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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설교수 (seeJESUS 특강 중)
해설
"영성형성론"-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의 삶의 저변은 얼마나 아름답게 형성되어가는가에 대한 신학자의 새로운 영성 형성론이다.- 이 특강의 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발전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해오면서 스스로 알지 못하는 많은 의문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지, 아니면 정체되고 있는지, 스스로 조명할 수 있으며 함께 토론하면서 나를 서서히 일깨우시고 자라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감사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송인설 교수의 영성형성론은 교리가 아니라, 그의 오랜 신학적 연구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잘 깨닫지 못하면서 영성을 이야기하는데 송 교수는 "영성과 믿음의 삶"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성령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영성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성장의 질서를 놓으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영성형성 과정의 사다리를 올라가 보자
l. 영성의 의미
최근에 ''영성'' (spirituality)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본래 가톨릭 용어였는데, 개신교에 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경건의 모양을 넘어 경건의 능력(딤후 3:5)올 갈망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주고 있다. 그러면 영성이 무엇인가?
첫째. 영성은 영적인 삶을 가리킨다. ''영적"(spiritual) 이라는 말은 보통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 말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영에 대해 말할 때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서로 친밀하게 교제(koinonia)하는 삶을 말한다.
둘째 영성은 영의 성품 내지 영의 덕(virrue)올 의미한다. 우리의 영이 삼위 하나님의 영과 교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의 영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영성은 또한 영의 성품 내지 영의 덕(virtue) 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영성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
첫째, 보이지 않는 세계(영 계)가 보이는 세계(물질계)보다 크다는 영적 우주론이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후 4:18). 물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함께 창조하셨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서로 차원이 다를 뿐 서로 함께 속하여 있지만 말이다.
둘째, 육체(겉사람)가 아니라 영혼{속사람)이 인간의 참 자아라는 영적 인간론이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후 4:I6). 하나님은 육체와 영혼을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영혼과 육체는 서로 함께 속하여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은 죽은 후에도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인격이다.
셋째. 세상 나라 위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세상 끝까지 구분되어 진행된다는 구속사적 역사 이해이다.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피조 세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 나라가되었다. 세상 나라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약 3:Is).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나라 한복판에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천국을 건설하였고 지금도 천국을 계속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 천국의 역사를 우리는 구속사라고 부른다. 성경의 구속사는 `''옛 언약(출19:5-6)에서 ''새 언약''(렘31:3l-34. 겔36:26-27) 위 역사로 전개되었다. 하나님은 `옛언약''을 통해 율법을 주셨고, ''새 언약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조성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다 이루어졌다(요 l9:30, 고전 1l:23-25).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는 우리의 믿음의 여부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 구속사이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편적 구속사이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앞당겨 선취하였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 구속사이다. 이 객관적_보편적_종말론적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고, 그 때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고전 l5:28).
넷째, 객관적-보편적-종말론적 구속사가 지금 여기에 있는 한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다 는 주관적-개인적 -현재적 구속사의 개념이다 성령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될 때, 인간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회개하고 천국을 믿게 된다. 이때 객관적-보편적-종말론적 구속사가 우리 인간에게 적용되어 주관적_개인적 _현재적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 글에서는 이루어 가는 구원{빌 2:l2)의 의미로서 주관적_개인적_현재적 구원의 과정을 영혼의 형성 과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3. 영성 형성론
우리의 영혼은 보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과정 즉 영혼의 발견, 영혼의 중생, 영혼의 성장, 영혼의 자아 부정, 영혼의 성숙 등의 단계를 따라 변화된다. 영성 형성론은 바로 이러한 영혼의 변화 과정을 설명해 보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여기서 영혼의 중생은 루터의 칭의론, 영혼의 성장은 칼빈의 성화론, 영혼의 자아 부정은 수도사 신학과 웨슬리의 온전한 성화론, 영혼의 성숙은 고대의 신비 신학 전통에서 빌려 왔다. 이러한 영성 형성론은 하나의 교리는 아니다. 다만 성경 말씀과 여러 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토대를 두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경험을 종합하여 하나의 모델로 구성해 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 형성론은 ''에큐메니칼 구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l) 영혼의 발견
영혼의 발견은 육체(겉사람)와 구별되는 참 자아인 영혼(속사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은 분명히 전인적 존재(whole being)이다. 영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다. 서로 함께 속하여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또한 육체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일반 종교도 죽음 너머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의 실체를 인식하고 있다. 영은 죽어도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인간의 핵심적 주체이다
특히 영은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는, 인간의 존재의 중심이다. 이 영을 바울은 속사함(inner man)이라고 불렀다
현대 심리학에 의하면, 보통 인간은 정신(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영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정신(혼)과 몸 안에 영이라는 새로운 인격과 기능을 경험하게 된다. 영혼 정신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새로운 자아이다. 영은 정신과 몸 전체에 영향을 주어 그 사람 전체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 정신(혼)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정신 안에서 형성되는 그리스도인의 영도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혼의 지성과 영의 지성은 차원이 다르다. 혼의 지성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존재 정도밖에 모르지만, 영의 지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직판적으로 인식한다 혼의 의지와 영의 의지도 다르다. 혼의 의지는 너무 강하거나 아주 무기력하지 만, 영의 의지는 온유하여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 혼의 감정과 영의 감정도 다르다. 혼의 감정은 회로애락을 따라 아주 기복이 심하지만, 영의 감정은 항상 기쁘고 평안하며 슬퍼도 애통할 뿐이다.
