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04
우리에게 주신 것 (디모데후서 1:3~8절)
2002년 가을 한국에 소개 된 미국영화 은 정신지체로 일곱 살 수준의 지능을 가진 한 가장 샘 도우슨과 그의 딸 루시의 이야기입니다. 커피전문점에서 테이블을 정돈하고 청소하는 일을 하던 샘에게 딸 루시가 태어나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루시의 엄마는 병원을 나서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져 버립니다. 엉겹결에 홀로 딸을 키우게 된 샘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이웃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가며 루시를 힘겹게 키워갑니다. 그 부녀는 어느 집 보다도 행복했지만 어느덧 8살이 된 루시에게 고민이 생깁니다. 자기보다 지능이 쳐지고 어려운 단어를 읽지 못하는 아빠보다 똑똑해지는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일부러 공부를 게을리 하다가 학교와 복지기관의 결정에 따라 보호시설로 옮겨지게 되고 아버지와는 면회가 일주일에 두 번으로 제한됩니다. 딸을 빼앗긴 아빠 샘은 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 일과 성공에 욕심이 많던 리타라는 여성 변호사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재판은 시작되고 복지기관에서는 아빠 샘의 낮은 지능을 지적하며 딸을 키울 수 없다고 주장했고 샘과 변호사 리타는 변변한 증언자 없이 고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루시는 양부모에게 입양되고 샘에게는 가끔씩의 면회만이 허용됩니다. 실망한 샘에게 리타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며 오히려 자신의 가정 속에 있던 문제를 보고 해결을 위해 노력할 힘을 얻게 됩니다. 샘은 가정이 회복될 수 있는 갖은 노력을 다 합니다. 이러한 정성을 본 양부모들도, 그리고 샘의 친구들도 가족에 대한 상처로 가득 찼던 변호사 리타도 루시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들이 보다 가까이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모은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지능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요, 돈으로 성공적인 자녀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잣집 자녀들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공부는 좀 더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좋은 인간성과 훌륭한 신앙까지 소유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필요한 자녀양육의 구비조건은 돈과 지식이나 명예와 권세와 아니라 오직 그의 딸을 아름답게 키워갈 수 있는 것은 사랑과 헌신이 담긴 아버지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해줍니다.
요즘은 아이들을 키우기가 참으로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많이 낳지도 않으려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여러분은 어떠한 가치관과 소원으로 자녀를 가르치십니까? 지능과 지식으로 키웁니까? 혹은 돈으로 키웁니까? 저 옛날 우리의 어머님들은 소학교도 제대로 못 마치시고, 심지어 한글을 제대로 깨치시지 못한 분들도 참 많은데 일곱 씩, 열 씩 되는 자식을 얼마나 훌륭하게 키우셨습니까? 가난하기는 또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그런데 요즘 엄마들은 참 똑똑하거든요, 공부도 많이 했고, 아는 것도 많을 뿐 아니라 모르는 게 있어도 인터넷을 통해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있죠. 살기는 전보다 참 좋아졌고 자녀 수도 하나, 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자녀들을 키우는 데 힘겨워 하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어떻게 키워야만 부모가 바라는 자녀로 자라나는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판 속에서 자란 아이는 커서도 남을 지적하려고만 한답니다. 좋은 것, 밝은 것은 보려하지 않고 어두운 것만 들추어 낸 답니다. 또한 적대감 속에서 부모가 싸우는 것을 자주 보고 자란 아이가 밖에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지요. 조롱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부끄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수치감을 갖고 자란 아이는 늘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런가하면 아량 속에서 자란 아이는 인내를 배우고, 격려와 칭찬을 들으면서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는 감사할 줄 알고, 공정한 대접을 받으면 자란 아이는 정의롭게 됩니다. 평안 속에 자란 아이는 신뢰를 배우고, 인정받으며 자란 아이는 긍정적 태도록 갖습니다. 용납과 애정 속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에서 사랑할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는 디모데와 그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 그리고 육신의 조상들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에게 가장 귀중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러웠던 믿음의 아들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그는 한 평생 바울의 동역자요, 후계자였으며 늘 바울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개척정신이 투철해서 한 마을에서 교회를 세우고는 기초가 잡히면 떠나고 또 다른 곳에서 교회를 세워갑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그 뒤를 따라 다니면서 수습을 하고 목회해 나갑니다. 그는 외향적인 바울과는 달리 내성적이고, 꼼꼼하며 사람입니다. 양떼를 잘 돌보며 여러 문제를 잘 처리하는 지극히 목회적인 사람입니다. 바울을 선교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디모데는 목회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바울이 앞 선 사람이라면 디모데는 뒤에서 협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피 한방을 섞이지 않았지만 바울은 아버지요 선교적으로, 목회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디모데는 그의 아들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아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간구하는 가운데 생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밤낮으로 기도 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귀한 사랑은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늘 기도합니다. 심지어는 내 기도제목은 잊어도 그의 기도는 계속합니다. 기도 할 때마다 생각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나는 것은 어떤 감정위에 있느냐? 바로 감사와 기쁨입니다.
