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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20~24
새해 표어를 '예배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이라고 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대표적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들만 훌륭하게 해 나가면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 기능은 예배와 교육과 봉사와 선교, 그 다음에 한 가지를 더하면 친교의 기능을 들 수가 있습니다. 다른 모든 종류의 기능은 이 몇 가지 기능 속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기능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 기능이 무엇인가? 바로 '예배'입니다. 왜 예배가 중심인가? 우리 인간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예배 역사를 살펴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최초의 인간 후손인 가인과 아벨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활환경에서 하나님을 향해 한 명은 곡식으로 한 명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던 기록이 있는데 그 제사가 곧 예배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왔다고 했는데 그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면 '가정 제단을 쌓는다'는 말을 합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말이 예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28장으로 가면 야곱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록에 보면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라고 하나님을 만나는 대목이 나오는데, 예배를 통해서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나는 경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였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고 기도를 드립니다. 즉,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제사 의식이 율법으로 주어져 있는데, 아주 많습니다. 번제, 화목제, 서원제, 요제, 속제, 속건제, 낙헌제, 전제 이 모든 제사들이 곧 예배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평생 동안 네 가지 관계 속에서 살게 되는데, 오늘은 제가 첫 주일의 방향을 그림으로 그려 스크린을 통해 보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관계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게 됩니다. 조금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설명을 잘 하겠습니다. 저기 가운데 중앙에 원형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네 가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가지 관계성의 제일 위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으로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예배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드릴 것인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방법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이렇게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철저하게 예배로 관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이 보시는 그 원형의 오른쪽에는 '이웃'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웃과 관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와 '이웃'은 무엇으로 관계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관계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배와 연결하고, 이웃은 사랑으로 연결하는 그런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위쪽 옆으로 보시면 '나타나는 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바울 선생이 일찍이 말을 했습니다. "내 속에 또 내가 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나타나는 관계를 어떻게 우리가 설정할 것인가? 나에 대해서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로 나와 내가 연결하고 있는 그런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내 자신이 존경스러울 때가 있어요. 그게 바로 내가 '나타나는 나'를 보는 관점입니다. 어떤 때는 내가 나 자신을 멸시할 때가 있어요. 학대할 때가 있어요. '내가 왜 이 모양인가?' 내가 '나타나는 나'를 볼 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아주 진실로 연결할 때 내가 나를 존경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아래로 보시면 물질과 관계를 합니다. 평생 동안 우리가 물질과 관계 안하고 살 수 없잖아요? 이 물질은 어떤 관계인가? 선하게 사용하는 관계입니다. 선용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나는 위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관계하고 또 한쪽으로 나와 내가 진실로 관계를 하고 아래로 물질을 선용하는 관계로 이 네 가지 관계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어떻게 하면 이 관계를 훌륭하게 해나갈 것인가 그것이 우리 삶의 과정입니다. 만약 위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데 순서를 바꾸어서 밑에 있는 물질을 예배하고 하나님은 이용하는 관계가 되면 이 순서가 깨어지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필요한 마찰과 고통을 수없이 겪어왔고, 이 관계성이 잘못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본래의 모습대로 가지 아니하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종교 개혁'이라고 하는 대 사건이 터져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도 했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역사의 길을 가기도 했고, 그것이 우리 기독교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움을 주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여러 갈라진 종교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한번 설정할 것인가? 지난번에 청지기 수련회 때 제가 이것을 파워포인트로 교인들에게 강의한 적이 있는데 많은 교인들이 그것을 온 교인들 앞에서 다시 한번 더 보여 달라고 요청을 하셔서 제가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이 도표에서 맨 위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최초로 부른 사람이 한 명 나타나는데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을 하지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유대인이었잖아요? 그래서 이것이 '유대교'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 거기서는 '야훼'입니다. 