그래서 글에서는 영을 속사람으로 보고, 정신과 몸은 겉사람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바울은 겉사람은 날로 약해지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였다.(고후 4:I6). 우리는 우리의 겉사람 즉 정신과 몸이 점차 쇠약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날로 약해지고 결국 죽게될 겉사람에는 온갖 신경을 다 쓰면서도. 정작 날마다 새롭게 자라서 영원히 살 영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의 첫 출발은 나의 영혼이 나의 진정한 자아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3:6).
(2) 영혼의 중생
영혼의 중생은 성령이 잠자는 영혼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 중생은 죽은 영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소생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생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선포하시면서 세상 나라로부터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l:I5). 회개는 세상 나라의 삶의 양식에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양식으로 철저하게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가 안되고 복음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육체의 현실이다. 그래서 먼저 성령이 역사 하셔야 한다. 그러나 성령은 주권적으로 역사 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 성령의 역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혼의 지성으로 동의하고 혼의 의지를 꺾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기로 결단하는 것뿐이다.
그 다음은 성령이 하실 일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회개시키고 믿음을 주시면서 우리의 영을 중생 시키신다. 어떤 사람은 중생이 급격하게 일어나서 중생하는 시점을 의식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중생이 너무 서서히 진행되어서 중생의 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과 교제하는 사람은 자신의 중생 여부를 다 알 수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롬 8:l6).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였다.
중생은 이러한 하나님의 칭의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면적 차원의 역사이다.
(3)영혼의 성장
영혼은 이단 중생하면 계속 자란다. 하나님이 자라게도 하시거니와, 영혼 그 자체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셨다''(고전 3:6). 그러면 영이 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이 자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영의 3기능 즉 영적 지성(직관, 양심)과 영적 의지와 영적 감정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정신의 3기능인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영성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의 3기능이 갖추어지면서, 영은 영의 3덕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영의 능력이다. 소망은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영의 능력이다 사랑은 조건 없이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영의 능력이다. 보통 영의 믿음의 덕이 먼저 형성된다. 그 다음 영의 믿음의 덕이 자라면서 영의 소망의 덕도 자라고 영의 사랑의 덕도 자란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엡 4:l3)
그러면 우리의 영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우리 몸이 음식을 먹고 성장하듯이. 영은 말씀을 먹고 성장한다. 우리의 영은 주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믿고 순종할 때 성장한다. 먼저 영의 지성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 그 다음 영의 의지가 믿음으로 순종한 후 영의 감정이 하늘의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영의 의지는 주의 음성에 순종하고자 할 때마다 혼의 의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왜 그러한가? 영은 새사람의 자아이지만, 혼은 육체의 혼으로써 옛 사람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신앙 생활은 영의 의지와 혼의 의지의 싸움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이 혼의 의지를 꺾고 자아를 부정하는 일이다.
