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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2:1-9
오늘 봉독한 말씀은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써 메시아의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성품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와 각색 병자들을 다 고처 주시고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시면서 오늘 봉독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을 암시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대’란 약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갈대’라고 말한 것은 약한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말입니다. 갈대 같은 애굽이란 말도 약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하는 말도 역시 연약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갈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있는 사람을 가리켜 무쇠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인간의 체력이란 그리 든든하지 못합니다. 오늘 건강한 사람도 언제 쓰러질지 모릅니다.
또한 철석같은 의지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잘 사용하지만 사실 인간의 의지는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작심 삼일’이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40장에 보면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사람은 약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는 말씀도 인생의 무상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동시에 인간의 연약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초로 같은 인생’,‘안개와 같은 인생’이라는 말 역시 인생의 무상함과 약함을 우리에게 실감나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정말 갈대나 메뚜기와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갈대는 이렇게 약하니 상하기 쉽습니다. 세찬 바람에 꺾이기 쉽습니다. 짐승이 한번만 지나가도 짓밟히거나 상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생의 모진 풍파에 시달리며, 천재지변과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등등 여러 가지 사고로 짓밟히고 시달려서 문자그대로 육체가 상하고 심령이 깨어집니다.
여러분, 요새는 숨도 돌이킬 사이도 없이 대형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도되는 TV와 신문을 볼 때마다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비행기 잔해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은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여기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육체는 문자그대로 상한 갈대요, 메뚜기 같은 존재입니다.
더욱 무서운 죄로 말미암아 모든 심령들이 문둥이처럼 이리 터지고, 저리 갈라지고 상하여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인생은 상한 갈대입니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멀쩡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알고 보면 어디나 상처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상할 대로 상해서 신음하는 소리가 없는 심령이 별로 없습니다.
말하지만 인생이란 바로 상한 갈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상한 갈대를 흔히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꺾어 버리고 밟아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불한당을 만나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져 죽어가 있습니다. 그냥 두면 곧 죽을 것입니다.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레위 사람도 그저 지나갔고, 제사장도 그저 지나갔습니다. 오늘날도 무관심하게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자 생존’이니 ‘약육강식’이니 ‘자연도태’니...이런 말을 인류 사회까지 적용할 만큼 험악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짐승의 세계에나 있는 일이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만물의 영장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인생들이 비참하게 된 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이렇게 인간을 악하고 추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존경쟁에 낙오된 자는 넘어지고 맙니다. 상합니다. 죽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지구촌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기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복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한 갈대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다시 밝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참된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해주신 메시아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시는 곳마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죄에서 신음하는 심령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손 마른 자를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셨습니다.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상하고 병든 심령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죄로 상하고 병들어 쓸모 없는 인간들이지만 꺽어 버리지 아니 하시고 회복케 하셔서 구원해 주시는 사랑과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며, 마음에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셨습니다. 전혀 소망이 없어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참된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하심이요, 사랑입니다.
요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주님 앞에 끌고 와서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처서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그 여인은 문자그대로 상한 갈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꺽어 버리기를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얼마 후에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있거든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에게 던져라’ 그리고 다시 땅에다가 무슨 글을 쓰셨습니다. 얼마 후에 보니 살기 등등하여 소리치든 사람들은 모두 다 돌아가고 그 여자만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잘하기 때문에, 좋아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기 때문에 사랑하는 조건적 사랑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롬5: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의인이든 죄인이든 관계없으신 사랑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시되 피한 방을 물 한 방울 남기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배우고 아는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랑하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이에나 같은 왕비가 있었더라면 벌써 폐위가 되어 사약을 마시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고로 죽었다면 ‘잘 죽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허물과 잘못은 들추어내고, 장점은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녀의 허물과 단점을 보기보다는 장점만을 생각하면서 그를 높이고 칭찬하였습니다. 장례식에서 기도하는 내용 가운데 ‘그녀에게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주셔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돌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차이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아는 사람들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기 오는 차이입니다. 인간다운 참된 인격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배우고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돌아가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잃고 실망과 낙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설상가상으로 더욱더 고달프고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많은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써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고 주님께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일을 생각하면 면목이 없었습니다. 장담하고 큰 소리쳤지만 예수님이 잡히실 때 약속대로 하지 못하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게다가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죽음을 모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상한 갈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만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른 것을 물으셨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물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 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때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엄청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회복시켜서 쓰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하심과 진정한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빈궁과 실패와 병과 슬픔과 죄에 상한 심령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주시고,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집에 합당한 성결하고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써 경건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도 오로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연기가 나는 삼대를 끄지 아니한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불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불 띠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빛은 발하지 못하고 연기만 납니다. 그러니 비벼서 아주 꺼버리는 것이 날 법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작은 불티를 멸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숨결로 불어서, 성령의 바람으로 불을 다시 일으키고 큰 빛을 발할 수 있는 등대를 만들어 주십니다.
제아무리 사람의 눈에는 소망이 없이 인생이지만 그 심령 깊은 속에는 아직은 불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속 어느 구석에 있는 실낱같은 양심입니다. 그래서 진, 선, 미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작은 불티를 일으켜서 회개케 하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 당시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삭개오를 매국노로 정죄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돈을 거두어다가 이방 로마 사람에게 바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불의와 토색을 하였습니다.
탐관오리요, 돈만 알고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예수님이 그곳으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키는 작고 사람은 많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뽕나무 꼭대기로 올라 갔습니다. 이것을 보면 삭개오의 마음 속에 의를 사모하는 작은 불티가 남아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꺼저가는 등불을 다시 돋우어서 큰 등불이 될 수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았고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배우고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토색하고 빼앗던 사람이 주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마다 이와 같이 회복시켜서 큰 등불을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사람도 꺼저가는 등불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로써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남을 위해서 무슨 봉사도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슨 봉사도 못합니다. 불티만이 있으니 연기만 납니다. 그 연기는 사람들의 눈을 쓰리게 합니다.
이렇게 작은 믿음은 연기가 많이 꺼립니다. 의심의 연기가 있고, 근심의 연기가 있고, 불평의 연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거나 유익을 주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렇게 작은 믿음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믿음이라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귀히 여기십니다. 추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불티라도 다시 돋우어서 빛을 밝히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하심과 온전한 사랑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에 도마는 주님 앞에 엎드려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도마는 의심의 연기 속에서 꺼저가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작은 믿음의 불씨를 돋우어서 큰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 가까이 나오기만 하면 다시 말하다 기도를 좀 더 힘쓰고, 성경을 좀더 보시고, 예배에 좀더 열심히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작은 믿음이거나 의심에 눌린 믿음일지라도 그 불을 돋우어서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큰 믿음의 등불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치료함을 받고, 꺼저가는 등불이 돋우어져서 이 어둡고 캄캄한 세상을 복음으로 밝히 비추는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0월은 전도의 달로 정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좋은 계절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주변에 상한 갈대와 꺼저가는 등불과 같은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저가는 심지와 같은 심령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언제나 새롭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로써 절망과 어두움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과 소망의 빛인 이 복음의 빛을 비추는 사랑의 큰 등불로 사용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