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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36-43
무엇을 안다고 하는 일은 원래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안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보탠다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기란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자기를 아는 일과 자기에게 진실하다는 일, 두 가지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피곤하다고 합니다. 피곤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것은 위선과 가장과 허세가 가져다주는 부산물입니다. 간혹 실망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실망했고, 가정에 실망했고, 친구에게 실망했다고 한탄합니다.
사실 실망이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이 그 실망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시켜 놓고 너로부터 실망했다고 넋두리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믿기에 남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실망 할 것도 못됩니다. 진작 깨달았어야 했던 것을 이제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고 무엇인가 좀 이룬 줄 알았는데 이룬 것도 없고, 가진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결산해 보니 적자투성입니다. 조금은 의로운 줄 알았는데 불의한 것을 이제사 알게 되고, 남보다 나은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평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도 못되는 비참하고 나약한 자기를 바로 볼때, 자신에게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처럼 되찾은 진실입니다. 실망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비로소 본래성을 찾은 것입니다. 남의 물건도 빌려서 오래동안 쓰고나면 내 물건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돌려줄 때는 아쉬운 것입니다. 여러분, 가면도 너무 오래 쓰고 살면 꼭 자기 얼굴인양 느껴집니다. 가면을 벗으면 오히려 어색합니다. 위선이라는 것이 체질화 되고 나면 그것이 본래 [나]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나의 얼굴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입니까?
본문 성경에 두 인물이 나타납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인간상입니다.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세리요, 또 하나는 창기입니다. 이들은 공개적인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 (성경학자들의 의견을 모아 보면 막달라 마리아 이라고 한다)은 창녀 출신이요, 일곱 귀신이 들었던 여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어서 맑은 정신을 찾았지만 본래는 벌거벗고 소리지르며 다니던 미치광이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별명은 바리새인인데, 바리세라는 말은 구별한다 또는 성별 한다는 뜻입니다. 남보다 더 깨끗하게 종교 생활을 하며 남보다 더 온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바에 의하면, 어느 날이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대접을 하게 됩니다. 이 잔치에 죄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불청객으로 들어옵니다.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 밑에 서서 울면서 그 눈물로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기고 입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겸손이요, 회개요, 충성이요, 자기 생명을 바치는 헌신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집주인인 시몬은 이 여자를 못마땅해했습니다. 처음 문간에서부터 말리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그녀를 받아들이시며 영접하시므로 감히 나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모신 이 분이 정말로 선지자이면 이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 줄을 아실 것이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아시고 "시몬아, 내가 네게 할 말이 있다"하고 시몬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시몬은 "선생님, 말씀하소서"하며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빚진 자가 둘 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두 사람 다 갚을 길이 없다. 그래서 빚을 주었던 사람이 다 탕감해 주었는데 둘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대단한 용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의도는 네가 이 여인을 업신여기지만 너도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죄인이다. 네 생각에는 네가 저 여인보다 조금 의롭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빚지기는 마찬가지다. 즉 갚을 수 없는 입장은 똑같다고 전적으로 책망하시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상대적 관계와 절대적 관계를 혼돈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바리세 교인이 났습니다. 다소라도 나은 데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남보다 조금 났다는 요건 때문에 정말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모습, 자기 존재를 상실하고 맙니다. 남보다 돈이 조금 더 있습니까? 남보다 공부를 조금 더 했습니까? 혹은 지위가, 혹은 깨끗하게 살았습니까? 남보다 조금 더 났다고 하는 상대적 관계에 신경을 쓰다 보니 교만하고 업신여기게 되어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인 된 모습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시몬은 이 여인으로 인하여 자기 존재를 잃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앞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잊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도 지금 빚진 죄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더 많은 빚을 졌기에 더 사랑하느니라 라는 의도로서 이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단지 두 가지 죄인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또 하나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소설 "주홍 글씨" 가 생겨납니다. 여기 나오는 여인은 죄인의 표시로 가슴과 등에다가 빨간 글씨[A]자를 붙이고 다닙니다. [나는 죄인이오]라는 표시입니다. 이 여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죄를 짓게 한 남자는 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 남자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오늘 본문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다하지 못한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종교적 의무의 상실을 말합니다. 또한 매여 있고 부자유한 상태를 말합니다. 빚은 꼭 갚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몸으로 일을 해서라도, 즉 노예가 되어서라도 갚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다 갚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실 하려고 노력해 본 사람은 진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압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의롭고 살아보려고 노력한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진실한 고백이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애썼더니 교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을 위해 살려고 했더니 위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님을 찾아다니다가 우상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깨끗하게 산다고 했으나 게으른 사람이 되었고 불 신앙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의를 생각한다고 했더니 교만한 옹고집이 되어 아집의 인간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돈, 명예, 권력, 지식 무엇에 내 놓아도 하나님 앞에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진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습니다. 스스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월이 지내고 나이가 들면 갚을 수 있을 리라 생각하지 맙시다.
