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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갈릴리 해변 어딘가에 위치한 미지의 한 산이 새 언약의 시내산이 었습니다. 황량하고 쓸쓸한 광야의 시내산과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해빛 쬐는 아름다운 언덕인 새 시내산의 현격한 차이는 이 두 산에서 주어진 법의 대조적인 특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옛 시내산에서는 우뢰와 번개와 빽뻑한 구름이 산위에 있고, 심히 큰 나팔 소리가 나고, 모든 백성이 진중에서 떨고 있고, 주님께서는 불 가운데 강림하여 옛 율법을 반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새 시내산에서는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함께 않으사 왕국의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은 이 천국의 법을 돌비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이 법에는 "할찌니라" 는 엄격한 강제어나 "하지 말찌니라"는 냉흑한 금지어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모두 축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인격적 특성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팔복 중 이 첫번째 복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사람에게는 죽은 것, 인연이 없는 것입니다. 보이는 외적인 것들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하고 심원한 내적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칭찬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정죄하고, 세상이 피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고 명하시며, 그 안에서 우리가 참된 복을 얻을 것이라고 확언 하십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말하는 복된 이유도 복을 이루는 인격 자체처럼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법칙과는 다른 것입니다. - "천국이 저희 것이다".
심령의 가난이 세상적인 어떤 계획을 앞당겨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이 세상에서 성공과 부유라고 불리는 것을 이루어 주는 수단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령의 가난은 우리에게 이 세상적인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줍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확실히 이 지상의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상의 선물은 잃어도 하늘의 복을 확실히 소유하는 그런 사람들의 행복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러면 지금 주의를 기우려 주십시요,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근본적 인격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심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헬4151)는 여기서 '영'(spirit), 곧 인간의 가장 내부의 자아를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토코스(헬4431)는 여기서 '극빈자', 곧 거지가 될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음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프토코스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브욘이나 아니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은 서너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1) 물질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 2) 사회적으로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힘없고 억압당하는 사람, 3) 하나님 앞에 영적 상태로,
영적 빈곤과 고통 중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도움이나 구원을 요청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가난한 자"는 3)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어 신약성경 역본에는 본절에서 아니가 사용되었는데, 팔복의 내용과 관련하여 에브욘보다 적절하기 때문이다.
아니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는 의미로부터 그 뜻이 변하여 깊은 곤궁과 곤란 속에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도움을 얻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종교적 칭호가 되었습니다.
아니는 스가랴 9:9에서 메시아를 묘사하며, 이러한 자는 겸손한 자이며(잠3:34; 시18:27), 통회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으며(사66:2),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며(74:19),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이며(14:6), 구원을 확신하는 자입니다(삼하22:28).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6:20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언뜻 보면 외적 지상적 빈곤 상태에 대한 찬사와 축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물질적 가난이 미덕이고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부자들을 통렬히 매도하는 세속적 민중 선동자가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6:20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언뜻 보면 외적 지상적 빈곤 상태에 대한 찬사와 축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물질적 가난이 미덕이고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부자들을 통렬히 매도하는 세속적 민중 선동자가 아닙니다.
외적인 가난이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종종 나타나는 듯이 가난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이 그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것도 복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훨씬 빈번합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외적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연인들에 대해 말할 때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난에 아무런 미덕이나 유익이 없습니다. 빈궁이 영성(spirituality)을 보 장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난"은 외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누가복음 6장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주님은 "가난"이란 말을 세속심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며, 따라서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받은 정신입니다. 많은 부자들이 세속심에 사로잡혀 세상의 부귀를 탐내고 의지하는 것과 같이 많은 가난한 자들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외적으로 가난한 자라 하여 "복되도다"라고 할 수 없습니 다.
로마 카토릭의 주석가들의 대부분과 그들의 모방자들은 이 말씀을 자원적 빈궁을 권장하는 성경의 근거로 삼습니다. 그들은 앗시시의 프란시스와 같은 타입의 사람들만이 이 가난한 자의 복에 부합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말씀은 일부려 스스로 가난해지고 부귀에 등을 돌린 사람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의 경우는 그리스도안에서 세속심을 버린 자들의 일종의 생활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세속심이 없는 것과 외적 가난을 혼돈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심지가 약하거나 소심한 자, 다른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무능무지한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식하는 심령, 곧 일부려 겸손하는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까? 이 영적 가난은 자신의 결핍,연약, 공허,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 죄악등을 분명히 알아서 자신을 겸손하게, 정당하게 평가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된 것은,
- 성전에서 여호와를 뵈옵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이사야의 심정,
-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통곡하던 세리의 심정,
- 굶주림에 지치고 병약해진 돌아은 탕자의 마음,
- 한 때 자기 의를 내세웠으나 주님을 만난 후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친 바울의 심정과도 같은 자기 부인,
- 그리하여 하나님만 의존하여 도움과 구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가난은 4가지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핍과 무력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부족한 존재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생과 내세의 진정한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만 누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3) 세속심(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귀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4)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정당히 평가하는 진정한 겸손입니다. 따라서 최선의 삶을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 영적 가난에 반대되는 것은 자기 의(self righteous)에 도취된 심성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바리새 인들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 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례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거만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는 천국시민의 인격의 특성을 결핍과 죄에 대한 자각으로부러 묘사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나머지 모든 도덕률은 이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제 1 복은 천적(天的)이고 신적(神的)인 온갖 성격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자기 신뢰를 표방하는 현대인들의 사상과 이교 교리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사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는,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교만한 자기 신뢰가 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원리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생각해 봅시다.
