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07
분류 |
---|
윤성호목사 (물가에심기운교회)
해리 리버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폴란드인으로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했던 분입니다. 미국에서 나이 칠십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낙이 없어 하루 종일 노인정에서 장기를 두는 그런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장기 맞수가 결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하며 멍하게 앉아 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계시지만 말고 그림이라도 그려보세요."
그 노인은 젊은이의 권면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그 즉시 발걸음을 옮겨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이 칠십에 배운 그림 실력으로 일백 한 살까지 31년 동안 총 22회의 작품전을 열었습니다. 미국의 그림 전문가들은 그 노인을 일컬어 ''미국의 샤갈''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도 자신의 잠재력 가운데 어떤 장점이 잠재워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했던 말도 기억해야 합니다.
''모방은 자살행위다.''
어느 말이 맞겠습니까?
물건을 만들어내는 범위에서는 전자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으로 볼 때는 에머슨 말이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머슨이 했던 말이 의미상으로 볼 때 성경 말씀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개개인들에게 고유한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
유전학자들의 말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그에게 3천억 명의 친형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똑같은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부모에게 3천억 명의 형제가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기자를 통해서 저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하나님을 잘 믿는 화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그림을 못 그리게 된다든가, 하나님을 잘 믿는 무용가가 후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무용을 전혀 못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배반해도 그 재능은 그대로 남겨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빛을 동시에 비춰주시고, 비를 동시에 내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모방해서 살아가지 말고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살라고 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현재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 갈등을 겪는 이유는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되려고 노력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인 것입니다.
내가 나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나의 은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일정한 규격품으로 만들려고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합니다.
"첫째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무슨 과를 가라. 둘째 너는 지방이라도 좋으니까 무슨 과를 가라. 그리고 셋째 너는 하는 짓이 어째 그 모양이냐? 도대체 공부도 못하고 ... 어쩔 수 없다. 너는 신학교나 가라."
그리고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어린 자녀들을 혹사시키며 학원들을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자녀들의 고유한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계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무조건 부모의 욕심대로 학과나 학교를 선택하게 하면 안됩니다. 먼저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가부터 알아내어 그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사람 안에 있는 은사를 꺼내어 그 은사를 계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은 이루지 못한 퓰리처상에 대한 애착을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다른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나 집에 있는 물건들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루는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카 센터에 가서 견적을 뽑아보았더니 40여만원의 돈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차를 고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더라.''라고 한마디 푸념 섞인 말을 한마디 던졌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이 밖으로 나가서 뚝딱뚝딱하더니 자동차를 만원 들여서 고쳐놓았습니다.
그 후로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퓰리처상을 받아야 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사람들은 자신의 열등한 부분들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예정된 실패의 길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받은 바 본연의 은사에 해당되는 일을 해 나가게 될 때 비로소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행복해지는 길인 것입니다.
첫째, 어떻게 나의 은사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늘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즐거워하지 않는 일을 뛰어나게 하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경우는 하나같이 자신의 일을 즐겼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일이 아니라면 저희들의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끌려드는 일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과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고하라"(왕하 4:2)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가지고 역사하시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통해서 역사를 하셨고, 모세의 손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은사를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컴퓨터가 얼마나 기능이 많습니까? 그러나 모르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잠재된 능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역시 모르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한한 잠재능력을 사장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이 생각이 되어도 현재 내게 있는 은사를 활용하면 그것이 큰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큰 것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활용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사람은 고난 때 자신이 제일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설적인 일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유명해지고 싶으면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유명인들을 보면 바둑이면 바둑, 골프면 골프, 야구면 야구 한가지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해서 유명해졌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해서 유명해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난 때 무엇을 강하게 붙들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래서 그 한가지를 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인생 살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붙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 조금 하다말고, 저것도 조금 하다가 포기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자신의 은사에 해당되는 일을 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라흐마니로프는 25살에 작곡가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심포니를 작곡하고 나서 사람들의 비평에 완전히 절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족들이 보다못해 정신과 전문의 니콜라스 데일 박사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데일 박사가 라흐마니로프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당신 속에는 위대함이 잠자고 있습니다. 당신 속에는 위대함이 역동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의 말에 정신을 차린 라흐마니로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해서 데일 박사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승승장구해서 아주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타가 인정하는 재능이라고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 당나귀가 집 안에서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 위에 올려져 사랑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하루는 강아지가 없는 틈을 이용해 당나귀도 그 육중한 몸을 날려 주인 무릎으로 뛰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무릎 뼈만 다 으스러뜨리고 주인에게 몽둥이로 죽도록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일지라도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을지라도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그 사람에게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장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장점들을 살려내지 못한 채로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모방하는데만 열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들의 남은 인생을 우리들의 장점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있는 일들을 나 혼자의 힘으로는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은 현재 분업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희 각자들도 받은바 은사가 모두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을 대략 32가지로 지적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 목사의 입장이 되었다면 과연 32가지의 일들을 처리해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32가지의 일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입니다.
