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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12-18
제가 전도사로 시무했던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이 40대 초반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때 그 장로님은 매우 유능한 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암으로 40대 초반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산 복음병원에서 저는 그분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와 가족들이 둘러 서 있는 병상에서 장로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담임목사의 손을 꼭 잡고 “목사님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눈을 감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구원을 크게 보라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구원의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정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라면 오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을 받은 자로서 오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납니다. 붙잡힙니다. 보여집니다. 평소에는 우리에게 구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기차를 같이 타고 가면 구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고객들 가운데 구원 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고, 보여지고, 내가 구원받은 것을 다른 사람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종말론적입니다.
왜 우리는 구원을 말하는가? 교회의 존재이유 가운데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목적입니다. 왜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가? 교회가 왜 예배당을 짓고, 돈을 들여 행사를 하는가?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목적이 없다면 교회는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두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성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목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숨을 거두고 하늘나라로 가는 생명을 위한 목회도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사람은 늙어서 그대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합니다. 금년 한 해만 해도 우리 성도들 가운데 하늘나라로 간 분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병들어서, 혹은 사고로, 젊어도, 늙어도 하늘나라로 갑니다. 이렇게 한사람, 한사람 가다보면 여러분과 제 차례가 옵니다. 언젠가는 옵니다. 잘 살고, 못 살고, 잘 되고, 못 되고, 배우고, 못 배우고…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내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우리의 모든 문제는 그 마지막 순간에는 전혀 필요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받을 구원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경험화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구원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받은 구원을 간직하지 말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쁘고, 은혜롭고, 축복을 받고, 그 구원으로 인하여 당당하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너희들에게 경험화하라는 것입니다. 냉장고에 식품을 가득 사 놓으면 뭐합니까? 때를 따라 꺼내어 요리해서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현장화하라는 것입니다. 창고 안에 넣어 두는 구원이 아니라 날마다 그 구원을 우리가 살아가는 발걸음 속에 함께 그 구원이 묻어나도록 현장화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보충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주신 그 구원을 너희들이 마음껏 누리고 은혜 받고, 복 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교회는 천국 가는 대합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기다렸다가 앞차로 가고, 뒤차로 가는 차이일 뿐 다 천국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삼차원적으로 설명합니다. 과거의 구원입니다.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의 구원을 자주 강조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 구원은 과거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살아가라. 현재 구원입니다.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광야를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입니다. 그 광야를 통과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여호와의 땅이 있다. 그 땅에 들어갈 길을 예비하라. 가나안에 입성하는 미래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하여 현재적으로 강조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현재 구원을 강조합니다. 지금 너희들이 구원을 누리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인격적인 구원이고, 온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살아계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하는 인격의 신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전한 복입니다. 구원은 온전한 것입니다. 조금도 첨가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받은 그대로 온전한 것입니다. 이 온전하고 인격적인 구원을 우리가 또한 인격적이고 온전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구원을 주신 그 하나님 앞에 우리도 인격적으로 그 구원을 이루고,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응답
인격이라고 할 때 3가지 요건이 요구됩니다.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여기에서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사람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을 우리가 말할 때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인격 안에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영으로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구원받은 자입니다.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지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내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자기 뜻을 위하여 일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은 구원을 붙잡고 일하면서도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옥중서신에서 ‘알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바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분이 너희 안에 거하심을 알고, 그 분이 너희 소원을 이루시는 줄 알고, 그 분이 너희 소원을 통하여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즉 지성의 구원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는 믿으면서도 못 깨닫고 믿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믿었으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성의 구원이 일어나야 온전한 구원의 한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일은 기적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기적으로 살면 안 됩니다. 바로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눈앞에 있는데도 둘러갑니다. 여러분은 둘러 가는 길로 신앙생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가십시오. 시간낭비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 한번 가고 나니 깨닫습니다. 건강할 때는 도무지 주님 뜻대로 살 줄 모르던 사람이 병원에 가서 한번 시련을 겪고 나니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름길로 갑시다. 병원에 한번 가지 않고, 건강할 때 깨달으십시오. 병상에서 보내는 시간은 아까운 시간입니다. 사고를 당해서 깨닫는 친구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바로 가르쳐 주는데도 그것을 왜 돌아가면서 깨닫습니까? 가치관을 바로 붙잡으십시오. 왜 사는지 삶의 가치관을 바로 붙잡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구원이 복이 되도록, 그 구원이 빛나도록, 그 구원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도록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성적인 응답
