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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근목사 (승리교회)
며칠 전 신문 사회면 기사 한쪽에 ‘왕따 비관 목 매 자살’이라는 제목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14일날 우리 가까이 있는 파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 짜리 여학생이 따돌림당한 것이 너무 괴로워서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즘 ‘왕따’라는 전에 쓰지 않던 단어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한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왕따 현상이 학교의 큰 문젯거리가 되고 보편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쓰는 은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왕따라는 말 외에도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을 따돌이, 따순이라 부르기도 하구요. 또 은따가 있습니다. 은따라는 것은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영따라고 해서 영원히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전따라 해서 전교생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따돌림을 당하는데 그 느낌이 어떤가 물어보니까 14.2%가 죽고싶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왕따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어보니까 3척 때문에 그렇답니다. 잘난 척, 예쁜 척, 착한척하기 때문에 왕따 당한다는 것입니다. 못생기고 공부 못해서만이 아닙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도 왕따 당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왕따 당합니다. 반 아이들이 다 왕따 시키는데 내가 나서게되면 내가 착한 척하게 되어서 나도 같이 왕따 당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으면서도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되면 내가 곧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사랑으로 만족하고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부터는 부모님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친구와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서, 수평적인 관계를 통해서 내가 사랑과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 살맛이 나는 것이지 부모님이 주신 수직적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부터 관계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반드시 성적인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신자 때는 영적으로 유아기 때와 같다고 할 수 있겠죠. 그 때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이같이 큰 죄인이 이같이 큰 은혜로 구원받고 내가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늘 감사하며 감격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분명한 구원의 확신이 생기게 되고 매주일 빠지지 않고 주일 성수하게 되고 그리고 신앙이 점점 자라서 교사도 되고 성가대원도 되고 구역장도 되고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가 되면서부터는 달라집니다.
교인과의 관계가 점점 비중을 많이 차지하게 됩니다. 성도간의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신앙 생활에 재미가 나고 교회도 가고 싶지 교우관계가 틀어지게되면 신앙에 큰 상처가 되고 교회 가기도 싫고 아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보십시오. 친구관계가 잘못되니까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이만큼 큰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간에, 교우간에 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게 되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라는 것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실 더 힘듭니다. 여러분 부부 관계 얼마나 가깝습니까. 그래서 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지만 이게 한번 틀어지게 되면 가장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부부간의 인간 관계인 것입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관계, 그것은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같은 성도, 같은 구역, 같은 교인끼리는 사정이 다릅니다. 자주 만나기 때문에 그만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좋은 인간 관계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7장 끝 부분에 보면 대부분의 기도를 제자들을 위해서 할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 거기에 예수님의 기도가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니 삼 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던 열 두 제자들, 그들이 하나되는 것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게 뭘 중요하다고 네 번이나 강조해서 하나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되게 해주십시오. 거듭거듭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만큼 사탄이 하나되는 것을 방해할 것을 예상하시고 주님께서 하나될 것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끼리 그것도 같은 교인끼리, 같은 구역식구끼리 하나되는 것 뭘 그리 어렵겠습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 당연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문제가 얼마나 됩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한 식구가 서로 하나된다는 것 당연하고 쉬울텐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이제 성경에 보면 특별히 바울 서신에 보면 초반부는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말하고 하나님과 어떻게 바른 관계를 맺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반드시 인간과 인간끼리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함께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로마서를 보면 1장에서 11장까지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인간관계, 바른 실천적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조금 앞 부분에 보면 우리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머리시고 우리 모두는 함께 몸을 이루고 있는 한 몸입니다.
