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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다빈치코드 ‘현상’
결국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요즘 미국과 한국 교계에서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다빈치코드’ 때문에 무척 말들이 많습니다. 다빈치코드는 몇 년 전에 출판되어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4천만 권 이상 팔린 공전의 베스트셀러 추리소설인데 재작년부터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습니다. 드디어 2주 전에 영화가 개봉되어 첫 주에 대단한 흥행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다빈치코드는 예수의 생애와 관련해서 교회가 그 동안 믿고 가르쳐왔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적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깊은 우려를 표명해왔습니다. 아마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치지 않았더라면 교회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내용의 소설이나 연구서들이 다수 있었는데 그때는 교회가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빈치코드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소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급효과를 갖는 영화가 세간의 큰 관심 속에 개봉됐으므로 교회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기독교계는 교파를 막론하고 다빈치코드가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을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비교적 점잖게 영화가 초래할 우려되는 폐해를 지적하며 영화를 보지 말 것을 권고했습니다. 개신교계의 반응은 둘로 갈라집니다. 한편에서는 그저 소설일 따름이라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강력하게 다빈치코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고 더 격렬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 보수교회의 대표적인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은 순교의 각오로 영화 개봉을 막겠다며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었습니다. 이 신청이 법원에 의해 기각되어 영화가 개봉됐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누가 이 때문에 순교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순교’라는 말이 너무 남발되고 있습니다. 한번 웃고 넘어갈 해프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한국 보수기독교가 다빈치코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저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봤습니다. 제 소감은 ‘별로’였습니다. 소설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고 재미도 있지만 저는 너무 작위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소설을 이미 읽어 내용을 알고 있으니 별로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추리소설과 추리영화는 긴장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식스 센스’의 내용을 미리 알고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 순간의 반전이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빈치코드를 무시하려 했지만 현재 불고 있는 열풍이 이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교계의 반응도 크게 분노하기는 하지만 정작 다빈치코드 현상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빈치코드와 그 현상에 대해 설교하려 합니다. 두 주일 동안 하는 이유는 기왕 다루려면 제대로 다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빈치코드 소설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 만들어낸 현상, 곧 다빈치코드 현상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몇 측면을 한 번 깊이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자크 소니에르 관장이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안간힘을 써서 스스로 발가벗고 손과 발을 활짝 벌리고 바닥에 드러누운 채 죽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설의 두 주인공 하버드대학교 종교상징학 교수 로버트 랭던과 소니에르 관장의 손녀이며 암호 해독 전문가인 소피 느뵈가 만나 소니에르가 남긴 암호들을 차례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을 여기서 전부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비밀의 중심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다빈치코드의 비밀은 다빈치가 그린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됩니다. ‘최후의 만찬’은 널리 알려져 있는 다빈치의 명작 중 하나로서 요한복음 13장이 그 근간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몹시 번민하시며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 하고 내놓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누구를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인지를 몰라 서로 쳐다보았다.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보라고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께 바싹 다가앉으며 ‘주님, 그게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빵을 적셔서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아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 ‘주님을 배반할 자가 누굽니까?’라고 물었던 제자, 곧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the Beloved Disciple)가 바로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님 왼쪽에 앉아 있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이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달라 보입니다. 그는 여자처럼 보입니다. 소설은 이 제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있었고, 예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으며, 예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빈치는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다고 소설은 말합니다. 물론 다빈치가 직접 이 사람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설이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확고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배’(聖杯)는 최후의 만찬 때 사용된 포도주 잔이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담았다는 잔을 가리킵니다. 두 사건에 같은 잔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성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도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서’ 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잘 보면 거기에는 포도주 잔이 없습니다! 포도주 잔이 없는 최후의 만찬? 왜 다빈치는 잔이 없는 만찬 그림을 그렸을까요? 포도주를 병째로 마셨을 리는 없는데 왜 그림에는 잔이 없을까요? 소설은, 다빈치가 ‘성배’ (the Holy Grail)를 잔이 아니라 holy blood 곧 거룩한 혈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는 혈통이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마태복음 1장에는 지루할 정도로 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므로 예수님께 혈통이 있었다는 주장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말하는 예수님의 혈통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혈통, 곧 선조가 아니라 후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예수님의 아기를 낳았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답니다. 훗날 마리아는 이 아기를 낳았고 그 혈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소설 다빈치코드는 얘기합니다. 이 대목이 교회를 가장 화나게 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 역시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예수님의 혈통을 템플 기사단이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이 비밀을 주인공들이 하나하나 풀어 가는데 마지막에는 처음 장면에서 죽은 루브르 박물관 관장 소니에르가 템플기사단의 후신인 시온 수도원의 최고 책임자였고 살아있는 예수님의 후손은 다름 아닌 소피였다고 말합니다. 좀 황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신가?
