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요일 3:11)  
  

지금까지 요한일서 말씀을 살펴보면 구원에 대한 12가지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한다’ ‘그의 계명을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졌다’ ‘하나님을 안다’ ‘의를 행한다’ ‘그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다’ ‘빛 가운데 행한다’ ‘깨끗하다’ ‘죄를 용서받았다’입니다. 이 말씀은 표현만 다르지 ‘너희는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사랑하며 삽니다.

사랑의 세 가지 법칙

사랑에는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사랑의 법칙 첫 번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항상 슬픕니다. 짝사랑도, 짝사랑의 도를 넘는 스토커도 슬픕니다. 하는 사람도 슬프고, 당하는 사람도 슬픕니다.
사랑의 근본 법칙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사랑은 홀로 독불장군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받아야 되고 누구나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건강해집니다. 집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손녀를 키우면서 건강해집니다. 교회는 사랑하면서 건강해집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받는 사랑만큼 건강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사랑만큼 건강해집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너무 교만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선물을 주면 기분 좋게 받으십시오. 그렇다고 선물 받을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슬퍼집니다. 그러나 선물은 기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누가 밥을 한 끼 사주면 기분 좋게 드십시오. 그래야 밥을 산 사람도 행복합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베푸는 크리스마스가 되십시오. 가진 것이 없다면 웃음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또 튼튼한 몸으로 짐을 들어주십시오. 재미있게 말하는 재능으로 웃겨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남성들이여 자존심을 꺾고 자녀와 아내를 칭찬하십시오. 그러면 사랑이 다시 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했습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의 사랑을 좋아하십니다. 손을 들고 ‘주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랑을 좋아하십니다. 예배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에 눈물겨워 입술로 목소리로 헌금으로 모든 봉사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잘못된 가인의 사랑  

하나님과 나와의 아름다운 사랑,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첫째 사랑의 법칙입니다. 이 사랑을 잘 설명하는 것이 12절 말씀입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가인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열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의 동생 아벨도 양의 첫 번째 새끼와 기름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행동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아우 아벨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동생과 자기를 비교했습니다. 여러분, 피를 나눈 형제는 비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박수쳐주는 대상입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면 비교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의 제사를 받아주셨다는 것에 대해 박수를 쳐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가장 무서운 것이 비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역자입니다. 한 팀입니다. 우리는 경쟁상대가 아니라 한 가족이고 동지입니다.
둘째, 가인은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생각하셔서 아벨 제사를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인데 그 하나님의 판단에 도전했습니다. 이것이 미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셋째 가인은 악을 실행했습니다. ‘내 동생을 죽이고 싶다’라는 생각이 왔을 때 이 생각을 키웠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악한 생각을 실행했습니다.
넷째 가인은 이기적으로 사랑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경건을 이익에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저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잘못된 비교의식이 사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일을 잘되게 하실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박수치는 것이 몸에 익어야 합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돌이켜 소망을 품으십시오. 가인같이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의 판단을 불신하지 말고, 악을 실행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구원의 증거 ‘사랑’

12절을 보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있습니다. 가인이 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악하고 아벨은 의인이기 때문에 아벨을 미워한 것입니다. 아벨이 악인이고 자기는 의인이라 아벨을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바르고 의롭게 생활을 하는데 자기는 악하기 때문에 아벨을 미워한 것입니다.
13절입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의롭게 사시는 여러분, 세상이 당신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바르게 살고, 가슴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로 결정했다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의로운 아벨을 잘못된 가인이 싫어했던 것처럼 의롭게 살기를 원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는 당신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혼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듣는 말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말을 듣기 때문에 사람이 당신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베풀면서 살기를 원하고, 가슴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로 결정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웃들과 친척들이 당신을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법칙은 잘못된 사람이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똑바르지 못한 것은 ‘자’와 ‘칼’이 오면 싫어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나타나면 싫어합니다.
14절, 15절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자는 사랑하는 자이고, 사망에 아직도 거하는 자는 사랑치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그제서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받는다’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삶의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원본을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가 사랑하며 살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이다’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증거요 구원의 열매입니다.

묵숨을 다한 사랑

두 번째 사랑의 법칙은 16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의 법칙 두 번째는 ‘목숨을 버리라’입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목숨을 버리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에서 안식월을 주셔서 영국에 잠깐 갔었습니다. 거기서 제일 좋았던 것이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수염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설교를 하게 되어 수염을 깎게 되었는데 일주일동안 기른 수염이 정말 아까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내게 있는 작은 것, 내게 있는 명예, 자존심, 물질, 위치를 포기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하물며 어찌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나의 모든 것을 용납하신 사랑이 가슴깊이 느껴지면,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내게 임하면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너무 평가절하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가족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내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 자존심, 체면을 꺾고 말로 사랑할 수 있고 행동으로 사랑할 수 있고 재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행함, 진실이 있는 사랑  

사랑의 법칙 세 번째는 17절, 18절입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의 법칙 세 번째는 ‘전인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물질로 사랑하십시오. 배고픈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지갑을 여십시오.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해 지갑을 터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말과 혀로도 사랑하고 행함과 진실로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말로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힘이 듭니다. 처음부터 유창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한 마디가 두 마디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 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사람, 목숨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 전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복을 주실까요? 19절부터 22절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담대함’과 ‘기도’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을 얻습니다. 평소에 구체적으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담대합니다. 이것은 건방진 것과 조금 다릅니다. 담대한 사람은 편안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평소에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기도를 잘 들어주십니다. 사랑하지 않고 사는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사람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고아원 사역, 구제사역, 긍휼사역 잘하는 가정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베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엉뚱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합니다. 성령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는 비법, 응답받는 기도를 하는 비법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한 기도는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23절과 24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결혼식의 핵심은 식사가 아닙니다. 축의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식의 핵심은 신랑 신부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식 때 하객을 잘 바라보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를 보며 “잘살길 바래, 축하해”라고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출입문을 나갈 때까지 축복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례자의 나이를 초월하고, 예식장의 분위기를 초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열 명 밖에 없어도 주례자가 정말 사랑하는 맘으로 하면 그 예식장이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사랑이 세상을 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뚫고 나갈 방법이 생깁니다.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생깁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슴이 따뜻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며 살다가 사랑하며 죽기를 바랍니다. 지갑이 열리고 행동이 열리는 사랑을 하면서 2006년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성령님 우리의 의지에 기름을 부어주십시오.
성령님 우리의 감성에 기름을 부어주십시오.
성령님 우리의 지식에 기름을 부어주십시오.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하용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