다시 한번 더 속지 않으려면 자기 부정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능력에 대해서 동정할 것도 없습니다. 깨끗이 부정하고 무효로 돌립시다. 죄인의 선한 행실은 공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죄만 짖는다"고 자기 얼굴도 모르고 위대한 사도로만 알고 있는 로마 교인들에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일면입니다. 실패를 깨끗이 시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시몬도 자기의 불가능을 진작 알았더라면 이 여인을 멸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주인이 탕감해 주십니다. 갚을 것이 없는 자에게 기다리거나 책망한다고 되겠습니까? 이제 탕감해 주었습니다. 다 탕감했습니다. 주인 편에서 즉, 하나님 편에서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의 계시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지불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유일한 소망, 유일한 가능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갚을 길이 없으니 주인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죄인은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리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죄인의 괴수를 불러서 구원하셨으니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할 말이 없고, 사도가 되었으니 더욱 할말이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나 할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또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은 이 은혜 앞에서 세계관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율법적인 관계에서 보면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둘 중에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다소 의로운 자요, 조금 더 나은 사람이겠습니다. 그러나 탕감 받은 위치에서 은혜의 관계로 보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보다는 오백데나리온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입었고 더 많이 주인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씀이빈다. 많은 것을 탕감받았으니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많은 것을 탕감받았으니 많이 사랑한다는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죄인 중의 죄인으로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아닙니까? 그는 남보다 더 많은 은혜를 입었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탕감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말합니다."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당연한 말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탕감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머리털로 발을 씻기며 회개할 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본문 50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딸아, 평안히 가라"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라는 말이 성경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만, 이 본문과는 그 뜻이 다릅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병이 낫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오늘 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라는 뜻이 "네 믿음이 너를 의롭다 함을 입도록 했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달아, 네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안심하고 평안히 가라'는 귀한 뜻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죄인됨을 알고 구제불능함을 알고 오직 은혜로 주님 앞에 나왔기에,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크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강한 부채 의식과 동시에 탕감받은 의식이 합쳐져서 더 높은 사랑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과거 현재도 미래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살뿐입니다. 어차피 은혜로 산다고 하면 은혜를 많이 입은 자가 많이 사랑하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부인이 이야기 하기를 자기는 인물도 시원치 않고, 아는 것도 없고 재주도 없는데 남편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고마움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할수록 고마운 마음은 더 짙어 집니다. 그러나 못난 사람일수록 자기만큼 상대방이 살아주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다고 섭섭해 하고 실망합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만이 넘칠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바울의 뜻이 무엇인지 이제 알만 합니다.
시몬은 비교적 의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감격을 모르기에 불쌍한 사람입니다. 회개와 감사는 병행합니다. 회계의 깊이와 은혜의 높이는 함께 이루어집니다. 나의 나됨과 나의 무능함을 시인하면 할수록 더욱 감사하게 되고 헌신하는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