목사가 먼저 해야할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해서 그 온전해진 성도로 하여금 그보다 더 약한 성도들을 책임지게 하는 역할만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32가지의 일을 위임하여 처리하라는 것이지 목사 혼자서 32가지의 일을 모두 다 처리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목회자는 32가지의 일들을 성도들을 훈련시켜 위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18, 21-22)
성격적인 특성을 살피는 것입니다.
목공들은 나무를 자를 때 그것을 아무방향으로 자르지 아니하고 나무결의 방향에 따라 자릅니다.
마찬가지로 도무지 성격상 맞지 않는 일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에 성격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앉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행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할 때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우리들은 우리들의 성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예민한 성격을 가졌다면 그 예민한 성격을 아주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예민사람은 신중한 일에 맞습니다.
반면에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 신중한 일을 하려고 하면 즐겁지도 않고 만족해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이 오면서 경험한 일들 중에 어떤 일들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었다고 생각이 드는 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기란 어렵습니다. 이 일 저 일 행동으로 실천을 하다보면 뜻밖에도 자신에게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소매치기였는데 회개를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목회를 시작하는데 모인 성도님들 중 거의 대부분이 소매치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과 이야기만 나누어도 어느 순간엔가 지갑을 빼내서 "목사님, 이거 보셨어요?"라며 흔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은사에 맞게 사람들을 보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경험을 존중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뒤돌아보므로 서 자신에게 맞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알아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과목,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일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봉사, 자신이 가장 즐거워했던 일들, 자신이 가장 힘들어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전도서 기자는 인생들이 행복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 중 한 가지를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전 3:22)
어떤 사람도 일단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자기가 이루어 놓은 일을 보려고 다시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 지금 일하는 그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도 받지 않은 일을 하느라고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현재 그분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들을 고려 할 때 현재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은사와 맞지 않는 일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갈등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둘째, 받은 바 은사는 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한 경우입니다.
요셉은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하였습니다(창 39:8-20). 그리고 그는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땅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조금만 자기 관리를 잘못하게 되면 애굽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애굽사람이 총리대신이 되어도 모함하고 시기하는 상황에서 철저한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요셉이 그 자리에서 견딜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요셉이 자신의 은사를 활용해서 7년 흉년과 7년 풍년을 예언하고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지금 은사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쓰지 않으시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은사는 훌륭한데 강력한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연단 중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은 불필요한 고급화 현상들을 정리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중국 어느 지역에서는 마약 중독자들을 지하 땅굴 속에 가두고 위에서 잠가버리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완치률은 90% 이상이라고 합니다.
감옥은 쓸데없는 중독현상을 끊게 하기 좋은 곳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이 고난의 감옥에 들어가 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필요한 생각들과 태도들을 고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해서 현재의 고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은 훌륭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지만 성령님과 의견을 달리하고 행동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행동을 막으셨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10)
아무리 은사가 훌륭해도 성령님께서 지시하시는 쪽으로 따르지 않으면 고난을 받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생활을 행하다가 징계를 당하는 경우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가장 우선 순위로 순종을 해드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므로 현재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철저한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받은 바 은사대로 순종을 안 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초기 사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사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분명히 이방인들에게 쓰실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8:6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꾸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인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해봐야 믿지를 않으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에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면 된다는 겁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고 큰 기회를 받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 곧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받은 바 은사를 전도를 실천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전도는 그 자체가 남을 돕는 행위인 것입니다. 전도만큼 사람을 강력하게 살려내는 힘은 없습니다.
수많은 가정이 이혼을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 믿고 회복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극복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고통을 당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치유 받았습니다.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성자 프랜시스의 고백입니다.
