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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탄식 (롬8:22-28)
얼마 전에 경기도 이천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급히 차를 몰고 오는 중에 길 한가운데 좋은 자동차 한대가 서있고 몇 사람이 비를 맞아가며 차를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보기가 딱해서 제가 차를 세우며 도와드릴 것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를 주유소까지만 좀 태워달라고 해서 동승을 하고 가며 물었습니다. "차의 어디가 고장이 났습니까?" 그 사람은 약간 계면쩍은 듯 하며 차가 고장난 것 이 아니라 휘발유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제 때에 기름을 채워서 다니시지 이 비속에서 웬 고생이냐고 했더니 휘발유의 양을 알려주는 게이지가 고장 이 나서 이런 고역을 치룬다고 진작 고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게이지는 불과 얼마 안되는 값싼 부속품입니다만 그 작은 부속 하나가 고장남으로써 아무리 좋은 차도 쓸모가 없게 된 것입니다.
자동차는 휘발유가 있어야 갑니다. 그러나 게이지가 고장이 나면 휘발육의 양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격의 게이지는 이상이 없습니까? 사실 그 자동차의 게이지는 벌써 고장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지금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을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없다하는 하나님을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가보지 못한 하늘나라를 가본 것처럼 믿습니다. 믿음으로 천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역사 속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시간시간 역력히 눈으로 보며 두려워하고 떨며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 입니다.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찬 세상이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중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믿고, 오늘도 주의 사랑이 여기 있고, 앞으로도 그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여기 있음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문 밖에서 두드리는 주님의 음성도 듣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두드리고, 사건을 통해서 두드리고, 계속 우리 마음 문을 두 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삽니다. 그 음성에 진실하게 응답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갔을 때 제자들은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유대 나라의 왕이 될 것으로 믿고 예루살렘 성을 돌아봅니다. 이 건물이 굉장하지요? 이 기둥이 굉장하지요? 자랑을 하면서 들떠 있을 때에 주께서는 감람산 기슭에 올라가셔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 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면서 우셨습니다. 사십년 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깨끗하게 망하게 될 그날을,그 결정된 심판의 날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저들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들었기에 우셨습니다.이것이 믿음의 사람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깊은 탄식이 있습니다. 이 탄식 소리가 들립니까? 대포 소리는 들을줄 알면서 양심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들으면서 의인의 슬픈 탄식은 듣지 못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탄식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정결한 귀입니다. 깨끗한 마음이어야 이 깊은 탄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함께 느끼며 공감대를 형성하며 같은 생각, 같은 뜻을 가질 때만이 비로소 이 탄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이라는 말은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라는 신학적 전제를 근거로 말씀하는 것입니다.성령은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에 마수적으로 역사하거나 폭탄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역사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여 마치 옆에 한 사람이 있듯이 보혜사 성령이 되셔서 나와 함께 계속 이야기를 하십니다. 권면하시고, 책망하시고, 때로는 슬프하시며, 심판하시며, 탄식하십니다. 성령의 탄식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을 때에 슬퍼하십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슬픔이요, 사랑의 아픔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몸이 아픈 것은 알아도 마음이 아픈 것은 모릅니다. 때로는 마음 이 아픈 것까지 알아도 영혼이 아픈 것은 모릅니다. 탕자는 배고픔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아픈 마음은 헤아릴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보이는 사업의 실패는 알아도 나를 위하여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의 탄식은 들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탕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 안에 계셔서 탄식하고 있는 탄식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보이는 것에 끌릴 때 탄식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양심, 의,선, 진리, 자유,은혜 이 모두가 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것,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깊은 것, 손으로 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부딪치는 것,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물질이 아니라 영혼, 금세가 아니라 내세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나는 너의 자랑이 되고 너는 나의 자랑이 되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 마음의 근거를 두고 그리고 오늘을 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이 아니요, 사람들의 구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사람들이 날 보고 무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느냐 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죽어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서 어떻게 심판을 받느냐 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의식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세속화 되고 물질주의화 되어버렸습니까? 누가 부자를 복되다 하고 가난한 자를 저주 받았다고 할수 있습니까? 누가 건강만이 복이요, 병든 것이 저주라고 말했느냐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우리의 축복관이 물질주의화 해 버리고 자본주의화 해버렸습니다. 