그런데 '야훼'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해서 '여호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던 하나님이 그대로 믿던 사람들이 쭉 줄기가 내려와서 밑에 500만 '유대교'가 지금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유대교가 나온 줄기에서 7세기 초에 '이슬람'이 나왔습니다.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줄기가 쭉 내려오면 맨 오른쪽에 현재 12억의 이슬람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똑같이 유대교, 아브라함이 믿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뭐가 다르냐?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아브라함이 드렸던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구죠? '이삭'입니다. 이슬람에서는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라는 겁니다. 그거 하나만 달라요. 그리고 거의 다 같아요. 그래서 세상에 지금 이슬람이 12억이 되고, 유대교가 약 5백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 중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셨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기독교가 쭉 내려오다가 1054년에 불행하게도 두 갈래로 갈라졌어요. 하나는 '동방정교회'이고 하나는 '카톨릭'입니다.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는 '정교회'라는 이름이 있고, 하나는 '카톨릭'이라고 이름을 해서 쭉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이 카톨릭 줄기에서 1517년에 '마틴 루터'같은 인물이 나와서 교회가 잘못 가는 길을 종교개혁을 해서 1517년 이후에 '개신교'라고 하는 것이 생겼죠? 바로 우리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와 '카톨릭'과 '정교회' 이것은 다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신앙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인구가 약 18억이 됩니다. 이 18억과 이슬람의 12억을 합치면 30억이 되지요? 유대교까지 합치면 30억이 넘죠? 세계 인구 가운데 절반가량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교파마다 조금씩 구원에 대한 교리가 달라요.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큰 축복 속에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이슬람과 유대교에서는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가 이단자라고 생각을 해서 끌고 와서 십자가에서 죽인 것이고, 이슬람에서는 "그도 위대한 선지자 중에 하나이다"라고 주장하고, 기독교에서는 "그가 곧 하나님이다." 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역사의 오랜 시간 마찰을 겪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큰 틀 속에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제도적으로 분류하면 또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제도는 세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여러분이 보신 맨 왼쪽의 '1인 감독제도'라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뭐냐 하면 같은 기독교이지만 최고의 지도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2감독 기관', '제3감독기관', 그리고 맨 아래 '지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최고의 지도자 명령이 제일 중요합니다. 1인 감독제도의 교회입니다. 동방정교회, 카톨릭, 성공회, 감리교, 나사렛 교단이 1인 감독제도입니다. 1인 감독제도에서는 최고 감독의 명령 하나로 세계적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제도를 갖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자, 교황청이라고 있잖아요? 교황이 말씀하시는 대로 온 세계가 움직입니다. 이것이 1인 감독제도의 교회입니다. 카톨릭 신자들, 정교회 신자들은 금요일에는 고기를 안 먹습니다. 왜 안 먹습니까? 교황이 먹지 말라고 해서 안 먹습니다. 왜 먹지 말라고 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 무슨 고기를 우질우질 먹고 있느냐? 먹지 말라!" 1인 감독제도의 교회에서는 그분의 명령 하나가 전 교회에 내려서 미국이나 중남미 일대 카톨릭 국가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민 가서 음식점, 햄버거 장사를 많이 하는데 금요일에 안 팔립니다. 먹으러 오는 사람이 있어야 팔지요.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안 먹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아예 문 닫는 게 낫습니다. 또, 금식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도 아예 문 닫아야 합니다. 한 사람도 먹으러 오지 않습니다. 교황이 먹지 말라고 해서 못 먹는 겁니다. 1인 감독제도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옛날 1950, 6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가난하고 배고프게 살던 시절에 교황청에서 한국 교회에 명령이 내려왔어요. 한국 사람은 고기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렇게 고기가 먹기 어려운 나라의 사람들이 오랜만에 교회 잔칫집이 있어서 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 올라온 고기 한 점을 금요일이라고 해서 먹지 못하는 불행을 한국인은 제외해 주겠다고 교황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카톨릭 신자들도 고기를 먹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카톨릭 신자라고 해서 금요일에 고기 안 먹는 문화 없잖아요? 여러분, 모르셨죠? 그게 바로 교황이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도의 교회입니다. 이런 교단의 교회들은 지금 다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1인 감독제도 안에 있는 교회 안에서 목회 하는 목사가 되었다면 제가 지금 갈보리 교회 목사잖아요? 그런데 "2005년 1월 1일부터 이필재 목사는 소록도 교회로 가라! 그리고 소록도에 있는 김용환 목사는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로 와라!" 위의 지도자가 명령을 내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대로 해야 합니다. 아무 소리 못하는 겁니다. 갈보리 교인들이 다 모여서 데모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게 1인 감독제도의 교회들입니다. 감독의 명령에 의해서 모든 것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세상에 제일 많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어요. 위에서 명령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가보세요. '집단 감독제도'라고 했습니다. 맨 위에 총회가 있고, 대회가 있고 그 다음에 노회가 있고, 지교회가 있습니다. 저는 이 제도 속에서 평생을 목회를 해왔습니다. 이것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대표 대의원 제도라고 합니다. 집단 감독제도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총회에서 명령을 하면 교회가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명령하면 총회법도 바꿀 수가 있어요. "총회가 잘못 되었다.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회의를 해서 이렇게 법을 바꾸시오." 그러면 무시 못 하고 바꿔야 합니다. 총회를 가보면 약 3,000명의 대의원들이 모여 있잖아요? 