불빛 주위를 맴도는 나방이나 햇빛 속을 춤추며 날아다니는 모기가 자기의 일부 친구들 보다 더 긴 날개, 더 아름다운 무늬를 가졌다는 이유로 교만을 떤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한 것과 가진 것을 자랑하고 중시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까? 답변이 아주 명백한 서 너 가지 질문이면 우리 모두가 저지르기 쉬운 과대한 자기 평가를 산산이 깨뜨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당신이 가진 것들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 당신이 그것을 어디서 받았습너까?
-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겠습니까?
- 결국에 가서 그것은 지금처럼 아주 위대한 것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 당신이 한 권의 책을 저술했다 합시다.
- 당신이 뛰어난 기사, 실험가라 합시다.
- 당신이 유명한 학자라 합시다.
- 당신이 돈을 무더기로 모은 재벌이라 합시다.
- 당신이 크게 출세하고 성공하여 사회적 지위를 얻고 당신 아래 있는 인생 낙오자들을 동정, 또는 경멸의 미소로 대할 여유가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엇 대단한 것이라고 뽑낼만한 것입니까?
숲 속에 있는 두 개의 개미 탑 꼭대기에서 가장 가까운 별을 바라볼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한 자 더 높다 하더라도 그 별자리까지의 거리는 거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없는 것, 무(無)에서 나왔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단 한 순간이라도 지탱시키는 능력과 호흡을 주시는 권능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불 속에서 사그러드는 한 조각 종이처럼 무로 돌아갈 것이며, 하나님의 일성만이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러한 진공 속으로 다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위에서 자신의 자질과 소유물을 매우 중시합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언제나 우리 자신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극한 공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처럼 뽑내고 자랑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니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이 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자기 자신을 높이 치켜 듭니까?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을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 자신에 대한 평가에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현재의 많은 번민과 불행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언제나 낮게 평가해야 될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 인간이 의존적 피조믈의 위치에 있다는 사설은 인간의 거만한 온갖 모습과 높은 기상을 제압하기에 충분합니다.
-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사실은 인간을 하나님의 위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업드리게 만들기에 충분함니다.
- 그것은 자기 입술에 손을 대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라고 외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누구나 다 거기서 온갖 자기 만족과 자아 도취를 깡그리 사그려들게 만들만한 충분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안팎을 뒤집어, 가슴 속에 꿈틀대는 온갖 더러운 것과 마음 속에 묻은 갖 가지 얼룩과 반점을 햇빛에 펼쳐 보인다면 우리는 도저히 서로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수처럼 목에 칼을 쓰고 우리가 어떤 인간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를 온 세상 앞에 공포하고 돌아다닌다면, 구태여 우리가 얼굴에 섞은 달걀 치례를 받지 않은다하더라도 자신을 지독히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이 그 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여 동료들 앞에서 으슥대며,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말하는 그러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네 자신을 알라'는 옛 헬라인들의 자랑스런 금언을 우리가 우리 자신과 결부시켜 면밀히 분석해 본다면, 우리는 온갖 자기 주장에 대한 자아 포기를 하고, 이 영적 가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하늘 아래서 가 장 순결한 성인이라도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영적 가난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한 위대한 시인은 삶을 주권적 권능에로 이끄는 것들은 자기 지식, 자아 존중, 자아 통제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오한 자기 통찰적 지식은 결국 자아 존중보다는 자기 혐오로 귀착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죄악을 해결할 수도 없고 대처할 수도 없음을 알고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앞에 자신을 내던지고 그에게 나를 구원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지켜 달라고 간구할 때만 자기 통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의 올바른 자세는 세리처럼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울부짖은 심령입니다.
오직 자기 인격의 토굴감옥 속에 들어가 자신을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그 깊은 곳으로 부터 하나님께 울부짖은 적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 영혼의 집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 꼭대기로 구름을 뚫고 하늘에 까지 닿을 수 잇을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러한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 이러한 인격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복이 있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오이는 형용사 마카리오스(헬3107)의 복수입니다. 마카리오스는 핀다르(Pindar)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염려와 걱정, 노고와 죽음이 없는 초월적 생의 행복이었습니다.
따라서 시적 언어에서 이 단어는 첫째로 지상의 고생과 노고를 초월해 있는 신들의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며, 그리고 신들의 행복한 실존에 참여하는(함께 나누는)자들의 상태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주전 4세기에 점차 이 의미는 상실되고 오늘날의 '행복한happy'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으며, 따라서 시인들이 이 단어의 사용을 피했습니다.
