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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 (잠16:16-20)
봉독한 말씀 중에 20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자.
삼가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
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성경을 읽고 무엇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는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
떠해야 하는가?
20절의 말씀은 ‘말씀을 주의하라 좋은 것을 얻는다 ’하더니 그 후에는 ‘여호와를 의지하
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
‘말씀을 주의하라’는 말은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서 말씀을 대하라는 것이다. 쉽게, 가
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한다. 결국 하
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보면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의 말씀은 “성경을 주
의하여 보면 좋은 것을 얻으며 복을 받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을 보라. 그곳에는 많은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 고난의 승리자 욥....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
은 이들은 과연 위대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보잘것없는
인생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장사꾼이
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요 믿는 이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자랐으나 나이 40에 살인자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칠고 메마
른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참으로 쓸모없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서 애굽의
바로를 대항하여 이기는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다윗은 어떤가? 한낱
가난한 목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게 하신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간음죄를 범하고 살인을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그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자손 대대로 복을 받게 하셨다.
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다. 그럼으
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하고 의지할 때 좋은 것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
다. 이런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복음송 중에 “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나를 보호해주는 주님 곁에 더 가까이
가리라....”
우리는 약하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복 받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인간의 부족을 시인
하라 그리고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인생의 진리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과연 성경을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는가?
그러나 죄인들은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능력이 있다. 뭐든지 원하는대로
다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는다. 그리고 인간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신앙인들 중에도 있다.마태복음 5: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
라”무슨 말씀인가?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굉장하게 여겼다. 그것
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의 대단한 지식 때문 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천국에 들
어갈 사람으로 두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할 때에 “천국에 갈 두 사람은 서기관과 바
리새인 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로 사
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마5:20에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라고 하신다. .
주님이 `결단코`라고 하는 강한 용어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연계해서 사용하신 경우는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이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
단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천국의 주인이시오, 생명과 죽음을 좌우하
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단코`라는 말을 쓰신다.
이 말은 헬라어로 우메(oume)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뜨끔하지 않는가? 어떤 성경학자가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말을 읽
어 본 적이 있습니다. 대단히 무서운 말씀인데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서 "기독교는 절대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만 믿으면 그만 이라는 식으로 적당하게 신
앙생활 하고, 적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세상을 살아도 되는 종교가 아니라
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 기독교는 절대 쉬운 종교가 아니다. 천국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못 들어갑니다.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서기관들이 내세우는 의보
다도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는 의보다도 훨씬 더 나은 의를 가진 사
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여기서 `더 낫다` 하는 말은 원래 물이 둑을 넘어서 넘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둑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
람의 의는 그 둑을 훨씬 넘는 물과 같은 의라야만 하기때문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위에 속
하는 의를 소유해야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러분, 자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한번 냉정하게 물어 봅시다. 나는 천국 들어갈 수 있다고 안심할 수 있는가?
나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서기관보다도 더 나은 의가 무언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나에게 이 의가 있
는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성경의 지식이 뛰어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왜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인
가?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인가? 믿음의 의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선한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
는 자랑할만한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합니
다. 하나님만 붙들겠습니다.`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은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은근히 `세상에서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래도 양심적이다.`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믿는 체 해도 진짜 믿음을 갖기가
어렵다.믿음은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배
척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들은 성경의 지식 때문에 교만해
졌다. 하나님까지 심판을 할 정도 이다.이들이 성전에 가서 기도했으나 그것은 기도가 아니
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을 드러 내고 있다. 겸손이 없다. "
하나님, 나는 토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세상 사
람들처럼 그렇게 악하게 살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하
나님은 성경에서 일년에 한 번씩 금식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랑을 해 댔다.
사람들은 `야, 저 분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겠구나.` 하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들은 들어
갈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단정하신다.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는가?