우리가 혹 자녀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걱정하며 기도합니까? 감사하며 기도합니까? "어찌 저런 십자가를 제게 주셨습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자녀를 주셔서 오늘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기쁨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며 기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녀 키우기 어렵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얻습니까? 오늘도 유아세례 받은 어린 아이들이 많은데 이 아이들이 한번 방긋 웃어주면 모든 피로가 사라지고 얼마나 행복해합니까? 그렇게 웃게 하려고 할아버지, 할머니 할 것 없이 오히려 어른들이 재롱을 부리쟎아요?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우리 자녀를 선택한 바가 없습니다. 요렇게 생기고, 이런 저런, 재능과 성격을 가진 아이 낳겠다고 우리가 주문할 수 없는 겁니다. 부모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동네, 어떤 직업을 가진 몇 살 된 부모 슬하에 태어나겠다고 신청하고 이 땅에 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결정사항이 아니라는 그 이야기는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우자도 그래요. 부모 자식과는 달리 내가 선택했다. 하지만 어디 정말 그렇습니까? 세상에 나와 다른 성(性)을 가진 사람이 수십억입니다. 그 가운데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산 사람으로 만 추려도 수억이 되고요.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만 해도 몇 백만이 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몇 사람이나 만나보고 결혼하셨습니까? 몇사람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내 선택이라구요?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지 않으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감사와 감격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짝 지워 주셨다는 고백이 없이 이런 저런 일이 다 있는 이 세상을 어찌 늘 감사와 감격 속에 산다는 말입니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면서 아주 많이 예뻐서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그래야 네가 사랑하지 않겠느냐" 아담이 하와를 쓰다듬으면서 다시 묻습니다. "어쩜 이렇게 고운 피부와 예쁜 몸을 가졌습니까?" "그래야 네가 사랑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 여자가 가끔 멍청할 때가 있는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하와가 너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했답니다.
부부사이에, 가족간에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분이 좋고 기쁠 수 있는 것은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다고 고백 할 때 입니다. 생각 할 때마다 미워서 분하고, 기도 할 때마다 한이 맺히고 눈물나면 안 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생각합니다. 그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떠올리며 감사하고 기쁨으로 가득한 행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디모데에게서 세 가지 아름다움을 봅니다. 우선은 디모데 속에 있는 믿음이 거짓 없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믿음! 진실이란 행동으로 이어지고 지속성을 가집니다. 한번 믿는다 하더니 없어졌다. 그것은 거짓이다. 사람들 앞에 보이려는 것 안 됩니다. 또한 거짓 없는 믿음은 순종을 이끕니다. 그 속에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순종이 나올 수 없습니다. 행동이 있는 믿음. 헌신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거짓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이 아니라 순전한 믿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디모데의 전통 있는 믿음을 귀히 봅니다. 이는 신앙의 가정적 전승입니다. 뿌리가 있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믿어온 것을 이어왔습니다. 그는 전통이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의 아버지는 헬라사람이고 어머니가 히브리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히브리 남자가 이방여자와 결혼하면 그 자녀는 이방인이 되고 히브리 여인과 이방남자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히브리인이 됩니다. 우리는 보통 부계혈통제를 갖습니다만 그들은 모계혈통을 원칙으로 합니다. 사실 신앙은 모계영향이 더 큽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영아기가 평생의 정서를 결정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말하기를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신앙적 전통이 있었던 것처럼 그 믿음을 잘 이어받은 믿음의 사람이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보니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부모의 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학교에 어린아이들 부서가 많습니다. 이 아이들은 혼자서 교회 올 수가 없지요. 부모가 주일 아침에 교회 데리고 오면 교회 오는 것이고, 들로 산으로 놀러 나가면 놀러가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부모가 억지로 찡그리며 교회 오는 것을 본 아이들은 교회 오는 것을 별로 기뻐하질 않아요. 부모가 일주일중에 교회 가는 주일에 가장 행복해하며 제일 좋은 곳에 간다는 얼굴로 자녀의 손을 붙들고 교회 오는 것을 본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곳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금 여러분 가정의 어린아이가 무슨 노래를 흥얼거립니까? 교회 유아부나 유치부에서 배운 찬양입니까? 아니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상품 선전 노래입니까? 얼마 전 한 권사님이 손주를 데리고 교회 마당에 서 계시길래 제가 다가가 인사를 했더니 그 아이가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무슨 노래를 불러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들어봤더니 유행가를 부르더라구요.