이제 이 몸이 건강해야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건강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체간의 혈액순환이 잘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영양상태가 좋아도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리게 되죠. 특히 한방에서는 혈액순환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혈액순환이 모든 질병의 근원이라 보고 혈액순환을 원활히 해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잘 아시느냐 궁금해하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약방집 아들입니다. 등너머로 조금 들은 풍월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일하는 사람이 발을 삐었나봐요. 발목이 퉁퉁 부어서 적당한 탈것이 없으니까 리어카에 실려서 약방에 왔어요. 그런데 제 아버님이 침을 놓고 한 30분쯤 있으니까 제 발로 걸어서 나가더라구요. 어릴 때 마치 마술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아, 신기하다, 침이 뭔데 몇 개 꽂아두었는데 금방 낳더라구요. ‘아버지 그게 뭡니까.’ 물어보니까 혈관을 자극해서 혈액순환을 잘 도와주게 해주는 침이라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성도 성도간에 사랑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듯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뜨겁게 사랑하고 이것이 되어야 건강한 교회가 되어서 일할 수 있는 것이지 숫자만 많이 모인다고 힘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듬직하고 뚱뚱하다고 힘씁니까.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으면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다고요.
우리가 건강한 교회, 힘있는 교회,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끼리, 성도끼리 바른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성도끼리 바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0절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서로 우애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애라는 이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필로스 토르고입니다. 이 말의 뜻은 혈족적인 사랑, 가족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 서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입니다.
지난주일 성찬식을 했는데 그 성찬식은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속을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성찬입니다만 동시에 이것은 천국에서 우리가 함께 먹을 천국의 식사, 공동 식사를 상징하는 예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하나님 품에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식사를 할 한 가족이다 하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가족은 서로 우애해야 합니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미움이 아니고 다툼이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더라도 서로 미워하지 않더라도 무관심한 그것이 가장 나쁜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현대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실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현대 교회는 식당으로 전락하고 있다,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고 대중 식당처럼 되어가고 있다’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중식당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옆에 누가 않았는지 관심 있습니까. 관심 없죠. 오로지 내가 음식 먹는 것에만 관심 있죠.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내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영적인 양식을 받아먹고 내가 은혜 받는 것 여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옆에 누가 앉아있는지 옆에 누가 고통스러운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야 우리가 어떻게 한 가족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서로서로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끈끈한 혈족으로서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그래야 우애가 되는 것이고 그래야 우리가 힘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가 먼저 다가서면 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이면 상대도 관심을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한 걸음 다가서게 되면 상대도 한 걸음 다가서게 되어있습니다. 간혹 엘리베이터 타면 둘만 있게 되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틀림없이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서로 통성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 걸기 어색합니다. 그런데 그냥 있으면 어떻습니까. 그 몇 초밖에 안 되는데 얼마나 지루한지 서로 민망하죠. 그 때 여러분이 먼저 말을 건네 보시죠. 몇 층에 사십니까, 오늘 날씨가 차군요. 한 마디 건네면 상대방도 아주 부드럽고 따스하게 나옵니다. 그럼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만날 때마다 인사하게 되고 그럼 사는 것이 각박해지지 않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 말을 걸어와야 대꾸하죠. 그게 바로 게으른 마음입니다.
일거리가 있으면 내가 해야지 그게 바로 열심 있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죠. 남이 하겠지 하는 것은 게으른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관심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다가와 주겠지 하고 부동 자세로 자신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면 게으른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뭡니까. ‘서로 먼저’ 내가 먼저 다가섭시다. 우리가 예배 중간에 서로 교제시간을 갖죠. 성도의 교제 갖는 시간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동성간은 가볍게 포옹해주시고 이성간은 악수하시면서 정겹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드리는데 처음에는 잘하시는데 요즘은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하면서 그리고 돌아서서는 옆에 누가 앉았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면 그것은 참으로 사랑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인사할 때 그저 소 닭 쳐다보듯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지 마시고 정말 사랑하는 어머니가 딸을 보듯이 가족끼리 쳐다보듯이 사랑이 담뿍 담긴, 관심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쳐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 생활이 재미가 없어요. 왕따 당하는 느낌입니다. 수천 명이 함께 예배드리지만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그런 분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서십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인사를 미리 땅겨서 하십시다. 오늘 인사는 ‘있다 차 한잔합시다.’ 우리 교회서 나가실 때 친교를 위해서 차를 대접하고 있는데요. 수년간하고 있는데요. 아직 차 한잔 마시지 않고 예배 마치자마자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007 교인이 꽤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교제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소한도의 시간을 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먼저 다가서십시다. 가족말고 늘 있는 사람말고 조금 서먹서먹한 낯선 사람 얼굴은 마주친 적이 있지만 아직도 통성명한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앞뒤좌우에 있으면 ‘있다가 차 한 잔 합시다’ 인사하십시오.