믿음의 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있는 어떤 의를 자랑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
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착각을 해도 한참 한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나온다. `율법의 행
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서기관들이 성경에 정통했는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좔좔 외우면서 다녔다. 그러나 율법을
알면 알수록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했다. 그렇게 되어야 정
상이다. 그런데 율법을 연구하는 그들이, 율법을 그렇게도 들먹거리는 그들이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앞에 이런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한 것은 율
법을 거꾸로 본 것임을 드러내 준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만 생각했
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천국에 못 들어온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한두 번이 아니라 네다섯 번을 반복해서 주님이 그들을 책망한다. `
외식하는 서
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위선자들이여`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너무나 일
치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거룩한 체 하면서 보이는 것들은 이것저것 지
키는 것 같
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율법에 중요하다고 명시하신 본질, 즉 그 정신은 싹 쓸어내 버렸
다. 그 정신
이 무엇인가? 의와 인과 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십일조는 잘 하
고, 안식일은
잘 지키는구나.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꼭 해야 할 것은 다 하면서 진짜 중요한 인을 버렸구
나. 의를 버
렸구나. 신을 버렸구나.` 예수님이 이처럼 책망하신 것은 사실이었다. 의라는 것은 공의를
말하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는 정직한 것은 정직한 것이라고, 불의한 것은 불의한 것이
라고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공정하게 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관과 바리새
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남들 보기에는 거룩하게 기도한답시고 질질 끌며 오랜 시간 기도를
하면서 남이
안 보는 곳에서는 과부와 같이 힘없는 사람은 깔아 뭉개며 그 재산을 착취하고, 힘있는 사
람은 나쁜 짓
을 해도 옳다고 인정을 해 주는 짓들을 하나님 보기에 살금살금 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을 하신
것이다. 공의를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이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만 전
적으로 의지
해야 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을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까지 하지 않으셨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은 내가 보니
하루살이는
뱉어내고 약대는 삼키는 위선자들이다." 하루살이같이 금방 삼킬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들
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낙타가 얼마나 큰가?
그게 목으로 넘어가는가? 그러므로 그걸 뱉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꾸로 하고
있었다. 하루
살이같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은 하나하나 들고서 사람들 앞에 자랑도 하고 남을
비판하기도
한다. "왜 안식일 지키지 않았는가? 왜 십일조를 내지 않는가? 왜 금식은 하지 않는가?" 그
러면서도
공의와 자비와 믿음같이 너무나 중요한 것은 마치 낙타를 삼키듯이 꿀꺽꿀꺽 삼키는 것이
다. 순종을
하지 않는 그들의 생활 모습이었다.
로마서 3장 21절, 22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온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가 나타났
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무엇인가? `
예수 그리스
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의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여 주셨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다.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전혀 하나님의 아
들로 인정하
려 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들어갈 수 없는 불행한 자가 되어버
렸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목표는 인간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고 좋은 것을 얻는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좋은 것을 얻는 자가 되고 있는
가? 이것은 성
경을 대하는 자세에서 나올 수 가 있다.
오늘 성경은 삼가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간단하게 4가지 방법을 말씀을 드리겠다.
1. 성경을 보는 시간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라.
우리는 편지를 받으면 그 편지를 보낸 분을 생각하게 된다. 편지로 보낸 사람을 만나게 되
는 것이다. 성
경은 하나님의 편지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야곱을 보라. 고향을 떠나 타향, 객지에서 천신만고 끝에 금의환향을 한다. 그런데 고향에는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동생 야곱에게 적대심을 갖고 기다린다. 과거에 에서의 장자권을 빼
앗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과 가족... 아내가 넷이요, 자녀가 열둘을
형에게 보내
서 그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지만 안된다. 그러자 야곱은 실망을 한다. 그리고 혼자 남는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 앞에 선다. 아니 하나님
이 야곱을
찾아 오신다. 그리고 밤새 야곱과 씨름을 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 것을 알게 되자 붙잡
고 복을 달라
고 한다. “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그 결과 복을 받
는다. 야곱은
그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한다. ‘브니엘은 하나님을 대면했다’ 는 뜻이다. 그리고 에서를
만나자 하나님
은 에서의 마음을 돌이키셔서 야곱을 만나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신다. 문제는 사람의 노력
으로 되는 것
이 아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셔야 해결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 이 말씀에서
내게 복을 주
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저 한낱 책을 대하듯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을 하
나님을 만나
듯 대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뉴잉글랜드 선장이 이끄는 배 한 척이 인도로 가는 도중 어떤 말레이시아 상인을 태우게 되
었다. 이
상인은 굉장한 부자였는데 어느 날 선장에게 성경을 몇 권 갖고 있으면 나누어 달라고 부탁
했다. 선장은 이교도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당신은 무엇에 쓰려고 영어성경을 달라고 하십니까? 당신은 그것을 읽을 수 없을 텐
데요?"
