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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원태목사 (경향교회)
성경이 성경 되게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役事)의 표현이 있습니다. 권능(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표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적(기사)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말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과 그의 역사(役事)에 관계되는 신기한 초자연적 사건을 두고 쓰여진 말입니다. 사실상 신구약 성경 전부는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기사)과 표적의 산물을 기록한 구원계시의 책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특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룩하고 있는 공동체인 교회는 사실상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과 표적을 먹고사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자연법칙을 따라 살면서도 또 한편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권능과 표적과 이적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자연적인 떡(빵)만 먹고사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마 4:4).
Ⅰ.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과 표적과 이적의 정체이십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설교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행 2:2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인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 그 자체이십니다.
그의 이 세상 화육(化肉)의 탄생, 33년 간의 무죄의 삶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 자체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었습니다. 그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또 말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행 2:3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하였습니다.
Ⅱ. 예수 부활신앙이 하나님의 큰 권능이요, 표적이요, 이적의 산물입니다(요 20:19~29).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고 하는 사람은, 주께서 부활하신 첫날 저녁에 문이 닫혀있는 공간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 20:19~24).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보았던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 20:25)고 하였습니다. 그때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여러 제자들이 집안에서 문을 닫고 있는 가운데 홀연히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26)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사건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평강을 기원하셨습니다(요 20:19, 21, 26).
그리고 주님은 도마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였습니다.
그때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부활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예수를 향한 도마의 부활신앙고백은 예수께서 도마에게 베풀어주신 또 하나의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입니다. 그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신앙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요 3:3, 5) 고백되어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은 결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13).
도마에게는 순간적으로 예수 부활에 대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도마에게 있었던 인간이성과 지식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도마에게 있었던 그 자신의 이성이나 이성의 산물인 지식으로는,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세기 종교개혁은 하나님께로(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예부흥은 인간으로 돌아가라는 이성의 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한 문예부흥의 영향을 받은 영국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중심으로 경험론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라고 하는 사상을 강조하여 인간이성에 근거한 경험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에서는 르네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이성철학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내걸고 인간이성의 힘을 주장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칸트나 헤겔을 중심으로 관념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이성주의는 결국 합리주의에 빠지고 급기야 반기독, 반교회주의로 흐르고, 마침내 무신론, 반신론, 사신론과 함께 살신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성의 최고 무기 중에 하나가 지식주의입니다. 그 지식주의는 결국 과학지상주의, 과학만능주의에 이르고 맙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믿는다’고 하지 아니하고 ‘안다’, ‘알았다’고 합니다. 과학의 세계는 오관(五官)을 통한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과학은 보이는 가시적 세계만이 연구의 대상이 됩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세계입니다. 과학은 이 보이는 가시적 세계를 분석하고, 개발하고, 종합해서 그 결과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간 문화생활에 응용하도록 하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이러한 이성적 지식주의의 사고방식에 빠진 결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사실에 대해 회의와 불신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부활의 정체성으로 그를 접촉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인격적 신체를 보게 하고(시각적), 만져서 느끼게 하고(감각적), 주님 자신의 부활의 육성을 친히 듣게(청각적)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예수 부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성적, 지적 인식작용의 과정 어간에 영으로 그의 마음을 녹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이성과 지식보다 우선하는 신앙의 우위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나 그 이성의 산물로서의 지식은 결코 보이지 아니하는 불가견적 세계에 이르지 못함을 알려줍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세계, 말하자면 제1원리의 세계는 이성이나 지식의 영역이 아닌 신앙의 영역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히 11:1-2). 믿음은 신비의 실존적 힘과 세계를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존재하는 영적 실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결코 인간 이성의 산물인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산물인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알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 1:17) 한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안다는 말은 결코 이성적 산물인 지식을 말함이 아닌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이성적인 머리나 가슴의 이해가 아닌 체험적, 영적 지식인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사건은 이성적 지식의 판단보다 우선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나 사람을 관계함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노도광풍이 심한 바다 가운데서도 어린애가 어머니 품에서 잠자는 것은 그가 어머니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발소에서 칼을 들고 내 앞에 서있는 이발사에게 내 얼굴을 맡기는 것은 그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안셈(Anselm)은 말했습니다. “나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다.