다빈치코드는 소설입니다. 그저 소설일 따름입니다. 소설은 작가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소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얘기라 해도 그 얘기를 할 권리는 전적으로 작가에게 있습니다. 왜 소설을 그따위로 썼냐고 혼자 생각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유지만 공적으로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소설이 아무리 작가 맘대로 쓰는 것이라 해도 성공하려면 얘기가 그럴듯해야 합니다. 지어낸 얘기이고 거짓말이지만 현실감이 있고 사실인 것처럼 보여야 소설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다빈치코드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쓰였기 때문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기독교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평소의 의심 또는 잠재적 의심을 사람들에게서 끄집어냈기 때문에 다빈치코드는 성공했습니다. ‘음모설’이 소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얘기입니다. 교회는 음흉하게 뭔가 중요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 교회에는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교회 최고 권력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깊고 깊은 방에서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꾸며져 왔고 지금도 꾸며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소설이 자극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 운운 하지만 교회가 아직까지 해온 일들은 하나님과 성령이 하신 일이 아니라 사람이 꾸며낸 일이라는 의심이 다빈치코드 현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다빈치코드 현상의 핵심입니다.
다음으로 다빈치코드 현상을 만들어낸 데는 역설적으로 교회가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가 신성모독이네, 순교네 하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소설이 이토록 큰 파문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설 내용 중에서 교회를 가장 크게 분노하게 만든 부분은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요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고백해왔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이라면 여자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주장이 무슨 문제가 될까요? 교회는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의 ‘인성’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여자와 동침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여자와 동침할 수 없었다는 주장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물음과 정면으로 맞부딪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하느님이라고 고백됩니다. 그가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목수로 살았다는 건 그분의 신성에 아무 흠집도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면 사태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지만 진짜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 아닙니까?
다음 주일에 이 설교를 계속할 텐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입니다. 초대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부 아는 것처럼 주장하니 ‘음모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사도들을 비롯한 제자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며, 누가 어떤 복음을 어떻게 전했고 첫 교회는 어떤 사람들과 대립하여 싸웠으며 그때는 어떤 종류의 기독교들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제대로 다 알지 못하지만 믿을 수는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지식의 한계 안에서, 또는 역사의 한계 안에서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한계를 넘어서서 믿을 것인가 라는 물음에 봉착합니다. 우리 믿음이 역사의 한계, 또는 역사적 지식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 믿음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어주는 분이 있습니다. 곧 제대로 알지 못해도 믿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분이 역사를 무시하라고 명령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있는 만큼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신앙은 그 신앙의 한쪽 기반이 매우 부실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근거는 아는 데 있지는 않습니다. 다빈치코드 현상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로 이어집니다. ♣
다빈치코드 ‘현상’
결국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요즘 미국과 한국 교계에서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다빈치코드’ 때문에 무척 말들이 많습니다. 다빈치코드는 몇 년 전에 출판되어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4천만 권 이상 팔린 공전의 베스트셀러 추리소설인데 재작년부터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습니다. 드디어 2주 전에 영화가 개봉되어 첫 주에 대단한 흥행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다빈치코드는 예수의 생애와 관련해서 교회가 그 동안 믿고 가르쳐왔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적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깊은 우려를 표명해왔습니다. 아마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치지 않았더라면 교회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내용의 소설이나 연구서들이 다수 있었는데 그때는 교회가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빈치코드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소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급효과를 갖는 영화가 세간의 큰 관심 속에 개봉됐으므로 교회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기독교계는 교파를 막론하고 다빈치코드가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을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비교적 점잖게 영화가 초래할 우려되는 폐해를 지적하며 영화를 보지 말 것을 권고했습니다. 개신교계의 반응은 둘로 갈라집니다. 한편에서는 그저 소설일 따름이라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강력하게 다빈치코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고 더 격렬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 보수교회의 대표적인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은 순교의 각오로 영화 개봉을 막겠다며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었습니다. 이 신청이 법원에 의해 기각되어 영화가 개봉됐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누가 이 때문에 순교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순교’라는 말이 너무 남발되고 있습니다. 한번 웃고 넘어갈 해프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한국 보수기독교가 다빈치코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저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봤습니다. 제 소감은 ‘별로’였습니다. 소설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고 재미도 있지만 저는 너무 작위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소설을 이미 읽어 내용을 알고 있으니 별로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추리소설과 추리영화는 긴장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식스 센스’의 내용을 미리 알고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 순간의 반전이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빈치코드를 무시하려 했지만 현재 불고 있는 열풍이 이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교계의 반응도 크게 분노하기는 하지만 정작 다빈치코드 현상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빈치코드와 그 현상에 대해 설교하려 합니다. 