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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지키며 긍휼을 빌라 (눅18:1-14)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도와 관련시켜 말씀하신 비유 두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9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 각각의 기도하는 모습을 대비시켜 말씀하신 것을 전합니다. 이 기도에 관련된 두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할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말씀 먼저 생각해봅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한 사람의 과부와 한 사람의 재판장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등장시킨 과부는 원한이 많이 맺힌 사람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그 원한을 풀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는 재판장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장은 그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자주 재판장을 찾아가 호소하며 그를 번거롭게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동안은 과부의 호소를 듣지 아니하던 재판장이 나중에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 따위는 무시할 수 있으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시고는 그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6-8절을 다시 읽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불의한 재판장조차도 자기가 번거롭고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와 아무 상관없지만 끈질기게 탄원하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을 때에 오래 동안 모른척하시겠냐는 것입니다. 반드시 정의의 심판을 하시고 모든 이의 원한이 사라지는 의의 나라를 세우시리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 올지는 모르나 반드시 올 그 인자의 날을 확신하며 그때까지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나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럴 수 있겠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직전에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이 첫 비유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지킬 믿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주님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주님의 날이 이르기까지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할 일들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백성을 무시하는 오만하고 무정하며 불의한 자들이 다스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이 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기를 쉬지 말고, 또 기도한대로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때문에 박해와 위협과 피해가 닥쳐와도 끝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 역시 예수님께서 기도와 관련시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두 사람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을 가리켜 언급하셨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멸시를 받으며 스스로 불의한 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당당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말하면서 율법의 요구 이상을 행하고 있다는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는 자화자찬에 빠져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여기며 멸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도 없고 하나님을 바라볼 염치조차 없는 자로 알고 있었다는 표시입니다. 그가 다만 가슴을 칠뿐이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 죄에 대해 후회하고 부끄러워하고 그 죄를 알면서도 짓고만 자신을 책망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밖에 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기댈 데가 없는 죄인으로 여기며 그저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을 대비시키신 예수님께서 내리신 결론은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중에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인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가 무슨 계명을 어겼는지. 그가 범한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의롭다 인정하지 않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무리 해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외형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평가하며 자만에 빠져있었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잣대로 자신을 판단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나 자비나 용서나 긍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신앙적으로 교만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만이 하나님 앞에 죄의 본질임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서 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 죄를 미워하고 죄 지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 그래서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자신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긍휼을 비는 것,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실 것이며, 불쌍히 여기실 뿐 아니라 기뻐하시고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마지막에 덧붙이신 말씀은 그러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와 멀어지는 것 같아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굽히지 않고 기도하는 믿음만이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만큼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당신의 자녀들의 간절한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낙심된다 할지라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원한이 사라지고 정의가 바로 서는 나라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맞이하고 누릴 수 있는 길은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통렬하게 살피는 믿음의 눈입니다. 나 스스로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임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알면서도 지은 죄에 대해 마음을 찢고 통회하며 긍휼을 비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며 긍휼을 빌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며 결코 우리를 낙심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세상의 불의한 재판장도 계속해서 조르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이 세상에서 억울함과 원통함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이며, 둘째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모든 억울함과 원통함을 반드시 풀어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또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하시며 세리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 앞에 머리 들 수 없는 죄인일 뿐인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감격스럽고 크나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지키며 긍휼을 빌라" 하시는 것은 또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물으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렇게 끝까지 믿음을 지킬 자가 과연 있겠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특히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과 박해에 맞서서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하기를 잊고 낙심하여 굴복과 타협을 택하기 쉬운 우리들임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 하셨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오직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백하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 원통한 일이 많은 이 세상입니다. 사기 당하는 일, 배신당하는 일, 호의를 악의로 되갚음 당하는 일, 열심히 일하고도 야단만 맞고 정직하게 행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 터무니없이 꾸며낸 거짓말로 명예를 손상당하는 일, 대기업의 횡포로 일생 모은 재산을 강탈당하거나 평생연구의 성과를 날도둑 당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좋은 교육으로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하여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선한 뜻을 가지고 거액의 사재를 들이며 헌신적인 노력으로 일구어놓은 대학을 악의적인 몇 몇 사람의 거짓말과 선동 때문에 통째로 빼앗기고 사악한 무리들과 그 뒤를 봐주는 거대한 정치세력과 맞서 수년간의 외로운 법적 투쟁을 벌여야 했고 대법원의 최종 무죄판결까지 받고 학교강탈주도자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는데도 설립자에게 학교를 돌려주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정권의 무법성과 권력형 범죄로 인해서 심신이 상처뿐이지만 그저 믿음 하나로 견뎌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법이 그의 권위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나라의 최고통치자부터 그럴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그 불의한 재판장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을 무시하는 대통령입니다. 국민의 여론이라 하면 더 기를 쓰고 거스르려 하는 대통령입니다. 선거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민심조차도 대수롭지 않다고 일축하는 대통령입니다. 전 세계의 여론과 동향에 홀로 역행하고 있는 김정일 정권에게만 그렇게 고분고분하며 동반역주행을 일삼아온 우리의 대통령입니다. 전 세계의 왕따 1위 집단인 북한의 [민족공조] 가락에 장단을 맞추며 나란히 대한민국을 세계 제2위의 왕따 국가로 만들고 있는 대통령입니다. 그래서 절대 다수의 국민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는 대통령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의 불의한 재판장은 그래도 여러 차례 호소하면 마음을 돌이켜 듣기라도 하는데 우리 대통령은 그럴 기미조차 없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착실히 해온 여당의원들도 차기 총선이 염려되니까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동의 책임을 시인하고 책임지려 하지는 않고 모든 것을 대통령에게 돌리며 발뺌하는 모습들이 애처롭습니다.
그래서 속 터지고 원통하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되 우리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라 하십니다. 오늘 이 사회와 나라의 문제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고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바로 지키지 못한 결과로 자책하며 용서를 빌고 긍휼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