선장의 말에 말레이시아 상인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갖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성경을 필요로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
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거래를 원하는 영국인이나 또는 당신 나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성경을 그
가 다니는
길에 남모르게 놓아두고 그가 어떻게 하는 가를 지켜본답니다. 만일 그가 성경에 대해 관심
을 갖고 주의 깊게 읽으면 나는 그가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성경을 아무런 관심도 없이 대하고 함부로 집어던지거나, 또는 성경에 대해 불경스러
운 말을 하게 되면 나는 결코 그와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간됨을 판단할 수 있다.
당신은 과연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라 그것이 복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가지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역사의 주인이시다. 이 하나님께 겸손
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설득을 당해야지 내
가 하나님을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면서 하나님앞에 일천 번제를 드린다. 그 때에 하나님이 말
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고 하신다. 이 때 솔로몬은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
라고 한다. 이 지혜를 달라는 말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지혜뿐아니라 부귀와 영화의 복도
주신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달라고 했던 지혜는 무엇인가? 이 지혜는 히브리 말로
‘메부쉐 미르’ 이다 이 말의 뜻은 듣는 마음이다. 이해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
는 마음이 지혜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말을 기뻐하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 16절에도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
이 금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본문 18,9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
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
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그리고 성경을 대하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 음성을 듣
자. 그러면 그 어떤 재물을 갖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3. 성령으로 해석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느 젊은 신자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잘 읽을 생각을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성경을 되는대로
펼쳐서 맨 처음에 눈에 띄이는 성경구절을 하나님이 그날에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기
로 작정을 했다.어느날 아침 조심스럽게 성경을 펼치니 그의 눈에 들어온 첫번 구절은,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였음으로 이 말
씀이 그날에 자기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으로는 여길 수가 없음으로 다시 한번 펼치기로 하
고 두번째 펼치니 이번에는,"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는 말씀
이 눈에 들어 왔다.
그래서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다시 한번 펼치기로 하고 다시 펴니 이번에는,"예수께서 유다에
게 이르시
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7) 였다. 그는 다시는 제 멋대로 성경을 보지 않
기로 작정하
고 회개의 기도를 하였다
청교도들의 신앙원칙은 ‘주님을 조용히 기다리자’ 는 것이다.( 웨이팅 더 로드 )
성경을 보는대로, 듣는대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자의적 판단이 되기 때
문이다. 설교를 자의적으로 듣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오해를 하고 의심을 하는
경우는 참으로 설교자를 황당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듣기는 속히 하되 말은 천천히 하라
는 말처럼 해석은 늦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판단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보라 그는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
장에 일을 벌이지 않는다. 성경은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던 것
이다. 그 결과 나님의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성경을 보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깨우치심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깨우쳐 주시는 것을 중요시 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성
령이 감동케 하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라.이런 의미에서 큐티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복이 된다.
4. 성경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론은 그대로 순종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사
용하지 않으
면 결과가 없듯이 말씀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없는 것이다.
우연히 비누장수가 목사와 나란히 지하철을 타고 가게 되었다. 비누장수가 슬쩍 목사를 비
꼬며 말했다.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당신네들은 매일 선과 진실을 가르치지만 세상을 보
십시오 거짓과 악과 미움뿐
입니다.”
마침 그 때 걸인이 누추한 차림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말했다. “아니, 저 사람의 옷은 왜 저렇게 더럽소? 비누가 있을텐데..”
“그야 비누는 있지만 사용을 하지 않아서 이지요”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이지요”
순종하는 자 만이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받게 되는 법이다.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이 때의 회의의 주제는 ‘성경에 오류가 없
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사흘 동안 회의를 하는데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서 온 학자들만은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니
까.. 핍박이 심해서 성경에 관심이없는가? 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회자가 묻기를 “당신
들은 왜 사흘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소감이나 한마디 하십시오”
소련 공산치하에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 당신들은 참 편한 말들을 합니다. 당신들이 이런 주제로 회의를 사흘동안이나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
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열변을 토하던 많은 학자들은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의 권위와 영광과 말씀의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토레이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번역
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을 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살고자하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다. 말씀과 삶이 일
치가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란다. 순종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을 얻는다 라고 했다. 듣지 않으면 저주이다.
왜 듣지 않는가?
글렌 힐슨(Glann Hinson)이라고 하는 현대 영성학자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고 한다,
첫째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져서 그저 성공에만 급
하고 성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한다. 의미도 깊이도 없이 그저 뛰고 있는 것이다. 생각
하고 뛰는 것이 아니고 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열심히 뛰고 바쁜데 왜 바쁜지도 모르겠고
이 바쁨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수
밖에 없다.
