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8
마태복음 5:9
"화평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 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묘사한 것으로는 마지막 복(福)입니다. 세상이 그리스 도인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 여덟번째 복이 하나 더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일곱째가 8복 전체의 관석(冠石)과도 같습니다. 이 최고의 정점을 향해 앞의 여섯 가지 복이 점진적으로 하나의 건물을 쌓아 갑니다.
여러분이 기억하겠지만,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그리스도교적 삶의 이 모든 특성들 은 영적 빈곤이라는 뿌리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앞에서 언급하였 듯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이 첫번째 복이 나머지 모두의 뿌리와 모태인 반면, 나머지는 자신 및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루는 미덕과, 대인 관계를 논하는 미덕이 교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셋이 대인 관계 즉 세상과의 관계를 논한 것입니다. 본문의 일곱번째 복으로써 이 셋이 완성됩니다. 이 셋은 적대와 증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묘사하고 있는 "온유", 관대한 판단과동정의 행위를 묘사하는 "긍휼", 그리 고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의 가해를 참고, 이를 긍휼과 사랑으로 갚아야 함은 물론, 적극적으로 인류의 상태를 보다 건전하고 깨긋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이 세상 의 온갖 다툼과 싸움 위에,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를 불어 넣기 위해 힘써 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라는 이름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면, 이 미덕 이 일련의 8복 고리 전체 가운데서 최후의 완성품이며, 그리스도다운, 이 그리스도 교인의 자질들 전체를 하나로 묶는 보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는 자
먼저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형용 사 에이레노포이오스(헬1518)는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와 '행 하다, 만들다'을 뜻하는 포이에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역본은 이러한 의미로, peace maker라고 번역 했습니다. 여기서 복수가 사용되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필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원수들과 자연적 재난으로부터 보호할 때 그를 '평화 를 만드는 자'로 불렀지만, 이 용어는 또한 무력으로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는 강력 한 통치자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문맥에서 이 단어는 한층 히브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샬롬 이라는 단어가 의미하였던 바와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샬롬은 구약에서 인사로 나 오며(삿6:23; 19:20; 단10:9),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었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기대의 구성요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어 샬롬은 '평 화'뿐만 아니라 '구원'으로도 번역됩니다.
시편 85:9,10에는 주의 구원이 임하고 주님의 영광이 이 땅에 거하는 그때에는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마나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출"것이라고 했습니다. 야웨의 구원의 계약은 "평화의 계약"
(사54:10)이며, 메시야는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 지고 있습니다(사9:5; 미5:4).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수립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습니다. 랍비문학은 평화에 이바지했던 구약의 경건한 사람들을 찬양했습니다. 아론은 '평화를 사랑했고 평화를 추구했으며 이웃사이에 평화를 이룩했다'고 합니다. 랍비 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비슷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근본 동기는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평화)을 방해할지 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사랑과 심판 (회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룩되 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베들레헴에 탄 생하셨을 때,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찬송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펴화을 이룩하시고 평화를 전하셨습니다(롬5:10; 엡2:14-16).
평화를 베풀라는 계명은 원시 그리스도교의 권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화해와 평화 수립에 대한 의무는 그리스도교의 중심계명이며, 그리스도교의 미덕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미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서로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참조, 마 5:23; 살전5:13).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 평화를 이룩하는 자들로부터 의와 평화를 기대합니다. - 야고보는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했습니 다(약3:18).
이 샬롬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5:48에 나오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 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말씀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온전한 제자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지닌 완전한 의미에서 평화를 지닌자이며, 참으로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자녀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를 닮았기 때문에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릅니다(참조, H.Beck; C.Brown; 게오르 크 슈트레커의 산상설교).