‘서로 우애하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두 번째로는 서로 존경하라하십니다. 목사님 존경할라해도 존경할 건더기가 있습니까. 특별히 돈 많은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지체 높은 분도 없는 것 같은데 어디를 보느냐 거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디를 볼 것이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무레투스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굉장히 가난한 학자입니다. 가난하다보니까 굶기를 밥먹듯 해서 몸이 너무 쇠약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거리를 거닐다가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마침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발견해서 극빈자 수용소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정신이 들자 외과의사 두 명이 이 사람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이 사람이 못 알아들으리라 생각하고 라틴어로 둘이 이야기합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을 또 데려다놨네, 이런 무가치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괜히 시간 보내고 신경 쓸 것 없잖아 그냥 치료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두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있던 무레투스가 라틴어로 한마디했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무가치하다고 하지 마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를 누가 감히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를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예수님의 목숨과 맞바꾼 존재들입니다. 만약 이 우주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밖에 없으면 그러면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안 오셨겠습니까.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셨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짜리 예수님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존귀한 자입니다. 동시에 옆에 있는 다른 성도도 이와 같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돈이 있던지 학벌이 있던지 그런 것 따질게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처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이 자리에 성도가 없고 각 국의 대통령을 앉혀놓았다 할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의 모임보다도 여러분들의 모임이 훨씬 더 소중한 모임입니다. 이제 이 믿음의 눈으로 서로서로 바라보면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가 잘못을 할 때입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는 존귀한 자처럼 살아야할텐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그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가 잘못한다고 해서 성도가 아닌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절대 축복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자거든요. 아브라함이 좋은 일 해서 복 받은 겁니까. 아니요.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복을 받은 자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했어요. 바울에게 팔아먹었어요. 약속의 땅 가나안이 흉년든다고 애굽으로 피난 갔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왜요. 절대적 복을 주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으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복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성도를 비난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 소년 강제구라는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보았는데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이 지금도 제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강제구가 사관생도였을 때 사관생도 답지 않은 잘못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지나가던 선배가 강제구를 불러 세웠습니다. 귀관, 사관생도가 이런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고 벌점을 주고 갑니다. 그냥 지나가는 장면이죠. 그런데 저는 그 선배 생도가 후배생도를 향하여 귀관이라 부른 장면이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아 저게 바로 사관생도의 자부심이구나, 실수를 해도 사관생도는 사관생도 입니다. 야, XX야 그러면 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해도 귀관이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어떻게 대했는지 여러분 기억해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보면 장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충성스러운 사울의 장군입니다. 신하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정신이 약간 헷가닥 해 가지고는 사위이자 충성스런 부하를 자꾸 죽이려고 합니다. 몇 번 죽이려고 창을 던졌지만 실패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이 피신을 가죠. 그런데 군사를 풀어 따라다니면서까지 다윗을 죽이려합니다. 그러다가 굴속에 숨어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사울이 굴 입구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네 까짓게 무슨 왕이냐, 무슨 장인이야 하고 얼마든지 헤칠 수 있었습니다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옷만 살짝 벤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때 ‘내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엎드려 절하면서 왜 나를 죽이려하십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당신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입니다. 내 손으로 당신을 헤하지 않겠습니다 말합니다.