"나는 권력과 부를 가져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조금은 기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러한 과거의 기쁨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얻게 되는 기쁨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령님께서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남을 도울 때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를 잡을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서 그에 맞는 장소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물론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해야 하므로 사람에 대한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문화적 동류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같은 층끼리 모이려고 하는 동일수준의 계층선호사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만나서 편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서 복잡하고 자꾸 신경이 쓰이고 하는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람을 끊을 수는 없지만 내가 만나서 아주 편안하게 정말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층이 어느 층인가를 먼저 설정을 해서 그 대상의 사람들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잡고자 하는 물고기를 먼저 선정을 하고 거기에 맞는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수고했으나 고기를 못잡았던 베드로에게 "아무 곳이나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6)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맞는 장소를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갈까요?" 하고 주님께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도를 실천할 때 ''무엇으로 그 사람을 돕고, 무엇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하려고 해도 갖은 것이 없어서 전도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받은 바 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상대방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은사를 가지고 상대방을 도우면 그것처럼 큰 도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만 남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므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면 전도는 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바 은사를 남김없이 모두 활용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사를 받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은사를 소멸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은사를 하나님께서 불일 듯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전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전도를 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처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엄마들이 아기에 대한 백과사전을 반드시 미리 다 읽고 난 다음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아이를 낳은 후에 백과사전도 보고 주위의 어른들에게도 물어 배워 가면서 아이를 잘 길러 나가는 것입니다.
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전도하기 위해 나선 후에 경험자들에게 잘 물어 가면서 처리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말했다고 합니다.
"네게 날마다 1,440불씩을 주겠다. 그런데 주의 할 것은 그 날 반드시 그 돈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모두 회수해 가겠다."
꿈에서 깨어난 청년은 도대체 그 1,440달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다가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24시간을 분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1,440분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들에게 1,440분을 주십니다. 그것은 그 날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수해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시간뿐만 아니라 받은 바 은사도 낭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기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너무 많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주셨고 우리들은 받았습니다. 문제는 활용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7-31)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한 지체에 두시지 않으시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5만여 교회가 있지만 그 5만여 교회의 목사들의 은사는 다 다르고 그 5만여 교회의 특징이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물가에 심기운교회는 물가에 심기운교회에 맞는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는 말씀은 다른 은사는 다 무시하고 사랑의 은사만을 받으라고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은사를 다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은사에다가 사랑의 은사를 구해서 합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랑의 은사를 구해서 사랑으로 방언을 행사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랑의 은사를 구해서 사랑과 신유를 합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것을 너무너무 안타까워하십니다. 이제부터라도 남은 생애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들의 고유의 장점, 은사를 남김없이 활용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겠습니다.
해리 리버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폴란드인으로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했던 분입니다. 미국에서 나이 칠십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낙이 없어 하루 종일 노인정에서 장기를 두는 그런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장기 맞수가 결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하며 멍하게 앉아 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계시지만 말고 그림이라도 그려보세요."
그 노인은 젊은이의 권면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그 즉시 발걸음을 옮겨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이 칠십에 배운 그림 실력으로 일백 한 살까지 31년 동안 총 22회의 작품전을 열었습니다. 미국의 그림 전문가들은 그 노인을 일컬어 ''미국의 샤갈''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도 자신의 잠재력 가운데 어떤 장점이 잠재워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했던 말도 기억해야 합니다.
''모방은 자살행위다.''
어느 말이 맞겠습니까?
물건을 만들어내는 범위에서는 전자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으로 볼 때는 에머슨 말이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머슨이 했던 말이 의미상으로 볼 때 성경 말씀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개개인들에게 고유한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
유전학자들의 말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그에게 3천억 명의 친형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똑같은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부모에게 3천억 명의 형제가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기자를 통해서 저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하나님을 잘 믿는 화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그림을 못 그리게 된다든가, 하나님을 잘 믿는 무용가가 후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무용을 전혀 못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배반해도 그 재능은 그대로 남겨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빛을 동시에 비춰주시고, 비를 동시에 내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모방해서 살아가지 말고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살라고 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현재 저희들이 이 세상에서 갈등을 겪는 이유는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되려고 노력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인 것입니다.
내가 나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나의 은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일정한 규격품으로 만들려고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합니다.
"첫째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무슨 과를 가라. 둘째 너는 지방이라도 좋으니까 무슨 과를 가라. 그리고 셋째 너는 하는 짓이 어째 그 모양이냐? 도대체 공부도 못하고 ... 어쩔 수 없다. 너는 신학교나 가라."
그리고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어린 자녀들을 혹사시키며 학원들을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자녀들의 고유한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계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무조건 부모의 욕심대로 학과나 학교를 선택하게 하면 안됩니다. 먼저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가부터 알아내어 그 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사람 안에 있는 은사를 꺼내어 그 은사를 계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은 이루지 못한 퓰리처상에 대한 애착을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다른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나 집에 있는 물건들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루는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카 센터에 가서 견적을 뽑아보았더니 40여만원의 돈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차를 고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더라.''라고 한마디 푸념 섞인 말을 한마디 던졌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이 밖으로 나가서 뚝딱뚝딱하더니 자동차를 만원 들여서 고쳐놓았습니다.