둘째로,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는 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 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부드러운 융화와 화합을 조성하는 어떤 훌륭한 요 소를 천부적 품성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훌륭한 여성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더러있습니다. 그들은 지성적인 면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못하지만 마음의 평화 가운데 살아가므로, 그
들이 어느 자리에나 있기만 하면 다툼과 분쟁은 수그러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머지, 주변의 일들에 상관하지 않은 소 심한 형태로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들의 "평화 조성"은 단순히 시끄러운 사태를 싫 어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잠자는 개를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누워있게 하자" 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이라기보다는 싸움을 일으키는 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 격렬하게 폭팔할 재료를 쌓아가고 있기 때문입니 다(A.M).
안일무사한 사람,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화평하는 그런 사람, 말성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는 사람이 "화평케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공정과 정의감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맥이 없습니다. 그들이 멋있게 보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온 세상이 이런 원리에 입각하여 이런사람들에 의해 움직였다면 형편은 오늘보다 도 더 악화되었을 것입니다(참조, D.M.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교집).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문에서 고려하고 계시는 것은 이와 전혀 다른 기질 입니다. 팔복 시리즈에 대한 지난번의 강해들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본문의 이 인격적 특성 역시 선행하는 것들과 연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 가운데 서 이 일곱번째 것이 최후의 완성을 이루는 이름다운 꽃이자 마지막 소산입니다.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속 에서 상극하는 감정들이 서로 싸우는 사람, 자신과 하나님 사이, 자신과 어떤 의무 사이, 자신과 자신 사이에, 화합될 수 없는 분열과 불화의 큰 요인들이 가득차 있 고, 악의가 가득찬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깊고도 실질적인 어떤 평화를 심어주려 한다 해도 무위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일부 외적인 분쟁들을 피상적 땜질로 수습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뜻하는 바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는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다른 말로하면 어떤 사람이 참 으로 화평케 하는 자입니까?
앞의 구절들에서 밝히는 그러한 온갖 체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화평케 하는 자는- 자기 영의 빈곤을 깨달은 자입니다.
- 그는 통회의 눈물을 쏟은 자입니다. 실제적, 문자적으로 눈물을 흘리지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무가치성과 추악함을 생각하면서 그보다 훨씬더 고통스런 영의 눈물, 양심의 눈물을 쏟은 자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복하고 인간의 적대까지도 감내하는자입니다.
- 그는 자신이 획득한 것보다 더 고상하고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힐자입니다.
- 그는 남을 관대하게 판단하고,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힐 줄 아는 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관대한 판단이 몹시도 필요하며 자기 역시 무능력하여 도움을 받 아야 할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 그는,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한 이 모든 체험들을 통과하여 마음의 청결을 체 험함으로써 어는 정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을 얻은 자입니다.
이와같이 제반 준비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가 세상의 폭풍우 가운데서 '잠잠하 라, 고요하라
'(peace, be still)고 외칠 자격을 얻은 자, 그가 화평케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섬기는 주님의 어떤 기적적 권능이 임할 것입니 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이름에 합당한 화평케 하는 자는 이 깊은 영적 체험들을 통과한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어떤 규칙적인 단계들을 통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어떤 인격은 그런 식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고도가 서로 다른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경사면을 통해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미덕에 선행하는 이 여러가지 그리스도교적 미덕들이 개념상으로 는 분리될 수 있어도 체험상으로는 주님이 진술하신 형태로 차례대로 연결되어 있 으며, 종종 동시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좌우간 시간상으로 서로 분리되든 분리되지 않든, 그리고 선행 구절들이 약술하 고 있는 이 준비 과정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이루어지든 아니면 한꺼번에 홍수처 럼 영혼에 밀려오든,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고 축복하시는 그러한 종류의 화평케 하 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이 준비 과정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은 사 실입니다.