이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인도해가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니까 모세가 발끈해 가지고 이 패역한 백성들이여 하면서 그들에게 화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복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패역한’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잘못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모함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격적인 모욕을 내게 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성도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도 복 받은 자입니다. 그를 축복해주어야 내가 축복을 받습니다. 저주하지 마십시오. 비난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내가 먼저 그를 존경하면 그도 나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심는대로 거두거든요.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내가 좋게 대접하면 당장은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 뉴올리언스에 말가리다라는 여사가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여자 혼자 운영하다 보니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아야할 텐데 이 뉴올리언스라는 그 도시가 빈민가여서 모금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연말이 다가오고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돈이 부족해서 아이들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형편입니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성탄절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그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여사는 거리에 나가서 모금을 하기 시작합니다. 연말분위기로 흥청대는 한 술집에 들어가서 불쌍하고 가엾은 고아들을 위해서 모금을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면하고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 몇 푼 줍니다. 그런데 이 때 술주정뱅이 하나가 ‘시끄러, 이거 뭐야 술맛 떨어지게, 이거나 먹고 떨어져’ 그리고는 마시던 맥주 컵을 이 여인을 향해서 던졌습니다. 미쳐 피할 틈도 없이 맥주 컵이 얼굴에 맞았습니다. 유리컵이 깨지면서 얼굴에 피가 솟구칩니다. 순간 술집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반응할까 지켜보았습니다. 이 여사는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막으면서 깨어진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모았습니다. 그리고 유리조각을 모아 일어서면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컵은 제게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저 가엾은 고아들을 위해서는 어떤 선물을 주시겠습니까’ 너무나도 뜻밖의 반응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조용히 있다가 한참 후에 와 하는 함성과 박수와 함께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있다 보니 컵을 던진 술주정뱅이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는 지갑이 하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 메모지가 놓여있고 이와 같이 적혀있었습니다. ‘불쌍한 고아들을 위하여’
내가 존경하면 상대방도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는 못하지요. 내 인격으로는 못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화해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 이룩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하자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소원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맹맹한 신앙생활, 재미없는 신앙생활 여기에 만족하지 마십시다.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 힘있는 선교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주님께 능력을 구하여 그 능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서 내가 먼저 우애하고 내가 먼저 존경하여서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 이룩하여 주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은 선교의 공동체 힘있는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며칠 전 신문 사회면 기사 한쪽에 ‘왕따 비관 목 매 자살’이라는 제목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14일날 우리 가까이 있는 파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 짜리 여학생이 따돌림당한 것이 너무 괴로워서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즘 ‘왕따’라는 전에 쓰지 않던 단어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한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왕따 현상이 학교의 큰 문젯거리가 되고 보편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쓰는 은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왕따라는 말 외에도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을 따돌이, 따순이라 부르기도 하구요. 또 은따가 있습니다. 은따라는 것은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영따라고 해서 영원히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전따라 해서 전교생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따돌림을 당하는데 그 느낌이 어떤가 물어보니까 14.2%가 죽고싶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왕따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어보니까 3척 때문에 그렇답니다. 잘난 척, 예쁜 척, 착한척하기 때문에 왕따 당한다는 것입니다. 못생기고 공부 못해서만이 아닙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도 왕따 당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왕따 당합니다. 반 아이들이 다 왕따 시키는데 내가 나서게되면 내가 착한 척하게 되어서 나도 같이 왕따 당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으면서도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되면 내가 곧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사랑으로 만족하고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부터는 부모님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친구와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서, 수평적인 관계를 통해서 내가 사랑과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 살맛이 나는 것이지 부모님이 주신 수직적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부터 관계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반드시 성적인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신자 때는 영적으로 유아기 때와 같다고 할 수 있겠죠. 그 때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이같이 큰 죄인이 이같이 큰 은혜로 구원받고 내가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늘 감사하며 감격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분명한 구원의 확신이 생기게 되고 매주일 빠지지 않고 주일 성수하게 되고 그리고 신앙이 점점 자라서 교사도 되고 성가대원도 되고 구역장도 되고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가 되면서부터는 달라집니다.