그 후로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퓰리처상을 받아야 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기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사람들은 자신의 열등한 부분들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예정된 실패의 길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받은 바 본연의 은사에 해당되는 일을 해 나가게 될 때 비로소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행복해지는 길인 것입니다.
첫째, 어떻게 나의 은사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늘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즐거워하지 않는 일을 뛰어나게 하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경우는 하나같이 자신의 일을 즐겼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일이 아니라면 저희들의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끌려드는 일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과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고하라"(왕하 4:2)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가지고 역사하시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통해서 역사를 하셨고, 모세의 손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은사를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컴퓨터가 얼마나 기능이 많습니까? 그러나 모르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잠재된 능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역시 모르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한한 잠재능력을 사장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이 생각이 되어도 현재 내게 있는 은사를 활용하면 그것이 큰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큰 것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활용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사람은 고난 때 자신이 제일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설적인 일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유명해지고 싶으면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유명인들을 보면 바둑이면 바둑, 골프면 골프, 야구면 야구 한가지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해서 유명해졌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해서 유명해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난 때 무엇을 강하게 붙들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래서 그 한가지를 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인생 살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붙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 조금 하다말고, 저것도 조금 하다가 포기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자신의 은사에 해당되는 일을 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라흐마니로프는 25살에 작곡가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심포니를 작곡하고 나서 사람들의 비평에 완전히 절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족들이 보다못해 정신과 전문의 니콜라스 데일 박사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데일 박사가 라흐마니로프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당신 속에는 위대함이 잠자고 있습니다. 당신 속에는 위대함이 역동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의 말에 정신을 차린 라흐마니로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해서 데일 박사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승승장구해서 아주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타가 인정하는 재능이라고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 당나귀가 집 안에서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 위에 올려져 사랑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하루는 강아지가 없는 틈을 이용해 당나귀도 그 육중한 몸을 날려 주인 무릎으로 뛰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무릎 뼈만 다 으스러뜨리고 주인에게 몽둥이로 죽도록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일지라도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을지라도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그 사람에게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장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장점들을 살려내지 못한 채로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모방하는데만 열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들의 남은 인생을 우리들의 장점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있는 일들을 나 혼자의 힘으로는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은 현재 분업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희 각자들도 받은바 은사가 모두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을 대략 32가지로 지적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 목사의 입장이 되었다면 과연 32가지의 일들을 처리해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32가지의 일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입니다.
목사가 먼저 해야할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해서 그 온전해진 성도로 하여금 그보다 더 약한 성도들을 책임지게 하는 역할만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32가지의 일을 위임하여 처리하라는 것이지 목사 혼자서 32가지의 일을 모두 다 처리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목회자는 32가지의 일들을 성도들을 훈련시켜 위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18, 21-22)
성격적인 특성을 살피는 것입니다.
목공들은 나무를 자를 때 그것을 아무방향으로 자르지 아니하고 나무결의 방향에 따라 자릅니다.
마찬가지로 도무지 성격상 맞지 않는 일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에 성격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앉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행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할 때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우리들은 우리들의 성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예민한 성격을 가졌다면 그 예민한 성격을 아주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예민사람은 신중한 일에 맞습니다.
반면에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 신중한 일을 하려고 하면 즐겁지도 않고 만족해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이 오면서 경험한 일들 중에 어떤 일들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었다고 생각이 드는 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기란 어렵습니다. 이 일 저 일 행동으로 실천을 하다보면 뜻밖에도 자신에게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소매치기였는데 회개를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목회를 시작하는데 모인 성도님들 중 거의 대부분이 소매치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과 이야기만 나누어도 어느 순간엔가 지갑을 빼내서 "목사님, 이거 보셨어요?"라며 흔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은사에 맞게 사람들을 보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경험을 존중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뒤돌아보므로 서 자신에게 맞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알아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과목,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일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봉사, 자신이 가장 즐거워했던 일들, 자신이 가장 힘들어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전도서 기자는 인생들이 행복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 중 한 가지를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전 3:22)
어떤 사람도 일단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자기가 이루어 놓은 일을 보려고 다시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 지금 일하는 그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도 받지 않은 일을 하느라고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현재 그분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들을 고려 할 때 현재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은사와 맞지 않는 일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갈등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둘째, 받은 바 은사는 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한 경우입니다.