여러분, 부끄럽게 돈을 벌고 사는 것 보다는 의로운 가난이 복된 것이 아닙니까? 추한 생을 오래 살기 보다야 의롭게 빨리 가는것이 옳은것이 아닙니까? 부끄러운 생을 오래 산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믿는 사람의 생각은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영원한것을 버리고 현세적인 것을 택하고 신령한 것을 버리고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느냐는 말입니다. 현재의 것만생각하고 영원한 가치의 것을 소홀히 여길때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축복과, 우리의 신앙이 현세적으로 물질주의로 세속주의로 기울어 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인내가 부족할때 탄식하십니다. 신앙 생활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내의 생활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롬8:25). 기다림, 대망,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거가 있습니다. 약속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 리고,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기다렸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다 기다렸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도 기다렸습니다. 특별히 욥의 인내를 우리가 압니다. 오직 하나님의 위로만을 기다리며 끝까지 버티고 기다려서 주의 은혜를 받는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고보서에서는, 욥의 인내를 배우고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농사하는 사람이 씨를 뿌려놓고 부지런히 수고하며 끝까지 가을을 기다리는 인내, 그 속에 신앙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이 멀 다고 지치고, 험하다고 포기하고, 원수가 악하다가 내가 더 악한 사람이 되고,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내가 함께 부조리해 버리고 만다면 성도의 인내는 어디 갔습니까?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처음 마음, 처음 사랑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참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잘 참다가 중간에 터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내가 10년 동안 참았다고 참은 것을 내 세웁니다. 참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참은 것입니다. 참은 것을 내세우고 나면, 10년 동안 참은 것이 아니라 벼른 것이 됩니다.
우리 인내의 끝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여러분, 참기 시작했으면 불만, 신세타령, 원망하면서 참지 말고 끝까지 깨끗이 참읍시다. 처음 사랑, 처츰 마음으로 일관해야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랑을 버렸느니라"(계3장), 처음에 가졌던 헌신으로, 처음 진실로 끝까지 관철해야 합니다. 도중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 의 면류관을 얻으리라."충성이라는 말은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끝까지 진실하라. 그 끝이 어디입니까? 도중에 진실을 져버려서는 안됩니다. 은혜로 시작했으면 은혜로 끝내야지 처음에 가졌던 목적이 변경되어서는 안됩니다.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믿음으로 끝내고, 주는 것으로 시작했으면 주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바치기로 생각했으면 바쳐버릴 것이지 무엇을 지체하고 있습니까? 남이 알아주기를 바랍니까? 사랑으로 시작했으면 사랑으로 끝내야지 이제 다시 무슨 미움이나 원망이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쳐서 성도의 인내가 끝날때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가 흔들릴때 탄식하십니다.야고보서 4장에 보면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다. 실패했을 때에 정치적 이유라고 변명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학적 이유를 다 들어 말하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 이유가 있다면 오직하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와 함께 하고 기도로 끝냈으면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한 죄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중단한 죄가 있습니다. 기도가 막히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다른 일은 다 잊어버릴 수가 있어도 기도가 막히면 못삽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끊어질 때 엄청난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빌 바를 모를 때 탄식을 하십니다. 다시말하면 기도의 제목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욕심을 걸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제목이 틀린 것입니다. 그것이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소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때 성령은 탄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들어보십시다. "하나님이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처음 기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도를 들어 보십시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성령이 도우시는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산에서 내려오실 때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십자가를 수락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소원 자체가 빗나가고, 기도 제목 자체가 정욕저이고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기도로 잘못 가고 있으면 성령은 탄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간구하는 소원과, 여러분의 기도 제목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교회도, 세상도, 하나님의 나라도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소원의 기도 제목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때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정욕에, 욕심에 끌려서 세상에 빠지면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빌바를 모를 때 탄식하십니다. 여러분, 회개를 생각하십니까? 회개는 오늘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벌써 했어야 했습니다. 성령의 탄식을 벌써 들었어야 했습니다. 오늘 애통하는 문제, 중요합니다만 이미 애통했으면 오늘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이라도 애통할 수 있을 때에 내일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탄식을 듣습니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맙시다. 성령을 소멸하지 맙시다. 성령의 역사에 순종합시다. 큰 일이 있기 전에 오히려 편안할 때, 오히려 안일한 바로 지금, 성령의 탄식을 듣고 순종하고, 회개하고,진실하게 애통하면 이제 성띵여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일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