두 번째는 너무 산만하다고 했다. 많은 볼거리가 있고 많은 들을 거리가 있다.
요즘에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산다. 여름에 휴가 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강릉까지 두시간
십오분이면 가는 것을 요새 여덟시간, 열시간을 간다고 한다. 열시간이 얼마나 힘든가? 텔레
비전에 해운대가 나오는 것을 보니 목욕탕이 아니고 죽탕이다. 물은 하나도 안보이고 사람
만 보인다. 도대체 그래야 되나? “이 사람들이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했더
니 제 말을 들은 사람이 제게 말하길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재미에 가는
겁니다.” 시끄러운 재미에 가는 것이란다. "와글와글 해야지 쓸쓸하면 사람들이 가겠습니
까?" 그것도 또 말이 된다.
요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들어야 한다.
제가 제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산천 경치가 좋은 유원지에 좀 조용했으면 좋으
련만 거기다
대고 식당에서 스피커를 틀어놓고 흘러간 노래를 크게 들려대는데 참 유감스러웠다. 시장님
께 전화를
좀 걸든지 해 보아야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조용한 곳을 찾아왔는데 서울 시내보
다도 더 복잡
하고 더 시끄러웠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한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
이 보아야 된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 된다. 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겪어야 된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산만해졌다. 깊은 명상도 깊은 생각도 없다.
이제 인간 궁극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돼있는데 조용하게 이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만
날 수 있으려면 어떠해야 할 것 같은가? 미안하지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안 된다. 엄청
난 사건을 만나기 전에는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냥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고 시끄럽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보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없다. 물어보
았더니 딱 세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식사할 때.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는가? 영혼이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영혼에 병
이 생기고 마음에 병이 생긴다. 이기심이 있고 자기 우상화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이 나고 교만해진다. 낙심도 절망도 다 교만에서 온다.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모두
가 피해자다. 비참하다. 큰 전쟁을 치른 다음에 오는 패잔병의 모습이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역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양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들을 길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시끄럽다.
여러분,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
은 심판이다. 기도할 때 성경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이미 현재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 말이다. 여러분,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실패를 좋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을 즐기고 있다.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했다.교만하면 멸망한다. 그런데 멸망은 싫
지만 교만은 즐기고 있다. 여러분이 이번 월드컵이라는 큰 행사 속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
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
은 다 망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교만을 즐기면 어떻게 되겠
는가?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마음의 성향이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는가? 점점 겸손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교만해지고 있는가?
구약성경에서 사울왕을 보자.사울왕이 겸손할 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고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렇지만 그가 교만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서 그를 버리셨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리노라” 이렇게 분
명히 말씀하신다. 잊지 말자. 사울왕은 전쟁에 성공했다. 승전했다. 싸움에서 이겼다. 전쟁에
는 이겼는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실패했다. 교만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다. 그런가 하면 은사를 모독하였다. 제사는 사
무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무엘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렸다. 교만해서 하나
님께서 주신 은사를 모독했다.그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신다. 그 뿐인가. 다윗을 죽이
려고 쫓아다닌다. 가만히 상상해 보라. 다윗은 자신의 사위이고 게다가 충성된 신하이다. 그
런데 그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이 늙은 사울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
나 한심한가? 무엇에 씌웠다. 악령에 씌워서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 결국엔 죽었다.
얼마나 비참한가? 이런 말이 있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친다.’ 그는 전쟁에 이겼다. 차
라리 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쟁에 이겼다는 것 때문에 아주 망가지고 말았다. 교만해지
면서 그와 그 가문, 그 족벌이 다 망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문자 그대로 교
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하자.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인정하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 그것이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것이 바로 교만이
다, 여러분, 자신을 마음을 한 번 진단해 보라. 겸손 지향적인가? 교만 지향적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지는 않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성숙하면서 겸손
해지고 있는? 이것만을 잊지 말라. 사탄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래서 감사하게 만든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할 때에
나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진다. 동시에 조용하게 주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 마음
에 주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더욱더 크게 크게 말씀
의 역사가 우리 영혼 안에 우리 실제 생활 속에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40일 금식기도 한 후에 제일먼저 찾아온 대상은 다름 아
닌 마귀이다. 예수님이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그 능력으로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한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
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마귀의 요청을 거절을 하시고 물리치신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
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
한 기갈이라”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듣고 나가는 즉시 마귀는 분명 시험을 할 것이다. 말씀보다 떡으로
살아야 한다고. 조심하라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인간은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나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
란다.