교인과의 관계가 점점 비중을 많이 차지하게 됩니다. 성도간의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신앙 생활에 재미가 나고 교회도 가고 싶지 교우관계가 틀어지게되면 신앙에 큰 상처가 되고 교회 가기도 싫고 아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보십시오. 친구관계가 잘못되니까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이만큼 큰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간에, 교우간에 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게 되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라는 것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실 더 힘듭니다. 여러분 부부 관계 얼마나 가깝습니까. 그래서 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지만 이게 한번 틀어지게 되면 가장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부부간의 인간 관계인 것입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관계, 그것은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같은 성도, 같은 구역, 같은 교인끼리는 사정이 다릅니다. 자주 만나기 때문에 그만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좋은 인간 관계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7장 끝 부분에 보면 대부분의 기도를 제자들을 위해서 할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 거기에 예수님의 기도가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니 삼 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던 열 두 제자들, 그들이 하나되는 것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게 뭘 중요하다고 네 번이나 강조해서 하나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되게 해주십시오. 거듭거듭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만큼 사탄이 하나되는 것을 방해할 것을 예상하시고 주님께서 하나될 것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끼리 그것도 같은 교인끼리, 같은 구역식구끼리 하나되는 것 뭘 그리 어렵겠습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 당연한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문제가 얼마나 됩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한 식구가 서로 하나된다는 것 당연하고 쉬울텐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이제 성경에 보면 특별히 바울 서신에 보면 초반부는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말하고 하나님과 어떻게 바른 관계를 맺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반드시 인간과 인간끼리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함께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로마서를 보면 1장에서 11장까지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인간관계, 바른 실천적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조금 앞 부분에 보면 우리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머리시고 우리 모두는 함께 몸을 이루고 있는 한 몸입니다.
이제 이 몸이 건강해야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건강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체간의 혈액순환이 잘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영양상태가 좋아도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리게 되죠. 특히 한방에서는 혈액순환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혈액순환이 모든 질병의 근원이라 보고 혈액순환을 원활히 해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잘 아시느냐 궁금해하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약방집 아들입니다. 등너머로 조금 들은 풍월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일하는 사람이 발을 삐었나봐요. 발목이 퉁퉁 부어서 적당한 탈것이 없으니까 리어카에 실려서 약방에 왔어요. 그런데 제 아버님이 침을 놓고 한 30분쯤 있으니까 제 발로 걸어서 나가더라구요. 어릴 때 마치 마술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아, 신기하다, 침이 뭔데 몇 개 꽂아두었는데 금방 낳더라구요. ‘아버지 그게 뭡니까.’ 물어보니까 혈관을 자극해서 혈액순환을 잘 도와주게 해주는 침이라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성도 성도간에 사랑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듯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뜨겁게 사랑하고 이것이 되어야 건강한 교회가 되어서 일할 수 있는 것이지 숫자만 많이 모인다고 힘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듬직하고 뚱뚱하다고 힘씁니까.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으면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다고요.
우리가 건강한 교회, 힘있는 교회,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끼리, 성도끼리 바른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성도끼리 바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0절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서로 우애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애라는 이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필로스 토르고입니다. 이 말의 뜻은 혈족적인 사랑, 가족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 서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입니다.
지난주일 성찬식을 했는데 그 성찬식은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속을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성찬입니다만 동시에 이것은 천국에서 우리가 함께 먹을 천국의 식사, 공동 식사를 상징하는 예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하나님 품에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식사를 할 한 가족이다 하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가족은 서로 우애해야 합니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미움이 아니고 다툼이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더라도 서로 미워하지 않더라도 무관심한 그것이 가장 나쁜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현대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실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현대 교회는 식당으로 전락하고 있다,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고 대중 식당처럼 되어가고 있다’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중식당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옆에 누가 않았는지 관심 있습니까. 관심 없죠. 오로지 내가 음식 먹는 것에만 관심 있죠.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내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영적인 양식을 받아먹고 내가 은혜 받는 것 여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옆에 누가 앉아있는지 옆에 누가 고통스러운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야 우리가 어떻게 한 가족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서로서로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끈끈한 혈족으로서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그래야 우애가 되는 것이고 그래야 우리가 힘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가 먼저 다가서면 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이면 상대도 관심을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한 걸음 다가서게 되면 상대도 한 걸음 다가서게 되어있습니다. 간혹 엘리베이터 타면 둘만 있게 되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틀림없이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서로 통성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 걸기 어색합니다. 그런데 그냥 있으면 어떻습니까. 그 몇 초밖에 안 되는데 얼마나 지루한지 서로 민망하죠. 그 때 여러분이 먼저 말을 건네 보시죠. 몇 층에 사십니까, 오늘 날씨가 차군요. 한 마디 건네면 상대방도 아주 부드럽고 따스하게 나옵니다. 그럼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만날 때마다 인사하게 되고 그럼 사는 것이 각박해지지 않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 말을 걸어와야 대꾸하죠. 그게 바로 게으른 마음입니다.