두 주일 동안 하는 이유는 기왕 다루려면 제대로 다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빈치코드 소설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 만들어낸 현상, 곧 다빈치코드 현상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몇 측면을 한 번 깊이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자크 소니에르 관장이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안간힘을 써서 스스로 발가벗고 손과 발을 활짝 벌리고 바닥에 드러누운 채 죽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설의 두 주인공 하버드대학교 종교상징학 교수 로버트 랭던과 소니에르 관장의 손녀이며 암호 해독 전문가인 소피 느뵈가 만나 소니에르가 남긴 암호들을 차례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을 여기서 전부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비밀의 중심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다빈치코드의 비밀은 다빈치가 그린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됩니다. ‘최후의 만찬’은 널리 알려져 있는 다빈치의 명작 중 하나로서 요한복음 13장이 그 근간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몹시 번민하시며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 하고 내놓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누구를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인지를 몰라 서로 쳐다보았다.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보라고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께 바싹 다가앉으며 ‘주님, 그게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빵을 적셔서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아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 ‘주님을 배반할 자가 누굽니까?’라고 물었던 제자, 곧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the Beloved Disciple)가 바로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님 왼쪽에 앉아 있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이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달라 보입니다. 그는 여자처럼 보입니다. 소설은 이 제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있었고, 예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으며, 예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빈치는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다고 소설은 말합니다. 물론 다빈치가 직접 이 사람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설이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확고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배’(聖杯)는 최후의 만찬 때 사용된 포도주 잔이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담았다는 잔을 가리킵니다. 두 사건에 같은 잔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성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도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서’ 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잘 보면 거기에는 포도주 잔이 없습니다! 포도주 잔이 없는 최후의 만찬? 왜 다빈치는 잔이 없는 만찬 그림을 그렸을까요? 포도주를 병째로 마셨을 리는 없는데 왜 그림에는 잔이 없을까요? 소설은, 다빈치가 ‘성배’ (the Holy Grail)를 잔이 아니라 holy blood 곧 거룩한 혈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는 혈통이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마태복음 1장에는 지루할 정도로 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므로 예수님께 혈통이 있었다는 주장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말하는 예수님의 혈통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혈통, 곧 선조가 아니라 후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예수님의 아기를 낳았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답니다. 훗날 마리아는 이 아기를 낳았고 그 혈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소설 다빈치코드는 얘기합니다. 이 대목이 교회를 가장 화나게 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 역시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예수님의 혈통을 템플 기사단이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이 비밀을 주인공들이 하나하나 풀어 가는데 마지막에는 처음 장면에서 죽은 루브르 박물관 관장 소니에르가 템플기사단의 후신인 시온 수도원의 최고 책임자였고 살아있는 예수님의 후손은 다름 아닌 소피였다고 말합니다. 좀 황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신가?
다빈치코드는 소설입니다. 그저 소설일 따름입니다. 소설은 작가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소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얘기라 해도 그 얘기를 할 권리는 전적으로 작가에게 있습니다. 왜 소설을 그따위로 썼냐고 혼자 생각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유지만 공적으로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소설이 아무리 작가 맘대로 쓰는 것이라 해도 성공하려면 얘기가 그럴듯해야 합니다. 지어낸 얘기이고 거짓말이지만 현실감이 있고 사실인 것처럼 보여야 소설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다빈치코드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쓰였기 때문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기독교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평소의 의심 또는 잠재적 의심을 사람들에게서 끄집어냈기 때문에 다빈치코드는 성공했습니다. ‘음모설’이 소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얘기입니다. 교회는 음흉하게 뭔가 중요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 교회에는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교회 최고 권력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깊고 깊은 방에서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꾸며져 왔고 지금도 꾸며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소설이 자극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 운운 하지만 교회가 아직까지 해온 일들은 하나님과 성령이 하신 일이 아니라 사람이 꾸며낸 일이라는 의심이 다빈치코드 현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다빈치코드 현상의 핵심입니다.
다음으로 다빈치코드 현상을 만들어낸 데는 역설적으로 교회가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가 신성모독이네, 순교네 하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소설이 이토록 큰 파문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설 내용 중에서 교회를 가장 크게 분노하게 만든 부분은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요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고백해왔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이라면 여자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주장이 무슨 문제가 될까요? 교회는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의 ‘인성’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여자와 동침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여자와 동침할 수 없었다는 주장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물음과 정면으로 맞부딪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하느님이라고 고백됩니다. 그가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목수로 살았다는 건 그분의 신성에 아무 흠집도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면 사태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지만 진짜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 아닙니까?
다음 주일에 이 설교를 계속할 텐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입니다. 초대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부 아는 것처럼 주장하니 ‘음모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사도들을 비롯한 제자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며, 누가 어떤 복음을 어떻게 전했고 첫 교회는 어떤 사람들과 대립하여 싸웠으며 그때는 어떤 종류의 기독교들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제대로 다 알지 못하지만 믿을 수는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지식의 한계 안에서, 또는 역사의 한계 안에서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한계를 넘어서서 믿을 것인가 라는 물음에 봉착합니다. 우리 믿음이 역사의 한계, 또는 역사적 지식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 믿음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어주는 분이 있습니다. 곧 제대로 알지 못해도 믿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분이 역사를 무시하라고 명령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있는 만큼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신앙은 그 신앙의 한쪽 기반이 매우 부실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근거는 아는 데 있지는 않습니다. 다빈치코드 현상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로 이어집니다. ♣