출처/오찬우 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1)
봉독한 말씀 중에 20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자.
삼가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
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성경을 읽고 무엇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는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
떠해야 하는가?
20절의 말씀은 ‘말씀을 주의하라 좋은 것을 얻는다 ’하더니 그 후에는 ‘여호와를 의지하
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
‘말씀을 주의하라’는 말은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서 말씀을 대하라는 것이다. 쉽게, 가
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한다. 결국 하
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보면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의 말씀은 “성경을 주
의하여 보면 좋은 것을 얻으며 복을 받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을 보라. 그곳에는 많은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 고난의 승리자 욥....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
은 이들은 과연 위대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보잘것없는
인생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장사꾼이
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요 믿는 이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자랐으나 나이 40에 살인자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칠고 메마
른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참으로 쓸모없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서 애굽의
바로를 대항하여 이기는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다윗은 어떤가? 한낱
가난한 목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게 하신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간음죄를 범하고 살인을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그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자손 대대로 복을 받게 하셨다.
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다. 그럼으
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하고 의지할 때 좋은 것을 얻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
다. 이런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복음송 중에 “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나를 보호해주는 주님 곁에 더 가까이
가리라....”
우리는 약하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복 받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인간의 부족을 시인
하라 그리고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인생의 진리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과연 성경을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는가?
그러나 죄인들은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능력이 있다. 뭐든지 원하는대로
다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는다. 그리고 인간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신앙인들 중에도 있다.마태복음 5: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
라”무슨 말씀인가?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굉장하게 여겼다. 그것
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의 대단한 지식 때문 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천국에 들
어갈 사람으로 두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할 때에 “천국에 갈 두 사람은 서기관과 바
리새인 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로 사
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마5:20에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라고 하신다. .
주님이 `결단코`라고 하는 강한 용어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연계해서 사용하신 경우는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이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
단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천국의 주인이시오, 생명과 죽음을 좌우하
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단코`라는 말을 쓰신다.
이 말은 헬라어로 우메(oume)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뜨끔하지 않는가? 어떤 성경학자가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말을 읽
어 본 적이 있습니다. 대단히 무서운 말씀인데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서 "기독교는 절대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만 믿으면 그만 이라는 식으로 적당하게 신
앙생활 하고, 적당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세상을 살아도 되는 종교가 아니라
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 기독교는 절대 쉬운 종교가 아니다. 천국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못 들어갑니다.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서기관들이 내세우는 의보
다도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는 의보다도 훨씬 더 나은 의를 가진 사
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여기서 `더 낫다` 하는 말은 원래 물이 둑을 넘어서 넘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둑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
람의 의는 그 둑을 훨씬 넘는 물과 같은 의라야만 하기때문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위에 속
하는 의를 소유해야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러분, 자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한번 냉정하게 물어 봅시다. 나는 천국 들어갈 수 있다고 안심할 수 있는가?
나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서기관보다도 더 나은 의가 무언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나에게 이 의가 있
는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성경의 지식이 뛰어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왜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인
가?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인가? 믿음의 의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선한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
는 자랑할만한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합니
다. 하나님만 붙들겠습니다.`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은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은근히 `세상에서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래도 양심적이다.`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믿는 체 해도 진짜 믿음을 갖기가
어렵다.믿음은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배
척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들은 성경의 지식 때문에 교만해
졌다. 하나님까지 심판을 할 정도 이다.이들이 성전에 가서 기도했으나 그것은 기도가 아니
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을 드러 내고 있다. 겸손이 없다. "
하나님, 나는 토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세상 사
람들처럼 그렇게 악하게 살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하
나님은 성경에서 일년에 한 번씩 금식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랑을 해 댔다.
사람들은 `야, 저 분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겠구나.` 하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들은 들어
갈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단정하신다.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는가?