한 생명 전도를 하자고 하는데 그 구원은 100번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뜻이 있도록 신앙생활해야 나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자로서의 기쁨을 가지고 살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 때 또 다른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또 다른 구원을 말합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구원이 전도입니다. 구원의 가치를 가지고 전도해야지 전도라는 말 가지고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내 삶속에서 의미를 나타날 때 복음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그리고 12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감성적 영역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심이 아닙니다.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학생은 교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즉 존경해야 합니다. 공포심이 아닙니다. 자식은 부모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사람과의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하나님 앞에 겁없이, 버릇없이 살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흐트러진 자세로 할 일이 아니라 여호와의 인격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 분이 기뻐하는 바를 나도 기뻐하고, 그 분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그 분이 의도하는 것을 나도 의도하는 그 마음이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제 친척 중에 고종형님이 계십니다. 아깝게도 수년전에 사망했습니다. 저는 그 형님을 존경할 뿐 아니라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자랐습니다. 한 가지도 나는 그 형님을 추월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두뇌가 좋은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줄곧 전교 1등을 했습니다. 장학생이 되었고, 영어 소사전을 중학교 때 다 외었습니다. 3학년 때 그 당시 대기업에서 특별전형으로 30명의 사원을 뽑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시험은 약 300:1의 경쟁률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고교 졸업자로서 유일하게 합격을 했습니다. 합격할 때 순위가 30등입니다. 그런데 6개월의 연수를 받고 시험을 쳤는데 1등을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비상했습니다. 이 형의 특징은 교사를 두려워합니다. 선생님이 시키면 그대로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이라 하면 에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 매일 6시간~8시간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 뛰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천적인 응답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12절 말씀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 앞에 붙은 수식어가 얼마나 강한 말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항상 복종하라.” 행동입니다. 인격적 구원이라는 것은 깨달음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마음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행동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고, 마음이 하나님께 가는 것이고, 행동이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이 3가지가 다 이루어지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냥 너희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입니다. 구원을 경험해 가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양편의 강도 두 사람이 함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강도는 한 사람은 구원에 이르렀고, 한 사람은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임종을 맞이했지만 한 인생은 천국으로 가고, 한 인생은 지옥으로 갔습니다. 구원을 받은 한 강도는 예수님을 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아 이 사람은 의인이다. 이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죄가 있어 죽지만 이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이고, 이 분의 가르침은 그른 것이 하나도 없도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해 보라.” 예수님을 향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메시야로 깨달은 그 강도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이 메시야임을 믿습니다. 내가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합니다.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신앙고백입니다. 마음을 열었습니다. 마음의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생명을 부탁했습니다. 주님은 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도에게도 3가지 인격적인 요건의 구원이 성립된 것입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그 분께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인격적인 구원의 요건을 가지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루어 가기 바랍니다. 구원은 머릿속에 머물면 안 됩니다. 오늘 예배 중에 아멘으로 끝나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을 움직여서 우리의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구원이 경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승을 승리하기 위해
요즘 올림픽 뉴스를 많이 듣습니다. 감동적인 경기를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결승전을 좋아합니다. 결승전이 하이라이트입니다.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어느 국가이든 큰 감동을 줍니다. 결승을 영어로 final game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준결승을 semifinal game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결승에서 지면 억울해 하고, 분해하고,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경기를 보는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진짜 억울한 것은 준결승에서 탈락하는 것입니다. 이 준결승에서 탈락하는 것만큼 억울하고 애석한 것이 없습니다. 위로해 주어야 할 선수는 준결승에서 탈락한 선수입니다. 결승에서 지는 것은 준결승에서 지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결승전에서는 져도 은메달입니다. 결승에 올라간 것 만해도 영광입니다. 결승전에 진출했다는 뉴스도 국민을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진짜 억울한 것은 준결승 탈락입니다. 우리나라 조석환 선수가 준결승에서 이겼으면 역사상 최초로 남북대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에서 권투 남북대결이 이루어지는 이것을 미리 뉴스로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선수가 준결승에서 졌습니다.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우리는 주님 앞에 서야 하는 마지막 결승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결승전이 앞에 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것은 전부 semifinal입니다. 그 날의 결승전을 위한 과정입니다. 준결승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준결승에서 지고 결승이 오리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인생살이의 준결승을 패배하고 결승을 기대하는 망상이 많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인생은 준결승을 승리해야 영광스러운 결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준결승에서 이기고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 준결승에서 이기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그래야 오늘 우리 예배가 당당한 것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semifinal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마지막 결승 때 주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완결해 주십니다. 영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날에 이르기까지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다 semifinal 과정입니다. 8강, 4강을 다 치루면서 올라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루하루 멋진 승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 이루라.” 이 말씀이 축복의 음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