들려준 대로 듣습니다. 보여준 대로 봅니다.
전통이란 이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유아세례 받은 이 아이들이 늘 교회에서 뛰어 놀 겁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면 또 이 아이들이 바로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 낳고 다시 그 아이들이 세례 받으려고 나올 겁니다.
부모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부모의 신앙은 더욱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디모데 속에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금 일으키고자 하는 소망을 나타내며 그에게 이미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많은 칭찬을 듣던 디모데였지만 그의 신앙여정 가운데 많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많지 않은 나이에 바울에 의해서 책임을 맡고 나니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도 있었고, 심지어는 그의 연소함을 업신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모함과 시비를 받기도 했을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22절을 보니 모든 사람이 수긍 할 만큼의 연단과 훈련과정을 이미 다 수행한 준비된 사역자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한 날들 가운데 어찌 늘 밝은 날만 있었겠습니까? 힘들고 지치고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침체되어 있을 때에도 다시금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요, 소중한 동역자임 깨달아 꺼져가는 불꽃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귀한 역할을 바울이 기꺼이 자처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는 지금 바울에 의해서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에 긴장도 하고 두려워도 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지쳐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느만큼 성장하여 스스로 많은 일들을 처리 할 때까지 부모는 참으로 많은 것을 돌봐주고 해결해줍니다. 어려서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에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돌봐줍니다. 해마다 대입 수능 시험이 있는 날이면 교회에서는 입시생을 위한 중보기도모임을 엽니다. 지난해에도 어김없이 200명에 가까운 수험생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여쭤보니 아침이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 싸주고 차 태워 시험장에 넣어주고 이제 오는 길이라고 하십디다. 그뿐입니다. 시험을 대신 치러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더 많은 길을 이제는 같이 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의 고독과 번민, 좌절과 실의를 만난다면 그저 곁에서 위로하고 응원할 뿐 그 이상의 아무 힘도 해결도 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언젠가 그날이 오면 그마져도 누군가의 손에 맡기고 홀연히 우리는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의 손은 더 이상 붙들 수 없다 할지라도 영원하신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헤쳐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녀는 걱정하며 신음하며 염려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직 이미 내게 주신 은총과 구원이신 십자가의 은혜로 이끌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그분의 자녀로 자라게 할 믿음의 유업이라는 사실입니다.
칼럼니스트인 알비게일 반 부렌(Albigail Van Buren)이 지은「부모의 기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로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제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질문에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여주옵소서. 저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지 말게 하시고, 그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실수를 할 때에 비웃지 않도록 하여주옵소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만족이나 권위를 내세우려고 그들을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옵소서. 매순간마다 저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정직함이 옳음을 알려줄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제가 기분이 언짢을 때에 저의 입술을 지켜주시고, 그들이 어린이라는 것과 그들이 어른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할 수 있도록 저에게 참을성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저를 정직하고 바르며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시고, 그들에게 존경받고 본이 되는 부모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우리 주님께 구하기를 먼저 우리가 좋은 부모, 바른 부모가 되기를 간구해야 할것이며, 우리에게 우리의 자녀들과 후대를 이끌 능력과 지혜와 신앙적 경륜을 허락하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처/윤광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