믿음의 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있는 어떤 의를 자랑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
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착각을 해도 한참 한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나온다. `율법의 행
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서기관들이 성경에 정통했는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좔좔 외우면서 다녔다. 그러나 율법을
알면 알수록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했다. 그렇게 되어야 정
상이다. 그런데 율법을 연구하는 그들이, 율법을 그렇게도 들먹거리는 그들이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앞에 이런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한 것은 율
법을 거꾸로 본 것임을 드러내 준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만 생각했
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천국에 못 들어온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한두 번이 아니라 네다섯 번을 반복해서 주님이 그들을 책망한다. `
외식하는 서
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위선자들이여`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너무나 일
치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거룩한 체 하면서 보이는 것들은 이것저것 지
키는 것 같
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율법에 중요하다고 명시하신 본질, 즉 그 정신은 싹 쓸어내 버렸
다. 그 정신
이 무엇인가? 의와 인과 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십일조는 잘 하
고, 안식일은
잘 지키는구나.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꼭 해야 할 것은 다 하면서 진짜 중요한 인을 버렸구
나. 의를 버
렸구나. 신을 버렸구나.` 예수님이 이처럼 책망하신 것은 사실이었다. 의라는 것은 공의를
말하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는 정직한 것은 정직한 것이라고, 불의한 것은 불의한 것이
라고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공정하게 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관과 바리새
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남들 보기에는 거룩하게 기도한답시고 질질 끌며 오랜 시간 기도를
하면서 남이
안 보는 곳에서는 과부와 같이 힘없는 사람은 깔아 뭉개며 그 재산을 착취하고, 힘있는 사
람은 나쁜 짓
을 해도 옳다고 인정을 해 주는 짓들을 하나님 보기에 살금살금 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을 하신
것이다. 공의를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이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만 전
적으로 의지
해야 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을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까지 하지 않으셨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은 내가 보니
하루살이는
뱉어내고 약대는 삼키는 위선자들이다." 하루살이같이 금방 삼킬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들
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낙타가 얼마나 큰가?
그게 목으로 넘어가는가? 그러므로 그걸 뱉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꾸로 하고
있었다. 하루
살이같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은 하나하나 들고서 사람들 앞에 자랑도 하고 남을
비판하기도
한다. "왜 안식일 지키지 않았는가? 왜 십일조를 내지 않는가? 왜 금식은 하지 않는가?" 그
러면서도
공의와 자비와 믿음같이 너무나 중요한 것은 마치 낙타를 삼키듯이 꿀꺽꿀꺽 삼키는 것이
다. 순종을
하지 않는 그들의 생활 모습이었다.
로마서 3장 21절, 22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온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가 나타났
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무엇인가? `
예수 그리스
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의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여 주셨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다.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전혀 하나님의 아
들로 인정하
려 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들어갈 수 없는 불행한 자가 되어버
렸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목표는 인간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고 좋은 것을 얻는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좋은 것을 얻는 자가 되고 있는
가? 이것은 성
경을 대하는 자세에서 나올 수 가 있다.
오늘 성경은 삼가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간단하게 4가지 방법을 말씀을 드리겠다.
1. 성경을 보는 시간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라.
우리는 편지를 받으면 그 편지를 보낸 분을 생각하게 된다. 편지로 보낸 사람을 만나게 되
는 것이다. 성
경은 하나님의 편지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야곱을 보라. 고향을 떠나 타향, 객지에서 천신만고 끝에 금의환향을 한다. 그런데 고향에는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동생 야곱에게 적대심을 갖고 기다린다. 과거에 에서의 장자권을 빼
앗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과 가족... 아내가 넷이요, 자녀가 열둘을
형에게 보내
서 그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지만 안된다. 그러자 야곱은 실망을 한다. 그리고 혼자 남는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 앞에 선다. 아니 하나님
이 야곱을
찾아 오신다. 그리고 밤새 야곱과 씨름을 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 것을 알게 되자 붙잡
고 복을 달라
고 한다. “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그 결과 복을 받
는다. 야곱은
그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한다. ‘브니엘은 하나님을 대면했다’ 는 뜻이다. 그리고 에서를
만나자 하나님
은 에서의 마음을 돌이키셔서 야곱을 만나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신다. 문제는 사람의 노력
으로 되는 것
이 아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셔야 해결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 이 말씀에서
내게 복을 주
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저 한낱 책을 대하듯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을 하
나님을 만나
듯 대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뉴잉글랜드 선장이 이끄는 배 한 척이 인도로 가는 도중 어떤 말레이시아 상인을 태우게 되
었다. 이
상인은 굉장한 부자였는데 어느 날 선장에게 성경을 몇 권 갖고 있으면 나누어 달라고 부탁
했다. 선장은 이교도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당신은 무엇에 쓰려고 영어성경을 달라고 하십니까? 당신은 그것을 읽을 수 없을 텐
데요?"