요셉은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하였습니다(창 39:8-20). 그리고 그는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땅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조금만 자기 관리를 잘못하게 되면 애굽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애굽사람이 총리대신이 되어도 모함하고 시기하는 상황에서 철저한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요셉이 그 자리에서 견딜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요셉이 자신의 은사를 활용해서 7년 흉년과 7년 풍년을 예언하고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지금 은사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쓰지 않으시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은사는 훌륭한데 강력한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연단 중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은 불필요한 고급화 현상들을 정리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중국 어느 지역에서는 마약 중독자들을 지하 땅굴 속에 가두고 위에서 잠가버리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완치률은 90% 이상이라고 합니다.
감옥은 쓸데없는 중독현상을 끊게 하기 좋은 곳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이 고난의 감옥에 들어가 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필요한 생각들과 태도들을 고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해서 현재의 고난을 견디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은 훌륭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지만 성령님과 의견을 달리하고 행동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행동을 막으셨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10)
아무리 은사가 훌륭해도 성령님께서 지시하시는 쪽으로 따르지 않으면 고난을 받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생활을 행하다가 징계를 당하는 경우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가장 우선 순위로 순종을 해드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므로 현재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철저한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받은 바 은사대로 순종을 안 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초기 사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사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분명히 이방인들에게 쓰실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8:6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꾸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인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해봐야 믿지를 않으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에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면 된다는 겁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고 큰 기회를 받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 곧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받은 바 은사를 전도를 실천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전도는 그 자체가 남을 돕는 행위인 것입니다. 전도만큼 사람을 강력하게 살려내는 힘은 없습니다.
수많은 가정이 이혼을 하려고 했지만 예수님 믿고 회복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극복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고통을 당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치유 받았습니다.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성자 프랜시스의 고백입니다.
"나는 권력과 부를 가져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조금은 기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러한 과거의 기쁨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얻게 되는 기쁨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령님께서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남을 도울 때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를 잡을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서 그에 맞는 장소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물론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해야 하므로 사람에 대한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문화적 동류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같은 층끼리 모이려고 하는 동일수준의 계층선호사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만나서 편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서 복잡하고 자꾸 신경이 쓰이고 하는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람을 끊을 수는 없지만 내가 만나서 아주 편안하게 정말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층이 어느 층인가를 먼저 설정을 해서 그 대상의 사람들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잡고자 하는 물고기를 먼저 선정을 하고 거기에 맞는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수고했으나 고기를 못잡았던 베드로에게 "아무 곳이나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6)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맞는 장소를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갈까요?" 하고 주님께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도를 실천할 때 ''무엇으로 그 사람을 돕고, 무엇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하려고 해도 갖은 것이 없어서 전도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받은 바 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상대방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은사를 가지고 상대방을 도우면 그것처럼 큰 도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만 남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므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면 전도는 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바 은사를 남김없이 모두 활용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사를 받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은사를 소멸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은사를 하나님께서 불일 듯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전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전도를 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처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엄마들이 아기에 대한 백과사전을 반드시 미리 다 읽고 난 다음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아이를 낳은 후에 백과사전도 보고 주위의 어른들에게도 물어 배워 가면서 아이를 잘 길러 나가는 것입니다.
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전도하기 위해 나선 후에 경험자들에게 잘 물어 가면서 처리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말했다고 합니다.
"네게 날마다 1,440불씩을 주겠다. 그런데 주의 할 것은 그 날 반드시 그 돈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모두 회수해 가겠다."
꿈에서 깨어난 청년은 도대체 그 1,440달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다가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24시간을 분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1,440분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들에게 1,440분을 주십니다. 그것은 그 날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수해 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시간뿐만 아니라 받은 바 은사도 낭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기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너무 많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주셨고 우리들은 받았습니다. 문제는 활용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7-31)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한 지체에 두시지 않으시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5만여 교회가 있지만 그 5만여 교회의 목사들의 은사는 다 다르고 그 5만여 교회의 특징이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물가에 심기운교회는 물가에 심기운교회에 맞는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는 말씀은 다른 은사는 다 무시하고 사랑의 은사만을 받으라고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은사를 다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은사에다가 사랑의 은사를 구해서 합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랑의 은사를 구해서 사랑으로 방언을 행사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랑의 은사를 구해서 사랑과 신유를 합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것을 너무너무 안타까워하십니다. 이제부터라도 남은 생애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들의 고유의 장점, 은사를 남김없이 활용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