일거리가 있으면 내가 해야지 그게 바로 열심 있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죠. 남이 하겠지 하는 것은 게으른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관심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다가와 주겠지 하고 부동 자세로 자신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면 게으른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뭡니까. ‘서로 먼저’ 내가 먼저 다가섭시다. 우리가 예배 중간에 서로 교제시간을 갖죠. 성도의 교제 갖는 시간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동성간은 가볍게 포옹해주시고 이성간은 악수하시면서 정겹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드리는데 처음에는 잘하시는데 요즘은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하면서 그리고 돌아서서는 옆에 누가 앉았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면 그것은 참으로 사랑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인사할 때 그저 소 닭 쳐다보듯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지 마시고 정말 사랑하는 어머니가 딸을 보듯이 가족끼리 쳐다보듯이 사랑이 담뿍 담긴, 관심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쳐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 생활이 재미가 없어요. 왕따 당하는 느낌입니다. 수천 명이 함께 예배드리지만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그런 분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서십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인사를 미리 땅겨서 하십시다. 오늘 인사는 ‘있다 차 한잔합시다.’ 우리 교회서 나가실 때 친교를 위해서 차를 대접하고 있는데요. 수년간하고 있는데요. 아직 차 한잔 마시지 않고 예배 마치자마자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007 교인이 꽤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교제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소한도의 시간을 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먼저 다가서십시다. 가족말고 늘 있는 사람말고 조금 서먹서먹한 낯선 사람 얼굴은 마주친 적이 있지만 아직도 통성명한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앞뒤좌우에 있으면 ‘있다가 차 한 잔 합시다’ 인사하십시오.
‘서로 우애하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두 번째로는 서로 존경하라하십니다. 목사님 존경할라해도 존경할 건더기가 있습니까. 특별히 돈 많은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지체 높은 분도 없는 것 같은데 어디를 보느냐 거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디를 볼 것이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무레투스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굉장히 가난한 학자입니다. 가난하다보니까 굶기를 밥먹듯 해서 몸이 너무 쇠약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거리를 거닐다가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마침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발견해서 극빈자 수용소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정신이 들자 외과의사 두 명이 이 사람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이 사람이 못 알아들으리라 생각하고 라틴어로 둘이 이야기합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을 또 데려다놨네, 이런 무가치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괜히 시간 보내고 신경 쓸 것 없잖아 그냥 치료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두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있던 무레투스가 라틴어로 한마디했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무가치하다고 하지 마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를 누가 감히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를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예수님의 목숨과 맞바꾼 존재들입니다. 만약 이 우주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밖에 없으면 그러면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안 오셨겠습니까.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셨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짜리 예수님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존귀한 자입니다. 동시에 옆에 있는 다른 성도도 이와 같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돈이 있던지 학벌이 있던지 그런 것 따질게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처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이 자리에 성도가 없고 각 국의 대통령을 앉혀놓았다 할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의 모임보다도 여러분들의 모임이 훨씬 더 소중한 모임입니다. 이제 이 믿음의 눈으로 서로서로 바라보면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가 잘못을 할 때입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는 존귀한 자처럼 살아야할텐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그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가 잘못한다고 해서 성도가 아닌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절대 축복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자거든요. 아브라함이 좋은 일 해서 복 받은 겁니까. 아니요.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복을 받은 자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했어요. 바울에게 팔아먹었어요. 약속의 땅 가나안이 흉년든다고 애굽으로 피난 갔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왜요. 절대적 복을 주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으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하셨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복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성도를 비난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 소년 강제구라는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보았는데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이 지금도 제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강제구가 사관생도였을 때 사관생도 답지 않은 잘못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지나가던 선배가 강제구를 불러 세웠습니다. 