선장의 말에 말레이시아 상인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갖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성경을 필요로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
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거래를 원하는 영국인이나 또는 당신 나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성경을 그
가 다니는
길에 남모르게 놓아두고 그가 어떻게 하는 가를 지켜본답니다. 만일 그가 성경에 대해 관심
을 갖고 주의 깊게 읽으면 나는 그가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성경을 아무런 관심도 없이 대하고 함부로 집어던지거나, 또는 성경에 대해 불경스러
운 말을 하게 되면 나는 결코 그와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간됨을 판단할 수 있다.
당신은 과연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라 그것이 복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가지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역사의 주인이시다. 이 하나님께 겸손
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설득을 당해야지 내
가 하나님을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면서 하나님앞에 일천 번제를 드린다. 그 때에 하나님이 말
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고 하신다. 이 때 솔로몬은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
라고 한다. 이 지혜를 달라는 말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지혜뿐아니라 부귀와 영화의 복도
주신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달라고 했던 지혜는 무엇인가? 이 지혜는 히브리 말로
‘메부쉐 미르’ 이다 이 말의 뜻은 듣는 마음이다. 이해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
는 마음이 지혜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말을 기뻐하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 16절에도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
이 금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본문 18,9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
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
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그리고 성경을 대하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 음성을 듣
자. 그러면 그 어떤 재물을 갖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3. 성령으로 해석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느 젊은 신자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잘 읽을 생각을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성경을 되는대로
펼쳐서 맨 처음에 눈에 띄이는 성경구절을 하나님이 그날에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기
로 작정을 했다.어느날 아침 조심스럽게 성경을 펼치니 그의 눈에 들어온 첫번 구절은,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였음으로 이 말
씀이 그날에 자기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으로는 여길 수가 없음으로 다시 한번 펼치기로 하
고 두번째 펼치니 이번에는,"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는 말씀
이 눈에 들어 왔다.
그래서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다시 한번 펼치기로 하고 다시 펴니 이번에는,"예수께서 유다에
게 이르시
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7) 였다. 그는 다시는 제 멋대로 성경을 보지 않
기로 작정하
고 회개의 기도를 하였다
청교도들의 신앙원칙은 ‘주님을 조용히 기다리자’ 는 것이다.( 웨이팅 더 로드 )
성경을 보는대로, 듣는대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자의적 판단이 되기 때
문이다. 설교를 자의적으로 듣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오해를 하고 의심을 하는
경우는 참으로 설교자를 황당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듣기는 속히 하되 말은 천천히 하라
는 말처럼 해석은 늦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판단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보라 그는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
장에 일을 벌이지 않는다. 성경은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던 것
이다. 그 결과 나님의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성경을 보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깨우치심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깨우쳐 주시는 것을 중요시 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성
령이 감동케 하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라.이런 의미에서 큐티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복이 된다.
4. 성경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론은 그대로 순종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사
용하지 않으
면 결과가 없듯이 말씀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없는 것이다.
우연히 비누장수가 목사와 나란히 지하철을 타고 가게 되었다. 비누장수가 슬쩍 목사를 비
꼬며 말했다.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당신네들은 매일 선과 진실을 가르치지만 세상을 보
십시오 거짓과 악과 미움뿐
입니다.”
마침 그 때 걸인이 누추한 차림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말했다. “아니, 저 사람의 옷은 왜 저렇게 더럽소? 비누가 있을텐데..”
“그야 비누는 있지만 사용을 하지 않아서 이지요”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이지요”
순종하는 자 만이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받게 되는 법이다.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이 때의 회의의 주제는 ‘성경에 오류가 없
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사흘 동안 회의를 하는데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서 온 학자들만은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니
까.. 핍박이 심해서 성경에 관심이없는가? 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회자가 묻기를 “당신
들은 왜 사흘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소감이나 한마디 하십시오”
소련 공산치하에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 당신들은 참 편한 말들을 합니다. 당신들이 이런 주제로 회의를 사흘동안이나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
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열변을 토하던 많은 학자들은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의 권위와 영광과 말씀의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토레이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번역
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을 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살고자하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다. 말씀과 삶이 일
치가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란다. 순종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을 얻는다 라고 했다. 듣지 않으면 저주이다.
왜 듣지 않는가?
글렌 힐슨(Glann Hinson)이라고 하는 현대 영성학자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고 한다,
첫째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져서 그저 성공에만 급
하고 성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한다. 의미도 깊이도 없이 그저 뛰고 있는 것이다. 생각
하고 뛰는 것이 아니고 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열심히 뛰고 바쁜데 왜 바쁜지도 모르겠고
이 바쁨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수
밖에 없다.
두 번째는 너무 산만하다고 했다. 많은 볼거리가 있고 많은 들을 거리가 있다.