구약성경(70인역본)에서는 그 본래의 의미를 재생, 신학적 의미로 사용했으며, 히브리어 아쉬레(시편 1편 공부 참조)에 해당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특징은 이 단어가 하나님(나라)에 참여를 통해 오는 독특한 즐거음이나 행복을 나 타내는데 사용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복되도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렇게 번역합니다(참조:Hauck; Becker).
예수 그리스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기쁘다 유쾌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복되도다'라는 이 놀라운 단어에 내포된, 깊이와 평온함과 영구성에 비하면 빈약하고 천박한 말에 불과 함니다.
복된 상태는 즐거음을 훨씬 초월하는 것입니다. 즐거움은 때로 소란스럽기도 하고 종종 불순하기도 합니다.
이 행복은 외적 세상에 근원을 둔 어떤 기쁨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기쁨이 사라질 때도, 그리고 영혼의 겨울에 봄날의 노래가 사라질 때에도 그 행복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행복은 세상에서 가난, 궁핍, 실패, 고생과 상관없이 향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하박국 처럼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 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주어지는 약속들은 각 경우마다 팔복에서 묘사된 인격적 특질에 대해 임의로 주는 보상이라기보다 그 특질에서 자연스레 흘려나오는 결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것 임이요" 라고 주님은 말씀하셨 습니다.
이 제 1 복은 현재에 대해 말합니다. 천국이 미래 '저희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현재 '저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제 l 복은 하나의 포괄적인 약속으로서 그 자체 속에 나머지 7가지 약속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나머지 7 가지는 이 천국 소유에 내포된 다양한 측면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의 왕되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완전히 복종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서는 부분적으로 실현되며, 후에는 완전히 실현됩니다. 영적 가난은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는 필수 불가결의 조건이기 때문에 복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 허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결핍, 공허, 연약, 죄의 심각한 상태, 하나님께 의존성에 대해 피상적으로 밖에 알지 못하거나 전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무지와 그릇된 평가는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및 본질에 관한 불완전하고 불공정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이단의 모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 우리가 어떤 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짐을 제거하시는 그디스도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가 아무런 결핍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빈곤을 채울 무엇인가 있다는 소식은 그다지 감명 깊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위해 죽으셨다는 진리는 결코 복음이 되지 못할 것입 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정으로 완전히 소유하는 단 한 가지 길은 심령의 가난입니다. 그것은 좁은 문입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싶다면 영의 가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팔복을 영의 가난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영적 가난은 하나님의 부요가 찾아들게 만들고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기 때문에 복된 것입니다.
영적 가난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아와 소성시키고 정화시키고 겸손하게하는 하나님의 온갖 권능을 끌어당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 높이 솟은 피뢰침이 하늘에서 번개를 끌어당기 듯이 영적 빈곤 의식이 은혜를 끌어당김니다.
- 높은 고지는 벌거벗은 불모지입니다.
- 낮은 골짜기로 강물이 흐르며 거기애 꽃이 핍니다.
- 낮은데로 임하십니다.
-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온갖 행복의 유일한 원천인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기 원한다면 그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영적 가난을 통해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욕구가 실현을 가져다 줍니다. 자신의 결핍을 아는 자들, 오직 그들만이 무언가 채워지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이 영적 가난은 영적 가난 자체가 그 보상이기 때문에 복된 것입니다. 거만과 자기 만족은 모두, 누군가의 표현처럼 '길을 잘못 굴러가 자기 가시로 자기를 괴롭히는'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자기가 남보다 뛰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칭찬보다는 공격, 애정보다는 적대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종류의 자만심에 상처를 받아 여기 저기가 쓰리고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알고 이 모든 거만한 생각들을 벗어버리고 심령이 가난해진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즐거워하고 만족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고 지혜와 순결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존 번연의 소설에 겸손의 골짜기 아래 내려간 목동이 나옵니다. 거기서 평온심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낮은 자는 떨어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그는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뿌리 깊은 영적 가난을 가지고 있다면 폭풍우는 우리의 머리 위쪽으로 휩쓸고 지나갈 것입니다.
높은 상수리나무는 벼락을 맞지만 풀잎은 타지 않습니다. "주의 날이 모든 높은 것들에 임하고 교만한 자들은 낮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행복}이란 우리 몸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복을 가져오기 위해 "누가 하늘로 올라갈 것인가 누가 깊은데로 내려갈 것인가"라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한 복락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참된 복의 원천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복락이 우리 마음에 없으면 에덴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팔복에서 진술하는 인격적 성향을 가진다면 외적 환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복의 원천이 우리 속에 자리를 잡는다면, 거기로 가는 첫 단계는 영적 가난입니다.
영적 가난은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겸손으로 옷입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고 했습니다(골3:12; 벧전5:5).
우리 주님은 친히 종의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29).
영혼이 안식을 얻는 것, 이것이 복이 아닙니까?
끝으로 천국에 대해 몇 마디 더 언급하겠습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뜻은 이미 언급한 바처럼 천국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입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 주님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시면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 주님이 우리 교회를 다스리시면 교회가 천국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 실패의 곳이라도 천국이 됩니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천국이 됩니다.
- 고통과 시련의 장소가 천국이 됩니다.
- 가난과 초막에 살아도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