귀관, 사관생도가 이런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고 벌점을 주고 갑니다. 그냥 지나가는 장면이죠. 그런데 저는 그 선배 생도가 후배생도를 향하여 귀관이라 부른 장면이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아 저게 바로 사관생도의 자부심이구나, 실수를 해도 사관생도는 사관생도 입니다. 야, XX야 그러면 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해도 귀관이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어떻게 대했는지 여러분 기억해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보면 장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충성스러운 사울의 장군입니다. 신하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정신이 약간 헷가닥 해 가지고는 사위이자 충성스런 부하를 자꾸 죽이려고 합니다. 몇 번 죽이려고 창을 던졌지만 실패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이 피신을 가죠. 그런데 군사를 풀어 따라다니면서까지 다윗을 죽이려합니다. 그러다가 굴속에 숨어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사울이 굴 입구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네 까짓게 무슨 왕이냐, 무슨 장인이야 하고 얼마든지 헤칠 수 있었습니다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옷만 살짝 벤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때 ‘내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엎드려 절하면서 왜 나를 죽이려하십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당신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입니다. 내 손으로 당신을 헤하지 않겠습니다 말합니다.
이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인도해가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니까 모세가 발끈해 가지고 이 패역한 백성들이여 하면서 그들에게 화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복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패역한’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잘못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모함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격적인 모욕을 내게 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성도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도 복 받은 자입니다. 그를 축복해주어야 내가 축복을 받습니다. 저주하지 마십시오. 비난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내가 먼저 그를 존경하면 그도 나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심는대로 거두거든요.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내가 좋게 대접하면 당장은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 뉴올리언스에 말가리다라는 여사가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여자 혼자 운영하다 보니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아야할 텐데 이 뉴올리언스라는 그 도시가 빈민가여서 모금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연말이 다가오고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돈이 부족해서 아이들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형편입니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성탄절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그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여사는 거리에 나가서 모금을 하기 시작합니다. 연말분위기로 흥청대는 한 술집에 들어가서 불쌍하고 가엾은 고아들을 위해서 모금을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면하고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 몇 푼 줍니다. 그런데 이 때 술주정뱅이 하나가 ‘시끄러, 이거 뭐야 술맛 떨어지게, 이거나 먹고 떨어져’ 그리고는 마시던 맥주 컵을 이 여인을 향해서 던졌습니다. 미쳐 피할 틈도 없이 맥주 컵이 얼굴에 맞았습니다. 유리컵이 깨지면서 얼굴에 피가 솟구칩니다. 순간 술집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반응할까 지켜보았습니다. 이 여사는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막으면서 깨어진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모았습니다. 그리고 유리조각을 모아 일어서면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컵은 제게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저 가엾은 고아들을 위해서는 어떤 선물을 주시겠습니까’ 너무나도 뜻밖의 반응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조용히 있다가 한참 후에 와 하는 함성과 박수와 함께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있다 보니 컵을 던진 술주정뱅이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는 지갑이 하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 메모지가 놓여있고 이와 같이 적혀있었습니다. ‘불쌍한 고아들을 위하여’
내가 존경하면 상대방도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는 못하지요. 내 인격으로는 못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화해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 이룩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하자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소원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맹맹한 신앙생활, 재미없는 신앙생활 여기에 만족하지 마십시다.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 힘있는 선교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주님께 능력을 구하여 그 능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서 내가 먼저 우애하고 내가 먼저 존경하여서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 이룩하여 주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은 선교의 공동체 힘있는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