둘째 대지로 넘어가지 전에 여기에서 단 한가지만 더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적 인격의 정점이 대신(對 神) 관계가 아닌 대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했다시피, 마음과 영의 예배, 가장 신성하고 달콤하고 거룩하고 경 건한 감정도 절대적으로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지극히 순결한 교 제, 그리스도교적 삶의 지극히 고귀한 감정적 체험은 실제적 봉사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봉사가 후속되지 않을 경우 이 감정적 요소들은 가짜라고 생각해 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는 인간에 대한 봉사입니다. 영의 가난에서 출발하는 자가 어느 때에 비로소 완전해지는가? 그것은 자신을 잊고서, 하나님의 영광의 구 름과 들리는 소리가 있는 산 꼭대기에서 내려와 산 아래 무리들의 분쟁 속에 뛰어 들어, 귀신들린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 입니다.
반드시 영의 가난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여기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영의 가난이 그리스도께서 복되도다고 선언하신 온유, 긍휼, 화평케함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는 자가 가져오는 평화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는 자" 가 가져오는 평화란 무엇입니까? 이상하게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이 본문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깊이있는 교리나 그리스도교적 체험과는 무관한, 인간의 상식 과 천부적 양심에 호소하는 내용이라고 상상합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다투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쟁을 포기하게 만들 고, 가는 곳마다 어떤 치유적인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훌륭한 사람이 바로 화 평케 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적용에도 어떤 표면적인, 단지 표면적 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문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단어의 성경 적 용법을 고려한다면,그리고 인간의 체험에서 이 단어가 포괄하는 모든 분야를 고려한다면,또한 이 용어가 그리스도의 이름의 한 요소("평화를 가져오시는이", "평화의 왕") 로 들어가 있음을 기억한다면,그리고 지적한대로, 일련의 팔복에서 이 복이 점유하는 위치를 살펴본다면,우리는 주님이 의도하신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보다 깊은 어떤 의미를 찾아야만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전술한 바와 같은 준비 과정을 걸쳐 가져올 수 있 는 제일차적 특성인 평화는 하나님과 화해라는 평화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싸움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의 관 계가 교란되어 있다는 점,하나님으로부터는 오직 사랑과 화목만이 흘러 나오지만, 우리 인간은 이를, 때로 는 적대감정, 때로는 의지의 반항, 때로는 마음의 소원(疎遠), 그리고 거의 언제나 무관심과 망각으로 대한다는 점, 바로 거기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싸움의 원인 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상호 간의 평화를 가져다 주고 내적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해 맨 먼저 해야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그 관계의 평화를 도모하는 일입니다.
요즈음, 그리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사회 관계를 조성하기 위한 제 반 운동에 전심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계로부터, 혹은 사회 로부터, 종종 불평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가장 긴 우회로가 때로는 가장 짧은 첩경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 운동에 뛰 어드는 것이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할당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교회 자체의 본래의 과업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를 인간들 에게 전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면, 그는 사회를 감미롭게 만들고 적대를 종식시키는데 있어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더 큰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상 존재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중 최고의 것은, 그 리스도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는 그 위대한 메시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서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9)는 그 놀라운 소식을 입술과 생활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웃과의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입니다. 복음의 원리와 그리스도 의 모법 가운데 내포된, 평온과 화해의 요소를 사소한 일상 생활 속에 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아무리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성냥을 건초 더미에 켜서 불을 붙일 수는 있습니 다. 분쟁을 일으키기는 쉽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분쟁을 보기 좋아하는 악한 요소가 있습니다. 험담은 분쟁을 야기하는데 있어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 러나 불을 끄기 위해서는, 불을 붙일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시기, 질투, 상호 반목 등 이 모든 마귀의 불꽃을 잠재 우고자 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경멸을 경멸로, 비웃 음을 비웃음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분쟁이 일어나는데는 쌍방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호응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적대적인
원수라도 평화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평화를 지키고자 굳게 결심하다면, 분명히 평화는 유지될 수 있습니 다.
