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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보는 눈이 열리자 (눅24:13-17)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의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나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누가복음 24 : 13-17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주님의 제자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어떤 제자는 벌써 예루살렘을 빠져 나갔고, 본문에서는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이십오 리쯤 떨어진 곳입니다. 이들은 가면서 대화를 합니다. "야, 우리가 알기에는 그분을 구속자로 알았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이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들 가까이에 이르러서 동행하셨습니다(15절).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를 하고 가면서도 그분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16절)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두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 18절을 봅시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통치 속에 있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셔서 정치적 해방을 시켜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 두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때 침례 요한이 나타나자 백성들은 메시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고 했고, 자신은 그분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후에 오신 예수님께 이 기대를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 일을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는데 예수께서 승천하시려고 할 때 제자들이 묻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 : 6).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1 : 7)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자로 안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다 줄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게 되자 다 도망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지게 다른 것은 정보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옆동네에서 일어난 일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빨리 알아서 문제입니다. 그만큼 시대가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를 안방에서 한 눈으로 보는 시대입니다. 아직은 선진국만큼 밝지는 않지만 밝아진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시대가 밝아지다 보니 좋지 않은 곳에도 밝아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눈이 밝아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엉뚱한 데 눈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이성에 밝아지고, 오락에 밝아지고, 물질에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합니다. 이렇게 밝아졌습니다. 자, 이것은 눈이 뜬 것입니까? 오히려 눈이 감겨진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서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어두운 세상
데살로니가전서 5 : 1 이하에 보면 지금 세상은 밤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밤에 도적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2절에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 : 12에는 "밤이 깊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60 : 2에도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운다"고 했고, 요엘서 2 : 2에도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라고 했으며, 예수님은 요한복음 9 : 4에 "밤이 오리니"라고 했습니다. 찬송가에도 "어둔 밤 쉬 되리니"라는 곡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3 : 28 이하에는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교훈을 하시면서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올 줄을 아는 것처럼 이 시대를 보고 주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3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지금은 저물은 세상입니다. 또한 앞뒤를 분간 못하는 밤중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2 : 23, 24에 보면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밤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여호와께서 빛이 되심으로 밤이 없습니다.(25절)
이 세상에서는 죄인인 우리에게 밤이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 쉬기 때문입니다. 밤은 휴식을 가져다 주고 안식하게 합니다. 이 세상은 밤이 있어서 좋은데 천국에는 밤이 없다고 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밤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밤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밤은 캄캄합니다. 어둡고 캄캄한데서 악이 서식합니다. 이런 밤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정보가 빨라서 밝은 세상이라고 했는데 어둡다니요. 어떻게 어둡습니까? 오늘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집과 전혀 관계없이 지냅니다. 벽돌 한 장 두께 사이에 살면서 서로 어둡게 지냅니다. 또 그런가 하면 부부 사이에도 어둡습니다. 가리운 것이 있고 벽이 있습니다. 애정이 파괴되고 행복이 무너집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들이 직장을 다녀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강남 일대가 너무나 음란합니다. 직장에서도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으니까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밤이 없습니까? 에베소서 5 : 8에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을 없애고 밤을 없앤 자는 빛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4 : 16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과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고 했습니다 이 빛은 요한복음 1 : 9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어두움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 : 14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5 : 8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러면서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 알 자를 알지 못하는 세상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알아야 할 자가 있습니다.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는 내게 생명을 주고, 핏줄을 주고,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알 자를 모릅니다. 알아야 할 형제를 모르고, 알아야 할 스승을 모르고, 알아야 할 하나님을 모릅니다. 분문 16절을 다시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돈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 있습니다. 돈 대문에 청부살인을 하기까지 합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남편을 죽입니다. 눈이 가리워져서 이런 무서운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나마 눈이 떠진다면 다행한 일인데 영영 눈이 떠지지 않으면 큰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후에 눈이 뜨여져서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안 떠진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눈이 가리워진 상태로 있으니까 자기 스승을 팔았고, 계속해서 떠지지 않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눈이 가리워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 때문에 눈이 가리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비판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아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말을 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꾸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가리워집니다.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고 열등의식이나 자기 감정에 의해서 분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비난 하고 헐뜯는 사람이 봉사하지도 않고 충성하지도 않습니다. 말로만 일하고 충성하고 헌신합니다. 우리는 속지 말고 눈이 가리워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형제를 미워하기 때문에 눈이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 : 11에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만 보입니다. 형제의 좋은 면이나 잘하는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듯 미움이 우리의 눈을 가리우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세 가지 눈이 있습니다. 육의 눈과 양심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오늘날에는 양심의 눈까지 화인 맞았습니다. 전에는 잘못을 하다 들키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잘못을 빌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던 것을 그대로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혹 들키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양심의 눈이 다 가리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의 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영의 눈이 무엇입니까? 영의 눈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요한계시록 4 : 6에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고 했고, 8절에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의 눈이 세계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앞뒤 좌우에 다 눈이 있습니다. 영의 눈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자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 자를 알려면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분문의 두 제자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3. 알 자를 아는 눈이 열리자.
저는 스물네 살부터 강단에 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에게 철저히 교육을 받았어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영원히 멸망당할 내가 예수님의 보혈로 공로로 영원히 의롭게 되었구나' '지옥에 갈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에 가게 되었구나' '그러므로 예수는 나의 주인이로구나' '예수는 나의 왕이시로구나' '예수는 나의 구원자시로구나' 하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스물 여덟 살 때 알았습니다. 그때까지 그인 줄 몰랐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철저하게 신앙 생활합니다. 미국의 한 침례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금주, 금연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배 드릴 때는 모두다 정중한 의복을 입고 오도록 합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그 교회 내에 성경학교가 있는데 여학생들이 바지를 입고 공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못 나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속을 받으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교회입니다. 미국의 교인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기를 그 교회 교인들은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제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이 '우리 교인들 중에 예수님이 오시면 절반이나 구원받을지 모르겠습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반이라고 말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에 나와도 알 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성도는 알 자를 아는 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알 자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고 좋을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 목양실에서 거하면서도 호화스러운 아파트를 부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알 자를 알고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나의 왕이시오, 나의 주인이시오, 나의 구원자이신 그분을 알고 보니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는 찬송만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 : 7, 8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이렇게 배설물로 여겼습니까? 5, 6절에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했습니다. 알 자를 알고 난 후에 이것을 다 버린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알 자를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알 자를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알 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4. 눈이 열리는 방법
제자들이 나중에 가서야 주님을 알게 되는데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분문 1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러면서 제자 중에 하나가 말하기를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18절)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대답하기를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도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19-24절)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에 대한 사건을 자세히 말할 때 예수께서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날은 어두워지면서 어떤 촌에 가까이 왔을 때 제자들이 강권하여 함께 유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께 유하게 됩니다. 때가 되어 식사하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음식을 놓고 축사하셨습니다. 30, 31절을 봅시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데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았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사할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 : 48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산 떡이라고 했습니다. 이 떡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이 언제 열립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열립니다. 그래서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하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시편 119 : 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기 때문에 우리를 밝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습니까? 예수께서 축사하셨을 때 밝아졌습니다. 축사는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게 되고 주님을 보게 됩니다. 기도 생활하지 않으면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눈이 가리워진 사람은 물질을 땅에만 쌓아 둡니다. 그러나 눈이 열린 사람은 보물을 하늘에 다 쌓아 둡니다(마 6 : 19, 20).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영안(靈眼)이 열리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행 7 : 54-60). 우리도 이와같이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