그 법을 바꾸라고 교회에서 올라온 것이 쭉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스크린이 나와서 막 설명을 하고 1번, 2번, 3번 버튼을 빨리 누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가결되고 다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상부 기관의 총회도 얼마든지 뒤집어엎을 수가 있습니다. 왜? 잘못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총회에서도 지교회가 잘못하면 마음대로 명령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감독이 되는 집단 감독 제도를 특별히 장로교가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맨 오른쪽에 보시면 '무감독 제도'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맨 위에 총회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지방회가 있고, 시찰회가 있고 지교회가 있는데 이것은 제가 그림을 점을 찍었죠? 이건 무슨 소리냐? 서로 협조할 것만 협조하고 가장 큰 권한이 지교회에 있습니다. 총회가 뭐라고 했던지 지방회나 시찰회에서 뭐라고 했던지 상관없습니다. 지교회에서 결정한 것이 최우선적입니다. 침례교, 회중교회, 독립교단이 바로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들은 그 교회 교인들, 그 교회 목회자들이 결정한 것이 절대적입니다. 누구도 간섭하지 못합니다. 다만 총회에서는 지교회가 결정한 것을 협력해서 도와줄 의무만이 서로 있습니다. 갈보리교회는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 갈보리교회보다도 더 교인이 많은 어느 교회가 집사님들에게 성찬 집례권을 주었다고 합니다. 집사님들이 성찬식 집례를 할 수 있는 권합니다. 자기 교구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책임자, 교구장이 성찬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변의 다른 교회들이 그런 소리를 듣고 "아, 교인들 가운데도 이건 뭐 이렇게 되느냐?"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교회가 결정하면 됩니다. 그 교회 목회자들이 그렇게 하자고 하면 괜찮은 겁니다. 그 제도 안에서는 괜찮은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간을 못하기 때문에 "이 교회는 왜 이러냐, 저 교회는 왜 저러냐?" 그러는 것이지 이 제도를 잘 봐야 합니다. 미국은 무감독 제도의 교회가 가장 많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과 그 교회 목회자들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거기서 결정한 것이 뭐든지 가장 훌륭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다 도와주어야만 되는 그런 입장의 교회들입니다. 아마 우리 갈보리 교회 나오시는 분들도 우리 갈보리 교회는 소속이 바로 여기 무감독 제도의 교회입니다. 미국은 이 제도가 가장 많습니다. 이 제도에서는 무엇까지 할 수 있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 지금 여기 맨 앞에 어떤 집사님이 앉아 계시단 말이에요? 이 집사님이 교회 봉사도 많이 하시고 연세도 있으시고 신앙도 좋으시고, "아! 집사님! 이제 집사님 그만두고 목사가 되십시오." 우리 모두가 결정해서 집사님을 목사로 추대하면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어디, 해볼 마음 있으십니까?" 그 교회 결정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면서 교회 봉사를 해야 된단 말입니다. 다른 소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러한 세상에 많은 뿌리의 교회들이 있는데 어디에서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내가 결정해서 '아! 나는 이런 교회가 좋다. 일인 감독 제도의 교회가 좋다! 교황 쪽에서 한번 명령 내리면 온 세계가 다 그 말에 복종해야 되는 이게 좋다!' 그래서 이 카톨릭 교회에서는 무엇까지 말했어요. '교황무오설'입니다. '교황은 죄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성경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 교단에서 그렇게 정하면 괜찮은 겁니다. 다른 데서 뭐라고 하든지 상관이 없는 겁니다. 하나의 제도적으로 만든 겁니다.
창세기 때부터 지금까지 제도와 교파는 달라졌어도 절대로 달라지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배를 명령하셨고 예배 안에서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배의 문제를 보다 열심히 아주 신중하게 해가야 합니다. 예배의 모범은 조금씩 변천사의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차이가 조금 나타나지만 교회가 정한 예배, 이 모임은 아주 열심을 다해서 참석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 공식예배를 보면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고, 또 새벽기도 나오시는 분은 새벽기도 드리고, 수요예배 드리고 또 구역 예배드리고 그런 정도로 예배를 드리죠? 여러분이 가능하면 빠지지 말고 모두 참석하셔야 되는 겁니다. 아니, 예배를 빼먹고 다른 거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배는 꼭 드리셔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생각에 '예배가 너무 많다. 예배보다 일 끝나겠다.'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이슬람은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드려요. 어떻게 할 겁니까? 이슬람 국가에 가보세요. 여행하다 제일 불편한 게 그겁니다. 예배 시간이 되면 물건도 안 팔아요. 가서 뭐 달라고 하면 막 인상 쓰면서 비키라고, 예배드리는데 와서 방해 하냐고 화냅니다. 예배가 다 끝나야 물건을 팝니다. 그런데 365일 하루 다섯 번이에요. 우리는 한 달에 5번도 힘들다고 하잖아요?
금년에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예배에 내가 열심을 내서 참석하자!' 그걸 표어로 건 겁니다. 해보세요. 그렇게 손해도 안 나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저는 365일 평균 하루에 네 번씩 설교를 합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하느냐?' 40년 해왔잖아요?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예배 참석을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도와드리려고 오늘부터 4부 예배를 시작하고 이제 올해는 새벽 기도회도 좀더 많이 나오시라고, 토요일 날은 가족 새벽기도로 정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새벽기도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 안 가르치면 언제 가르칩니까? 잠 조금 덜자고 새벽에 나와서 자녀들도 기도하는 거 배워야 합니다. 토요일은 가족들 다 데리고 나와서 예배드리고 조금 이렇게 철저히 예배에 참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요일 날은 우리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직장과 일터에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금년에는 "예배중심"으로 '내 평생 제일 멋있게 교회 다닐 때는 2005년이었다'고 생각하시는 해로 정한 겁니다. 여러분! 예배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년 동안 영혼의 풍요함과 지상의 삶까지 큰 축복의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나타내주시고 우리와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한 중요한 예배를 소홀히 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시고 금년도에는 예배를 철저히 참석해서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꼭 만날 수 있는 축복의 한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