그밖에 또 어떤 의미를 본문에서 끌어낼 수 있습니까? 본문은 실제적인 전쟁에 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아주 명백하게 밝혀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칼과 총 등 무서운 무기를 통한 실제적 전투가 합법적인가 아 닌가에 대한 문제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향하여 포문(砲門)을 열고 세계 도처의 무지한 계층들을 거친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은 군국주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그리고 지옥 같은 전쟁들과 부상자들의 불행, 슬퍼하는 전쟁 미망인들, 평화로운 농부들의 시신, 촌락과 도시들의 파괴 등, 전쟁의 참상과, 전쟁을 이르키려는 마귀의 욕망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확실히 전투정신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회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어떤 위치를 점유해야할 임무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호전가(好戰家)들이 어떤 종교적 임무를 띠고 나선다거나 그런 전투에서 수천 수만명이 죽었다 하여 테 데움 성가(Te Deums)를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너무나도 거리가 멈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명백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집 단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 전쟁의 귀신, 전쟁과 관련된 그 가짜 영광과 대항해 야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마지막으로, 이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축복을 살펴봅시다.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이요".
일곱째 복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약속이 주어집니다(참조, 롬9:26).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가 장 높은 영예이며, 가장 귀중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일컬음을 받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를 언급하시지는 않으나 확 인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인간들로부터 그러한 칭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약속을 팔복 전 시리즈 의 정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치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방식대로 산다면, 즉 악(惡)에 대항하고, 자기 주변에 평화의 분위기를 퍼뜨리며, 무엇보다도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의 이름(그리스도)을 알리는데 힘쓴다면, 사람들이 보통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 라 부르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 다음의 한 구절이(5:11), 세상이 그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 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대중적 찬사의 향기로운 장미 꽃다발을 받기보다 돌과 썩은 달걀을 맞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인간의 판단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우리를 어 떻게 부르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러 주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도 본문의 의미를 그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이 구절을 매우 감 동적으로 인용한 바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 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은 그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에 의거하고 있음 을 시사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를 자신의 아들로 만드시고 인정하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우 리가 지금까지 묘사한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자 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아들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 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1)고 말합니 다.
-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제일의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 그리고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고 화평케하는 자 들은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닮은 자들입니다.
-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자기의 아들들로 인정받습니다.
그러한 인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많은 의미가 거기에 있 겠지만, 우리를 자녀라 부르시는 그 음성의 속삭임이 우리 귀에 들릴 것이라는 의 미도 여기에는 들어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그 영이 우리의 귀를 열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 라는 그의 음성을 듣게 할 것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요하고 행복한 의식을 계속 소유함에 있어, 이와같이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 곧 하나님의 평화를 모든 마 음에 심어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길은 없을 것입니다.
지난 번의 강해들에서 말했듯이, 이 모든 팔복의 약속들은, - 약속을 수반하는 그 인격들의 자연적 결과에 불과하며, - 성취에 이중적 관계를 가진 채 이 세상에서는 싹이 트는데 그치고 - 저 세상에서 완벽하게 성장합니다.
이 일곱번째 복 역시 그러한 이중적 관계를 가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금 이 땅에서의 의식은, 말하자면
- 새벽의 여명에 불과합니다.
- 이 빛이 장래는 결코 지는 법이 없는 정오의 햇빛으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화가 얼마나 심오한 것입니까? 고요하고 평화스런 부자(父子) 간 의 교제가 얼마나
신비스런 것입니까?
신적 유업의 한없는 부요가 어떤 것인가가 이 아들이라는 이름 속에 내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깊이와 신비와 부요는 오직 이것들을 충분히 소유함으로써만 알 수 있 습니다. 사도 요한은, 방금 인용했던 그 말씀 뒤에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래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요일3:2).
우리에게는, 온갖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넓고 온갖 소망을 공고히 하기에 충분한 하나의 확신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 께 한 후사"입니다(롬8:17).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만들 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남에게 평화를 전해주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과의 평화, 우리 자신과의 평화, 남과의 평화, 환경과의 평화를 가져다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선한 것들을 주셨다면 우리에게는 이것을 바깥에 퍼뜨릴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에게 평화를 선포할 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평화는 우리에게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