(4) 자아 부정
영혼의 자아 부정은 능동적으로는 영이 육을 이기는 것이고, 수동적으로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우리 육신의 소욕을 꺾으시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자를 "능동적 자아 부 정''이라 하고, 후자를 ''수동적 자아 부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하셨다. 그러므로 자아 부정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육을 죽여 영을 살리는 것이다. 영혼은 일단 중생하면 계속 자라난다. 그러나 영혼은 계속하여 욕망으로 가득 찬 육신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롬8:6). 그래서 영혼은 주의 뜻을 알면서도 번번이 육신의 욕망에 굴복하고 만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통곡했다.(롬 7:24). 자아 부정이 이러한 육신 중심적인 옛 사람. 즉 옛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 고집, 자기 야망 등 육신의 욕망을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의 악한 자아뿐만 아니라 선한 자아도 처리하는 것이다. 선한 자아를 처리하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기에 선한 자아라고 하더라도 자아는 결국 주의 뜻을 방해하기 때문에 부인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롬 8:I3) 하였고, 내 몸을 쳐 복종한다''(고전 9:27) 하였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l5:3I) 하였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자아를 부정할 수 있는가? 우리의 영은 어떻게 우리의 육을 부정해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한다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 죽은 십자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위해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모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하여 못 박혀 죽은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이다.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신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은 어느 한 순간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것은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성령의 조명의 역사요, 순간적인 깨달음의 사건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하고 선언할 수 있었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일시되는 계시적 깨달음 속에서 자기를 부정할 수 있었다.
둘째, 우리는 자아가 다시 살아 움직일 때마다 믿음으로 자아의 죽음을 선포할 수 있다. 우리의 자아는 결국 죽음 앞에서 무너진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어차피 죽을 자아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미리 죽을 때,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우리의 자아의 부정을 선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자아 부정은 하나님이 직접 고난의 방법으로 우리의 옛 자아를 처리하시는 "수동적 자아 부정''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 후 반드시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려 하신다. 그런데 우리의 옛 자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의 자아를 어떻게 그냥 놔두시겠는가? 우리가 우리 자아를 처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를 무너뜨리신다 사실 우리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스스로 부정해 낼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겉사람을 허무는 작업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자아 부정을 도우신다 그러니 고난이 얼마나 고마운 하나님의 손길인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l19:67)_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ll9:71).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지 않은가? (히 5:8-9). 하물며 우리랴!
자아가 처리되면, 육은 살아 있어도 자기 주장을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살아 있어도 죽은 자처럼 된다. 육체 중심적 자아(옛 자아)가 부정되고 영 중심적 자아(새 자아)가 인격의 중심이 된다 자아가 처리되면서, 우리는 전인적 구원을 맛보게 신다. 영이 구원받고. 정신(혼)이 구원받고, 또 점차 몸도 구원받게 된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우리의 영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l2:24)
자아가 처리된 사람은 진정한 ''나''와 ''나의 것''을 구분할 줄 안다. 나의 주변 환경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천국을 누리게 된다 자아가 처리된 사람은 자신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다.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도 자유롭다. 겉과 속이 같다. 한 마디로 겸손하고 진실하다.
(5) 영혼의 성숙
영혼이 성숙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영혼이 자아를 부정하고 나면 영혼은 놀라울 정도로 장성하여 성숙하게된다. 이 글에서는 영혼의 성숙을 성경의 여러 이미지들 중에 서 성령의 전(殿), 성령 충만, 성령의 인도(조명), 성령의 열매 등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성숙한 영은 점점 성령이 거하실 만한 성전으로 넓고 든든하게 건축된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이다(고전 6:l9). 베드로도 우리가 ,산 돌(Iiving stone) 같이 신령한 집(spiritual house)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하였다(벧전 2:5).
둘째, 성령의 전으로 건축된 영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l8). 성숙한 영은 성령의 은혜도 충만하고 또 성령의 은사도 충만하다.
셋째, 성령이 충만한 영은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일상의 삶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l6:l3).
넷째,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숙한 영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의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귀한 열매는 겸손이다. 그래서 영혼은 성장할수록 더 겸손해진다.
4. 일상 생활의 영성
궁극적으로 성령의 전으로 세워지고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염은 삼위 하나님의 내주와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거하시고, 역사 안에 거하시고, 특별히 성도의 교제 속에서 교회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신자의 영 안에 거하기를 즐겨하신다.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의 영이 영 안에 내주하는 사람은 안식과 희락을 누린다. 하나님이 6일의 창조 후 제7일에 쉬셨듯이, 하나님이 종말 때에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듯이, 모든 일상의 삶에서 고요한 안식을 누린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희락의 기쁨이 넘쳐난다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영 안에 내주하는 사람은 일상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산상수훈의 삶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고 일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구원을 이루어간다. 영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구원 받는다. 지성이 구원받고, 감정이 구원받고, 의지가 구원받는다. 정신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몸도 구원받는다. 교회 안의 삶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안의 삶도 구원받는다. 인간 관계가 구원받고. 돈이 구원받고. 공부가 구원받고. 노동이 구원받고. 일이 구원받고, 사업이 구원받는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