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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9:97-104
교인들로부터(특히 젊은이들)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만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선악과를 있게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데 그것을 없게는 하실 수 없었나요? 하는 질문입니다. 저도 역시 하나님께 여쭤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십니다. 때로는 심판하시고 또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세계에도 엄연한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의 법을 간단히 한마디로 말한다면 율법과 은혜입니다. 율법과 은혜의 질서, 그 신비로운 조화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율법과 은혜는 극과 극의 관계로서 정반대의 성격인 것 같습니다. 즉, 율법이라고 하면 차갑고 매섭게 느껴지고, 은혜는 따뜻하고 안온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온전히 조화되고 또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깊은 신앙 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고 한 사건 속에 계시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무서운 진노 속에서 계시되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인간들의 방법대로 분석해 본다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법칙입니다. 온 우주는 자연법이라고 하는 법칙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그 속에 법과 질서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보이지는 않으나 이 세상의 모든 생물 세계에 있는 본능의 법입니다. 생존 본능, 의식 본능, 귀소 본능은 생물 세계는 본능에 의한 질서와 법이 엄연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법이 살아 역사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인간은 그보다 좀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대로 양심의 법을 지녔습니다. 즉, 이성의 법입니다. 사실 교도소나 경찰이 무서워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마음의 법, 양심의 법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 석자를 못쓰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에는 법이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좀더 높은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법을 지니고 있고 성령의 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법, 말씀의 법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상의 법들을 다시 종합해서 둘로 나누면 하나는 자연론적 법(기계론적 법)입니다. 이 법은 불가피성이요,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법은 인격적인 법으로서 은혜와 율법이 조화된 법입니다. 이 두 가지 법(즉 모든 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법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법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한가운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신 뜻, 즉 선악과를 우리에게 주신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활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말씀의 계시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계약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계약입니다. "따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계약입니다. 반대로 먹지 않으면 영원히 살리라. 약속입니다. 이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인격적인 약속입니다. 인격적 관계이기에 여기에 있고 선택이 있고 여기에 자기 나름의 존재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계약을 어기고 따먹은 자는 꼭 변명을 합니다. 왜 이것을 만들어 놓았으며 먹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느냐, 또는 만들지 않을 수는 없었는가 하고 묻습니다. 마치 강아지 목에 사슬을 맨 것처럼 해서 못 따먹게 하든지, 아니면 철망을 쳐서 들어갈 수도 없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불평입니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강아지로 하락시키는 것밖에 안됩니다.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다릅니다. 못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안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이 자율적인 것에 인간다움이 있고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합니다.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먹지 않습니다.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갑니다. 그래서 인간이고 존재됨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범죄한 자나 타락한 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합니다. 그 순간에 벌써 비인간화되고 존재가 부정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가피했다고 한다면 나의 존재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가운데서 이 말씀의 계약을 지켜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의 법을 놓고 보더라도, 법이 누구를 위해 지키는 것입니까? 내 자유를 위해 지키는 것입니다. 간혹 나라의 법이 잘못되어 어떤 특정인 몇 사람을 위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진국의 경우이고, 선진국의 국민은 법이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 양심을 위하여, 내 자유를 위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자요, 그것이 바른 인간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지켜서 자유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못된 사람은 법을 빠져나가서 자유인이 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법 자체에 도전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세상 떠나기도 전에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주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말입니다. 그렇게 못된 자식인 줄 알면서 돈을 왜 줍니까? 돈이 없었으면 그렇게 방탕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유산을 주었습니다. 아들 책임입니까? 아버지 책임입니까? 생각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더 형편없는 탕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 아들에게 돈을 주어 방탕할 기회를 주고 그리고 기다리기는 무얼 기다리느냐고 묻고 싶지 않습니까?
이 탕자 아버지의 깊은 뜻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아버지는 끝까지 그 아들을 아들로 대했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은 다 없애도 좋으니 제 발로 걸어와서 진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불러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아들을 가지 못하게 붙잡아 앉혔다면 종과 주인의 관계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법이 형벌로 인해 문제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형벌이 과중하냐, 가벼우냐고 신경을 쓰는 것은 2차적인 문제입니다. 법 자체를 부정하고 법이 잘못되었다고 논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하는 동안 벌써 비인간화되고, 비인격화되어 스스로 노예가 되는 타락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7장 전반에 걸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의 문제를 신랄하게 논거 합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이 선한 것을 내가 안다는 말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죄인이어도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 되더라도 율법 자체가 선한 것은 끝가지 선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7장 10절에 말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되었도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이 귀중한 법이 결과적으로 내게 하여는 (죄인에 대하여는) 부득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법이 되어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양심, 이성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인간들의 타락과 함께 자꾸 희미해지고 깨진 그릇처럼 원형을 찾을 수 없게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과 법을 바로 잡기 위하여 모세를 통해서 법조 문화(성문화)해서 십계명을 주시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도 법은 있었습니다. 이제 십계명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에 있는 법을 깨우치려 하시는 것입니다.
법의 근본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법의 원 정신은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법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그렇게 주어지고 그렇게 받고 그렇게 믿고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특별히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마다 십계명을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대표자인 마틴 루터는 카키즘이라고 하는 그의 책 가운데 십계명을 해석하고 그 해석한 바를 교인들에게 암송하게 하고 그대로 살아가라고 훈계했습니다. 왜 십계명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깁니까? 그 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십계명이 주어진 곳에 애굽이 아니고 광야입니다. 애굽에 있는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이것을 지키면 산다. 복 받는다 가 아니고, 이미 애굽에서 광야로 홍해를 건너 구원해 놓으시고 "내가 너를 구원한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런고로 이 계명을 지키라" 즉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로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법을 지켜야 하되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인적인 뜻에서 이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하고, 믿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죄인들은 법 자체를 나무라고 형벌의 의식에 매입니다. 어느 청년이 목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갔습니다. 그 청년은 "목사님 저는 십계명을 싫어합니다. 십계명에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하면서 십계명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대답할까 하고 생각하는데 바로 앞에서 이정표가 나타났습니다. [동쪽은 00이고, 서쪽은 00이다]라는 이정표를 보고 목사님은 자기들이 가야 할 목적지와는 반대로 차를 꺾었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목사님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목사님은 "이 사람아, 내 마음대로 가면 되지 뭘 그래" 하며 암시적인 대답을 주었습니다. 자 빨간 신호, 파란 신호가 귀찮게 느껴집니까? 누구를 위한 신호입니까? 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법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완성하셨습니다. 법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로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어느 유대 랍비와 신 교인이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 교인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왜 맛있는 새우나 기름진 돼지고기 등을 먹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시니 안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안 먹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을 알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효자가 따로 있습니까? 아버지가 [해라] 하시면 자기에게 좋은 것인 줄 알고 그대로 행하고, 어머니가 [먹으라]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나를 위한 것인 줄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알아서 하시리라 믿는 것입니다. 설사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왜]라는 질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마음을 쓴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뜻의 소재가 어디 있는가를 물을 뿐입니다. 다만, 믿고 가노라면 먼 훗날 이것이 옳았음을 알고 감사하며 고백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며, 그의 말씀은 모두가 사랑이며, 그의 법은 전부가 내게 향한 축복의 길인 줄 알고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나이다."(시119:99-100) 스승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지혜롭고,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말씀을 따르고 보니 노인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따라 사는 영광 중에 지혜롭게도 되고 명철하게 되고, 자유롭게 되고, 그리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그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