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믿음은 이해의 길을 열어주나, 불신은 닫아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성이 없는 믿음이나, 믿음 없는 이성은 항상 참된 구원신앙고백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 없는 믿음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나 반지식주의나 아니면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런가하면 믿음 없는 이성은 결국 인본주의에 빠져 불신앙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안에 있는 피조물로서의 이성(고후 5:17)은 지식에까지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바로 새사람의 품성입니다(엡 4:24, 골 3:9-10).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는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요 20:28). 그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도 부활의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신앙에 이르는 복된 자가 됩니다(요 20: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먹고사는 특별한 무리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그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정체인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 그 자체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둔한(Dunhan)이란 사람은 ‘이적은 신화의 다른 표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이적은 자연법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부인하고, 단순한 그리스도의 교훈과 도덕만 가지고 기독교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사실상 이적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의 산물입니다. 죄로 인하여 그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연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과학자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철학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장차 나의 부활을 믿는 신앙도 인간 편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하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가능 충만 입니다(마 22:29). 개미 한 마리가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인 운전사에게는 너무 간단한 문제입니다.
저 유명한 세기적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시대를 연구하고, 또 그 제자들에 대한 증거도 조사하였으나 인류 역사 중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대계 학자였던 알프레드 에델 샤인은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임스 올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굳게 서 있다. 이 위대한 진리는 수세기 동안 저 오만한 회의주의자들의 조류 속에서도 움직일 줄 모르고, 저들과 부단히 대항해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의 양식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먹고사는, 또 다른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증인들이 됩니다. 하늘에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있고(예수 보좌에 앉으심), 땅에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있습니다(교회). 바로 예수 부활신앙의 증인들이 아닌가!
성경이 성경 되게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役事)의 표현이 있습니다. 권능(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표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적(기사)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말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과 그의 역사(役事)에 관계되는 신기한 초자연적 사건을 두고 쓰여진 말입니다. 사실상 신구약 성경 전부는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기사)과 표적의 산물을 기록한 구원계시의 책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특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룩하고 있는 공동체인 교회는 사실상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과 표적을 먹고사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자연법칙을 따라 살면서도 또 한편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권능과 표적과 이적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자연적인 떡(빵)만 먹고사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사는 자들입니다(마 4:4).
Ⅰ.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과 표적과 이적의 정체이십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설교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행 2:2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인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 그 자체이십니다.
그의 이 세상 화육(化肉)의 탄생, 33년 간의 무죄의 삶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 자체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었습니다. 그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또 말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행 2:3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하였습니다.
Ⅱ. 예수 부활신앙이 하나님의 큰 권능이요, 표적이요, 이적의 산물입니다(요 20:19~29).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고 하는 사람은, 주께서 부활하신 첫날 저녁에 문이 닫혀있는 공간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 20:19~24).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보았던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 20:25)고 하였습니다. 그때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여러 제자들이 집안에서 문을 닫고 있는 가운데 홀연히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26)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사건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평강을 기원하셨습니다(요 20:19, 21, 26).
그리고 주님은 도마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였습니다.
그때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부활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예수를 향한 도마의 부활신앙고백은 예수께서 도마에게 베풀어주신 또 하나의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입니다. 그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큰 권능이요 기사요 표적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신앙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요 3:3, 5) 고백되어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은 결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13).
