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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도 승리하십시오 (사무엘하 2장 18-32절)
사무엘하 처음 부분에는 다윗 진영과 죽은 사울 진영 간의 전투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는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의 군사들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 군사들과의 첫 번째 전투장면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 전투에서 요압이 이겼는데, 오늘 본문은 그 전쟁 후에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까요?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 노루 같이 빠르더라.”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는 아비새와 아사헬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이 3형제가 모두 다윗의 용맹한 장군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사헬이 가장 발도 빠르고, 가장 날렵했습니다.
그 아사헬이 전쟁에서 패배해서 도망가는 아브넬을 뒤쫓았습니다. 아브넬은 평소에 아사헬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20절 말씀에서 뒤를 돌아보며 “너 아사헬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아사헬이 그렇다고 하니까 본문 21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이 아사헬에게 “네 좌우를 돌아보면 네가 잡을 소년이 많다. 그 중에 하나를 잡고 나를 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사헬은 그 소리를 듣지 않고 계속 아브넬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22절에서 아브넬은 다시 한번 아사헬에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쫓지 말라. 내가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너를 죽이면 내가 네 형 요압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 장면을 보면 평소에 아브넬과 요압이 친분도 있었고, 아브넬이 싸움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아사헬이 그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 아브넬이 창으로 그의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자 뒤쫓아 오던 모든 요압의 군사들이 아사헬이 죽은 곳에 머물러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24절 말씀을 보면 아사헬의 죽음을 본 그의 형 요압과 아비새는 계속 아브넬을 뒤쫓아서 기아라는 지역의 맞은편 암마 산까지 이르렀을 때에 해가 졌습니다. 그때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이 작은 산꼭대기에 서서 요압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굳이 칼을 계속 휘둘러야 하겠느냐? 그러면 비참한 일만 생긴다. 결국 너와 우리는 형제가 아니냐? 언제쯤 형제 쫓기를 그치라고 명하겠느냐?”
그 말에 요압이 대답합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언뜻 보면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흔단의 말’이란 ‘싸움을 끝내는 말’을 말합니다. 즉 네가 싸움을 끝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침까지 계속 형제를 쫓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한 뒤에 요압은 나팔을 불어 더 이상 아브넬 군사들을 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9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과 그 군사들이 밤새도록 행군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고 다시 비드론 땅을 지나 그들이 임시 수도로 정한 마하나임에 도착했습니다.
그 접전 후에 30절 말씀을 보면 요압이 돌아와서 전과를 살펴보니까 자기 군사들 중에서는 19명과 아사헬, 즉 20명이 죽었고, 아브넬의 군사 중에서는 360명이 죽었습니다. 그 전쟁을 끝내고 요압과 그 군사들이 아사헬은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하고 나서 그들도 밤새 행군해서 자기들이 수도로 정한 헤브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동역의 중요성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루야의 세 아들은 다윗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맹장들이었습니다. 특히 본문 32절에서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했다는 말씀을 보면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은 다윗과 고향이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원장이 자기 동향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명나라를 세웠듯이 다윗에게는 동향 사람들인 이 스루야의 세 아들이 그가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맹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세 아들인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있었던 사울의 추종자들과의 첫 번째 싸움에 다 참여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용맹으로 그 첫 번째 싸움을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넬의 군사들이 패퇴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아사헬은 용맹한 것은 좋지만 혼자서 아브넬을 잡겠다는 마음으로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아브넬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아무리 용맹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사헬과 같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주 재능이 많습니다. 똑똑합니다. 그런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뜻을 이루는 것도 힘들게 되고, 본인도 결국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들 노루처럼 발 빠른 사람이 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동역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알게 하시고 함께 있게 하신 동역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권사님들의 건강을 위해서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권사님들이 한분도 이탈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힘으로도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권사님들도 같이 보게 하소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실질적인 힘을 주려고 지혜를 짜내고 기회를 엿보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 용서의 중요성
오늘 본문에서 왜 아사헬을 아브넬을 기를 쓰고 쫓아갔을까요? 아브넬에 대한 미움과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아사헬은 아브넬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고,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칼은 참혹한 일만 만든다. 우리가 형제끼리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 것을 보면 아브넬은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사헬을 미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자기 자신이 죽게 됩니다. 칼은 칼을 부르는 것처럼 미움은 미움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미움은 미워하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영혼을 죽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를 미워하고 망하기를 바라서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가 탄 배에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물고기 밥이 되게 하셨습니다. 미워하니까 자신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니까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다 멋있게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용서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도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축복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려면 힘써 용서해야 합니다. 미워하면 내 영혼이 점차 마르게 되지만 용서하면 내 영혼이 점차 풍성하게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은 굴뚝과 같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가면 옆집도 까맣게 되지만 그 전에 자신의 마음의 연통이 까맣게 됩니다. 그처럼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든지 상관없이 이웃을 미워하면 내가 먼저 망하게 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희망이 없어!” 그런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결점을 덮어주고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내게도 무수한 결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결점들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아서 남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내 것보다 훨씬 밝게 보입니다. 그처럼 남의 결점은 내 결점보다 훨씬 커 보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힘써 용납하고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바꿔주세요. 너무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용서하지 못한 것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제가 먼저 변하도록 도와주시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세요.” 그렇게 멋지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물론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무엇보다 그 십자가를 잘 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도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성령 충만을 주시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생각하고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용서하면 신기하게도 우리 주변에 우리를 얽어매던 수많은 사슬들이 신기하게 풀리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2가지 중요성, 동역의 중요성과 용서의 중요성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축복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항상 겸손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관계의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