요즘에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산다. 여름에 휴가 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강릉까지 두시간
십오분이면 가는 것을 요새 여덟시간, 열시간을 간다고 한다. 열시간이 얼마나 힘든가? 텔레
비전에 해운대가 나오는 것을 보니 목욕탕이 아니고 죽탕이다. 물은 하나도 안보이고 사람
만 보인다. 도대체 그래야 되나? “이 사람들이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했더
니 제 말을 들은 사람이 제게 말하길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재미에 가는
겁니다.” 시끄러운 재미에 가는 것이란다. "와글와글 해야지 쓸쓸하면 사람들이 가겠습니
까?" 그것도 또 말이 된다.
요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들어야 한다.
제가 제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산천 경치가 좋은 유원지에 좀 조용했으면 좋으
련만 거기다
대고 식당에서 스피커를 틀어놓고 흘러간 노래를 크게 들려대는데 참 유감스러웠다. 시장님
께 전화를
좀 걸든지 해 보아야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조용한 곳을 찾아왔는데 서울 시내보
다도 더 복잡
하고 더 시끄러웠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한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
이 보아야 된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 된다. 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겪어야 된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산만해졌다. 깊은 명상도 깊은 생각도 없다.
이제 인간 궁극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돼있는데 조용하게 이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만
날 수 있으려면 어떠해야 할 것 같은가? 미안하지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안 된다. 엄청
난 사건을 만나기 전에는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냥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고 시끄럽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보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없다. 물어보
았더니 딱 세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식사할 때.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는가? 영혼이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영혼에 병
이 생기고 마음에 병이 생긴다. 이기심이 있고 자기 우상화가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이 나고 교만해진다. 낙심도 절망도 다 교만에서 온다.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모두
가 피해자다. 비참하다. 큰 전쟁을 치른 다음에 오는 패잔병의 모습이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역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양심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들을 길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시끄럽다.
여러분,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
은 심판이다. 기도할 때 성경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이미 현재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 말이다. 여러분,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실패를 좋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을 즐기고 있다.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했다.교만하면 멸망한다. 그런데 멸망은 싫
지만 교만은 즐기고 있다. 여러분이 이번 월드컵이라는 큰 행사 속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
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
은 다 망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교만을 즐기면 어떻게 되겠
는가?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마음의 성향이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는가? 점점 겸손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교만해지고 있는가?
구약성경에서 사울왕을 보자.사울왕이 겸손할 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고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렇지만 그가 교만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서 그를 버리셨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리노라” 이렇게 분
명히 말씀하신다. 잊지 말자. 사울왕은 전쟁에 성공했다. 승전했다. 싸움에서 이겼다. 전쟁에
는 이겼는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실패했다. 교만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다. 그런가 하면 은사를 모독하였다. 제사는 사
무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무엘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렸다. 교만해서 하나
님께서 주신 은사를 모독했다.그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신다. 그 뿐인가. 다윗을 죽이
려고 쫓아다닌다. 가만히 상상해 보라. 다윗은 자신의 사위이고 게다가 충성된 신하이다. 그
런데 그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이 늙은 사울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
나 한심한가? 무엇에 씌웠다. 악령에 씌워서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 결국엔 죽었다.
얼마나 비참한가? 이런 말이 있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친다.’ 그는 전쟁에 이겼다. 차
라리 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쟁에 이겼다는 것 때문에 아주 망가지고 말았다. 교만해지
면서 그와 그 가문, 그 족벌이 다 망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문자 그대로 교
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하자.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인정하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 그것이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것이 바로 교만이
다, 여러분, 자신을 마음을 한 번 진단해 보라. 겸손 지향적인가? 교만 지향적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지는 않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성숙하면서 겸손
해지고 있는? 이것만을 잊지 말라. 사탄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래서 감사하게 만든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할 때에
나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진다. 동시에 조용하게 주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 마음
에 주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더욱더 크게 크게 말씀
의 역사가 우리 영혼 안에 우리 실제 생활 속에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40일 금식기도 한 후에 제일먼저 찾아온 대상은 다름 아
닌 마귀이다. 예수님이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그 능력으로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한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
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마귀의 요청을 거절을 하시고 물리치신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
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
한 기갈이라”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듣고 나가는 즉시 마귀는 분명 시험을 할 것이다. 말씀보다 떡으로
살아야 한다고. 조심하라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인간은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나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
란다.
출처/오찬우 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