도마에게는 순간적으로 예수 부활에 대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도마에게 있었던 인간이성과 지식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도마에게 있었던 그 자신의 이성이나 이성의 산물인 지식으로는,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세기 종교개혁은 하나님께로(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예부흥은 인간으로 돌아가라는 이성의 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한 문예부흥의 영향을 받은 영국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중심으로 경험론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라고 하는 사상을 강조하여 인간이성에 근거한 경험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에서는 르네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이성철학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내걸고 인간이성의 힘을 주장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칸트나 헤겔을 중심으로 관념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이성주의는 결국 합리주의에 빠지고 급기야 반기독, 반교회주의로 흐르고, 마침내 무신론, 반신론, 사신론과 함께 살신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성의 최고 무기 중에 하나가 지식주의입니다. 그 지식주의는 결국 과학지상주의, 과학만능주의에 이르고 맙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믿는다’고 하지 아니하고 ‘안다’, ‘알았다’고 합니다. 과학의 세계는 오관(五官)을 통한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과학은 보이는 가시적 세계만이 연구의 대상이 됩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세계입니다. 과학은 이 보이는 가시적 세계를 분석하고, 개발하고, 종합해서 그 결과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간 문화생활에 응용하도록 하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이러한 이성적 지식주의의 사고방식에 빠진 결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사실에 대해 회의와 불신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부활의 정체성으로 그를 접촉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인격적 신체를 보게 하고(시각적), 만져서 느끼게 하고(감각적), 주님 자신의 부활의 육성을 친히 듣게(청각적)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예수 부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성적, 지적 인식작용의 과정 어간에 영으로 그의 마음을 녹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이성과 지식보다 우선하는 신앙의 우위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나 그 이성의 산물로서의 지식은 결코 보이지 아니하는 불가견적 세계에 이르지 못함을 알려줍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세계, 말하자면 제1원리의 세계는 이성이나 지식의 영역이 아닌 신앙의 영역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히 11:1-2). 믿음은 신비의 실존적 힘과 세계를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존재하는 영적 실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결코 인간 이성의 산물인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산물인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알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 1:17) 한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안다는 말은 결코 이성적 산물인 지식을 말함이 아닌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이성적인 머리나 가슴의 이해가 아닌 체험적, 영적 지식인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사건은 이성적 지식의 판단보다 우선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나 사람을 관계함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노도광풍이 심한 바다 가운데서도 어린애가 어머니 품에서 잠자는 것은 그가 어머니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발소에서 칼을 들고 내 앞에 서있는 이발사에게 내 얼굴을 맡기는 것은 그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안셈(Anselm)은 말했습니다. “나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다.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믿음은 이해의 길을 열어주나, 불신은 닫아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성이 없는 믿음이나, 믿음 없는 이성은 항상 참된 구원신앙고백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 없는 믿음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나 반지식주의나 아니면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런가하면 믿음 없는 이성은 결국 인본주의에 빠져 불신앙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안에 있는 피조물로서의 이성(고후 5:17)은 지식에까지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바로 새사람의 품성입니다(엡 4:24, 골 3:9-10).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는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요 20:28). 그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도 부활의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신앙에 이르는 복된 자가 됩니다(요 20: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먹고사는 특별한 무리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그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정체인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 그 자체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엡 2:8).
둔한(Dunhan)이란 사람은 ‘이적은 신화의 다른 표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이적은 자연법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현대의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부인하고, 단순한 그리스도의 교훈과 도덕만 가지고 기독교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사실상 이적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의 산물입니다. 죄로 인하여 그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연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과학자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철학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장차 나의 부활을 믿는 신앙도 인간 편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하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가능 충만 입니다(마 22:29). 개미 한 마리가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인 운전사에게는 너무 간단한 문제입니다.
저 유명한 세기적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시대를 연구하고, 또 그 제자들에 대한 증거도 조사하였으나 인류 역사 중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대계 학자였던 알프레드 에델 샤인은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임스 올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굳게 서 있다. 이 위대한 진리는 수세기 동안 저 오만한 회의주의자들의 조류 속에서도 움직일 줄 모르고, 저들과 부단히 대항해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의 양식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먹고사는, 또 다른 하나님의 권능과 기사와 표적의 증인들이 됩니다. 하늘에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있고(예수 보좌에 앉으심), 땅에도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있습니다(교회). 바로 예수 부활신앙의 증인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