네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동네 사람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본문이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을 만나 본 경험이 있고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신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로 이 환자를 데리고 가면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 믿음을 주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이 믿음의 열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한 사람에게는 영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전도회나 여전도회에서 혹은 구역에서 저희의 믿음이 결성이 될 때 우리 혼자보다도 더 큰 일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희의 믿음에는 열정이 있습니다. 열정은 혼자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은 공동체 믿음으로 승화되고 거기서 또 개인은 더 큰 열정으로 승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한 열정
한국 교인들은 매우 열심 있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기도하는 열정이나 교회를 섬기는 열정은 놀랍습니다. 한국 교회의 저력과 자랑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열정입니다. 그런데 열정은 좋은데 질서를 역행하는 열정이 많습니다.
필리핀에서 선교하다가 괴한에게 네 발의 총을 맞고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는 모 선교사의 문병을 갔습니다. 병실 앞에 '면회제한' 이란 글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아보고 시간을 맞추어 결례가 안되는 시간에 면회를 갔습니다.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에 중상을 입고 치료받는 이 사람에게 면회를 와서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가서 되겠는가 싶은 장면이 자꾸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라는 것이 그때 참 좋더라고요. 우리 기도합시다 하고는 분위기를 좀 다른 데로 돌리면서 기도하고 바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탄 차는 다 망가졌는데 총을 난사하는 그 속에서 뇌라든지 명치에 총을 안 맞고 발이나 손에 맞아서 생명에는 지장없이 살았다는 게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환자를 찾아뵙고 문안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히 너무 지나친 면이 참 많습니다. 제발 면회 가서 음식 먹지 마십시오. 환자 앉혀놓고 주스 마시고 먹지 마십시오.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병간호를 하는 입장이라도 면회 오는 사람에게 음료수 내놓지 마십시오. 안 내어놓아도 그것은 결례가 아닙니다. 먹을 것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면회만 하고 가도록 합시다. 먹으니까 시간 더 가고 이야기가 많아지고 환자한테는 하나도 도움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문병갈 때는 내놓을 생각을 하지 마세요. 우리의 열정이 질서를 역행하면 안됩니다.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메고 간 이 사람들이 예의가 있습니까? 예의가 없습니다. 지붕을 뜯어서 이 사람을 메고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는데 그게 무슨 예의가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아셔야 됩니다. 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간 것은 단순히 우리가 환자를 문병하러 가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방법이 아니고는 도무지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절대절명의 기회입니다. 또 이 정도의 열정이 아니고는 도저히 주님 앞으로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러한 열정이 가능했는가? 바로 생명을 살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이 의미심장한 말씀 앞에 제자들도 데리고 간 사람도 거기 둘러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사할 수 있느냐? 아니 병자를 고치는데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죄사함의 은혜
그러나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병 고침보다도 죄 사함의 은혜가 우선이고 더 크다는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 중풍병자의 병도 고쳐주셨지만 먼저 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메시야 사역의 초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로 오는 사람 중에 믿는 자 보다도 불신자가 먼저 오는 것을 주께서 우선하신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할 그 사람을 주님께서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인 은혜 안에서 이미 살고 있는데도 자꾸 육신의 것을 먼저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것을 먼저 보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자기 앞에 온 것을 주님은 대환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노라, 너와 같은 죄인을 만나려고 내가 이 땅에 왔노라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병을 앓고 이 세상을 마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예수님께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영혼으로서 하늘나라 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것을 입지 못하고 가는 인생이 불쌍한 것이지 예수를 믿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또 하나의 은혜요 소망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중풍병자에게 영적인 관심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명제가 하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왔던 이 동네 사람 안에 우리 각자가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저희의 믿음 안에 내가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믿음 안에 내 믿음이 함께 포함되어야 합니다. 내 기관 안에 내 믿음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미사일 발사대로서의 교회
이 중풍병자는 인간적으로 불행하지만 자기를 예수님께로 메고 갈 수 있는 믿음의 이웃들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 큰복입니다. 자신에게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회는 나 스스로 부딪히는 기회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서는 저희의 믿음을 통하여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운동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기도는 절망에 처한 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기회를 부여하는 능력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기도에 참여해야 하고 교회의 믿음에 내 믿음이 함께 역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는 미사일 발사대라 그랬습니다. 미사일은 발사대가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미사일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미사일은 발사대가 있어야 정확하게 발포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미사일은 무기가 됩니다. 교회는 발사대입니다. 저희의 믿음은 발사대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희의 믿음이라는 이 발사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발사대의 후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은 교회를 통해서 함께 후원을 받고 교회 안에서 나도 다른 사람을 후원하는 발사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저희 믿음의 비밀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개념으로 많은 교훈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교훈은 사도바울 서신에서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던 용어와 바울이 말씀하는 용어는 다른데 의미는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이야기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너희라는 말은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지금처럼 교회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었는데 바로 중풍병자를 합심하여 예수님께로 메고 왔던 그 사람들이 그때 하나님이 쓰신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교회는 하나님의 밭입니다. 밭은 농사가 이루어지고 소출이 나야 합니다. 밭에는 파종이 있고 추수가 있듯이 우리 교회도 파종과 추수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밭이기 때문에 묵은 밭은 보기에도 민망합니다. 밭을 보십시오. 채소가 잘 가꾸어져 있는 밭처럼 농사가 잘 되어있는 밭과 농사를 짓지 않고 묵혀놓은 밭은 보기에도 민망합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파종이 되고 가꾸어지고 추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파종하지 않고 거두는 욕심만 가지면 안됩니다. 정성스럽게 심고 당연한 것을 거두어야지 심는 것은 인색하면서 거두는 욕심만을 부리는 이런 묵은 밭이 되면 안됩니다. 좋은 씨를 정성스럽게 심고 가꾸어서 충실한 추수를 하는 하나님의 밭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이 밭입니다. 여러분의 구역이, 기관이,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밭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저희의 믿음에 내 믿음이 함께 역사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